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과 중국 공산당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
zhugehyuk
2026

차례

서문
1장. 당이 지도자를 만들던 때
2장. 후계자의 이름을 적어도
3장. 퇴임을 설계한 원로
4장. 직위마다 다른 시계로 넘어간 권력
5장. 부패를 처벌하는 권력
6장. 군의 명령은 어디로 가는가
7장. 세 번째 임기를 연 결정들
8장. 정책은 바뀌고 지도자는 남았다
결론. 네 번째 임기는 아직 역사 밖에 있다
부록. 직위·사료·판단의 범위

서문

중국 정치 기사를 읽다 보면 사람 이름은 익숙한데 직함 앞에서 멈춘다. 당 총서기와 국가주석은 무엇이 다른가. 한 사람이 오래 집권한다는 말은 어느 자리를 오래 지킨다는 뜻인가. 시진핑의 이름 너머에서 그를 선출하는 당을 알고 싶은 독자를 위한 책이다.

한 사람의 생애를 따라가는 전기보다, 지도자가 바뀔 때 권한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묻는 시간순 비평에 가깝다. 연도는 사건의 순서를 잡는 데 쓴다. 직함은 누가 무엇을 결정할 수 있었는지를 구별하는 데 쓴다. 그 차이를 놓치면 퇴임이라는 말도 집권이라는 말도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설명하게 된다.

닫힌 회의의 대화나 지도자의 속마음을 재현할 수는 없다. 공개된 규정이 실제 권력관계를 빠짐없이 보여 주지도 않는다. 당이 훗날 정리한 역사는 그때 사람들이 남긴 문서와 구별해서 읽어야 한다. 알 수 없는 부분을 자신감 있는 문장으로 메우지 않는 것이 이 비평의 한계이자 약속이다.

시진핑에 대한 평가는 그가 물려받은 권력의 역사를 통과해야 한다. 그 역사의 인물들은 같은 직함으로도 다른 힘을 행사했다. 한 사람의 퇴임이 끝나지 않은 곳에서 다른 사람의 집권이 시작되기도 했다.

1장. 당이 지도자를 만들던 때

창당자의 자리

중국 공산당을 세울 때 마오는 이미 최고지도자였을까. 당의 공식 창당사조차 그렇게 기록하지 않는다. 인민망의 제1차 당대회 회고에서 마오는 창사 대표 가운데 한 명이다. 1921년 7월 당이 꾸린 중앙국의 서기는 천두슈였다. 장궈타오가 조직을, 리다가 선전을 맡았다. 훗날의 승자를 창당 순간의 수장으로 놓으면 그 사이에 벌어진 권력투쟁은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다.1

초기의 조직 규정도 한 사람에게 당을 맡기는 형식은 아니었다. 1921년 강령은 조직 규모에 따라 집행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1922년 당장은 전국대표대회가 중앙집행위원 5명을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각 집행위원회는 위원 중에서 위원장을 뽑았다. 위원장은 당무와 회계를 맡았다. 이 직책은 뒤에 등장하는 중앙위원회 주석이나 국가주석과 구별해야 한다.2

복수의 지도기관이 있었다고 해서 창당기를 자유로운 토론의 황금기로 볼 수도 없다. 1921년 첫 결의는 중앙집행위원회가 출판물을 감독하도록 했다. 다른 정당에 대해서는 독립적인 입장을 요구했지만,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제3인터내셔널에는 매월 사업을 보고하도록 했다. 독립이라는 말은 누구와의 관계를 가리키느냐에 따라 범위가 달랐다.3

당이 규율을 갖추었다는 사실과 마오가 그 규율을 지배했다는 주장은 별개다. 창당 당시의 문서에는 이미 중앙의 감독 권한이 있다. 그 권한을 훗날 마오가 쥐었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그의 소유였다고 읽어서는 안 된다. 마오의 부상을 설명하려면 조직이 생긴 경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여러 사람이 나누던 권한이 언제, 어떤 절차로 그에게 모였는지가 남는다.

준이회의에서 끝나지 않은 권력이동

1935년 1월 준이회의에서 마오는 정치국 상무위원에 들어갔다. 후대 연대기에 따르면 군사 지휘자로는 저우언라이와 주더가 남았다. 회의 뒤 2월에 보구의 당무 총책임을 이어받은 사람은 장원톈이었다. 마오의 지위 상승과 다른 지도자들의 권한 존속이 함께 나타나는 인사 기록이다.4

이때의 지도권은 당무와 군사 지휘를 나눠 맡는 관계 속에 있었다. 마오가 훗날 우위를 얻었다는 결과를 알고 준이회의에 모든 권력의 이전을 몰아넣으면, 그 뒤 무엇이 더 달라져야 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대외 전략과 통신 조건의 변화도 한 회의에서 전권을 얻었다는 설명의 근거로 삼기 어렵다.567

사상을 심사하는 당, 사상의 이름이 된 지도자

1942년 마오는 당원이 무엇을 잘못 생각하는지 규정하는 목소리로 등장한다. 2월 1일 중앙당교 연설에서 그는 주관주의와 종파주의를 비판했다. 당의 상투적인 글투도 교정 대상으로 삼았다. 정풍은 당의 학습과 업무 방식을 바로잡는 운동이라는 뜻이었다. 마오는 그 목적을 “병을 고쳐 사람을 구한다”는 말로 표현했다.8

교육이라는 설명에는 실제 조직 문제가 담겨 있었다. 1943년 4월 3일 당 중앙의 정풍 계속 결정은 새 당원에 대한 교육을 강조했다. 적의 후방에서 활동하는 조직에는 그 조건에 맞는 계획을 요구했다. 떨어져 있는 조직이 같은 기준으로 일하게 하는 과제까지 지도자 개인의 권력욕으로 환원하면, 중앙이 해결하려던 문제가 사라진다.9

같은 결정은 교육을 간부 심사와 연결했다. 초기와 중기의 공개 호소에서는 간부 심사와 내부 간첩 숙청 과제를 언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뒤의 세 번째 단계에는 각 동지의 사상과 이력을 심사하도록 했다. 발언을 장려하는 과정 뒤에 발언한 사람을 분류하고 심사하는 과정이 놓여 있었다. 중앙은 초기·중기의 공개 호소에서 밝히도록 한 과제와 이후 절차를 구분했다.10

이 결정문만으로 누구에게 어떤 폭력이 가해졌는지를 알 수는 없다. 문서가 숙청 대상으로 지목한 사람들이 실제 간첩이었다는 증거도 되지 않는다.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중앙의 설계다. 사상의 오류를 고치는 일이 사람의 이력을 평가하는 일로 이어졌다. 교육의 필요를 인정해도 심사의 권한을 누가 갖는지는 남는다. 가르치는 쪽이 당원으로서의 자격까지 판단한다면, 배우는 쪽의 반론은 학습 내용에 관한 이견으로만 머물기 어렵다.10

마오의 연설과 중앙의 결정이 보여 주는 변화는 지휘권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조직이 누구의 지시를 따르는가에 더해, 누구의 설명으로 옳고 그름을 가르는가가 걸려 있다. 마오가 모든 심사를 직접 지시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다만 지도자의 사상적 권위가 간부를 평가하는 조직 절차와 만나는 지점은 보인다. 개인의 인기라는 말로는 이 절차를 설명할 수 없다.

1945년 6월 11일 채택한 당장은 마오쩌둥 사상을 당의 모든 사업을 이끄는 지침으로 명시했다. 제34조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중앙위원회 주석 한 명을 선출하도록 했다. 이 주석이 정치국과 서기처의 주석을 겸하도록 규정했다. 사상의 기준에 한 지도자의 이름을 붙이는 일과 여러 지도기관의 주석직을 묶는 일이 같은 당장 안에 들어갔다.11

당장 채택 여드레 뒤인 6월 19일, 제7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는 마오를 중앙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했다. 후대 공식 기록은 서기처에 다른 지도자들도 함께 들어갔다고 전한다. 집단기관은 존속했다. 그 기관들을 잇는 주석직을 당의 활동 지침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맡았다.12

주

  1. 1인민망,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소개」, 발행일 미상. 1921년 7월의 인사에 관한 후대 공식 회고이며 동시대 회의록은 아니다. https://cpc.people.com.cn/GB/64162/64168/64553/4427940.html↩
  2. 2중국공산당, 「중국공산당 강령」, 1921년 7월, 제13조, https://zh.wikisource.org/wiki/中國共產黨綱領 ; 「중국공산당 장정」, 1922년 7월, 제7·9조, https://zh.wikisource.org/wiki/中国共产党章程_(1922年) . 위키문헌 공개 전사. 1921년 강령은 러시아어본에서 옮긴 중국어 텍스트이며 이문과 누락 조항이 있다. 조문상의 기구 구성과 실제 인사 결과는 구별해야 한다.↩
  3. 3중국공산당, 「중국공산당 첫 결의」, 1921년, 제2·5·6절, 인민망 재수록, 웹 발행일 미상. 러시아어본 번역자 주가 남은 공개 전사다. https://cpc.people.com.cn/GB/64162/64168/64553/4427949.html↩
  4. 4Sina 재수록, 「장정의 전환 단계: 1935년 1월 15일–6월 14일」, 2006-08-01, 준이회의와 그 뒤 인사 항목. 후대 연대기이며 당일 회의록은 아니다. https://news.sina.com.cn/c/2006-08-01/112710596322.shtml↩
  5. 5이오시프 스탈린, 「중국혁명의 문제들: 선전원을 위한 테제」, 《프라우다》 제90호, 1927-04-21, Marxists Internet Archive 영문 재수록. 공산당을 국민당 안에 남겨 두도록 요구한 소련 지도부의 방침이다. 외부 전략 압력의 근거지만 중공의 실제 선택 전체나 당시 패배의 단독 원인을 입증하지는 않는다.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stalin/works/1927/04/21.htm↩
  6. 6Thomas Kampen, “The Zunyi Conference and Further Steps in Mao's Rise to Power,” 《The China Quarterly》 117, 1989-03, 118–134쪽, 공개 각주 66. 상하이 경유 모스크바 전신은 1934년 8월 중단됐고 산시–모스크바 직통은 1936년 6월 수립됐다는 설명이다. 준이회의는 그 사이에 있었다. 해당 각주가 인용한 원자료를 별도로 대조한 것은 아니며, 통신 공백이 국제 조직의 권위 소멸을 뜻하지는 않는다. https://doi.org/10.1017/S0305741000023675↩
  7. 7Benjamin Yang, “The Zunyi Conference as One Step in Mao's Rise to Power,” 《The China Quarterly》 106, 1986-06, 235–271쪽. 공개 도입 발췌는 후대의 해석이 준이회의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키웠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회의의 중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뜻으로 읽지 않으며, 논문 전체의 세부 논증을 소개한 것은 아니다. https://doi.org/10.1017/S030574100003856X↩
  8. 8마오쩌둥, 「당의 작풍을 바로잡자」, 중앙당교 연설, 1942-02-01. 《마오쩌둥 선집》 제3권 영문판의 Marxists Internet Archive 재수록. 공식 선집의 편집을 거친 텍스트이며 당시 녹취 원본은 아니다. 인용은 영문판에서 번역했다.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mao/selected-works/volume-3/mswv3_06.htm↩
  9. 9중공중앙, 「정풍운동 계속 전개에 관한 결정」, 1943-04-03. 중앙당안관 편, 《중공중앙 문건선집》 제14책, 중공중앙당교출판사, 1992-03, 28–33쪽. 당의 선정·편집을 거친 문서집 수록본. https://www.marxists.org/chinese/pdf/ccp/2/1-14.pdf#page=53↩
  10. 10중공중앙, 「정풍운동 계속 전개에 관한 결정」, 1943-04-03, 위 문서집 29·30·32쪽. 초기·중기에 심사와 숙청 과제를 공개 호소에서 제외하라는 지시와 세 번째 단계의 사상·이력 심사를 구별한다. 이 명령은 실제 집행이나 피해 규모를 입증하지 않는다. https://www.marxists.org/chinese/pdf/ccp/2/1-14.pdf#page=54↩
  11. 11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 「중국공산당 장정」, 1945-06-11 채택, 총강·제34조. 인민망 공개 전사, 웹 발행일 미상. 겸임 규정의 웹 전사에는 탈자가 있다. 주석 겸임은 아래 전원회의의 후대 공식 기록에도 나온다. https://cpc.people.com.cn/GB/64162/64168/64559/4442095.html↩
  12. 12인민망, 중국공산당 제7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 기록, 사건일 1945-06-19, 웹 발행일 미상. 마오의 중앙위원회 주석 선출과 서기처 구성, 당장에 따른 주석 겸임을 기록한 후대 공식 회고다. https://cpc.people.com.cn/GB/64162/64168/64559/4527011.html↩

2장. 후계자의 이름을 적어도

국가의 수장이 바뀌는 일

1949년 10월 1일 포고는 마오를 중앙인민정부 주석으로 기록했다. 류사오치는 여러 부주석 가운데 한 명이었다. 마오는 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도 맡았다. 새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와 군을 지휘하는 자리가 한 사람에게 더해졌다.1

1959년 류사오치는 국가주석직에서 마오를 대신했다. 류는 문화대혁명 이전에 유력한 후계자로 여겨진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국가주석 취임을 마오의 최고권력 승계로 읽을 수는 없다. 1969년 당장에도 당의 지도자는 마오로 명시돼 있다. 류에게 옮겨간 국가직에는 당의 지도기관을 잇는 마오의 주석직과 사상적 권위가 포함되지 않았다.234

이 간격은 후계자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국가주석이라는 지위는 류의 상승을 보여 준다. 그 지위만으로 마오의 판단에 맞설 권한이나 공격받지 않을 권리를 얻었다고 볼 수는 없다. 직책을 받은 사실과 그 직책이 어디까지 자신을 보호하는지는 다른 문제였다.

잘못을 고칠 수 있는 범위

1959년에는 국가주석 교체와 함께 정책 비판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건이 일어났다. 7월 루산회의에서 펑더화이는 대약진의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그는 비판을 받고 국방부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린뱌오가 그 자리를 이었다. 1981년 당의 역사결의는 루산 이후의 펑 비판과 반우경 투쟁을 잘못으로 판정했다. 이 투쟁이 오류 시정을 중단시켰다는 것이 결의의 평가였다.5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의 지위가 무너지면 뒤의 비판자에게도 비용이 생긴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말하기 전에, 그 말이 어느 정치적 입장으로 분류될지 고려해야 한다. 펑의 사례에서 정책 성과에 관한 논쟁과 지도부에 대한 충성 판정은 분리되지 못했다. 이 경로를 마오의 속마음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다. 비판자가 자리를 잃었다는 결과만으로도 교정을 맡을 사람이 감수해야 할 부담은 드러난다.5

그렇다고 마오 시대에 정책 수정이 전혀 불가능했던 것은 아니다. 같은 역사결의는 마오와 중앙이 1960년 겨울부터 조정에 착수했다고 기록했다.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가 실행을 맡은 지도자들에 포함됐다. 천윈과 덩샤오핑도 참여했다. 1962년 1월에는 7천인 회의가 열렸다. 당 스스로 교정을 막은 사건과 교정이 다시 시작된 시기를 함께 기록한 셈이다.6

수정할 수 있다는 사실은 수정하는 사람의 안전까지 보장하지 않았다. 당의 지침으로 인정받은 사상과 정책 판단이 연결된 상황에서는, 오류를 지적하는 말이 지도자의 권위에 대한 공격으로 바뀔 수 있었다. 교정이 허용되는 범위도 그 정치적 판정에 달려 있었다. 앞서 정책을 집행한 사람이 뒤에 비난받는다면, 지도부가 문제를 알아차리는 능력과 그 문제를 계속 고치는 능력은 같다고 볼 수 없다.

1981년의 결의에도 평가자의 입장이 들어 있다. 당은 문화대혁명의 주된 책임을 마오에게 돌리면서도 그의 공적이 오류보다 크다고 선언했다. 문화대혁명의 이론은 마오사상과 구별했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되 당의 사상적 정당성은 보존하려는 문서였다. 그 판정을 사건의 중립적인 최종 해답으로 삼을 수는 없다.7

후계자를 의심하는 규정

1966년 5월 16일 당 중앙의 통지는 후계자로 키우는 사람조차 내부의 적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직 신임을 받는 인물 가운데 흐루쇼프 같은 사람이 곁에 숨어 있다는 논리였다. 해당 구절은 류사오치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지명이나 신임이 의심을 막아 주지 못한다는 원칙은 분명했다. 지도자가 후계자로 골랐다는 사실도 충성심에 대한 재심사를 끝내지 못했다.8

류는 문화대혁명의 공격 대상이 됐다. 1968년 10월 당에서 제명됐고, 1969년에 사망했다. 1981년 역사결의는 류에 대한 정치적 결론과 징계가 잘못이었다고 명시했다. 국가주석에까지 올랐던 이력은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 사후의 명예 회복은 과거의 판정이 바뀔 수 있음을 보여 주지만, 살아 있는 동안 그 판정에 맞설 수 있었음을 뜻하지 않는다.9

1969년 4월 14일 채택한 새 당장은 다른 후계자의 이름을 총강에 넣었다. “린뱌오 동지는 마오쩌둥 동지의 친밀한 전우이자 후계자다.” 류가 유력 후계자로 여겨졌던 것과는 증거의 성격이 다르다. 린에게는 당이 채택한 문서의 명시적 지명이 있었다. 후계자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서 생기는 불확실성만 놓고 보면 이보다 분명한 답을 주기 어렵다.3

이름은 분명했지만 권력을 넘기는 절차는 그만큼 분명하지 않았다. 당장 제9조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주석과 부주석을 선출하도록 했다. 총강의 후계자 지명과 집단기관의 선출 조항이 한 문서에 공존했다. 마오가 죽거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면 린이 언제 어떤 자리에 자동 취임하는지는 규정하지 않았다. 지명을 철회할 수 없도록 하는 특별한 절차도 없었다.3

이는 당에 아무 규칙도 없었다는 말과 다르다. 최고 지도기관과 선출 규칙은 정해져 있었지만, 후계자 지명과 선출 결과의 충돌을 다룬 별도의 승계 절차는 이 당장에 없었다. 린의 이름을 넣은 당장도 마오의 퇴임 시점을 정하지 않았다. 후계자가 기다리는 시간과 현 지도자가 권한을 행사하는 시간을 어떻게 나눌지 문서는 답하지 않았다. 지정받은 사람의 지위는 그를 지정한 권위와 분리된 권리로 완성되지 않았다.3

린은 실제 승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는 1971년 몽골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저우언라이는 1973년 당대회 정치보고에서 그 날짜를 9월 13일로 제시했다. 보고는 린의 죽음을 암살과 권력찬탈 시도 뒤 도주한 결과로 규정했다. 추락 사망이라는 결과가 린이 무엇을 알고 지시했는지까지 입증하지는 않는다. 당의 범죄 규정과 사건의 전모는 구별해야 한다.10

1973년 8월 왕훙원의 당장 개정 보고는 린에 관한 문단을 완전히 삭제했다고 밝혔다. 보고는 혁명사업의 후계자를 한두 명이 아닌 수백만 명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수백만 명은 최고직 후보의 수가 아니다. 혁명을 이어갈 간부와 세대를 뜻했다. 특정인의 승계를 약속한 문장이 사라진 자리에 혁명의 지속을 강조하는 말이 들어왔다.11

린의 죽음은 마오가 정상적으로 퇴임할 때 승계 규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시험한 사건은 아니었다. 그보다 좁은 결론만 남는다. 당장에 이름을 넣었어도 그 사람의 승계는 실현되지 않았다. 지정 문구도 이후 당대회에서 삭제됐다. 키스 포스터가 1986년 연구의 공개 서두에서 지적했듯, 이때의 승계에는 마오 이후 중국이 계급투쟁 노선을 계속할지라는 문제도 걸려 있었다. 사람의 이름을 정하는 일만으로 그 정책적 분쟁까지 끝낼 수는 없었다.12

지도자가 죽은 뒤

1976년에는 화궈펑이 올라섰다. 안드레스 오나테의 연구 각주에 따르면 정치국은 마오의 추천으로 2월 3일 그를 총리 권한대행에 임명했다. 1981년 역사결의는 같은 해 화가 마오의 제안으로 당 제1부주석과 총리가 됐다고 회고했다. 추천을 받은 사실과 맡은 보직은 확인되지만, 린처럼 당장에 이름을 넣은 경우와 같은 지위는 아니었다.13

마오는 9월 9일 사망했다. 10월에는 화의 부상과 맞물려 4인방 체포가 일어났다. 군과 원로의 지원을 얻어 경쟁 세력을 제거하는 행동이 권력 재편의 일부가 됐다. 이 과정을 후계 지명의 자동 실행으로 설명하면 실제 협력과 강제력의 몫이 사라진다. 체포의 비공개 협의나 세부 작전을 확정할 수는 없어도, 추천 이후에 정치적 행동이 더 필요했다는 점은 남는다.14

마오의 생전 추천은 화에게 근거를 주었다. 마오가 죽은 뒤에도 그 근거가 통하려면 다른 지도자들이 화의 권한을 받아들여야 했다. 후계자의 이름을 고르는 일 뒤에 남았던 것은 살아 있는 권력자들 사이의 관계였다.

주

  1. 1마오쩌둥, 건국 포고, 1949-10-01, Collected Works of Mao Tse-tung (1917–1949), vol. 9 수록본의 영문 전사, Marxists Internet Archive. 중앙인민정부와 인민혁명군사위원회의 당시 직함을 기록한다.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mao/works/1949/10/01.htm↩
  2. 2Chineseposters.net, 「류사오치」, 발행일 미상. 1959년 국가주석 취임과 문화대혁명 이전 후계자 지위를 설명하는 후대 역사 해설. 류에게 린과 같은 당장상 지명 조항이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https://chineseposters.net/themes/liushaoqi↩
  3. 3중국공산당 제9차 전국대표대회, 「중국공산당 장정」, 1969-04-14 채택, 총강·제8·9조 및 전체 12개 조항, 영문 전사. 후계자 인용은 영문판에서 번역했다. 자동 취임·지명 철회 제한·전임자 퇴임에 관한 판단은 문서의 규정 범위에 한정한다.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ninth_congress2.htm↩
  4. 4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 「중국공산당 장정」, 1945-06-11, 총강·제34조, 인민망 공개 전사. 당직 결합과 마오사상의 지침 지위를 규정한 조문이다. 국가직 변경과 사상적 권위의 관계는 이 구별에 따른 해석이다. https://cpc.people.com.cn/GB/64162/64168/64559/4442095.html↩
  5. 5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 1981-06-27, 제17항,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history/01.htm ; Chineseposters.net, 「대약진: 1958–1961」, 발행일 미상, 루산회의 해설, https://chineseposters.net/themes/great-leap-forward . 전자는 후대 당 공식 평가다. 펑의 문제 제기·해임과 린의 대체는 후자의 역사 해설에 따른다.↩
  6. 6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 1981-06-27, 제17항. 1960년 겨울 조정 방침과 실행을 맡은 지도자들, 1962년 1월 회의를 기록한 후대 공식 회고.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history/01.htm↩
  7. 7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같은 결의, 1981-06-27, 제19·22·27항. 문혁의 책임을 마오에게 귀속하면서 공적의 우위를 유지하는 문서의 구성에 따른 해석이다.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history/01.htm↩
  8. 8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5·16 통지」, 1966-05-16, 말미의 후계자 경계 문구, 영문 전사. 그 구절에는 류사오치의 이름이 없다.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cc_gpcr.htm↩
  9. 9Chineseposters.net, 「류사오치」, 발행일 미상, https://chineseposters.net/themes/liushaoqi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 1981-06-27, 제20항 제2절,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history/01.htm . 제명·사망 연대는 후대 해설, 징계의 부정은 당의 사후 판정이다. 구체적인 의료 경위는 확정하지 않는다.↩
  10. 10저우언라이, 제10차 당대회 정치보고, 1973-08-24 보고·08-28 채택, 린 사건 대목,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10th_congress_report.htm ; Chineseposters.net, 「린뱌오」, 발행일 미상, https://chineseposters.net/themes/linbiao . 전자는 승자 측 공식 보고다. 후자의 해설도 쿠데타 계획 설명에는 유보를 붙인다. 린의 인지·지시 범위와 추락 원인을 단정할 근거로 삼지 않는다.↩
  11. 11왕훙원, 제10차 당대회 당장 개정 보고, 1973-08-24 보고·08-28 채택. 린 문단의 삭제와 혁명사업 후계자 양성에 관한 영문 전사.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cons_revision.htm↩
  12. 12Keith Forster, “The Politics of Destabilization and Confrontation: the Campaign against Lin Biao and Confucius in Zhejiang Province, 1974,” 《The China Quarterly》 107, 1986-09, 433–462쪽. 여기서 귀속한 논점은 공개 도입 발췌의 범위다. https://doi.org/10.1017/S0305741000039850↩
  13. 13Andres D. Onate, “Hua Kuo-feng and the Arrest of the ‘Gang of Four’,” 《The China Quarterly》 75, 1978-09, 540–565쪽, 공개 각주 68, https://doi.org/10.1017/S0305741000042557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 1981-06-27, 제25항,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history/01.htm . 총리 권한대행 임명과 이후 정식 보직을 구별한다.↩
  14. 14Onate, 위 논문, 1978-09, 공개 서두·각주 5, https://doi.org/10.1017/S0305741000042557 ; Chineseposters.net, 「화궈펑」, 발행일 미상, https://chineseposters.net/themes/huaguofeng . 오나테의 각주는 체포 관련 자료가 보고를 들었다는 간부와 가족·지인을 거쳐 신문에 전달됐다는 한계를 밝힌다. 비공개 작전의 구체적 경위를 재현할 근거로 삼지 않는다.↩

3장. 퇴임을 설계한 원로

종신직을 없앤다는 말

당서기도 한 표만 가져야 한다. 덩샤오핑이 1980년 8월 18일 당과 국가의 지도제도 개혁 연설에서 제시한 원칙이었다. 그는 권력의 과도한 집중이 집단지도를 희생시키는 개인의 전횡을 낳을 수 있다고 비판했다. 다음 자리에 더 나은 사람을 고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자리를 맡은 사람의 권한을 제한하려는 제안이었다.1

개혁의 목적은 공산당의 지도를 약화하는 데 있지 않았다. 덩은 같은 연설에서 당의 지도와 규율을 유지하고 강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지도자 개인에게 몰린 권한을 조정하는 것과 당의 독점적 지위를 다른 정치세력과 나누는 것은 다른 과제였다. 집단지도가 곧 민주주의의 출현은 아니었다.1

덩 혼자 정책을 제안한 것도 아니었다. 1980년 12월 25일 그는 천윈의 경제조정 연설에 동의하면서 일부 건설계획을 줄이겠다고 밝혔다. 천윈의 정책 영향은 이 발언에서 확인된다. 다만 덩이 반대하던 정책을 천윈이 강제로 관철했다는 증거는 아니다. 동의한 결과와 양보를 강요받은 결과는 겉으로 같아 보여도 권력관계에 관해서는 다른 설명을 요구한다.2

1976년 이후 당 주석으로 남았던 화궈펑의 지위도 재편됐다. 1981년 역사결의는 그의 4인방 제거 역할을 인정하면서 지도 노선을 비판했다.3 6월 29일 중앙위원회 공보는 화의 당 주석과 당 군사위원회 주석 사임을 수용했다. 후야오방이 당 주석을, 덩이 당 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았다. 화는 당 부주석으로 남았다. 한 사람에게 있던 당과 군의 최고직을 서로 다른 사람에게 배분한 인사였다. 공보의 ‘사임 요청’이라는 표현만으로 화가 자유롭게 물러났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4

후의 당 주석 취임과 덩의 군사위원회 장악은 함께 읽어야 한다. 마오 때 한 사람에게 모였던 권한을 나눴지만, 직함이 나뉜 만큼 실권도 똑같이 나뉘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규칙은 누구에게 적용됐는가

1982년 9월 6일 당장은 지도간부의 직위가 종신이 아니라고 규정했다. 집단지도 원칙과 개인숭배 금지도 명시했다. 중앙위원회 임기는 5년으로 정했고,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총서기를 선출하도록 했다. 사람을 바꿀 때마다 지도자의 의사에만 기대지 않도록 할 조직 규칙들이 문서에 들어갔다.5

원로가 물러난 뒤 참여할 통로도 설계했다. 중앙고문위원회는 중앙위원회의 정치적 보좌·자문기구였다. 원로의 영향력이 모두 규정 밖에서만 행사됐다고 보면 이 기구를 놓친다. 반대로 자문기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원로들이 최종 결정을 거부할 법적 권리를 가졌다고 할 수도 없다. 공식적인 참여와 개인의 명망에 따른 영향은 구별해야 한다.6

국가의 연임 제한은 당의 비종신 원칙보다 직책별로 구체적이었다. 1982년 12월 4일 헌법은 국가주석과 부주석의 연속 재임을 두 임기로 제한했다. 총리와 부총리, 국무위원에게도 같은 상한을 뒀다. 국가 중앙군사위원회에는 임기가 있었지만 같은 연임 상한은 없었다. 당 중앙위원회의 5년 임기 역시 총서기 개인의 두 임기 상한과는 다르다.75

이 규칙들을 ‘중국 최고지도자의 두 임기제’로 묶으면 적용 범위를 넘는다. 국가직에서 물러나도 당직과 군직이 남을 수 있었다. 일부 직책에 상한이 없었다고 해서 나머지 제한까지 없는 셈으로 치는 것도 오류다.

현직 총서기의 지위는 새 규칙 아래에서도 안전하지 않았다. 1987년 1월 16일 정치국 확대회의는 후야오방의 사임을 수용했다. 자오쯔양을 총서기 대행으로 추대했다. 중앙위원회가 이 결정을 추인한 것은 10월 20일이었다. 교체가 먼저 일어난 뒤 정식 기관의 확인이 뒤따랐다. 후는 그 10월 공보의 회의 주재 상무위원 명단에도 남아 있었다.8

후는 총서기에서 물러나도 다른 지위는 유지했다. 지도자를 바꾸는 절차는 존재했지만, 그 절차가 현직을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지켜 주는 장치였다고 보기 어렵다.

군직을 떠난 뒤에도 남은 권위

1989년의 위기는 총서기와 군사위원회 주석을 나눠 보는 이유를 드러냈다. 덩은 6월 9일 계엄부대 지휘 간부들을 만나 무력 진압을 정당화했다. 그는 시위와 저항을 ‘반란’으로 규정한 당국의 관점에서 군의 행동을 지지했다. 당시 덩에게는 당 군사위원회 주석이라는 공식 직책이 있었다. 그의 역할을 직함 없는 원로의 조언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9

진압 뒤의 연설로 모든 작전명령을 덩 혼자 내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군 지휘 간부 앞에서 행동을 정당화하는 최고 군직자의 정치적 책임은 드러난다.9

6월 16일 덩은 자신을 제2세대 집단지도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자신이 고른 두 후계자가 모두 자리를 오래 지키지 못했다고도 말했다. 집단지도를 주장하는 인물이 후계자 선택을 자신의 행위로 서술한 것이다. 동시에 한두 사람의 명망에 국가의 운명을 거는 일은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개인 권위의 위험을 인정하는 말과 그 권위를 행사한 사람의 자기설명이 한 발언 안에 있었다.10

6월 24일 중앙위원회 공보는 자오쯔양의 해임과 장쩌민의 총서기 선출을 발표했다. 자오는 총서기뿐 아니라 정치국 상무위원과 중앙위원 자리도 잃었다. 당 군사위원회 제1부주석에서도 해임됐다. 공보는 자오가 ‘동란을 지지하고 당을 분열시켰다’고 주장했다. 이는 제거를 정당화한 당의 판정이며, 자오의 행위에 대한 독립적인 유죄 판단은 아니다.11

후와 자오의 사례는 총서기에게 제약이 전혀 없었다는 주장에 반한다. 덩이 후계자 선택에 관여했고, 총서기가 바뀌는 동안에도 자신을 지도부의 핵심으로 설명했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현직을 물러나게 할 수 있는 원로의 힘은 원로 자신을 통제하는 제도와 같지 않다. 인사 교체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민주적 책임정치의 증거로 바꿀 수는 없다.10

덩도 공식 직책에서는 물러났다. 1989년 11월 9일 중앙위원회 공보는 그의 당 군사위원회 주석 사임을 받아들였다. 장쩌민이 그 자리를 맡았다. 이 날짜가 뜻하는 것은 당 군직의 이전이다. 국가 군사위원회의 인사까지 같은 결정으로 처리했다고 읽어서는 안 된다.12

퇴임한 덩이 뜻하는 대로 정책이 즉시 움직였던 것도 아니다. 조지프 퓨스미스는 1990년 말 지도부의 말뿐인 재확인이 덩의 개혁 노선을 되살리지는 못했다고 분석했다. 덩의 권위가 남았다는 것과 그가 아무 저항도 받지 않았다는 것은 다르다. 그렇다고 이 결과만으로 특정 원로에게 덩을 제어할 거부권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13

1992년 1월부터 2월까지 남방을 방문하며 한 담화에서 덩은 자신의 퇴임을 언급했다. 노년의 오류를 피하려 물러났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같은 담화에서 우경을 경계하되 주로 좌경을 경계해야 한다고 방향을 제시했다. 현직에서 물러났다는 자기설명은 현직 지도부가 따라야 할 노선에 관한 발언을 끝내지 않았다.14

장쩌민은 그해 10월 12일 당대회 보고에서 3월 정치국이 덩의 담화에 전적으로 동의했다고 밝혔다. 보고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의 수립을 목표로 제시했다. 이 수용을 덩 혼자 만든 결과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현직 지도부가 퇴임자의 담화를 노선의 근거로 삼은 사실은 분명하다.15

덩이 내려놓은 직위에는 후임자가 들어섰다. 그가 가진 노선의 권위는 그 자리에 함께 넘어가지 않았다. 퇴임할 수 있게 만든 사람이 퇴임한 뒤에도 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이 개혁의 한계였다.

주

  1. 1덩샤오핑, 「당과 국가 지도제도의 개혁에 관하여」, 1980-08-18 연설, 제1·4부와 말미, Marxists Internet Archive 영문 전사. 당서기의 한 표 원칙과 당 지도 강화 목표를 함께 제시한다. 연설은 개혁 목표이며 그 실행 성과를 입증하지는 않는다.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deng-xiaoping/1980/220.htm↩
  2. 2덩샤오핑, 중앙공작회의 연설, 1980-12-25, 천윈의 경제조정 연설에 동의하는 대목, 영문 전사. 정책의 지지와 건설계획 축소를 기록하며 강제 양보의 증거는 아니다.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deng-xiaoping/1980/49.htm↩
  3. 3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 1981-06-27, 제21항 제3절·제25–26항. 화의 역할과 1978년 전환에 대한 후대 당 공식 평가.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history/01.htm↩
  4. 4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 공보, 1981-06-29 채택, 영문 전사. 화의 사임 수용과 당·군 지도부 인사 기록.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history/03.htm↩
  5. 5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 「중국공산당 장정」, 1982-09-06, 제10·20·21·37조, 위키문헌 전사본. 중앙위의 임기와 지도간부 비종신 규정은 개인별 연임 상한과 구별해야 한다. https://zh.wikisource.org/wiki/中国共产党章程_(1982年)↩
  6. 6중국공산당 제12차 전국대표대회, 같은 당장, 1982-09-06, 제22조. 중앙고문위원회를 중앙위원회 지도 아래의 정치적 보좌·자문기구로 규정한다. https://zh.wikisource.org/wiki/中国共产党章程_(1982年)↩
  7. 7전국인민대표대회,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1982-12-04, 제79·87·93·94조, 1982년판 위키문헌 전사. 국가기관별 임기 규정이며 당 총서기의 임기 규정은 아니다. https://zh.wikisource.org/wiki/中华人民共和国宪法_(1982年)↩
  8. 8중국공산당 제12기 중앙위원회 제7차 전원회의 공보, 1987-10-20, 인민망 재수록. 1987-01-16 결정의 추인과 회의 주재 명단. 1월 내부 논의의 압박 순서나 사임의 자발성을 증명하는 기록은 아니다. https://cpc.people.com.cn/GB/64162/64168/64565/65382/4429510.html↩
  9. 9덩샤오핑, 계엄부대 지휘 간부 접견 연설, 1989-06-09, 영문 전사. ‘반란’은 화자의 규정이다. 진압의 정당화와 군 간부에 대한 발언은 보여 주지만 실제 작전명령의 전체 경로를 입증하지는 않는다.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deng-xiaoping/1989/5.htm↩
  10. 10덩샤오핑, 제3세대 집단지도에 관한 당 중앙 지도자들과의 대화 발췌, 1989-06-16, 영문 전사. ‘핵심’, 후계자 선택, 개인 명망의 위험은 당사자의 자기설명으로 귀속한다.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deng-xiaoping/1989/118.htm↩
  11. 11중국공산당 제13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 공보, 1989-06-24, 인민망 재수록. 자오의 당직·군직 해임과 장의 총서기 선출을 기록한다. 해임의 정당화 문구는 당의 주장이다. https://cpc.people.com.cn/GB/64162/64168/64566/65386/4441846.html↩
  12. 12중국공산당 제13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공보, 1989-11-09, 인민망 재수록. 덩의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사임 수용과 장의 취임을 정한 문서다. 국가 군사위원회 인사는 별도다. https://cpc.people.com.cn/GB/64162/64168/64566/65388/4441852.html↩
  13. 13Joseph Fewsmith, China since Tiananmen: From Deng Xiaoping to Hu Jintao, 제2판,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8, 제2장 “Deng moves to revive reform,” 48–80쪽. 여기서 귀속한 논점은 공개 장 첫머리 발췌에 한정한다. https://doi.org/10.1017/CBO9780511790454.005↩
  14. 14덩샤오핑, 남방 담화 발췌, 1992-01-18–02-21, 우창·선전·주하이·상하이 방문 중 발언의 편집물, 영문 전사. 단일 날짜의 연설이 아니며 퇴임 동기는 화자의 자기진술이다. https://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deng-xiaoping/1992/179.htm↩
  15. 15장쩌민, 제14차 당대회 보고, 1992-10-12, 인민망 재수록. 3월 정치국의 담화 수용은 10월 보고의 서술에 따른다. https://cpc.people.com.cn/GB/64162/64168/64567/65446/4526308.html↩

4장. 직위마다 다른 시계로 넘어간 권력

총서기는 바뀌고 군 주석은 남았다

2002년 11월 15일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후진타오를 총서기로 선출했다. 같은 날 발표한 군사위원회 명단의 주석은 장쩌민이었다. 후는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이름을 올렸다. 신임 총서기와 전임 총서기가 당과 군의 최고직을 나눠 가진 구도가 하나의 공보에 담겼다.1

2003년 3월 15일 전국인민대표대회는 후를 국가주석으로 선출했다. 그날의 또 다른 공고는 장을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했다고 밝혔다.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가 바뀌어도 군의 최고직은 전임자에게 남았다. ‘후진타오 시대가 시작됐다’는 말만으로는 이 시기의 권력 배치를 알 수 없다.2

당과 국가의 군사위원회는 이름이 비슷해도 인사 절차를 따로 거쳤다. 당 군사위원회 구성원은 당 중앙위원회가 결정했다. 국가 군사위원회 주석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선출했다. 같은 사람이 두 자리를 맡을 때도 한 번의 결정으로 두 직위를 얻는 것은 아니었다. 당·국가·군을 구별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군의 직함도 두 개로 나눠 봐야 한다.34

2004년 9월 19일 당 중앙위원회는 장의 당 군사위원회 주석 사임을 승인했다. 별도의 구성 변경 결정으로 후가 그 자리를 맡았다. 장은 국가 군사위원회 주석에서는 곧바로 물러나지 않았다. 총서기를 넘긴 뒤에도 남아 있던 두 군직 가운데 당의 직위부터 옮겨간 것이다.5

국가 군직의 이전도 한 날짜로 줄일 수 없다.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장의 사임 요청을 받아들인 날은 2005년 3월 8일이었다. 후를 후임 주석으로 선출한 날은 3월 13일이었다. 전임자의 사임 수락과 후임자의 선출 사이에는 닷새가 있었다. 권한을 놓는 결정과 다음 사람에게 주는 결정은 별개였다.6

장은 당 군직에 남아 있던 이유를 어떻게 설명했을까. 2004년 당의 사임 승인문은 장이 앞서 퇴임 의사를 밝혔고, 제16기 1중전회가 그의 군사위원회 주석 유임을 결정했다고 서술했다. 이는 당이 공개한 설명이다. 장이 실제로 얼마나 물러나고 싶었는지, 후와 어떤 협상을 했는지는 이 문서로 확정할 수 없다. 유임이 확인된다는 사실과 유임의 내막을 안다는 주장은 다르다.5

이양의 시차만으로 제도를 허구라고 할 수는 없다. 앤드루 네이선은 2003년 1월 발표한 연구에서 승계 정치가 점차 규범에 구속되는 성격을 제도화의 일부로 설명했다. 그가 설명하려던 것은 중국의 민주화가 아니라 권위주의 체제의 생존이었다. 공개 초록의 이 논점은 지도자 교체가 반복 가능한 절차를 갖추는 변화에 주목한다. 2003년의 평가를 뒤에 일어난 이양 전체에 대한 판정으로 옮길 수는 없다.7

실제로 총서기를 선출하는 기관과 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기관은 명시돼 있었다. 2002년 당장은 중앙위원회의 임기를 5년으로 정했다. 총서기는 정치국 상무위원 가운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선출하도록 했다. 다음 지도부가 생길 때까지 기존 지도부가 업무를 계속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이 조문들에는 총서기 개인의 연속 두 임기 상한이 없었다.3

규칙이 있다는 것과 규칙이 유력자들의 뜻에 반해서도 작동한다는 것은 다른 주장이다. 조지프 퓨스미스는 2021년 인터뷰에서 중국 정치의 제도화가 과장됐다고 비판했다. 지도자들이 제도의 구속을 받기보다 다른 사람을 제약하려 제도를 이용했다는 해석이었다. 공보의 인사 결과만으로 네이선과 퓨스미스 가운데 한 사람의 설명을 완전히 입증할 수는 없다. 공개 절차가 선택을 만들어 냈는지, 지도부의 합의를 공식화했는지는 별도로 살펴야 한다.8

직위를 그만둔 뒤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은 퇴임 규칙을 평가할 때 남았던 한계다. 여기서는 공식 이양의 종료 시점을 네 직위 모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의 실제 잔여 영향력을 모른다는 이유로 후가 받은 직위까지 무효로 만들 수는 없다.

시진핑이 거친 자리와 후진타오의 퇴장

시진핑은 중앙 최고직을 맡기 전에 지방의 당과 행정기관을 거쳤다. 신화사의 공식 약력은 1980년대 허베이성 정딩현에서 부서기와 서기를 맡은 경력을 적는다. 이후 푸젠성 샤먼 부시장과 닝더의 당서기를 거쳐 푸저우에서 일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는 푸젠성 성장이었다. 9

그는 2002년 저장성으로 옮겼다. 성장 권한대행을 거쳐 성 당서기를 맡았다. 2007년에는 상하이 당서기로 이동했다. 이 약력은 현과 시에서 성급 지도부까지 오른 경로를 보여 준다. 각 임명이 누구의 후원으로 성사됐는지까지 보여 주는 자료는 아니다. 경력의 존재를 능력에 대한 독립적인 평가나 엘리트의 만장일치로 바꿔 읽어서는 안 된다.9

2007년 시는 정치국 상무위원과 중앙서기처 서기가 됐다. 중앙당교 교장도 맡았다. 2008년에는 국가부주석이 더해졌다. 당의 핵심 지도기관 진입과 국가의 부주석 취임은 별도의 단계였다. 둘을 한 번의 후계자 확정 행사로 묶으면 공개된 인사 기록보다 더 많은 것을 주장하게 된다.9

2010년에는 당과 국가의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았다. 당 군직은 제17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가 증보했다. 국가 군직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가 임명했다. 이때 시의 경력에는 당의 상무위원과 국가부주석에 이어 두 군사위원회의 부주석이 함께 놓였다. 후계자로서 필요한 자리를 단계적으로 갖춰 간 경로로 읽을 수 있지만, 약력만으로 비공개 선정 과정을 재현할 수는 없다.9

국가부주석이나 군사위원회 부주석을 맡았다는 사실 자체가 다음 주석으로의 자동 승계를 뜻하지도 않았다. 2012년 당장은 총서기의 선출과 군사위원회의 구성 결정을 중앙위원회에 맡겼다. 시가 앞서 여러 부직을 거친 사실은 이후의 선출을 설명하는 경력이지만 그 선출을 대신하는 법적 절차는 아니었다. 유력한 후계자와 실제 권한을 넘겨받은 지도자의 차이는 이 시기에도 남아 있었다.3

2012년 11월 15일 중앙위원회는 시를 총서기로 선출했다. 같은 전원회의가 시를 주석으로 하는 당 군사위원회 구성을 결정했다. 후진타오는 총서기에서 물러난 뒤 당 군직에 남지 않았다. 장이 총서기를 넘기고 당 군직을 보유했던 경우와 다른 이양이었다. 시는 당 조직의 최고직과 당의 군 지휘직을 동시에 받았다.10

두 번의 이양에서 후임자가 직위를 받은 날짜를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선명해진다. 아래 표는 공식 직위의 이전만 나타낸다. 전임자의 비공식 영향력이 끝난 날짜를 뜻하지 않는다.

직위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후진타오에서 시진핑으로
당 총서기2002-11-15 선출2012-11-15 선출
국가주석2003-03-15 선출2013-03-14 선출
당 군사위원회 주석2004-09-19 구성 변경 결정2012-11-15 구성 결정
국가 군사위원회 주석2005-03-08 장 사임 수락, 03-13 후 선출2013-03-14 선출

표의 날짜는 당 공보와 전국인민대표대회 결정·공고, 신화사 선출 보도에 따른다.12561011

당직을 넘긴 뒤에도 국가직의 시간표는 남았다. 2013년 3월 14일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시를 국가주석과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했다. 같은 회의였지만 국가주석 선거와 군사위원회 주석 선거에는 별도의 투표지를 썼다. 당의 군직을 맡은 사실이 국가의 선출 절차를 생략하게 하지는 않았다. 후의 국가직 퇴장까지 이때 마무리됐다.11

후는 총서기에서 물러난 뒤 당 군사위원회 주석직에 유임하지 않았다. 시진핑은 총서기와 당 군사위원회 주석을 같은 날 맡았다.10 국가 군사위원회 주석직은 2013년 3월 14일 별도로 넘겨받았다.11 이제 그의 지시를 집행할 사람은 기존의 간부들이었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하고, 어떤 일을 감추며, 누구에게 자신의 경력을 맡기는지가 새 지도자의 통치에서 해결할 문제로 남았다.

주

  1. 1중국공산당 제16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 공보, 2002-11-15, 총서기·군사위원회 명단. 신화망 공보의 Sina 재전재. http://news.sina.com.cn/c/2002-11-15/1213808374.html↩
  2. 2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 주석단, 공고 제2호·제3호, 2003-03-15, 국무원공보 재수록. 후의 국가주석 선출과 장의 국가 군사위원회 주석 선출을 각각 기록한다. https://www.gov.cn/gongbao/content/2003/content_62025.htm ; https://www.gov.cn/gongbao/content/2003/content_62026.htm↩
  3. 3중국공산당, 2002년 당장, 2002-11-14 채택, 제21·22조, https://fuwu.12371.cn/2012/09/27/ARTI1348735605951472.shtml ; 2012년 당장, 2012-11-14 채택, 제21·22조, https://www.gov.cn/jrzg/2012-11/18/content_2269219.htm . 총서기 선출과 군사위원회 구성 결정, 업무 계속 조항을 구별한다.↩
  4. 4전국인민대표대회,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2004년 수정 반영본, 제62·79·93조, 국무원공보 2004년 제13호. 이 판본의 규정과 2003년 선출 행위 자체의 공고를 구별한다. https://www.gov.cn/gongbao/content/2004/content_62714.htm↩
  5. 5중국공산당 제16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 장쩌민의 당 군사위원회 주석 사임 승인 결정 및 군사위원회 구성 변경 결정, 2004-09-19. 잔류의 경위는 승인문의 공식 설명에 한정한다. http://cpc.people.com.cn/GB/64162/64168/64569/65412/4429179.html ; http://cpc.people.com.cn/GB/64162/64168/64569/65412/6348360.html↩
  6. 6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 장쩌민 국가 군사위원회 주석 사임 수락 결정, 2005-03-08, 전국정협 재수록, http://www.cppcc.gov.cn/2011/10/25/ARTI1319532318468217.shtml ; 신화망, 후진타오 국가 군사위원회 주석 선출 보도, 2005-03-13, Sina 재전재, https://news.sina.cn/sa/2005-03-13/detail-ikkntiam2910813.d.html . 사임 수락과 후임 선출 사이 직무 처리 방식은 이 문서들이 설명하지 않는다.↩
  7. 7Andrew J. Nathan, “China’s Changing of the Guard: Authoritarian Resilience,” Journal of Democracy 14(1), 2003-01, 6–17쪽. 여기서 소개한 제도화 논지는 출판사 공개 초록의 범위다. https://www.journalofdemocracy.org/articles/chinas-changing-of-the-guard-authoritarian-resilience/↩
  8. 8Joseph Fewsmith, 「CLM Insights: Interview with Joseph Fewsmith」, China Leadership Monitor 제70호, 2021-12-01, 제도화와 퇴임 관행에 관한 답변. 지도자들의 제도 이용이라는 학자의 해석이며 비공개 인사 거래의 회의록은 아니다. https://www.prcleader.org/post/clm-insights-interview-with-joseph-fewsmith↩
  9. 9신화사, 「시진핑 동지 약력」, 2017-10-25. 정딩·푸젠·저장·상하이와 중앙 지도부 경력에 관한 후대 공식 약력. 2007·2008·2010년 보직은 연도 단위이며 비공개 후계자 선정일을 뜻하지 않는다. https://www.xinhuanet.com/politics/leaders/2017-10/25/c_1121856289.htm↩
  10. 10중국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 공보, 2012-11-15, 신화사 발표. 총서기 선출과 군사위원회 구성 결정을 구별한다. http://news.xinhuanet.com/18cpcnc/2012-11/15/c_113697156.htm↩
  11. 11신화사, 제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의 국가 지도자 선출 보도, 2013-03-14, 공산당원망 재전재. 국가주석·국가 군사위원회 주석의 별도 투표와 후진타오의 임기 만료를 기록한다. https://www.12371.cn/2013/03/14/ARTI1363261977834356.shtml↩

5장. 부패를 처벌하는 권력

지방의 비리를 누구에게 보고하는가

지방 간부의 비리를 조사하는 사람이 같은 지역 지도부에 인사를 의존한다면, 보고는 조사자의 경력까지 걸린 선택이 된다. 중앙은 지역 안에서 걸러진 사건만 받아 볼 수 있다. 시진핑 집권 초기의 반부패 개혁은 이 문제에 사건 보고선과 감독관 인사의 변경으로 답했다.1

처음 내놓은 규칙은 지도부 자신의 행동을 겨냥했다. 2012년 12월 4일 정치국이 채택한 8항 규정은 기풍 개선을 정치국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사 방문 때 수행 인원을 줄이고 접대를 간소화하도록 했다. 연회를 마련하지 말라는 지시도 방문 규정 안에 있었다. 모든 중국인의 소비를 통제하는 선언보다, 간부가 공적 활동을 사적 대접의 기회로 삼지 못하게 하겠다는 구체적 약속이었다.2

행동 규범을 발표하는 것과 그 위반을 적발하는 일 사이에는 조직이 필요하다. 2013년 11월 12일 제18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 결정은 기율검사기관의 이중지도 체제를 다뤘다. 기율위원회가 동급 당위원회와 상급 기율위원회의 지도를 함께 받는 구조는 유지했다. 그 안에서 부패 사건 조사는 상급 기율위원회가 주도하도록 했다. 사건 단서의 처리와 조사 상황도 동급 당위원회에 보고하는 동시에 상급 기율위원회에 반드시 보고하도록 정했다.1

이 변화는 단서가 지역 내부에서만 처리될 여지를 줄이는 설계였다. 동급 당위원회가 보고를 받는 권한은 남았지만, 그 보고로 사건의 전달이 끝나지는 않았다. 상급 기관은 아래에서 무엇을 조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사건을 다루는 사람이 지역의 유력자와 부딪힐 때 기대야 할 지휘 계통도 위쪽으로 강화됐다. 지역 지도부와의 관계만으로 감독을 설명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감독관을 누가 고르는지도 함께 바꿨다. 같은 결정은 각급 기율위원회 서기와 부서기의 지명·심사를 상급 기율위원회가 조직부문과 함께 주도하도록 했다. 파견 감독기관은 자신을 파견한 기관에 책임을 지도록 했다. 사건 정보를 위로 보내도 감독관의 경력이 지역 지도부에만 달려 있다면 보고를 꺼릴 이유가 남는다. 정보와 인사를 함께 다룬 결정은 그 연결을 겨냥했다.1

지방 권력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감독관이 곧 독립적인 감독관은 아니다. 이 설계에서 강해진 것은 상급 기율 계통이었다. 당 외부의 기관이 당 지도부를 감시하도록 권한을 넘긴 것은 아니었다. 지방의 보호 관계를 뚫는 행정적 필요와 중앙의 통제력 강화는 같은 조치 안에서 함께 성립할 수 있었다.

조사 결과가 다음 자리를 결정할 때

고위직 경력도 처벌을 막아 주지 못한다는 신호는 저우융캉 사건에서 드러났다. 전직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저우에 대한 조사 발표는 2014년 7월 29일에 나왔다. 당시의 반부패 운동을 분석한 샘슨 위엔은 이를 최고위층에 관한 비공식 불처벌 관행을 흔드는 사건으로 다뤘다. 법률에 적힌 면책권이 폐지됐다는 뜻은 아니다. 누구까지 조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대가 달라진 사례였다.3

조사 발표와 유죄 선고는 다른 단계다. 신화사는 저우가 2015년 4월 3일 기소됐고, 5월 22일 비공개 심리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6월 11일 톈진 제1중급인민법원은 수뢰와 직권남용, 고의적 국가기밀 누설에 유죄를 선고했다. 신화사가 전한 종합 형량은 무기징역이었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법원이 그런 판결을 내렸다고 공표한 사실이며, 비공개 심리의 증거 전부가 독립적으로 검증됐다는 뜻은 아니다.4

저우의 몰락은 부패 처벌과 권력 재편을 구분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위 간부를 조사하면 그 사람이 쌓은 영향력도 약해질 수 있다. 그런 정치적 효과가 있다고 해서 혐의가 모두 꾸며졌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법원이 유죄를 선고했다는 이유로 조사 대상의 선택이 정치와 무관했다고 할 수도 없다. 저우가 시진핑의 무엇을 위협했는지 상상하지 않아도, 전직 최고위 간부의 지위가 조사와 처벌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개별 사건보다 넓은 통제 수단은 순시였다. 순시는 당 조직을 찾아가 문제를 파악하고 보고하는 감독 절차다. 시진핑이 처음 만든 제도는 아니다. 2015년 8월 3일 시행한 순시조례는 2009년 시범 조례를 대체했다. 새 조례는 순시조장을 임무마다 정해 권한을 부여하도록 했다. 순시조는 기율 심사 자체를 맡는 기관과도 구별했다.5

순시에서 발견한 문제는 종류에 따라 다른 곳으로 갔다. 기율 위반 단서는 기율검사기관으로 넘겼다. 간부 인사와 조직 운영에 관한 문제는 조직부문으로 보냈다. 순시조가 현장에서 알아낸 일을 곧바로 수사하고 판결하는 구조는 아니었다. 관찰한 문제를 분류해 담당 기관에 넘기는 절차가 있었다.5

그 절차의 끝에는 간부의 다음 자리가 걸려 있었다. 조례 제30조는 순시 결과를 간부 평가와 선발·임용의 중요한 근거로 삼도록 했다. 어떤 문제는 징계 사건이 되고, 다른 문제는 승진이나 보직 판단에 반영될 수 있었다. 처벌 명단에 이름이 없더라도 순시를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이유다. 감독은 이미 저지른 위반을 벌하는 일에서 앞으로 누구에게 권한을 줄지 판단하는 일로 이어졌다.5

이 연결은 조직을 움직이는 방식도 설명한다. 간부에게 중앙의 지시는 정책 문서에 적힌 요구이면서 자신의 경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감독기관이 정보를 갖고 조직부문이 인사에 반영한다면, 지시를 무시한 결과는 업무상의 지적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렇다고 시진핑이 모든 감독관을 직접 고르거나 모든 간부의 처분을 지시했다는 뜻은 아니다. 조문이 보여 주는 것은 개인의 손동작보다 오래 작동할 수 있는 기관 간 연결이다.

청렴과 복종은 같은 기준이 아니다

청렴한 행정과 조직에 대한 복종을 같은 기준으로 볼 수는 없다. 공적 재산을 사적으로 빼돌리지 않는 것과 상급자의 판단에 따르는 것은 다른 행위다. 2015년 순시조례에서 기율 위반은 기율검사기관으로, 인사와 조직 운영 문제는 조직부문으로 향했다. 서로 다른 문제를 구분하면서도 순시 결과 전체를 인사 판단에 연결한 설계였다. 간부의 자리를 바꾸는 근거는 법원의 부패 유죄 판결에만 한정되지 않았다.5

부패 억제의 실제 이익은 이 정치적 방향 때문에 사라지는가. 천팅과 쿵카이싱이 2018년 온라인으로 발표한 토지시장 연구는 그렇게 단순한 답을 허용하지 않는다. 저자들은 2004년부터 2016년까지 100만 건이 넘는 토지 거래를 분석했다. 지방정부가 공공 토지를 파는 시장에서 정치 인맥을 가진 기업이 누린 가격 특혜에 주목했다. 저자 초록은 중앙 순시를 받았거나 시진핑이 임명한 당서기로 교체된 성에서 그 특혜가 줄었다고 보고했다.6

이 결과는 적발 인원 증가보다 구체적인 성과를 말한다. 처벌한 사람이 많다는 사실은 조사 강도가 높아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인맥 기업이 공공 토지를 싸게 받던 특혜의 축소는 거래 조건이 달라졌다는 결과다. 다만 이것을 중국 전체 부패의 감소율이나 행정 전반의 효율 향상으로 넓힐 수는 없다. 해당 시장에서 저자들이 추정한 효과가 반부패의 모든 비용과 편익을 대신하지는 않는다.6

체포 대상의 정치적 분포도 한 가지 설명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피터 로런첸과 뤼시의 2016년 연구 초록은 총서기나 총리와 연결된 인물이 거의 체포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정치국 상무위원회 전반과의 연결은 같은 보호 효과를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저자들은 협소한 권력 공고화 설명에 맞지 않는 증거도 있다고 밝혔다. 최고지도자 주변의 비대칭과 반부패의 다른 기능을 함께 남긴 결과다.7

체포되지 않은 사람이 실제로 깨끗했는지, 보호받았는지는 체포 기록만으로 나눌 수 없다. 지도자와 연결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그가 정치적 경쟁자였다는 뜻은 아니다. 모든 처벌 대상을 정적으로 바꾸면 실제 부패 문제를 지워 버린다. 모든 유죄 발표를 공정한 집행으로 받아들이면 누구를 조사할지 선택하는 권력을 지워 버린다. 두 경우 모두 감독기관이 가진 재량을 보지 못한다.

위엔은 이미 2014년에 당 기구로 권한을 모으는 반부패와 독립적 견제 장치의 설치를 구별했다. 이 비판은 이후 토지시장 연구가 보고한 이익과 양립한다. 지방의 특혜를 줄이는 데 효과적인 감독기관이 중앙의 최고권력을 제한하는 데도 효과적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같은 기관이 무엇을 할 수 있게 됐는지와 누구에게 그 힘을 쓸 수 있는지를 따로 봐야 한다.3

새 보고선은 단서와 조사 상황을 상급 기율위원회에도 보내도록 했다. 감독 책임자의 지명·심사는 상급 기율위원회와 조직부문이 주도했다. 이 조합은 최고직을 넘겨받은 시진핑 지도부에 기존 간부를 조사하고 평가할 제도적 수단을 더했다. 순시에서 분류한 문제는 기율 심사와 간부의 다음 보직을 판단할 자료가 됐다.15

여기까지의 대상은 사람과 그 사람의 경력이었다. 간부를 바꾸는 권한만으로 조직의 업무 배분까지 바뀌지는 않는다.

주

  1. 1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개혁의 전면적 심화에 관한 몇 가지 중대 문제의 결정」, 2013-11-12 채택, 제36항, 신화사·국무원 사이트 2013-11-15 게시. 이중지도 유지와 상급 기율위원회의 사건·인사 주도를 규정한다. https://www.gov.cn/jrzg/2013-11/15/content_2528179.htm↩
  2. 2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8항 규정, 2012-12-04 채택, 인민망 「8항 규정」, 2013-06-05 재수록. 연회 금지는 조사 방문의 접대 규정이라는 맥락에 한정한다. http://qzlx.people.com.cn/n/2013/0605/c364582-21744009.html↩
  3. 3Samson Yuen, “Disciplining the Party: Xi Jinping’s anti-corruption campaign and its limits,” China Perspectives 2014/3, 2014-09-01, 41–47쪽, 특히 제2·8문단. 저우의 조사 발표일과 전직 상무위원 불처벌 관행은 동시대 연구자의 서술에 따른다. 권력 집중 비판은 당시의 제도적 해석이며 장기 효과의 실증 결과는 아니다. https://journals.openedition.org/chinaperspectives/6542↩
  4. 4신화사, 「저우융캉 1심 무기징역 선고」, 2015-06-11. 4월 3일 기소, 5월 22일 비공개 심리, 6월 11일 판결을 구별한 법원 보도다. 판결문 자체나 혐의에 대한 독립 조사 결과는 아니다. https://www.xinhuanet.com/politics/2015-06/11/c_1115590304.htm↩
  5. 5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중국공산당 순시공작조례」 2015년 개정판, 2015-08-03 시행, 제10·18·28–30·42조. 순시조의 관찰·이첩과 기율 심사 기관의 역할을 구별한다. https://news.12371.cn/2015/10/28/ARTI1446018115761675.shtml↩
  6. 6Ting Chen·James Kai-sing Kung, “Busting the ‘Princelings’: The Campaign Against Corruption in China’s Primary Land Market,” The Quarterly Journal of Economics 134(1), 2019-02, 185–226쪽, 온라인 발표 2018-10-22. 본문의 결과는 저자 초록에 한정해 귀속한다. 전국 전체 부패·세수·행정속도의 추정치가 아니다. https://doi.org/10.1093/qje/qjy027 ; 초록 재수록 https://ideas.repec.org/a/oup/qjecon/v134y2019i1p185-226..html↩
  7. 7Peter L. Lorentzen·Xi Lu, “Personal Ties, Meritocracy, and China’s Anti-Corruption Campaign,” 2016년 연구논문, 저자 초록. 지도자 인맥별 체포의 비대칭과 협소한 권력 공고화 설명에 대한 반증을 함께 제시한다. 초록은 실제 잠재 부패와 조사 선택을 완전히 분리한 결론을 제공하지 않는다. https://doi.org/10.2139/ssrn.2835841 ; 출판자 기탁 초록 https://api.crossref.org/works/10.2139/ssrn.2835841↩

6장. 군의 명령은 어디로 가는가

지휘관을 바꿔도 남는 조직

군 지휘관의 비리를 적발해 교체해도 그가 맡던 기관의 일은 남는다. 새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같은 보고를 받고 같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앞서 살핀 기율 조사와 인사 평가가 조직을 통제하는 수단이라면, 그 수단만으로 풀리지 않는 군의 문제는 업무 배분이었다. 누가 청렴하게 명령을 내리는가에 더해, 어느 기관이 어떤 명령을 내려야 하는지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종전의 네 총부는 군 전체의 업무와 육군 본부 기능을 함께 맡았다. 총참모부·총정치부·총후근부·총장비부였다. RAND의 크리스티나 가라폴라는 지역 군구도 육군 중심이고 평시 관리에 치우쳤다고 설명한다. 여러 군종을 함께 움직일 지휘체계를 만들려면 육군 관리와 군 전체의 작전지휘가 겹치는 구조를 고쳐야 했다. 개인의 충성이나 처벌 여부로는 해결할 수 없는 조직상의 과제였다.1

시진핑은 이미 2012년에 당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받았다. 그 직위를 얻는 것과 그 아래의 기관을 재편하는 것은 다른 결정이었다.2 2015년 11월 개혁공작회의에서 제시한 해법은 작전지휘와 전력 준비의 경로를 나누는 것이었다. 작전 명령은 군사위원회에서 전구를 거쳐 부대로, 지도·관리는 군사위원회에서 군종을 거쳐 부대로 이어지도록 했다.3

군종은 육군이나 해군처럼 전력의 성격에 따라 나눈 조직이다. 전구는 특정 작전 방향에서 여러 군종을 함께 지휘하는 사령부다. 해군이 함정과 승조원을 준비하는 책임과, 그 전력을 다른 군종과 함께 작전에 투입하는 책임을 구별하는 설계였다. 2016년 개혁 의견은 이를 군사위원회의 총괄, 전구의 작전 주관, 군종의 전력 건설 주관으로 정리했다.4

이 분리를 위해 육군의 자리부터 달라졌다. 2015년 12월 별도 육군 지휘기구가 생겼다. 가라폴라는 육군을 다른 군종과 조직적으로 맞추는 조치로 설명했다. 군 전체의 기관이 육군 본부이기도 했던 구조를 벗어나려는 변화였다.1 2016년 1월 11일 신화사는 네 총부를 군사위원회 산하 15개 기능기관으로 재편하는 작업이 기본적으로 끝났다고 보도했다. 합동참모부와 정치공작부, 후근보장부가 들어섰고 훈련관리·국방동원도 별도 부문으로 놓였다.5

2월 1일에는 옛 일곱 군구의 명칭을 폐지하고 동부·남부·서부·북부·중부의 다섯 전구를 세웠다. 국방부 대변인은 기존 군구의 관련 기능과 조직을 기초로 군종의 지휘·지원 요소를 보강했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군구 두 개를 줄인 변화가 아니었다.6

맡은 일개편이 제시한 기본 경로중간 기관의 역할
작전지휘군사위원회 → 전구 → 부대여러 군종의 합동작전 지휘
지도·관리군사위원회 → 군종 → 부대병력·훈련·장비를 중심으로 전력 건설

이는 발표된 기본 설계이며 핵전력과 모든 전략지원 기능의 실제 명령 관계를 포괄하는 도식은 아니다.34 사람을 조사하고 바꿀 권한에 더해, 그 사람이 맡을 직위의 일 자체를 재배분한 것이 군 개편의 별도 효과였다.

분담을 정해도 조정은 필요했다. 전구는 작전에 필요한 전력을 요구하고 군종은 그 전력을 준비해야 한다. 가라폴라는 초기 다섯 전구 사령관과 정치위원이 여전히 육군 출신이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합동지휘기구의 설치가 곧 군종 간 관점의 균형이나 실전 성과를 보증하지는 않았다.1 개편은 어떤 기관이 일을 맡을지에 관한 답이었다. 그 일을 얼마나 잘했는지는 작전계획과 훈련 결과로 따로 평가해야 한다.

집중된 권한을 나누어 행사하는 방식

기능을 나누는 동시에 감독은 군사위원회에 더 가까이 놓았다. 2016년 1월의 기관 명단에는 기율검사위원회와 정법위원회, 감사서가 각각 들어갔다.5 미국 국방대학교의 조엘 우스노와 필립 손더스는 감독기관이 기존 상급자의 간섭 없이 군사위원회 지도부에 직접 보고할 수 있게 된 점에 주목했다. 기존 총부 책임자로부터 떨어진 감독을 뜻하며 당이나 군사위원회 밖의 독립적인 견제는 아니었다.7

이 보고선의 변경은 기율 개혁과 같은 방향이지만, 작전 권한의 분리와는 구별된다. 감독기관은 지휘관이 어떻게 일했는지를 조사한다. 전구는 군사위원회가 부여한 범위에서 실제 합동작전을 지휘한다. 둘을 모두 ‘군 장악’이라고 부르면, 감시받는 지휘관이 동시에 현장에서 행사해야 할 권한을 놓친다. 중앙의 통제는 중간 기관의 판단을 전부 없애는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구 성립 때의 시진핑 훈령은 각 전구가 부여받은 지휘 권한과 책임을 이행하도록 요구했다.8 중앙군사위원회의 개혁 의견은 주석책임제의 전면 이행도 강조했다. 국가 군사위원회의 주석책임제는 개편 전인 2004년 수정 반영 헌법에도 있던 원리였다. 국가헌법을 당 군사위원회의 내부 규칙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최고책임의 원리 자체를 시진핑이 새로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49

변화는 그 책임을 행사할 조직적 수단에 있었다. 총부의 업무를 여러 기관에 나누면 군사위원회가 직접 조정할 대상도 늘어난다. 우스노와 손더스는 2019년 연구에서 이런 중앙집권이 결정 지연을 낳을 가능성을 경고했다. 최고지도자의 주의력과 커진 조직을 조정하는 부담에 관한 진단이며, 모든 명령이 실제로 느려졌다는 측정은 아니었다.7

군의 작전능력 부족을 고치려는 목적과 시진핑의 통제 수단 강화는 양립한다. 가라폴라는 정치적 충성과 전쟁수행능력의 개선을 함께 목표로 해석했다.1 그 목적을 평가할 때는 군사위원회에 권한이 모였다는 사실만큼 아래에 무엇을 맡겼는지도 봐야 한다. 전구의 합동지휘와 군종의 전력 준비를 빼면 중앙에는 집행할 조직이 남지 않는다.

직위를 물려받는 일, 그 직위에 속한 간부를 조사하는 일, 조직 사이의 작전 권한을 바꾸는 일은 이렇게 나뉜다. 시진핑은 주석직을 받은 뒤에도 별도의 개편으로 그 아래 지휘구조를 바꿨다. 개편이 정한 것은 군사위원회가 총괄하고 전구가 위임받아 지휘하는 배치였다. 이 권한이 특정 개인의 재임 기간을 정해 주지는 않는다. 그 정점에 누구를 얼마나 오래 둘 것인지는 선출과 퇴임 규칙의 몫이었다.

주

  1. 1Cristina L. Garafola, “People’s Liberation Army Reforms and Their Ramifications,” RAND Commentary, 2016-09-23, 조직 개편 및 함의 절. 육군 본부 설치는 2015년 12월이라는 범위로 서술한다. 개편 초기 군종 구성과 조정 문제에 관한 전문가의 분석이며 실전 성과 측정은 아니다. https://www.rand.org/pubs/commentary/2016/09/pla-reforms-and-their-ramifications.html↩
  2. 2중국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 공보, 2012-11-15, 시진핑을 주석으로 하는 당 군사위원회 구성 결정. http://news.xinhuanet.com/18cpcnc/2012-11/15/c_113697156.htm↩
  3. 3신화사·해방군보, 시진핑의 중앙군사위원회 개혁공작회의 연설 보도, 회의 2015-11-24–26, 허난성 고급인민법원 2015-11-27 전재. 작전지휘와 지도관리의 두 계통, 감독기구 재편 계획을 보도한 공개본이다. https://www.hncourt.gov.cn/public/detail.php?id=160881↩
  4. 4중앙군사위원회, 「국방과 군대 개혁 심화에 관한 의견」, 문서 표기 2016-01-01, 제1절 제3항·제2절 제1·3항. 중국 국방부의 2022-08-05 재수록본이며 사건 연도는 2016년이다. http://www.mod.gov.cn/gfbw/qwfb/jwgghbzbgs/4917411.html ; 동시대 공개 보도: 인민일보, 2016-01-02, http://politics.people.com.cn/n1/2016/0102/c1001-28003580.html↩
  5. 5신화사, 시진핑의 중앙군사위원회 각 부문 책임자 접견 보도, 2016-01-11, 인민망 전재. 말미에 네 총부에서 15개 기능기관으로의 재편과 기관 명단을 제시한다. http://cpc.people.com.cn/n1/2016/0111/c64094-28039066.html↩
  6. 6중국신문사, 리춘, 「인민해방군 다섯 전구 성립, 종전 일곱 군구 명칭 폐지」, 2016-02-01. 국방부 대변인 양위쥔의 특별기자회견 답변을 인용한 동시대 보도. https://www.chinanews.com.cn/m/mil/2016/02-01/7743433.shtml↩
  7. 7Joel Wuthnow·Phillip C. Saunders, “Introduction Appendix: Central Military Commission Reforms,” Chairman Xi Remakes the PLA, NDU Press 웹판, 2019-02-08. 감독 경로와 중앙집권의 비용에 관한 후대 연구다. 일부 평가는 2017년 익명 인터뷰에 의존한다. 감사서의 군사위원회 이관은 이 연구에서 2014년으로 설명하므로 2016년 신설로 세지 않는다. https://ndupress.ndu.edu/Media/News/News-Article-View/Article/1752065/introduction-appendix-central-military-commission-reforms/↩
  8. 8신화사, 인민해방군 전구 성립대회와 시진핑 훈령 보도, 2016-02-01, 간쑤성 인민대표대회 사이트 2016-02-02 전재. 군사위원회가 전구에 부여한 지휘 권한과 책임을 명시한다. http://www.gsrdw.gov.cn/html/2016/zhxw_0202/12224.html↩
  9. 9「중화인민공화국 헌법」, 2004년 수정 반영본, 제93조, 미국 의회·행정부 중국위원회 중·영 법문 재현. 국가 군사위원회 조항이며 당 군사위원회 내규를 대신하는 자료는 아니다. https://www.cecc.gov/resources/legal-provisions/chinas-constitution↩

7장. 세 번째 임기를 연 결정들

감독이 지키는 중심

기율검사기관이 가장 먼저 지켜야 할 것은 정치규율이라는 요구가 등장했다. 2016년 10월 27일 당내감독조례는 청렴 여부를 넘어 당중앙의 노선 이행과 정치적 불복종, 파벌 결성을 감독 대상으로 삼았다. 동급 당위원회 주요 지도간부의 문제도 상급 기율위원회에 직접 보고할 수 있도록 했다.1

같은 조례에는 반대 방향의 감독도 적혀 있었다.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정치국을 감독하도록 했다. 기율검사기관 자체도 감독을 받아야 했다. 조사 대상자의 소명과 이의제기 권리 역시 규정했다. 감독 규칙을 강화하면서 최고지도부나 감독관을 법문상 아무 제약도 없는 존재로 선언한 것은 아니었다.1

소명을 듣는 절차와 상급자의 판단을 바꾸는 절차는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 하급 간부의 정치적 불복종을 조사할 권한을 늘리는 동안, 위에 있는 사람을 제약할 조문의 실효성은 별도로 남았다.

2017년 7월 10일 시행한 순시조례 개정은 수호해야 할 중심에 시진핑의 이름을 넣었다. 제3조는 시진핑을 핵심으로 하는 당중앙의 권위와 집중통일 영도를 수호하도록 했다. 시·현급 당위원회의 순찰제도도 규정했다. 감독이 정치적 성격을 처음 얻은 순간은 아니었지만, 중앙의 권위와 특정 지도자를 연결하는 문구가 감독의 목적 안에 들어왔다.2

10월 25일 제19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는 시진핑을 총서기로 다시 선출했다. 시를 주석으로 하는 당 군사위원회 구성도 결정했다. 당직의 두 번째 임기였다. 이 공보는 정치국 상무위원 명단을 발표했지만, 그 가운데 누구를 다음 지도자로 지명한다는 문장은 없었다. 공개된 명단이 후계 구도를 뚜렷하게 보여 주지 않았다는 해석과 비공개 계획 자체가 없었다는 단정은 구별해야 한다.3

국가주석에게 있던 문장을 지우다

당의 정치규율과 군의 명령 체계는 중앙의 권한을 강화하는 문제였다. 그 정점의 개인이 같은 직위를 계속 맡는 문제에는 다른 규칙이 걸려 있었다. 전구에 지휘권을 주고 군사위원회가 이를 총괄하도록 해도 국가주석에게 남은 재임 상한은 없어지지 않는다. 조직 권한의 재배치와 현직자의 계속된 재임은 별도의 결정을 요구했다.

2018년 3월 11일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채택한 개헌 뒤 헌법 제79조에서 ‘연속 재임은 두 임기를 넘을 수 없다’는 문장이 사라졌다. 주석과 부주석의 임기가 전국인민대표대회 임기와 같다는 문장은 남았다. 정해진 기간마다 선출하는 절차를 유지하면서 이어서 맡을 수 있는 횟수의 상한을 지운 것이다.45

삭제의 범위는 분명했다. 국가주석과 국가부주석의 연속 두 임기 제한이었다. 총리와 부총리, 국무위원의 같은 제한은 제87조에 남았다. 국가 군사위원회 주석의 임기를 다루는 제93조에는 원래 국가주석과 같은 두 임기 상한이 없었다. 한 사람이 여러 직위를 겸한다고 해서 한 조문의 변경이 모든 직위의 규칙을 동시에 고치는 것은 아니다.5

당 총서기의 경우에는 이때 없앨 성문 두 임기 상한이 당장에 없었다. 2017년 당장은 중앙위원회의 임기를 5년으로 정했다. 총서기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정치국 상무위원 중에서 선출하도록 했다. 그 선출을 몇 번까지 이어갈 수 있는지는 해당 조문이 제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2018년 개헌으로 총서기 연임 제한을 없앴다’는 설명은 다른 문서의 다른 직위를 합친 것이다.6

그렇다고 개헌의 정치적 의미가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주석 자리에 남은 성문 제한은 당과 군의 직위를 계속 맡는 지도자에게도 국가직에서는 물러나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삭제는 그 차이를 없앴다. 국가의 대표직만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고 겸직을 계속할 법적 길이 열렸다. 권력이 이미 당과 군에 있다고 해서 국가직의 제한이 아무것도 막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개헌은 선거도 파면도 없는 종신직을 새로 만든 조문은 아니었다. 전국인민대표대회의 국가주석·국가 군사위원회 주석 파면권은 제63조에 남았다. 다음 회의가 뽑은 후임자의 취임까지 직권을 행사한다는 제83조도 유지됐다. 법문은 선출과 교체의 가능성을 남겨 뒀다. 동시에 일정 횟수를 채우면 더는 선출될 수 없다는 의무적 퇴장의 조건 하나를 없앴다.5

연임 상한과 파면권의 차이는 그 조건의 무게를 보여 준다. 상한은 현직이 잘했는지, 동료들이 교체를 원하는지와 별개로 다음 선출을 막는다. 파면은 권한을 가진 기관이 실제로 현직을 물러나게 할 결정을 내려야 작동한다. 상한을 삭제한 뒤에도 파면권이 남아 있다는 말은, 사라진 제한을 같은 방식으로 대체했다는 뜻이 아니다.

3월 17일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시진핑을 국가주석과 국가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했다. 두 국가직의 두 번째 임기였다. 이 선출 자체는 개헌 전의 국가주석 상한에도 걸리지 않았다. 삭제한 문장이 실제로 허용하게 된 것은 그다음 재선이었다. 당직의 장기 재임 여부와 국가직의 법적 장애 제거는 서로 연결되지만 별개의 결정이었다.7

통제받는 사람에게 남는 권리

통제의 영향을 지도부 인사에만 한정하면 시민이 보이지 않는다. 상급자가 간부를 감독하는 힘과 시민이 국가의 잘못에 맞서는 힘은 다르다. 집행 목적이나 수단이 권리를 침해한다면 그 효율은 성과로만 기록할 수 없다.

2022년 8월 31일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인권 상황을 평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중국 정부의 반테러·반극단주의 전략 적용 과정에서 심각한 인권침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적어도 2017년부터 2019년까지 위구르족과 다른 무슬림 공동체 구성원들이 대규모로 자의적인 자유 박탈을 겪었다고 평가했다. 모호하고 광범위한 법 개념, 관리의 큰 재량, 부족한 보호장치와 독립 감독을 함께 지적했다.8

보고서의 결론은 단지 정책이 엄격했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자의적이고 차별적인 구금의 규모가 국제범죄, 특히 반인도범죄를 구성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고문과 가혹행위 주장에도 신빙성이 있다고 봤지만 정확한 범위를 확정할 정보에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국제재판소의 유죄 판결은 아니며, 시진핑 개인의 구체적 명령이나 법적 책임을 이 평가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다. 이 구별이 피해의 중대성을 줄이지는 않는다.8

중국 정부는 차별과 억압, 강제노동에 관한 주장을 부인했다. 반테러라는 정부의 목적 설명과 인권최고대표사무소가 판단한 집행 수단의 문제는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다. 어떤 위험을 막으려 했는지 밝히는 것만으로 그 과정의 자유 박탈이 정당했는지까지 답할 수는 없다.9

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자의적 구금자의 석방과 행방 확인, 독립적 조사와 피해자 구제를 권고했다. 이 권고는 통치기관의 감독과 피해자의 구제 사이의 차이를 드러낸다. 간부가 중앙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는지 조사하는 것만으로 피해자의 자유를 되돌릴 수는 없다. 피해자가 국가의 판단 자체를 다툴 수 있는 절차가 필요하다. 권고가 나왔다는 사실은 그런 구제가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10

남은 규칙 아래의 세 번째 선출

지도부 교체에도 법문 밖의 기대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인사 재편 때 67세까지 진입하거나 남을 수 있고 68세 이상은 물러난다는 이른바 칠상팔하 관행이었다. 우궈광은 2022년 3월 분석에서 이 복잡한 은퇴 규범이 공개적으로 발표된 적은 없다고 밝혔다. 관찰된 인사에서 정리한 관행이며 68번째 생일에 자동 퇴직시키는 법률은 아니었다.11

관행은 성문법이 아니어도 기대를 만들 수 있다. 누가 다음 지도부에 남을지를 예상하는 데 쓰이고, 그 기대와 다른 인사가 나왔을 때 설명을 요구하게 한다. 다만 그것이 권력자의 선호에 반하는 퇴장까지 강제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시진핑 이전의 퇴임 관행도 지도자들이 서로를 제약하는 정치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퓨스미스의 비판은 이 한계를 겨냥했다.12

2022년 10월 22일 채택한 당장에는 집단지도와 개인숭배 금지가 여전히 남았다. 제10조는 위원회의 집단지도와 개인별 분담책임을 결합하도록 했다. 중대 사안은 위원회가 토의하고 결정하도록 했다. 모든 형태의 개인숭배도 금지했다. 시진핑이 이 문구들을 모두 지우고 개인 통치를 법문으로 선언했다는 설명은 정확하지 않다.13

제38조의 비종신 원칙도 남았다. 지도간부는 평생 자리를 보장받지 않으며 보직을 바꾸거나 해제할 수 있었다. 나이나 건강 때문에 계속 근무하기 어려우면 퇴직하도록 했다. 같은 사람이 세 번 선출되는 것과 한 번 선출된 뒤 죽을 때까지 교체할 수 없는 것은 법적으로 다른 상태다. 문제는 남아 있는 교체 권한을 누가 어떤 상황에서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느냐였다.13

규칙의 전면 삭제라는 설명을 버려도 장기 재임의 변화는 남는다. 국가직의 연임 상한은 지워졌고, 당 총서기에게는 두 임기를 마친 뒤 다시 선출되는 길이 열려 있었다. 집단지도 조항의 존재만으로 그 길이 막히지는 않았다. 현직 지도자에게 세 번째 임기를 주는 결정과 필요하면 그를 교체할 수 있다는 조문은 모순 없이 공존할 수 있었다.

2022년 10월 23일 제20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는 시진핑을 총서기로 선출했다. 같은 회의가 결정한 당 군사위원회 명단의 주석도 시진핑이었다. 2012년과 2017년에 이어 세 번째 당 임기였으며 국가주석의 재선과는 별도였다.14

현직을 다시 선택할 선출 절차는 작동했다. 일정 횟수 뒤에는 다른 사람을 선택하도록 강제하던 국가직의 조건은 미리 지워져 있었다. 계속 맡길 수 있다는 선택과 끝내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권한 사이의 무게는 이렇게 달라졌다.

주

  1. 1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중국공산당 당내감독조례」, 2016-10-27 채택, 제5·10·26·27·34·44조. 정치규율과 상향 보고, 정치국 및 감독기관의 감독, 소명·이의제기를 함께 규정한다. https://news.12371.cn/2016/11/02/ARTI1478087905680175.shtml↩
  2. 2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중국공산당 순시공작조례 개정 결정」, 결정 표기 2017-07-01, 시행 07-10, 공개 07-14, 개정 제2·3조. https://news.12371.cn/2017/07/14/ARTI1500036902608950.shtml↩
  3. 3중국공산당 제19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 공보, 2017-10-25, 총서기 선출·군사위원회 구성 및 상무위원 명단, 신화사·인민망. http://cpc.people.com.cn/19th/n1/2017/1025/c414305-29608266.html↩
  4. 4전국인민대표대회,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2004년 수정 반영본, 제60·79·93조, 국무원 영문 사이트 2014-08-23 게시. 개정 전 국가주석·부주석의 연속 두 임기 상한. https://english.www.gov.cn/archive/laws_regulations/2014/08/23/content_281474982987458.htm↩
  5. 5전국인민대표대회, 「중화인민공화국 헌법」, 2018-03-11 개정 반영본, 제60·63·79·83·87·93조, 중국정부망 2018-03-22 게시. 횟수 상한의 삭제와 남은 임기·선출·파면 규정을 구별한다. https://www.gov.cn/guoqing/2018-03/22/content_5276318.htm↩
  6. 6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중국공산당 장정」, 2017-10-24, 제22·23조. 중앙위원회의 임기와 총서기 선출을 구별한다. https://www.xinhuanet.com/politics/19cpcnc/2017-10/28/c_1121870794_4.htm↩
  7. 7신화사, 국가주석·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선출 보도, 2018-03-17,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 제5차 전체회의. 최초 선출과 두 번째 선출을 함께 설명한다. https://www.xinhuanet.com/english/2018-03/17/c_137046238.htm↩
  8. 8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 Assessment of human rights concerns in the Xinjiang Uyghur Autonomous Region, People's Republic of China, 2022-08-31, 제143–145·148항. 심각한 인권침해와 국제범죄 가능성에 관한 평가이며 사법기관의 확정 유죄 판결은 아니다. https://www.ohchr.org/sites/default/files/documents/countries/2022-08-31/22-08-31-final-assesment.pdf↩
  9. 9UN News, 신장 인권 평가 발표 보도, 2022-08-31. 중국 정부의 차별·억압·강제노동 주장 부인을 소개한다. https://news.un.org/en/story/2022/08/1125932↩
  10. 10OHCHR, 위 평가 보고서, 2022-08-31, 제151항. 석방·행방 확인·독립 조사·구제는 권고이며 이행 결과가 아니다. https://www.ohchr.org/sites/default/files/documents/countries/2022-08-31/22-08-31-final-assesment.pdf↩
  11. 11Guoguang Wu, “Politics, Norms in Leadership Reorganization toward the 20th Party Congress: Preliminary Observation,” China Leadership Monitor 제71호, 2022-03-01, 은퇴 관행 설명 및 각주 10. 공개 법률이 아닌 인사 관찰에 근거한 규범으로 서술한다. https://www.prcleader.org/post/politics-norms-in-leadership-reorganization-toward-the-20th-party-congress-preliminary-observation↩
  12. 12Joseph Fewsmith, 「CLM Insights: Interview with Joseph Fewsmith」, China Leadership Monitor 제70호, 2021-12-01, 제도화와 은퇴 연령에 관한 답변. 퇴임 기준을 권력투쟁과 연결하는 학자의 해석이다. https://www.prcleader.org/post/clm-insights-interview-with-joseph-fewsmith↩
  13. 13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 「중국공산당 장정」, 2022-10-22, 제10·22·23·38조, 신화사 공식 영문본 2022-10-26 공개. 집단지도·개인숭배 금지·비종신 규정을 보존한다. 전문 연결 페이지 https://english.news.cn/20221026/d7fff914d44f4100b6e586372d4060a4/c.html↩
  14. 14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 공보, 2022-10-23, 총서기 선출과 군사위원회 구성 결정, 신화사·중국정부망. 세 번째 임기는 앞선 두 차례 선출과 연결한 계수다. https://www.gov.cn/xinwen/2022-10/23/content_5720983.htm↩

8장. 정책은 바뀌고 지도자는 남았다

집에 머물 수 있게 된 감염자

시진핑이 2022년 10월 23일 총서기로 다시 선출돼 세 번째 당 임기를 시작한 뒤, 12월 7일 중앙의 방역 지시가 바뀌었다.1 조건을 갖춘 무증상·경증 감염자는 일반적으로 집에서 격리하고, 지역을 이동할 때 핵산검사 음성증명과 건강코드를 확인하지 않도록 했다.2 같은 지도자의 계속된 재임 아래에서도 큰 정책 수정이 가능한지를 보여 주는 사례였다.

이른바 신10조의 발신자는 국무원 코로나19 대응 연합예방통제기제 종합조였다. 통지는 현재의 유행 상황과 바이러스 변이에 맞춰 방역을 더 과학적이고 정밀하게 하겠다고 밝혔다. 정책 전체를 버린다는 선언 대신 ‘추가 최적화’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 제목 아래에서 통제의 범위와 격리 방식이 실제로 달라졌다.2

검사와 격리에는 남겨 둔 조건도 있었다. 행정구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전수 핵산검사는 중단했지만 고위험 업무 종사자와 고위험 지역 주민의 검사는 관련 규정에 따랐다. 노인요양시설과 의료기관, 학교 같은 특수 장소에는 예외가 있었다. 재택격리 중에도 건강 상태를 살피고 정해진 검사 조건을 충족해야 격리를 해제하도록 했다. 12월 7일 모든 방역을 하루에 없앴다고 읽으면 이 구별을 잃는다.2

통지는 소방 통로와 건물 출입구를 막는 행위도 금지했다. 진료와 긴급 대피를 위해 밖으로 나갈 길을 열어 두도록 했다. 검사·격리의 완화는 방역기관 내부의 업무 조정에 그치지 않았다. 시민이 이동하고 치료받을 조건을 바꾸는 결정이었다.2

제한이 줄어들 때 감염에 취약한 사람을 보호하려면 명령 이전의 준비가 필요했다.

완화 명령과 고령층의 준비

신10조는 60~79세의 백신 접종률을 높이고 80세 이상에서는 더 빠르게 끌어올리도록 했다. 우선 접종 통로와 이동 접종차량을 활용하고 의료진에게 접종 금기 판단을 교육하게 했다. 기저질환과 접종 상태를 지역 의료기관이 파악하라는 요구도 따로 뒀다. 제한을 푸는 결정 옆에 고령층의 보호 준비를 서두르라는 지시가 놓였다.2

즈루 덩과 캐런 그레핀은 2024년 연구에서 고령층 접종이 충분히 진척되지 않은 정책적 이유를 분석했다. 공식 기자회견 95건과 정책문서·보도를 살폈다. 연구는 초기 우선순위 설정의 지연, 이념적 안도감, 상명하달 집행의 불일치와 모호한 안내를 설명 요인으로 제시했다. 중앙에서 목표를 정하는 능력과 고령자에게 접종을 실제로 제공하는 능력 사이의 차이를 지적한 연구였다.3

접종 우선순위를 정하는 시점과 의료진의 판단 기준, 지역의 서비스 제공은 서로 다른 문제였다. 명령의 강도를 높이는 것만으로 모두 풀리지는 않는다. 중앙의 목표를 받는 조직에 필요한 정보를 모으고 판단을 조정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연구자들은 정책결정자나 고위 관계자를 면접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공개 문서를 분석한 설명으로 시진핑이 개인적으로 어떤 보고를 무시했는지까지 알아낼 수는 없다. 완화가 낳은 사망의 규모나 원인을 이 연구로 계산할 수도 없다. 그 한계를 남겨도 비평의 질문은 구체적이다. 제한을 줄이는 결정은 언제든 내릴 수 있지만, 그때 필요한 고령층의 보호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3

신10조의 마지막 문단은 새 방침을 집행하는 간부들에게 향했다. 통지는 사고와 행동을 당중앙의 결정에 통일하도록 요구했다. 일률적인 통제나 하급 단위가 제한을 계속 덧붙이는 관행을 바로잡으라고 했다. 지역의 과도한 집행을 교정하는 지시였지만, 그 자체가 최고지도부의 이전 판단을 심사한 결과는 아니었다. 같은 중앙의 권위로 새 방침을 이행하라는 명령이었다.2

바뀐 정책을 설명하는 권력

방침이 달라질 때 정부는 이전 방침과 새 방침의 관계를 설명해야 한다. 단단 류와 공동연구자들은 2025년 논문에서 이 설명의 언어를 분석했다. 2020년 2월부터 2023년 2월까지 중앙정부 기자회견 154건을 대상으로 삼았다. 저자들은 ‘최적화’와 ‘새 단계’라는 표현이 정책 전환을 포기나 실패 인정 대신 적응과 개선으로 제시하는 데 쓰였다고 해석했다.4

이 언어는 두 방침을 같은 권위 아래 놓을 수 있게 한다. 앞선 통제는 당시 상황에 맞는 선택이고, 완화는 달라진 상황에 맞는 선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정책이 바뀌어도 결정을 내리는 주체의 정당성은 유지하는 방식이다. 이런 설명이 언제나 거짓인 것은 아니다. 질병과 의료 환경이 달라지면 적절한 방역도 달라질 수 있다. 다만 적응이라는 설명만으로 잘못된 선택이나 준비 부족을 판별할 수는 없다.

담론 연구가 관찰한 것은 공개된 말이었다. 국민이 정부의 설명을 받아들였는지, 당 내부에서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었는지는 이 분석으로 알 수 없다. 명시적인 실패 인정 없이 전환을 설명했다는 결과를 책임심사 자체의 부재로 넓힐 수는 없다. 내부 심사가 있었을 가능성만으로 책임을 물었다고 평가할 수도 없다.4

책임 추궁에는 잘못된 판단의 특정과 결정권자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 설명에 따라 권한이나 보직을 바꾸는 결정도 가능해야 한다. 새 지침이 나왔다는 사실은 정책 변경을 입증하지만 이 과정까지 입증하지는 않는다.

2023년 3월 10일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시진핑을 국가주석과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했다. 2013년과 2018년에 이은 두 국가직의 세 번째 임기였다. 2022년 10월의 당직 선출과 다른 절차가 이때 마무리됐다. 방역 전환 뒤에도 최고지도자는 재선됐다. 이 결과만으로 재선의 이유 전체를 설명하거나 전환에 관한 모든 내부 평가를 안다고 할 수는 없다.5

공개된 인사 결과에서, 시민에게 적용하는 규칙을 바꾼 뒤에도 같은 지도자는 결정권을 계속 보유했다.

2026년 10월 29일 제20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공보도 시진핑을 총서기로 호명했다. 이 기록은 당시 그가 현직이었다는 근거다. 새로운 임기의 선출을 발표한 문서는 아니다. 2022년의 선출과 그 뒤의 재임을 구별해야 하듯, 당이 미래의 일정을 발표하는 일과 다음 지도부를 실제로 뽑는 일도 구별해야 한다.6

시민에게 신10조는 다음 행동에 관한 규정이었다. 조건을 갖춘 경증 감염자는 집에 머물 수 있었다. 지역을 옮기며 검사증명을 내밀 필요도 줄었다. 소방 통로와 건물 출입구는 열어 두어야 했다.2

주

  1. 1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 공보, 2022-10-23, 총서기 선출과 당 군사위원회 구성 결정. https://www.gov.cn/xinwen/2022-10/23/content_5720983.htm↩
  2. 2국무원 코로나19 대응 연합예방통제기제 종합조, 「코로나19 예방통제 조치의 추가 최적화·이행에 관한 통지」, 2022-12-07, 문서번호 113호, 제1–10항·서두·마지막 문단. 규정의 변경이며 모든 지역의 동일한 집행이나 건강 결과의 실측은 아니다. https://www.gov.cn/xinwen/2022-12/07/content_5730443.htm↩
  3. 3Ziru Deng·Karen A. Grépin, “Achilles’ heel: elderly COVID-19 vaccination policy in China,” Health Research Policy and Systems 22, 90, 2024-08-05, Results·Limitations. 기자회견과 정책문서·보도를 질적으로 분석했으며 정책결정자 면접은 하지 못했다. https://doi.org/10.1186/s12961-024-01155-1 ; 전문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11299290/↩
  4. 4Dandan Liu·Siti Ezaleila Binti Mustafa·Nor Zaliza Binti Sarmiti, “From zero-COVID to global alignment: transnational pressures and China’s pandemic communication transformation,” Globalization and Health 21, 64, 2025-11-04, Research design·“Zero-COVID to optimization semantic bridge”·Methodological Limitations. 공개 기자회견의 언어를 분석한 연구이며 내부 책임심사나 국민 수용도를 직접 관찰하지 않았다. https://doi.org/10.1186/s12992-025-01155-y ; 전문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12584499/↩
  5. 5신화사, “Xi Jinping unanimously elected Chinese president, PRC CMC chairman,” 2023-03-10. 제14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 제3차 전체회의의 선출 기록. 세 번째라는 계수는 2013·2018년의 앞선 국가직 선출과 연결한다. https://english.news.cn/20230310/0fb19441ee4145a588911118edd300a3/c.html↩
  6. 6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공보, 2026-10-29, 신화사·구시 전재. 회의 주재 단락에서 시진핑을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호명한다. 현직 표기와 새 임기 선출을 구별한다. https://www.qstheory.cn/20261029/d7e9f597b4fb417e9b6648b33194b291/c.html↩

결론. 네 번째 임기는 아직 역사 밖에 있다

당의 지속과 지도자의 재임

당이 오래 지배하는 것과 한 지도자가 오래 재임하는 것은 같은 정치적 성과가 아니다. 조직은 지도자를 바꾸면서도 지속될 수 있다. 반대로 같은 지도자가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조직이 다른 사람을 선택할 능력을 잃었다고 확정할 수도 없다. 시진핑에 대한 평가는 통치 수단의 강화와 퇴장 조건의 변경이 어떻게 결합했는지에 달려 있다.

시진핑의 권력을 평가하려면 실제로 바뀐 제약을 특정해야 한다. 사건의 보고와 감독관 인사는 상급 기율 계통으로 더 직접 연결됐다. 군의 기능도 중앙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재배치됐다. 국가주석의 연속 재임 상한은 삭제됐다. 아래를 움직일 제도적 수단이 늘어나는 동안, 현직을 일정한 시점에 물러나게 할 법적 조건 하나는 사라졌다.1

그 결합이 시진핑 개인의 장기 재임에 유리한 권력 배치를 만들었다는 것이 이 비평의 판단이다. 1945년에는 한 사람의 사상을 당의 지침으로 삼고 여러 지도기관의 주석직을 묶었다. 1969년에는 후계자의 이름까지 당장에 넣었지만 그 지명은 실제 승계로 이어지지 않았다.2 두 사례는 권위를 한 사람에게 모으는 결정과 다음 사람에게 넘기는 결정을 따로 평가할 이유를 준다. 시대마다 그 권한을 행사한 제도와 수단은 달랐다.

정책을 고치는 능력도 지도자를 교체할 능력과 구별해야 한다. 1981년 역사결의는 마오 시대에 오류 교정이 중단됐다가 다시 시작된 과정을 회고했다.3 시진핑 아래의 방역 완화 역시 수정이 불가능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4 어느 사례에서도 수정 사실 하나로 결정권자의 책임을 심사한 절차까지 입증할 수는 없다. 부패 억제의 실익이나 군 합동화의 필요를 인정하면서도, 그 일을 지휘하는 사람에게 누가 책임을 묻는지는 남는다.

남아 있는 집단지도와 비종신 조항도 무시할 수 없다. 규칙이 모두 지워진 체제라고 말하면 법문과 어긋난다. 그러나 교체할 수 있다는 문장만으로 교체를 집행할 힘이 증명되지는 않는다. 지도자가 원하지 않는 인사나 책임 판정을 집단기관이 관철한 기록이 나온다면, 개인 권력 집중에 관한 평가는 그만큼 좁혀야 한다.5

당의 통제가 강해졌다는 사실은 시민의 권리가 더 안전해졌다는 증거도 아니다. 간부를 조사하는 기관과 피해자가 국가의 처분을 다투는 절차는 서로 대신할 수 없다. 통치 능력을 성과로 평가할 때에도 무엇을 집행했는지와 그 집행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함께 남는다. 권력을 잘 쓰겠다는 약속은 잘못 썼을 때 책임을 묻는 제도의 대체물이 아니다.

예정된 회의와 미정인 선출

2026년 11월 2일까지의 기준점은 2022년 10월과 2023년 3월 선출에 따른 세 번째 당·국가 임기다.6 2026년 10월 29일 중앙위원회 공보는 제21차 당대회를 2027년 하반기 베이징에서 개최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일정의 결정이다. 당대회가 실제로 열렸다는 기록도, 그 뒤 중앙위원회가 시진핑을 다시 총서기로 선출했다는 공보도 아니다. 네 번째 당 임기가 성립하는지는 그 별도의 인사 결정에서 확인해야 한다.7

국가직은 다시 다른 시계를 따른다. 현행 헌법의 정상적인 5년 주기를 2023년부터 적용하면 다음 국가주석 선출 국면은 2028년이다. 비상상황에 관한 헌법상의 예외도 있으므로 특정 날짜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시진핑이 총서기로 다시 선출된다고 해도 그 사실이 국가주석의 별도 선출을 법적으로 대신하지는 않는다.8

계속 집권할 가능성과 이미 집권했다는 사실 사이에는 실제 결정이 있다. 그 구별을 지키면서도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한 변화는 지금 평가할 수 있다. 다음 공보에서 볼 것은 단지 한 이름의 반복 여부만이 아니다. 다른 이름을 선택할 수 있는 기관이 어떤 권한을 넘기고, 전임자의 권한을 어디서 끝내는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 당이 지도자를 교체할 수 있는지는 결국 그 결정의 집행에서 드러난다.

주

  1. 1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개혁 심화 결정, 2013-11-12, 제36항, https://www.gov.cn/jrzg/2013-11/15/content_2528179.htm ; 중앙군사위원회, 국방·군대 개혁 의견, 2016-01-01, http://www.mod.gov.cn/gfbw/qwfb/jwgghbzbgs/4917411.html ; 국가헌법 2018년 개정 반영본, 제79조, https://www.gov.cn/guoqing/2018-03/22/content_5276318.htm . 이 변화들의 결합에 대한 평가는 저자의 해석이다.↩
  2. 2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 당장, 1945-06-11, 총강·제34조, https://cpc.people.com.cn/GB/64162/64168/64559/4442095.html ; 제9차 전국대표대회, 당장, 1969-04-14, 총강,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ninth_congress2.htm ; 왕훙원, 당장 개정 보고, 1973-08-24 보고·08-28 채택, 린뱌오 문단 삭제,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cons_revision.htm . 1·2장에서 사용한 문서의 비교이며 시대 간 제도의 동일성을 뜻하지 않는다.↩
  3. 3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건국 이래 당의 몇 가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 1981-06-27, 제17항. 루산 이후 오류 교정 중단과 1960년 겨울 이후 조정을 다룬 후대 당 공식 평가.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history/01.htm↩
  4. 4국무원 코로나19 대응 연합예방통제기제 종합조, 방역 조치 추가 최적화 통지, 2022-12-07, 제2·3항. https://www.gov.cn/xinwen/2022-12/07/content_5730443.htm↩
  5. 5중국공산당 제20차 전국대표대회, 당장, 2022-10-22, 제10·38조, 신화사 영문 전문 연결 페이지. https://english.news.cn/20221026/d7fff914d44f4100b6e586372d4060a4/c.html↩
  6. 6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원회의 공보, 2022-10-23, https://www.gov.cn/xinwen/2022-10/23/content_5720983.htm ; 신화사, 국가주석·국가 군사위원회 주석 선출 보도, 2023-03-10, https://english.news.cn/20230310/0fb19441ee4145a588911118edd300a3/c.html . 앞선 두 차례 선출과 연결한 임기 계수다.↩
  7. 7중국공산당 제20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공보, 2026-10-29, 신화사·구시 전재, 제21차 당대회 개최 결정. https://www.qstheory.cn/20261029/d7e9f597b4fb417e9b6648b33194b291/c.html↩
  8. 8전국인민대표대회, 국가헌법 2018년 개정 반영 영문본, 제60·79조, 중국정부망 2019-11-20 게시. 2028년은 정상 주기를 적용한 조건부 전망이며 선출 공고가 아니다. https://english.www.gov.cn/archive/lawsregulations/201911/20/content_WS5ed8856ec6d0b3f0e9499913.html↩

부록. 직위·사료·판단의 범위

직위별 날짜를 읽는 법

중앙위는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인대는 전국인민대표대회를 가리킨다. 군위는 중앙군사위원회의 약칭이며 당과 국가의 기구를 구별한다. 아래 날짜는 공식 직위의 선출·구성 결정이다. 전임자의 비공식 영향력이 끝난 날을 뜻하지 않는다. ‘기’는 동일 직위의 임기 횟수이며 네 직위를 합산하지 않는다.

직위담당 기관·절차재임 규칙의 구별
당 총서기중앙위 전원회의가 상무위원 중 선출중앙위는 5년 임기. 해당 당장 조문에 총서기 연속 두 임기 상한 없음
당 군위 주석중앙위가 군위 구성 결정총서기 선출과 별도 결정. 해당 조문에 연속 두 임기 상한 없음
국가주석전인대가 선출전인대와 같은 임기. 연속 두 임기 상한은 2018년 삭제
국가 군위 주석전인대가 선출전인대와 같은 임기. 제93조에는 국가주석과 같은 횟수 상한 없음

당직 규정은 2002·2012년 당장 제21·22조, 2017·2022년 당장 제22·23조를 구별한다. 국가직은 헌법 제62·79·93조가 기준이다. 선출기관의 존재가 실제 후보 선택의 독립성을 보증하지는 않는다.1

장쩌민에서 후진타오로

직위후진타오가 받은 날결정 기관과 남은 시차
당 총서기2002-11-15제16기 중앙위 1중전회. 장은 당 군위 주석 유임
국가주석2003-03-15제10기 전인대 1차 회의. 장은 국가 군위 주석 재선
당 군위 주석2004-09-19제16기 중앙위 4중전회. 장 사임 승인·후 임명 별도 결정
국가 군위 주석2005-03-13제10기 전인대 3차 회의. 장 사임 수락은 2005-03-08

마지막 행의 닷새는 사임 수락과 후임 선출 사이의 차이다. 그동안의 직무 처리 방식은 해당 결정과 보도에 나와 있지 않다. 2003년 선출은 당시 공고에 근거하며 뒤의 헌법 판본을 소급한 결과가 아니다.2

후진타오에서 시진핑으로

직위시진핑이 받은 날결정 기관
당 총서기2012-11-15제18기 중앙위 1중전회 선출
당 군위 주석2012-11-15같은 전원회의의 군위 구성 결정
국가주석2013-03-14제12기 전인대 1차 회의 선출
국가 군위 주석2013-03-14같은 회의에서 별도 선출

두 당직을 같은 날 넘겼지만 국가직은 다음 해에 넘겼다. 두 군위의 주석을 한 번의 투표로 선출한 것이 아니다.3

시진핑의 두 번째 임기에서 세 번째 임기로

직위두 번째 임기세 번째 임기
당 총서기2017-10-252022-10-23
당 군위 주석2017-10-252022-10-23
국가주석2018-03-172023-03-10
국가 군위 주석2018-03-172023-03-10

당직은 각각 제19·20기 중앙위 1중전회의 선출·구성 결정이다. 국가직은 제13·14기 전인대 1차 회의의 선출이다. 2018년 국가주석 선출은 두 번째였으므로 당시 재선 자체가 개정 전 상한을 넘긴 것은 아니다.4

사료가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법문은 허용·금지된 절차를 보여 준다. 공보는 기관이 발표한 인사 결과를 보여 준다. 두 자료만으로 모든 참석자의 실제 선호나 비공개 거래를 재현할 수는 없다. 판결 보도 역시 판결문과 다르며, 국가가 혐의를 공표한 사실과 그 혐의의 독립 검증을 구별해야 한다.

후대 공식 회고는 과거 사건과 그 사건을 다시 평가하는 권력의 입장을 함께 담는다. 1981년 역사결의가 마오의 책임을 인정하면서 공적의 우위를 보존하는 것이 그 예다. 학술연구도 공개 초록·발췌와 논문 전체의 근거를 구별한다. 각주의 ‘공개 초록’ 표기는 연구자의 결론을 소개한 범위를 뜻하며, 세부 표와 방법을 모두 평가했다는 뜻이 아니다.5

판단을 바꿀 조건

집단기관이 최고지도자의 반대에도 인사나 퇴임 결정을 관철했다는 자료는 개인 권력 집중의 범위를 좁힐 근거가 된다. 상급 보고 규정이 실제로 작동하지 않았다면, 조직 재편의 효과를 조문이 약속한 수준보다 낮게 평가해야 한다. 규정의 존재와 실행은 서로 반증할 수 있는 별도 주장이다.

정책 실패의 원인을 특정하고 최고 결정권자의 책임을 심사한 기록이 나오면 책임 추궁에 관한 판단을 갱신해야 한다. 반대로 정책의 수정만으로 그 심사가 있었다고 추정하지 않는다. 비공개 기록의 부재를 심사 자체의 부재로 바꾸지도 않는다.

2026년 11월 2일을 기준으로 네 번째 임기는 선출 결과가 아니다. 2027년 당대회 개최 결정과 이후 지도부 선출을 구별한다. 2028년 국가 선출은 정상적인 5년 주기에 따른 예상이다. 실제 선출 공보나 일정 변경이 나오면 해당 직위와 일정만 갱신해야 한다.6

주

  1. 1중국공산당, 2002년 당장, https://fuwu.12371.cn/2012/09/27/ARTI1348735605951472.shtml ; 2012년 당장, https://www.gov.cn/jrzg/2012-11/18/content_2269219.htm ; 2017년 당장 제22·23조, https://www.xinhuanet.com/politics/19cpcnc/2017-10/28/c_1121870794_4.htm ; 2022년 당장 전문 연결, https://english.news.cn/20221026/d7fff914d44f4100b6e586372d4060a4/c.html ; 국가헌법 2018년 개정 반영본, https://www.gov.cn/guoqing/2018-03/22/content_5276318.htm↩
  2. 2제16기 중앙위 1중전회 공보, 2002-11-15, 신화망·Sina 재전재, http://news.sina.com.cn/c/2002-11-15/1213808374.html ; 전인대 공고 제2·3호, 2003-03-15, https://www.gov.cn/gongbao/content/2003/content_62025.htm 및 https://www.gov.cn/gongbao/content/2003/content_62026.htm ; 당 군위 사임 승인·구성 변경 결정, 2004-09-19, http://cpc.people.com.cn/GB/64162/64168/64569/65412/4429179.html 및 http://cpc.people.com.cn/GB/64162/64168/64569/65412/6348360.html ; 전인대 사임 수락, 2005-03-08, 정협 재수록, http://www.cppcc.gov.cn/2011/10/25/ARTI1319532318468217.shtml ; 신화망 후 선출 보도, 2005-03-13, Sina 재전재, https://news.sina.cn/sa/2005-03-13/detail-ikkntiam2910813.d.html↩
  3. 3제18기 중앙위 1중전회 공보, 2012-11-15, http://news.xinhuanet.com/18cpcnc/2012-11/15/c_113697156.htm ; 신화사 전인대 선출 보도, 2013-03-14, 공산당원망 재전재, https://www.12371.cn/2013/03/14/ARTI1363261977834356.shtml↩
  4. 4제19기 중앙위 1중전회 공보, 2017-10-25, http://cpc.people.com.cn/19th/n1/2017/1025/c414305-29608266.html ; 신화사 국가직 선출 보도, 2018-03-17, https://www.xinhuanet.com/english/2018-03/17/c_137046238.htm ; 제20기 중앙위 1중전회 공보, 2022-10-23, https://www.gov.cn/xinwen/2022-10/23/content_5720983.htm ; 신화사 국가직 선출 보도, 2023-03-10, https://english.news.cn/20230310/0fb19441ee4145a588911118edd300a3/c.html↩
  5. 5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역사결의, 1981-06-27, 제22·27항, https://www.marxists.org/subject/china/documents/cpc/history/01.htm ; 공개 초록의 사례: Ting Chen·James Kai-sing Kung, 토지시장 반부패 연구, 2019-02, https://ideas.repec.org/a/oup/qjecon/v134y2019i1p185-226..html↩
  6. 6제20기 중앙위 5중전회 공보, 2026-10-29, 구시 전재, https://www.qstheory.cn/20261029/d7e9f597b4fb417e9b6648b33194b291/c.html ; 국가헌법 제60·79조, 2018년 개정 반영 영문본, https://english.www.gov.cn/archive/lawsregulations/201911/20/content_WS5ed8856ec6d0b3f0e94999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