오트밀크 라떼를 오늘도 아침에 직접 내려 마시다가, 문득 손이 멈췄다. 나는 왜 오트라떼를 마시고 있지?

별것 아닌 질문 같다. 실제로 별것 아니다. 그런데 이 한 잔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나를 음식 쪽으로 끌고 다니던 세 겹의 손잡이가 차례로 보였다. 진화가 깐 것, 산업이 그 위에 덮어쓴 것, 사회가 마지막으로 내 안에 심어둔 것. 이 글은 그 세 겹을 벗기는 이야기다. 그리고 끝에서 나는 오트밀 라떼를 끊고 다시 일반 라떼로 돌아간다.

1. 사소한 결정 — 오트밀 라떼를 끊다#

1~2년간 나는 집에서도 밖에서도 라떼는 무조건 오트밀크로 주문해왔다. 집에선 반자동 머신으로 매일 아침 직접 내렸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걸 왜 마시고 있나 싶었다.

처음 떠올린 이유는 단백질이었다. 같은 250ml에서 우유 라떼는 단백질이 8g쯤 되는데 오트밀크 라떼는 2g도 안 된다. 매일 마시니 하루 6g, 한 달이면 180g 차이. 그럴듯한 이유 같았다. 그런데 곱씹어보니 이 하루치 6g은 계란 한 알이면 메꿔진다. 매일 마시는 첫 잔의 만족도를 그 6g 때문에 깎는 건, 결정의 무게를 엉뚱한 데 싣는 거였다. 단백질은 진짜 이유가 아니었다.

그래서 거꾸로 물었다. 나는 애초에 왜 오트밀크였나. 솔직한 답은 좀 민망했다.

“오트밀크를 주문하는 나를 좋아했던 것 같다.”

식물성이라는 막연한 정체성. 언제부터였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게 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맛이 더 고소했던 것도 사실이고. 무의식에서 굴러가던 습관 하나가, 이렇게 물어보는 순간 처음으로 의식 위로 올라왔다.

그러다 떠오른 건, 요즘 내가 여러 번 스스로 되뇌어온 모토였다.

요즘 내 모토
최대한 맛없는 걸 먹자.

이건 그냥 다짐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실현적 예언이다 — 틈날 때마다 입으로 뱉어서 나를 그 문장에 묶어두는 것. 그리고 이 기준이 들어오는 순간 모든 게 뒤집힌다. 더 고소하고 맛있다는 바로 그 속성이, 이제는 오트밀크의 탈락 사유가 된다. 더 맛없고, 단백질은 더 많고, 칼슘까지 자연히 챙겨지는 우유가 정답이 되는 거다.

같은 데이터(오트밀크가 더 맛있다)가 기준 하나에 따라 정답도 되고 오답도 된다. 결정은 데이터가 내리는 게 아니라 기준이 내린다 —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다. 그러면 진짜 질문은 라떼가 아니다. 나는 왜 음식을 일부러 맛없게 먹으려고 하는가. 이 사소한 결정의 뿌리를 따라 내려가니, 1년 반 전에 시작된 더 큰 생각이 거기 있었다.

2. 첫 번째 층 — 왜 새벽이면 떡볶이가 당기는가 (진화)#

1년 반 전, 90kg에서 68kg까지 살을 빼면서 생각 하나를 정립했다. 단순히 살을 빼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진짜 들여다본 건 음식에 끌려다니는 것 그 자체였다.

먼저 밝혀두면, 여기서부터는 정밀한 진화생물학이 아니라 내가 받아들인 거친 그림이다. 그런데 이 거친 그림이 내 행동을 너무 잘 설명한다. 왜 나는 새벽만 되면 떡볶이가 먹고 싶고, 햄버거가 먹고 싶고,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은가. 그 전에는 이런 걸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번 파고드니 답이 너무 명확해졌다.

먹을 수 있을 때 탄수화물과 단백질과 지방을 닥치는 대로 먹은 개체만이 살아남았다.

내 조상들은 모두 처먹은, 성공한 조상들이다.

호모 사피엔스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음식을 보면 처먹는 조상만이 살아남아 번식했다. “이걸 먹으면 살찔 것 같은데"라고 비만을 떠올리며 신중하게 멈춘 개체는 다 죽었다. 방계 사촌 중엔 그런 개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가지는 다 멸절했다. 지금 내가 여기 있다는 것 자체가, 음식 앞에서 멈추지 않은 조상들의 끝단이라는 증거다.

그러니 음식이 보이면 같이 처먹고 싶은 이 충동은 버그가 아니다. 너무나 정상적인, 제대로 작동하는 본능이다. 다만 이 펌웨어는 음식이 희소한 환경을 전제로 설계됐다. 환경이 과잉으로 뒤집히면, 같은 코드가 정반대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디테일이 하나 있다. 거칠게 말하면, 이 본능은 번식기까지만 적응적이다. 어릴 때 닥치는 대로 먹어 살아남고 번식에 성공하는 데까진 유리하게 작동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뒤따라오는 비만, 혈관 질환 같은 것들은 자연선택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구간이다 — 이미 유전자를 넘겼으니까. 그래서 진화는 이 본능을 알아서 교정해주지 않는다. 펌웨어는 패치되지 않은 채, 평생 나를 끌고 다닌다.

3. 두 번째 층 — 그런데 왜 지금은 이렇게 심한가 (산업)#

본능만으로는 지금 이 정도의 비만율이 설명되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도 본능은 똑같았는데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다. 어딘가에 증폭기가 있다.

인과 사슬은 이렇게 간다. 돈이 생기고 자본주의가 서서히 굴러가기 시작하자, 기술이 생산성을 끌어올렸고 식량은 대량으로 쏟아졌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만들 수 있게 되니, 이제는 더 많이 팔아야 더 번다 — 자본주의의 되먹임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사람들이 더 많이 먹게 만들어야 한다. 음모라기보다, 더 팔수록 돈이 되니 시스템 전체가 그 방향으로 진화했다. 한 100년쯤 됐을까. 결과만 놓고 보면 세뇌에 가깝다.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하루 세 끼를 다 챙겨 먹는다"는 것조차, 상당 부분은 그렇게 만들어진 자연스러움이다.

여기가 현대 산업의 핵심이다.

왜 거부가 어려운가
유도의 방향이 본능의 방향과 같다. 산업은 없던 욕구를 새로 만든 게 아니다. 이미 내 안에 있는 본능의 볼륨을 키웠을 뿐이다 — 저항이 가장 적은 방향으로.

그래서 이건 거부하기가 그토록 어렵다. 거부하려면 나 자신의 본능과 싸워야 하니까. 광고는 내 편이 아니라 내 본능 편이다. 그리고 내가 보기엔 최근 30년, 인터넷 이후로 이 유도 기술이 빠르게 정밀해졌다. 비만율 그래프를 보면 안다 — 내 눈엔 거의 지수함수처럼 올라간다.

마지막 고리가 가장 날카롭다. 이렇게 비만이 폭증하니, 이번엔 그 비만을 약으로 되파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열린다. 위고비 같은 것들. 물론 위고비는 누군가에겐 진짜 약이다. 누가 짠 음모라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돈이 그렇게 흐르다 보니, 비만을 만든 산업과 그 비만을 약으로 되파는 산업이 한 줄에 서게 된다. 회사는 서로 달라도, 돈은 양끝에서 난다. 닫힌 루프다.

flowchart LR P["돈 · 자본주의"] --> M["생산성 ↑
대량 생산"] M --> S["더 팔아야
돈이 된다"] S --> B["마케팅 · 유인:
더 먹게 만든다"] B --> O["비만 폭증"] O -. "되팔 시장" .-> D["비만 약 판매
(위고비…)"] D -. "정렬된 인센티브" .-> S

4. 세 번째 층 — 가장 끊기 어려운 것 (사회)#

여기가 최종 보스다. 저항은 본능과 광고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회적 합의의 형태로 한 겹이 더 있다. 그리고 이게 제일 끊기 어렵다.

증상은 이렇게 나타난다. 다이어트를 하거나 술·담배를 끊겠다고 친구한테 말하고 회사에서 꺼내보면, 돌아오는 반응이 거의 똑같다.

친구그럼 무슨 재미로 사냐.
동료그렇게 살 빼서 뭐 하냐. 맛있는 거 먹으면서 오래 살면 뭐 하냐.
누군가그렇게 맛없게 먹을 바에 차라리 일찍 죽겠다.

처음엔 이게 그냥 사람들의 인생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들여다보니 아니었다. 잔치도, 함께 나누는 음식도 인류만큼 오래된 즐거움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이미 있던 그 즐거움을 파는 쪽이 “재미 = 음식·술” 한 방향으로 몰아 굳혀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산업은 없던 걸 만든 게 아니라, 있던 걸 한 방향으로 키웠다. 그래서 음식에서 도파민을 안 찾겠다고 하면, 사람들 눈엔 재미를 통째로 포기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게 그 유도가 진화한 마지막 단계다. 이제 그 메시지는 광고가 아니라 친구의 입에서 나온다. 외주화되고 내면화돼서, 또래 압력의 형태로 작동한다. 광고는 거부할 수 있다 — TV를 끄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의 “그거 당연한 거 아니야?“는 다르다. 거부하는 순간 내가 이상한 놈이 된다. 그래서 이 층이 가장 질기다.

5. 그래서 나는 — 음식을 연료로 (처방)#

먼저 정직하게 인정하고 싶다. 이거 쉽지 않다.

내가 이렇게 말로 풀어놓으면, 마치 내가 항상 절제하며 사는 사람처럼 보이기 쉽다. 아니다. 나도 수십 년간 이 세뇌를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맛있는 게 안 땡기는 게 절대 아니다. 매일 땡긴다. 나는 그걸 지금 풀고 있을 뿐이다. 본능은 멀쩡히 살아있고, 나는 그걸 의도적으로 디프로그래밍하는 중이다.

그래서 도구를 쓴다. 자기실현적 예언. §1의 그 모토처럼, 틈날 때마다 일부러 사람들한테 “나는 맛없는 걸 먹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다닌다. 말로 뱉어서 나를 그 정체성에 묶는 거다. 발설하는 만큼 그게 나에게 가까워진다.

프레임은 이렇다. 음식은 연료다. 자동차에 맛있는 연료를 넣어서 자동차를 기쁘게 해줄 필요는 없잖아. 나는 내가 굴러가는 데 필요한 연료만 채우면 된다.

이 비유는 곧장 반론을 부른다.

반론근데 인간은 자동차가 아니잖아. 음식의 즐거움은 삶의 일부 아니야?

맞다. 인간은 자동차가 아니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나누는 한 끼는 분명 삶의 일부다. 그건 내가 떼어내려는 게 아니다. 내가 연료로 강등시키는 건 그 식탁이 아니라, 공장이 설계한 가짜 신호 — 혼자 새벽에 화면을 보며 입에 밀어 넣는 그 저렴한 도파민이다. 그리고 그 저렴한 도파민은 — 음식이든 술이든 도박이든 — 내가 보기엔 다 같은 줄에 있다. 그래서 거기서 도파민 얻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거다. 내가 진짜 거부하는 건 즐거움이 아니라, 외부에서 프로그래밍된 보상 회로에 내 행동의 운전대를 넘기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싶다. 이건 자기학대가 아니다.

중립화 ≠ 처벌. 목표는 도파민 회로를 음식에서 떼어내는 것(중립화)이지, 쾌락 자체를 처벌하는 것(금욕주의)이 아니다. 둘은 비슷해 보여도 종착지가 다르다. 구별하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 어쩌다 만난 진짜 한 끼를 허용하고 음미하면 중립화, 그것마저 박탈하면 처벌이다. 중립화는 음식에서 뗀 에너지를 일·운동·글쓰기로 돌린다. 처벌은 박탈 자체가 목적이 되어 점점 더 빡센 결핍을 요구한다.

그리고 역설적인 보너스가 하나 있다. 미각의 기준선을 낮춰두면, 어쩌다 정말 좋은 걸 먹을 때 그 신호가 훨씬 선명하게 들린다. 늘 고자극이면 모든 맛이 뭉개져 안 들리지만, 평소에 연료만 넣다가 어쩌다 제대로 된 한 끼를 만나면 그게 사건이 된다. 공장 신호를 끄면, 진짜 음식의 해상도가 오히려 올라간다. 이건 박탈이 아니다.

6. 다시, 라떼로#

그래서 라떼 한 잔이 여기까지 왔다. 나를 음식으로 끌고 다니던 건 세 겹의 외부 프로그래밍이었다 — 진화가 깐 펌웨어 위에 산업이 소프트웨어를 덮어쓰고, 사회가 다시 그 위에 펌웨어 업데이트를 올렸다 — 이미 본능처럼 느껴지도록 내면화된 채로. 내가 하는 건 이 셋 모두를 향한 의도적 디프로그래밍이다.

flowchart TB subgraph LAYERS["세 겹의 외부 프로그래밍"] direction TB L1["펌웨어 · 진화
'먹어라' 본능"] L2["소프트웨어 · 산업
광고와 되파는 시장"] L3["펌웨어 업데이트 · 사회
'오래 살아 뭐 하냐'"] end L1 --> ME(("나")) L2 --> ME L3 --> ME ME == "디프로그래밍" ==> FUEL["음식 = 연료
운전대를 되찾기"]

그걸 끊는 순간 사람들 눈엔 내가 재미없게 사는 이상한 놈이 된다. 알면서도 나는 그 프레임을 깨려는 쪽에 선다. 음식에 끌려다니는 것보다는, 이상한 놈이 되는 게 낫다고 보니까.

그래서 나는 오트밀 라떼를 끊고 일반 라떼로 돌아간다. 더 맛없고, 더 연료답고, 단백질은 더 많은 쪽으로. 사소해 보이는 이 한 잔이, 세 겹을 동시에 거스르는 첫 단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