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제갈량은 후한 말 형주(荊州)의 은거 선비였다가 유비(劉備)의 부름을 받아 촉한(蜀漢)을 세우고 이끈 재상이다. 1차 사료를 대조하면 그는 소설 속 신산묘계(神算妙計)의 군사(軍師)보다 법과 장부로 나라를 굴린 행정가에 가깝다. 동시대 편찬자 진수(陳壽)는 그의 재주가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장수의 지략보다 나았다”고 적었다 C80.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대표 장면인 동남풍 빌리기와 화살 모으기는 정사에 근거가 없고 C16, 공성계의 원형은 5세기의 주석가 배송지(裴松之)가 이미 허구로 판정한 전승이다 C81. 널리 쓰이는 생몰일도 사료가 준 값이 아니다. 생년 181년은 사망 나이에서 거꾸로 셈한 것이고 C2, 사망일 ‘8월 28일(234년 10월 8일)’은 청대 사당 지방지에서 비롯한 것으로 추적된다(지방지 원문은 미확인) C36. 한국에서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가장 이른 사서 언급이 12세기 『삼국사기(三國史記)』이고 C83 조선 왕명으로 사당이 섰으며 C97, 오늘날에는 ‘출사표를 던지다’라는 선거 관용구로 살아 있다 C110.
해석 — ‘제갈량’을 삼국 시대 촉한의 승상 제갈량(諸葛亮, 자 공명(孔明))으로 읽는다. 같은 이름을 쓴 다른 사람이나 게임·소설 속 캐릭터 자체는 다루지 않고, 그 수용사만 다룬다.
경계 — 시기는 출생(181, 역산)부터 사후 수용(기준일 2026-09-28)까지다. 깊이를 내는 곳은 생애와 촉한 운영, 정사와 연의의 경계, 한국·일본의 수용이다. 촉한 멸망(263) 이후의 삼국사 일반, 위·오의 내정, 『삼국지연의』의 문학사 전반은 제외했다. 한국어 독자가 제갈량을 주로 만나는 경로가 연의와 출사표이기 때문에 두 갈래를 가려 적는 데 분량을 썼다.
날짜 표기 — 음력 사료 날짜를 원문대로 적고, 서력은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했다(3세기에는 역산 그레고리력보다 하루 이르다). 환산 기준은 중앙연구원 『양천년 중서력 전환(兩千年中西曆轉換)』이다 S1. 본문의 C#은 주장 원장(ax3), S#은 참고문헌(ax9)으로 이어진다.
- 출생
- 181년(광화(光和) 4년, 사망 나이에서 역산) · 낭야(琅邪) 양도(陽都)
- 사망
- 234년 음력 8월(율리우스력 9-11~10-10) · 오장원(五丈原) 군중 · 향년 54(세는나이)
- 이름
- 자(字) 공명(孔明) · 별칭 와룡(臥龍) · 작위 무향후(武鄕侯) · 시호 충무후(忠武侯)
- 묻힌 곳
- 한중(漢中) 정군산(定軍山) · 현 산시성 몐현
생애
낭야에서 융중까지 (181–207)
진수의 본전은 그를 “낭야 양도 사람으로, 한의 사례교위 제갈풍의 후손”(琅邪陽都人也。漢司隸校尉諸葛豐後也)이라 소개한다 C1. 생년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234년 “나이 54”(時年五十四)로 죽었다는 기록을 세는나이로 거꾸로 셈해 181년이 나온다 C2. 진수 자신이 274년의 표문에서 208년의 그를 “나이 스물일곱”이라 적어, 이 역산과 한 살이 어긋난다 C3.
아버지 제갈규(諸葛圭, 통설 표기 ‘珪’)는 한말 태산군승이었고 그는 일찍 아버지를 잃었다 C4. 종부(從父) 제갈현(諸葛玄)을 따라 예장(豫章)으로 갔다가 형주의 유표(劉表)에게 의탁했다. 제갈현이 누구의 임명으로 예장태수가 되었고 어떻게 죽었는지는 본전과 배송지 주가 인용한 『헌제춘추(獻帝春秋)』가 서로 다르다 C5. 일곱 살 위의 형 제갈근(諸葛瑾)은 강동으로 피란해 손권(孫權)을 섬겼고, 훗날 사신으로 촉에 와서도 “공식 자리에서만 만나고 사사로이 만나지 않았다” C6.
제갈현이 죽은 뒤 그는 “몸소 밭을 갈며 「양보음(梁父吟)」을 즐겨 불렀고”, “늘 자신을 관중·악의에 견주었으나 당시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C7. 위(魏) 쪽 사서 『위략(魏略)』은 그가 건안 초 형주에서 벗들과 함께 공부하면서 “세 사람은 정밀함에 힘썼고 량만 홀로 대략을 보았다”고 전한다 C8. 거처 융중(隆中)은 습착치(習鑿齒)의 『한진춘추(漢晉春秋)』에 따르면 “남양 등현에 있는데 양양성 서쪽 20리”다 C9. 출사표의 “남양에서 몸소 밭을 갈았다”는 구절과 이 기록이 훗날 남양·양양 두 도시의 ‘몸소 밭 갈던 곳’ 논쟁을 낳았다(아래 유적 항목 참조) C10. 아내는 면남(沔南)의 명사 황승언(黃承彥)이 “머리는 누렇고 얼굴은 검지만 재주는 짝할 만하다”며 권한 딸이었다. 이름은 사료에 없고 ‘황월영(黃月英)’은 후대의 이름이다 C11.
세 번의 방문과 융중대 (207)
서서(徐庶)가 유비에게 “제갈공명은 와룡입니다…찾아가 만날 수는 있어도 굽혀 불러올 수는 없습니다”라고 권했고, 유비는 “모두 세 번 가서야 만났다”(凡三往,乃見) C12. 본전에는 연도가 없다. 207년이라는 연대는 배송지가 출사표의 “그 뒤로 스물한 해”를 근거로 역산하고, 『자치통감(資治通鑑)』이 이 일을 건안 12년 조에 편년한 데서 온다. 반대 전승도 있다. 『위략』과 『구주춘추(九州春秋)』는 제갈량이 먼저 북쪽으로 가서 유비를 만났고 유비가 그를 처음엔 서생으로 대했다고 쓴다. 배송지는 출사표의 “신을 초려로 세 번 찾아오셨다”를 들어 이를 물리쳤다 C13.
이 자리에서 나온 계책이 ‘융중대(隆中對)’다. 조조와는 “더불어 예봉을 다툴 수 없고”, 손권은 “원군으로 삼되 도모할 수 없으며”, 형주·익주를 차지해 험준함을 지키고 서쪽·남쪽의 이민족을 달래며 손권과 맺은 뒤 천하에 변고가 생기면 두 길로 북진하라는 설계였다 C14. 이에 유비가 한 말 “내게 공명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孤之有孔明,猶魚之有水也)가 성어 수어지교(水魚之交)의 출전이다.
적벽과 형주, 익주 (208–214)
208년 유비가 장판(長阪)에서 패하자 그는 “일이 급하니 명을 받들어 손장군께 구원을 청하겠다”며 시상(柴桑)으로 가서 손권을 설득했다. 손권은 주유(周瑜)·정보(程普)·노숙(魯肅)의 수군 3만을 보냈다 C15. 정사에서 적벽에 대한 그의 몫은 여기까지다. 『삼국지』 오서 주유전의 전투 서술에서 그는 전투 전 손권에게 보내진 사자로 한 번 나오고, 화공은 황개(黃蓋)가 건의했으며, “그때 동남풍이 급했다”는 문장은 배송지 주가 인용한 『강표전(江表傳)』에 있을 뿐 거기에도 제갈량은 나오지 않는다 C16. 동맹을 누가 먼저 발의했는지도 같은 진수의 촉서와 오서가 어긋나며, 배송지가 이를 짚었다.
적벽 뒤 그는 군사중랑장으로 영릉·계양·장사 세 군을 감독해 부세를 거둬 군수를 댔다. 214년 여름 성도가 평정되자 군사장군으로 좌장군부의 일을 맡았다 C17. 이 무렵 관우(關羽)가 새로 항복한 마초(馬超)가 누구와 견줄 만하냐고 묻자 그는 “맹기는 문무를 겸했으나…수염(관우)의 절륜함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답했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그가 쓴 편지가 전재된 가장 이른 사례다 C18.
승상과 탁고 (221–223)
221년 음력 4월 병오일(율리우스력 5월 15일) 유비가 황제에 오르며 그를 승상으로 삼았다 C19. 222년 이릉(夷陵) 패전 뒤 영안(永安)에서 병이 깊어진 유비는 223년 봄 그를 불러 후사를 맡겼다. “그대의 재주는 조비의 열 배이니…만약 뒤를 이을 아들이 보필할 만하면 보필하고, 재주가 없거든 그대가 스스로 취하시오.” 그는 “팔다리의 힘을 다하고 충정의 절개를 바치며 죽음으로 이어가겠다”고 답했다 C20. 이 “스스로 취하라”(君可自取)의 뜻은 당대부터 논쟁거리였다. 진수는 군신 관계의 “지극한 공정함”이라 칭송했고, 동진의 손성(孫盛)은 신하에게 찬탈의 길을 열어 준 “속임수 말”이라 비판했다 C21.
유비가 죽은 날은 사료 자체에 오류가 있다. 선주전은 “4월 계사일”이라 쓰지만 그해 4월에는 계사일이 없다. 제갈량의 표문이 적은 “이달 24일”, 곧 임오일(율리우스력 6월 10일)이 교감을 거친 값이다 C22. 열일곱 살의 후주 유선(劉禪)이 5월에 즉위했고, 그는 무향후에 봉해져 부(府)를 열고 정사를 맡은 뒤 곧 익주목을 겸했다 C23. 『위략』은 유선이 “정치는 제갈씨가 하고 제사는 과인이 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남정 (225)
225년 봄 그는 남중(南中) 네 군의 반란을 치러 나섰다. 후주전은 “3년 봄 3월” 출정과 “12월” 성도 귀환, 본전은 “그해 가을 모두 평정”, 출사표와 『화양국지(華陽國志)』는 “5월 노수(瀘水)를 건넜다”고 쓴다. 정밀도가 다를 뿐 서로 모순되지는 않는다 C24. 맹획(孟獲)을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놓아주었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은 진수 본문에 없다. 배송지 주가 인용한 『한진춘추』와 거의 동시대의 『화양국지』에 각각 나오고, 『자치통감』이 이를 받아 적었다 C25. 평정 뒤 현지 우두머리를 그대로 쓰고 “병사를 남기지 않고 군량을 나르지 않는” 방침을 폈다는 기사는 『자치통감』에서 확인된다 C26.
북벌 다섯 번 (227–234)
227년 그는 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북상하며 출사표를 올렸다. “선제께서 창업하신 지 반도 되지 않아 중도에 붕어하시고, 지금 천하는 셋으로 나뉘었으며 익주는 피폐하니, 이는 참으로 위급존망의 때입니다.” 『삼국지』는 해만, 『자치통감』은 “3월”(3월 1일 = 율리우스력 4월 4일)까지 적는다 C27. 이어진 원정은 다음과 같다.
| 시기 | 원정 | 결과 | 근거 |
|---|---|---|---|
| 228 봄 | 기곡(箕谷)에 조운·등지를 의병으로 두고 본대로 기산(祁山)을 침. 천수·남안·안정 세 군 호응 | 마속(馬謖)이 가정(街亭)에서 지휘를 어기고 장합(張郃)에게 대패. 마속의 최후는 처형·옥사·도망으로 기록이 갈림. 스스로 세 등급 강등을 청해 우장군 행승상사 | C28 C29 |
| 228 겨울(12월) | 산관(散關)을 나가 진창(陳倉) 포위 | 학소(郝昭)가 20여 일 버텨 군량이 떨어져 철수, 추격한 왕쌍(王雙)을 벰 | C30 |
| 229 봄 | 진식(陳式)을 보내 무도(武都)·음평(陰平) 공략 | 두 군 평정, 승상에 복위 | C31 |
| 231 2월–6월 | 다시 기산 포위, 처음으로 목우(木牛)로 군량 운반 | 군량이 떨어져 철수하며 추격한 장합을 활로 쏘아 죽임. 운량 책임자 이엄(李嚴) 폐출 | C32 C33 |
| 234 2월–8월 | 사곡(斜谷)을 나가 무공(武功) 오장원에 주둔, 둔전하며 사마의(司馬懿)와 위수 남쪽에서 100여 일 대치 | 8월 군중에서 병사 | C34 C35 |
가정 전투를 두고 위 명제기는 “봄 정월” 아래에 두지만 그 달에는 뒤이은 기사의 정미일이 없다. 전투의 정확한 날짜는 사료에 없다 C28. 마지막 원정에서 그는 “늘 군량이 이어지지 않는 것을 걱정해 병사를 나누어 둔전했다”. 경작하는 병사가 위수 가 주민과 섞여 살았지만 “백성은 편안했고 군은 사사로이 빼앗지 않았다” C37. 출병 시점은 촉 사료가 봄 2월, 위 사료가 여름 4월로 달라 출발과 도착의 차이일 가능성이 있다 C34. 대치 중 사마의는 그가 싸움을 걸어도 응하지 않았고, 사자에게 그의 식사와 업무량을 물은 뒤 “곧 죽겠다”고 판단했다 C38.
오장원, 그리고 그 뒤
“그해 8월 량이 병들어 군중에서 죽으니 나이 54였다”(其年八月,亮疾病,卒于軍,時年五十四). 234년 음력 8월은 율리우스력 9월 11일부터 10월 10일까지다. 정사와 배송지 주 어디에도 날짜는 없다 C35. 흔히 보이는 ‘8월 28일’(율리우스력 10월 8일)은 청대 허백도인(虛白道人)이 엮은 몐현 사당 지방지 『충무사묘지(忠武祠墓志)』에서 민국 시기 원수산(袁樹珊)을 거쳐 현대 사전으로 이어진 것으로 추적되는 전승이다(지방지 원문은 미확인) C36.
장사(長史) 양의(楊儀)가 군을 정돈해 물러나자 강유(姜維)가 깃발을 돌리고 북을 울리게 했고 사마의는 다가오지 못했다. 백성들 사이에 “죽은 제갈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死諸葛走生仲達)는 말이 돌았고, 사마의는 그의 진영 자리를 둘러보고 “천하의 기재로다”(天下奇才也)라고 했다 C39. 유언대로 그는 정군산에 “산을 따라 봉분을 삼고 무덤은 관이 들어갈 만하게, 평상복으로 염하고 기물은 쓰지 않게” 묻혔다 C40. 후주는 좌중랑장 두경(杜瓊)을 보내 승상 무향후의 인수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무후로 정했다. 시호를 받은 것은 사당이 선 263년이 아니라 죽은 해다 C41. 그는 생전에 “성도에 뽕나무 800그루와 메마른 밭 15경이 있어 자손은 먹고 입기에 넉넉하다”고 표를 올렸는데, 죽고 나니 그 말 그대로였다 C42.
백성들은 사당을 허락받지 못해 절기마다 길가에서 사사로이 제사를 지냈다. 263년 봄 습륭(習隆)·향충(向充)의 표에 따라 조서로 묘 가까이 면양(沔陽)에 사당이 섰다 C43. 같은 해 가을 촉을 치러 온 위의 종회(鍾會)도 그의 사당에 제사하고 묘 둘레에서 꼴 베기와 나무하기를 금했다 C44. 그해 겨울 아들 제갈첨이 면죽(綿竹)에서 등애(鄧艾)를 막다 서른일곱으로 전사했고, 맏손자 제갈상(諸葛尚)도 함께 죽었다 C46. 274년 진수는 진 조정의 명으로 그의 글을 모아 『제갈씨집(諸葛氏集)』 24편, 104,112자를 올렸다 C47.
촉한을 움직인 방식
익주 한 곳의 인구와 물산으로 위와 맞서야 했던 촉한에서, 그의 통치는 세 가지 부품으로 요약된다. 공개된 규칙에 따라 가까운 사람도 벌하는 법, 전쟁을 지탱할 재정과 물류, 그리고 그 물류를 위해 고안한 도구다.
법: 엄격하되 공평하게
진수의 평은 그의 정치를 “성심을 열고 공도를 폈다”(開誠心,布公道)로 요약하고, “형정이 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마음 씀이 공평하고 권계가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러고는 그를 “다스림을 아는 좋은 인재로 관중·소하에 버금간다”고 했다 C48. 같은 시대 위 쪽 인물 원준(袁準)의 『원자(袁子)』도 “법 집행은 엄했으나 나라 사람들이 기꺼이 복종했다”고 적는다 C49.
가장 이름난 두 사례가 이엄(李嚴)과 요립(廖立)이다. 231년 군량 운송을 맡은 이엄은 장마로 운송이 끊기자 회군을 권해 놓고, 군이 물러나자 “군량이 넉넉한데 어찌 돌아오는가” 하며 놀란 척했다. 그는 서인으로 폐해져 재동군으로 옮겨졌다 C33. 조정을 비방한 요립도 서인으로 폐해져 문산군으로 쫓겨났다. 두 사람은 제갈량의 부고를 듣고 각각 병이 나 죽고, “나는 끝내 오랑캐가 되겠구나” 하며 울었다. 동진의 습착치는 이를 두고 “진·한 이래 이런 형벌 운용은 없었다”고 평했다 C50. 반대 방향의 증언도 있다. 공신 법정(法正)이 사적인 원한을 갚으며 사람을 죽여도 그는 법정의 공을 들어 제지하지 않았다 C51. 스스로에게도 같은 잣대를 댔다는 증거가 228년 가정 패전 뒤의 세 등급 강등 요청이다 C28.
그가 신하를 훈계하려 지은 「팔무(八務)」·「칠계(七戒)」·「육공(六恐)」·「오구(五懼)」는 이름만 배송지 주에 남고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오늘날 그의 이름으로 도는 병서 『장원(將苑)』·『편의십육책(便宜十六策)』은 청대 『사고전서총목』이 후대의 위탁서로 판정했다 C52.
재정과 물류: 직백전과 둔전
214년 성도 함락 뒤 유비의 곳간이 비자 유파(劉巴)가 “직백전(直百錢)을 주조해 물가를 고르게 하고 관영 시장을 열자”고 건의했고, 몇 달 만에 부고가 찼다. 액면 ‘직백오수(直百五銖)’는 기존 오수전 100닢 값을 뜻한다고 풀이된다 C53. 이 화폐를 제갈량이 설계했다는 1차 근거는 없다. 같은 주석에서 그는 “장막 안에서 계책을 운용하는 것은 내가 자초(유파)에 한참 못 미친다”고 말한다. 직백전은 그의 사망 전후 무게가 처음의 4분의 1로, 촉 멸망 무렵에는 20분의 1로 줄었다는 서술이 있다(미확인) C54.
북벌의 최대 적은 적군보다 군량이었다. 228년 겨울 진창에서, 231년 기산에서 그는 군량이 떨어져 물러났다. 233년 그는 목우·유마를 만들어 쌀을 사곡 입구에 모았고, 234년에는 병사를 나누어 위수 가에서 둔전해 “오래 주둔할 기반”으로 삼았다 C37.
그가 만들었다고 전하는 것들
진수의 본전은 “천성이 교묘한 궁리에 뛰어나 연노를 가감 개량하고, 목우·유마는 모두 그의 착상에서 나왔다”고 적는다 C55. 아래 표는 그의 이름이 붙은 발명과 기법을, 가장 이른 문헌과 함께 정리한 것이다.
| 이름 | 가장 이른 문헌 | 무엇이 확인되나 | 판정 |
|---|---|---|---|
| 목우(木牛)·유마(流馬) | 『삼국지』 본전·후주전(231 목우, 234 유마), 배송지 주의 「목우유마 만드는 법」 | 운송 도구가 실재했고 치수 설명문이 전한다. 구조는 미확정. 외바퀴 수레설은 북송 고승(高承) 『사물기원(事物紀原)』에서 처음 나오고, 현대에는 수레설과 기계 보행기설이 맞선다 C56 | 확인 존재 · 형태는 논쟁 |
| 연노 ‘원융(元戎)’ | 배송지 주가 인용한 『위씨춘추(魏氏春秋)』 | “쇠화살 8촌, 한 노에 10발이 함께 나갔다.” 본전은 ‘개량’(損益)이라 쓰므로 연노 자체의 발명은 아니다 C57 | 확인 문헌상 · 실물 미확인 |
| 팔진도(八陣圖) | 본전 “병법을 추연해 팔진도를 지었다”, 『수경주(水經注)』 권33, 『진서(晉書)』 환온전·마륭전 | 어복(魚復, 현 펑제) 강변에 돌을 쌓은 진지 유구가 6세기까지 전했고, 서진의 마륭(馬隆)이 팔진도에 의거한 수레로 이겼다 C58 | 확인 진법·유구 전승 |
| 만두(饅頭) | 북송 고승 『사물기원』 권9 | 고승 스스로 “아마 무후에서 비롯한 듯”이라고 추정형으로 썼다 C59 | 미확인 전승 |
| 제갈채(諸葛菜, 순무) | 당 위현(韋絢) 『유빈객가화록(劉賓客嘉話錄)』 | 주둔지마다 병사에게 순무를 심게 했다는 채록. 사후 약 500년 뒤 기록 C60 | 미확인 전승 |
| 공명등(孔明燈) | 전근대 문헌 미발견 | “평양에서 포위되어 신호로 날렸다”는 이야기는 출처 없는 ‘전하는 말’이다 C61 | 미확인 전승 |
정사와 연의 사이
한국어 독자가 아는 제갈량의 상당 부분은 14세기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와 그 번안에서 온다. 연의 장면들의 뿌리를 캐 보면 세 부류로 나뉜다. 다른 사람의 일을 그에게 옮긴 것, 5세기 주석가가 이미 거짓이라 판정한 전승을 되살린 것, 그리고 사서에 근거가 없는 원대 강담·잡극의 장면이다. 판정 전체는 ax2의 표에 있고, 대표 사례만 여기 적는다.
- 다른 사람의 일, 사서 근거 없는 장면 — 짚단 배로 화살을 모았다는 초선차전(草船借箭)의 사서 원형은 213년 유수(濡須)에서 손권이 탄 배가 조조군의 화살을 받아 기울자 반대편으로도 화살을 받아 균형을 잡았다는 『위략』 기사다 C62. 적벽의 동남풍은 자연 조건이었고, 계책은 황개가 냈다 C16.
- 이미 판정된 거짓 — 성문을 열고 거문고를 타 사마의를 물린 공성계(空城計)의 원형은 진나라 초 곽충(郭沖)이 전한 다섯 가지 일 가운데 하나다. 배송지는 “그때 사마의는 형주도독으로 완성(宛城)에 있었다”며 반박하고 “이 책이 끌어온 것은 모두 거짓”이라 판정했다 C81.
- 사서에 없는 새 장면 — 칠성단에서 바람을 비는 장면은 원대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와 잡극을 거쳐 연의 제49회로 들어갔다 C63. ‘세 번 주유를 화나게 했다’는 이야기와 “하늘은 주유를 낳고 어찌 제갈량을 또 낳았는가”는 소설의 창작이다. 주유는 익주 원정을 준비하다 파구(巴丘)에서 병사했다 C64. 칠성등으로 수명을 늘리려다 위연이 등을 꺼뜨렸다는 장면도 사서에 대응하는 기사가 없다 C65.
가장 널리 인용되는 그의 말도 경계선 위에 있다. “몸을 굽혀 힘을 다하고 죽은 뒤에야 그친다”는 「후출사표」에만 있는데, 이 글은 진수의 본전과 『제갈씨집』에 없고 오나라 장엄(張儼)의 『묵기(默記)』에서 습착치의 『한진춘추』를 거쳐 배송지 주로만 전한다. 표 안에 229년에 죽은 조운(趙雲)의 죽음이 적혀 있어 228년 작성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 위작설의 핵심 근거다. 그리고 배송지 주 원문의 자구는 흔히 쓰는 ‘진췌(盡瘁)’가 아니라 ‘진력(盡力)’이다 C66.
평가: 주류 견해와 반대 입장
‘치국의 명재상, 전장의 평범한 장수’라는 기준점
주류 평가의 기준점은 진수다. 그는 두 곳에서 같은 판단을 내렸다. 274년 표문에서는 “군대를 다스리는 데 뛰어나고 기이한 꾀에는 짧았으며, 백성을 다스리는 재간이 장수의 지략보다 나았다”고 했고, 본전 끝의 평에서는 “해마다 군사를 움직였으나 성공하지 못했으니, 대개 임기응변의 장수 지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가”라고 물음형으로 맺었다. 흔히 한 문장처럼 인용되지만 두 문헌에서 나온 말이다 C80. 적국 사람들의 평가도 이 틀과 겹친다. 사마의의 “천하의 기재”, 오나라 장엄의 “중달은 열 배의 땅을 가지고도 스스로 지키기만 했다” C67, 원준의 “근본을 지키는 사람으로, 임기응변은 장점이 아니었다”가 그렇다 C49.
이 평가를 뒤집은 것은 사실이 아니라 정통론이었다. 동진의 습착치가 『한진춘추』에서 촉한을 정통으로 세웠고, 남송의 주희(朱熹)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이를 정착시켰다. 청대 『사고전서총목』은 “주자 이래 모두 습착치를 옳다 하고 진수를 그르다 했다”고 정리한 것으로 인용된다(원문 미대조) C68. 당나라 두보(杜甫)의 「촉상(蜀相)」 “군사를 내어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죽으니”는 그를 ‘뜻을 이루지 못한 충신’으로 굳힌 문학적 원형이다 C69.
맞서는 입장들
- 진수 편향설 — 당대에 편찬된 『진서』 진수전은 진수의 아버지가 마속의 참군이었다가 연좌로 머리를 깎였고 제갈첨이 진수를 경시했으므로, 진수가 그의 장략을 깎아내렸다는 ‘논자들’의 말을 싣는다. 북위의 『위서(魏書)』는 원한의 내용을 진수 자신이 매를 맞은 일로 달리 적는다 C70. 반대로 북위의 최호(崔浩), 청의 조익(趙翼) 등은 진수를 변호했다. 조익은 편향설을 “식견 없는 논의”라 했다 C71.
- 북벌 무익론 — 진나라 초에 이미 “섬길 곳을 잘못 골랐고, 촉의 백성을 피로하게 했으며, 힘은 작은데 꾀는 컸다”는 비판 여론이 있었다 C72. 북위의 최호는 형주를 버리고 파촉으로 물러난 것을 하책이라 하며 그를 관중·소하에 견준 것은 지나치다고 했다 C73. 257년 초주(譙周)의 「구국론(仇國論)」도 흔히 북벌 비판의 전거로 인용되지만, 백과류 서술에 따르면 직접 겨냥한 것은 강유의 해마다의 출병이며 제갈량을 지명하지 않는다(원문 미열람) C74.
- 융중대 설계 결함론 — 현대 중국 사학의 텐위칭(田餘慶, 1989)은 후인들이 제갈량과 융중대를 평하면서 미화와 감싸기가 잦다고 비판했고, 주다웨이(朱大渭)는 손권에게 형주가 반드시 다툴 땅이었음을 융중대가 간과했다고 보았다 C75. 마오쩌둥(毛澤東)도 소순(蘇洵)의 글에 단 메모에서 촉한의 패인을 천 리 떨어진 곳에 병력을 둘로 나눈 융중대에서 찾았다고 전한다 C76.
- 북벌 재해석론 — 요약 자료에 따르면 이중톈(易中天, 2006)은 북벌을 ‘공격으로 수비를 삼는’ 촉한 보전과 내부 결속의 수단으로 읽는다(원서 미확인) C77. 영어권의 레이프 드 크레스피니(Rafe de Crespigny)는 도덕적 정통론의 틀을 걷어 내면 촉한은 세 나라 가운데 가장 약한 나라였다는 전제에서 출발할 것을 권하고, 존 킬리그루(John Killigrew, 1999)는 전략은 경직되었으나 전술은 교묘했다고 평가한 것으로 요약된다 C78.
- 소설 형상 비판 — 루쉰(魯迅)은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에서 연의가 “제갈량의 지혜를 그리려다 요괴에 가까워졌다”고 비판했다 C79.
한국에서의 제갈량
한국에서 제갈량은 세 겹으로 수용되었다. 고려까지는 문인의 전고(典故), 조선에서는 왕이 제사하는 충신의 모범, 근현대에는 소설과 관용구 속 인물이다.
고려까지: 전고로서의 공명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의 『고운집(孤雲集)』에 나오는 ‘촉칭(蜀稱)’을 현대 번역본 각주는 제갈량의 공평무사에 대한 전고로 풀지만, 본문에 이름이 나오지는 않는다 C82. 이름이 직접 나오는 것으로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가장 이른 한국 사서는 1145년 『삼국사기』다. 김부식은 고구려 고국천왕이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한 일을 두고 “촉의 선주가 공명을 대한 것”에 견주었다 C83. 고려 문인 이규보·이제현·이곡의 문집과 정도전의 『삼봉집(三峯集)』에도 그의 이름이 거듭 나온다. 문집 기록에 따르면(원문 미대조) 이제현은 「제갈공명사당(諸葛孔明祠堂)」이라는 시를 남겼다 C84.
조선: 출사표와 연의, 그리고 과거 시험
『조선왕조실록』에서 그는 국방 논의의 모범으로 등장한다. 실록 기사에 따르면(원문 미대조) 1436년 세종 대의 평안도 방어책 논의가 그의 위수 남쪽 둔전을 본보기로 든다 C85. 출사표는 표문의 전범이 되었다. 한국고전종합DB에서 ‘출사표(出師表)’는 1,485건이 나오며, 이른 실록 인용으로 1499년 연산군 대 진강이 꼽힌다. 1787년 『일성록(日省錄)』에는 기생이 출사표를 노래로 부른 기록까지 있다고 한다(원문 미대조) C86.
『삼국지연의』가 한국 문헌에 처음 나오는 것은 1569년(선조 2) 6월 20일 경연이다. 선조가 연의의 장비 일화를 입에 올리자 기대승(奇大升)은 이 책을 “무뢰한 자가 잡스러운 말을 모은 것”이라 비판하며 그런 책이 인쇄까지 되었음을 개탄했다 C87. 2010년 공개된 명종 연간(1552~1560년대 초중반) 금속활자본 권8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판본으로 보고되었다 C88. 한글 번역본과 번안 『적벽가』·『화용도』까지 이본은 200여 종에 이른다 C89.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소개 자료에 따르면 아이들이 삼국 이야기를 들으며 유비가 지면 운다는 소식(蘇軾)의 일화를 들어, 소설이 정사보다 사람을 움직인다고 논했다 C90. 연의의 해석은 과거 시험에까지 들어왔다. 실록 기사에 따르면(원문 미대조) 선조는 1605년 향시에서 “제갈량이 관우를 구하지 않은 일”을 논제로 낸 적이 있다고 회고했다 C91. 『일성록』 기사에 따르면(원문 미대조) 정조는 1795년 춘당대 시험에서 제갈량의 말로 전하는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吾心如稱)를 부제로 냈는데, 이 말의 출전은 『삼국지』 본전이 아니다 C92.
병자호란 이후 그의 형상은 북벌론과 결합했다. 주희의 제갈량 존숭을 매개로 송시열(宋時烈) 등의 시문에서 그는 오랑캐를 치지 못한 한을 품은 충신으로 읽혔다 C93. 숙종은 그가 한나라 회복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했을 뿐이라고 평했다고 행장은 전한다 C94. 이순신은 시에서 “회복을 생각하면 제갈량”(恢復思諸葛)이라 읊었다고 전한다 C95. 이순신의 시호 ‘충무(忠武)’(1643)는 제갈량의 시호와 같은 글자지만, 조선에서 이 시호를 받은 사람은 여럿이고 제갈량을 의도적으로 본떴다는 1차 근거는 찾지 못했다 C96.
사당: 영유 와룡사에서 남산 와룡묘까지
평안도 영유현(永柔縣)의 제갈량 사당은 선조의 명으로 세워졌다. 1725년 영조실록은 이 사당을 “선조조에서 명하여 건립한 것”이라 적는다. 건립 연도는 1603년설과 1605년설이 갈린다 C97. 1667년 현종이 사액했는데, 실록은 그 이름을 ‘포충(褒忠)’, 『국조보감』과 2차 자료는 ‘와룡(臥龍)’으로 적는다 C98. 『국조보감』에 따르면 1695년 숙종이 남송의 악비(岳飛)를 함께 모셨고 C99, 1745년 영조가 승지를 보내 제사하고 1750년 문천상(文天祥)을 배향했다 C100. 세 충신을 모시면서 이름이 ‘삼충사(三忠祠)’가 되었는데, 개칭 연도는 1738년설과 1750년 이후설이 갈린다 C101. 신역 실록 기사에 따르면(원문 미대조) 1786년 정조는 삼충사에 제사하고 비를 세우게 했다 C102.
민간과 문중의 사당도 있었다. 1745년 영조는 처음 남양부의 용백사(龍柏祠)에 제사하려 했다가 격이 높은 영유 와룡사로 바꾸었다. 조선 안에 제갈량 사당이 여럿이었다는 증거다. 용산 둔지미 무후묘, 1903년 곡성의 무후사도 있었다 C103. 서울 남산 예장동의 와룡묘(臥龍廟)는 제갈량을 주신으로 관우·단군·산신을 함께 모시며, 1974년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창건 연대는 불명이다 C104.
현대 한국어 속의 제갈량
20세기 한국의 제갈량은 번역 『삼국지』의 인물이다. 월탄 박종화의 『삼국지』는 한국일보 연재(시작 연도는 1963년설과 1965년설이 갈린다) 뒤 1968년 단행본으로 나왔다 C105. 1988년 이문열 평역 『삼국지』는 출판사 발표로 누적 2,000만 부가 팔려 가장 많이 팔린 판본으로 보도되었고 C106, 2003년 황석영 번역본은 2020년까지 200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보도되었다 C107. 반면 이번에 확인한 3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의 해당 단원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C108.
그의 일화는 한자성어로 사전에 들어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삼고초려(三顧草廬), 읍참마속(泣斬馬謖), 수어지교(水魚之交), 칠종칠금(七縱七擒)이 올라 있다 C109. 가장 크게 뜻이 바뀐 것은 출사표다. 원래 출병하며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 ‘출사표를 던지다’, 곧 경기나 경쟁에 참가 의사를 밝힌다는 관용구가 되었다. 표(表)는 올리는 글이라 ‘던진다’는 어색하다는 규범 비판도 있다 C110. 2026년 6·3 지방선거 보도 제목에서도 출마 선언을 “출사표”로 부른 예가 보인다 C111.
유적과 대중문화
중국의 유적
그를 기리는 곳은 크게 네 군데다. 몐현의 무후사는 263년 조서로 세운 첫 공식 사당이라 ‘천하제일무후사’로 불리며, 1513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고 소개된다 C112. 정군산 아래 무후묘는 1996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가 되었고, 이번 조사에서 발굴 기록은 찾지 못했다 C113. 가장 유명한 성도 무후사는 창건 시기부터 기록이 엇갈린다. 송대 지리서는 성한(成漢)의 이웅(李雄)이 소성(少城) 안에 세웠다 하고, 박물관 공식 설명은 유비의 혜릉(惠陵) 곁 사당을 “대략 남북조 시기”로 적는다 C114. 명 초 촉헌왕 주춘(朱椿)이 무후사를 유비의 소열묘에 합쳤고(1390년설과 1391년설), 1671–72년에 재건되었으며, 1961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1984년 박물관이 되었다 C115. “문 편액엔 크게 소열묘라 썼건만 세상 사람은 모두 무후사라 한다”는 구절이 이 역전을 요약한다 C116. 2025년 관람객은 603만 명이었다 C117.
‘몸소 밭 갈던 곳’을 두고는 허난성 남양과 후베이성 양양이 늦어도 청대부터 다퉈 왔다. 남양은 출사표의 “남양에서 몸소 밭을 갈았다”를, 양양은 『한진춘추』의 “양양성 서쪽 20리 융중”을 든다. 국가는 판정하지 않고 1996년 두 곳을 같은 날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다 C10. 1990년 우표 발행과 2003년 교과서 주석을 둘러싸고 정부가 개입한 일도 있었다 C118.
일본과 동아시아의 대중문화
서지 자료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1689~1692년 고난 분잔(湖南文山)의 『통속삼국지(通俗三国志)』가 첫 번역으로 나왔다 C119.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의 『삼국지』(1939~1943 연재)는 이야기를 제갈량의 죽음으로 끝낸다 C120. 요코야마 미쓰테루(横山光輝)의 만화(1971년 연재 시작, 전 60권) C121와 1985년 12월 발매된 것으로 기록된 코에이(光栄)의 게임 『삼국지』 C122가 그 뒤를 이었다. 게임 시리즈는 2025년 10월 기준 세계 누적 950만 본 이상이 출하되었다(ax8). 영상 자료 목록에 따르면 중국 CCTV의 84부작 『삼국연의』(1994)에서는 탕궈창(唐國強)이 C123, 2010년 95부작 『삼국』에서는 루이(陸毅)가 제갈량을 맡았다 C124. 오우삼(吳宇森) 감독의 『적벽』(2008)에서는 가네시로 다케시(金城武)가 연기했고, 한국에서 개봉일 13만 9천 명으로 중국어권 영화의 개봉일 기록을 세웠다고 보도되었다 C125. 2026년 7월에는 애니메이션 『삼국 제1부: 쟁낙양(爭洛陽)』이 개봉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C126.
ax1 최초 문헌
사람에 대한 ‘최초 문헌’은 세 층으로 나눠 본다. 그 자신의 이름으로 남은 글, 동시대 다른 사람이 그를 적은 기록, 그리고 그를 기리는 일이 처음 문서에 오른 지점이다. 발견·발명의 우선권이라는 층위는 인물 자체에는 해당 없음이다. 사람은 발견되거나 발명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귀속되는 발명품의 우선권은 본문 표에서 다루었다. 아래 어느 것도 전문 사학이 ‘알려진 최초’로 판정한 사례를 찾지 못했으므로 모두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가장 이른 기록으로 표기한다. 검색 범위는 『삼국지』 권3·32·33·35·36·37·39·40·52·54·64와 배송지 주, 『자치통감』 권65·70–72·78, 『화양국지』 권4, 중국어·한국어 발굴·문물 보도다.
| 층위 | 문서 · 연대 | 대목 | 판정 |
|---|---|---|---|
| ① 본인이 쓴 글(서신)이 전재된 가장 이른 사례 | 관우에게 보낸 답서, 214년 무렵(마초 항복 직후) · 『삼국지』 관우전 | “맹기는 문무를 겸했으나…수염의 절륜함에는 미치지 못한다”(孟起兼資文武…猶未及髯之絕倫逸群也) C18 | 연도는 정황 추정 · 원본이 아니라 진수의 전재. 그가 한 말의 기록으로는 207년 융중대 C14와 208년 손권 설득 C15이 더 이르다 |
| ①′ 연도가 명시된 본인 명의 장문 | 출사표, 227년(건흥 5년) | “5년, 제군을 거느리고 북으로 한중에 주둔하며, 출발에 앞서 상소하였다” C27 |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가장 이른 기록 |
| ①″ 그의 글을 모은 책 | 진수 편 『제갈씨집』, 274년 2월 1일 계사(율리우스력 3월 25일) 상표 | “이상 24편, 모두 104,112자” · 목록 첫 편 「개부작목(開府作牧)」 C47 | 책은 전하지 않고 목록과 표문만 『삼국지』에 남음 |
| ② 동시대 외부인의 기록 | 223년 무렵 위의 화흠·왕랑 등이 그에게 보낸 칭번 권유 편지 · 오나라 장엄 『묵기』 「술좌편」(266년 이전) | “량은 끝내 답하지 않고 「정의(正議)」를 지었다” · 장엄은 그와 사마의를 비교 C127 C67 | 둘 다 배송지 주에 인용되어서만 전함 |
| ②′ 생전의 금석문·간독 | — | 촉한 명문 쇠뇌는 251–261년 것뿐이고 그의 이름이 없다 C128 | 미상 · 발굴 보고서 원문은 미열람 |
| ③ 추모의 첫 기록 | 234년 백성의 사사로운 길가 제사 → 263년 봄 면양 입묘 | “백성들이 절기마다 길가에서 사사로이 제사지냈다” · “경요 6년 봄, 조서를 내려 면양에 량의 사당을 세우게 했다” C129 C43 | 공식 사당으로는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가장 이른 기록 |
| ③′ 현존하는 가장 이른 사당 비각 | 몐현 무후사 당 정원 11년(795) 신묘비 · 성도 무후사 원화 4년(809) ‘삼절비’ | 795년 비는 전국 무후사 가운데 가장 이른 묘비로 소개됨 C130 | 보도 기준 · 금석학 도록 미대조 |
ax2 어원과 일화
이름과 호칭
- 성 제갈(諸葛) — 진수 본문은 성의 유래를 말하지 않는다. 배송지 주가 인용한 오나라 위소(韋昭)의 『오서』는 조상이 본래 갈(葛)씨로 낭야 제현(諸縣)에서 양도로 옮겨 왔는데, 양도에 이미 갈씨가 있어 사람들이 이들을 ‘제갈’이라 불렀다고 한다. 같은 주가 인용한 『풍속통(風俗通)』은 진승(陳勝)의 장수 갈영(葛嬰)의 손자가 제현후(諸縣侯)에 봉해져 땅 이름과 성을 합쳤다고 하며, 배송지는 “오서와 다르다”고 적었다. 두 설 모두 본래 성이 ‘갈’이라는 데서는 일치한다 C131.
- 이름 량(亮) · 자 공명(孔明) — ‘공(孔)’은 ‘매우’라는 뜻의 부사, ‘명(明)’은 이름 ‘량(밝다)’과 같은 뜻으로, ‘매우 밝다’는 이름–자 호응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시경』 「칠월」의 “우리 붉은빛 매우 밝다”(我朱孔陽)가 같은 용법의 예로 거론된다. 명명 이유를 적은 사료는 없다 C132.
- 와룡(臥龍) · 복룡(伏龍) — 본전에서는 서서가 “와룡”이라 부르고, 배송지 주의 『양양기(襄陽記)』에서는 사마휘(司馬徽)가 “복룡·봉추”라 한다. 방통전 주의 『양양기』는 와룡·봉추·수경이라는 호칭이 모두 방덕공(龐德公)의 말이라 적는다. 누가 이름 붙였는지는 세 기록이 서로 다르고, 대중적인 ‘와룡·봉추’ 짝은 두 전거가 섞인 것이다 C133.
- 무향후(武鄕侯) — 223년에 받은 작위다 C23. ‘무향’이 어디인지는 두 설이 맞선다. 고향 낭야의 무향 후국으로 보는 설과 한중 남정의 무향곡으로 보는 설이다. 한중의 무향현은 북위 때 처음 설치되어 오히려 그를 기념한 이름일 수 있다는 반론이 있다 C134.
- 충무후(忠武侯) — 234년 후주의 조서로 받은 시호다 C41. 시법에서 ‘충’은 “몸을 위태롭게 하며 윗사람을 받듦”, ‘무’는 “화란을 평정함” 등으로 풀이되나, 조서가 어느 조문을 적용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C135. 후대의 존칭 ‘무후(武侯)’와 ‘무후사’는 무향후와 충무후 가운데 어느 쪽에서 나왔는지 글마다 다르다 C116.
- 한국어 표기 ‘제갈량’ — 외래어 표기법은 중국 인명을 과거인과 현대인으로 나누어 과거인은 종전의 한자음대로 적게 한다 C136. 조선왕조실록 번역문은 ‘제갈양’으로도 적는다 C85.
일화 판정
| 일화 | 판정 | 근거 요지 |
|---|---|---|
| 세 번 찾아가서야 만났다(삼고초려) | 확인 · 반대 전승 있음 | 본전 “모두 세 번 가서야 만났다”. 『위략』·『구주춘추』의 ‘제갈량이 먼저 찾아갔다’는 배송지가 반박 C12 C13 |
| 오나라 선비들과 설전을 벌였다(설전군유) | 미확인 전승 사서 근거 없음 · 설득 자체는 확인 | 정사에는 손권을 설득한 기록만 있고, 배송지는 동맹 구상이 원래 노숙의 것이라 짚었다 C15 C137 |
| 짚단 배로 화살 10만 개를 모았다(초선차전) | 미확인 전승 제갈량 일화로서 · 원형은 손권의 일 | 213년 유수에서 손권의 배가 화살을 받아 균형을 잡은 『위략』 기사가 원형 C62 |
| 칠성단에서 동남풍을 빌렸다 | 미확인 전승 사서 근거 없음 | 정사의 동남풍은 자연 조건. 『삼국지평화』 → 원 잡극 → 연의 제49회 C63 |
| 주유를 세 번 화나게 해 죽게 했다 | 반증됨 | 주유는 익주 원정 준비 중 병사해 사망 경위가 사서와 충돌 C64 |
| 조운에게 비단 주머니 세 개를 주었다(금낭묘계) | 미확인 전승 사서 근거 없음 | 손권 주도의 혼인이었고 주유의 억류 건의를 손권이 받아들이지 않음 C138 |
| 맹획을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놓아주었다 | 통설 · 학자 간 논쟁 | 진수 본문에 없고 동진의 『한진춘추』·『화양국지』에 나옴. 방궈위(方國瑜) 등은 허구, 황청쭝(黃承宗)은 맹씨 대성의 실재를 근거로 긍정 C25 |
| 울며 마속을 베었다(읍참마속) | 확인 눈물 · 최후는 기록 충돌 | 본전 “마속을 죽여 무리에 사과했다”, 마량전 “옥에 갇혀 죽었다”, 향랑전 “마속이 도망쳤다” C29 |
| 성문을 열고 거문고로 사마의를 물렸다(공성계) | 반증됨 | 곽충의 전승을 배송지가 당시 사마의의 위치를 들어 반박 C81 |
| 흰 깃털부채와 갈건 차림(우선윤건) | 통설 · 해석 논쟁 | 동진 배계(裴啟)의 『어림(語林)』이 가장 이른 묘사. 소식의 「적벽회고」 “우선윤건”은 문맥상 주유를 가리킨다는 해석과 맞선다 C139 |
| 큰 별이 오장원에 떨어졌다 | 통설 징조 서사 | 손성의 『진양추(晉陽秋)』(배송지 주)에 붉은 별이 진영에 떨어진 뒤 죽었다고 나옴 C140 |
| 칠성등으로 수명을 늘리려 했다 | 미확인 전승 사서 근거 없음 | 연의 제103회. 정사 사망 기사에 대응 내용 없음 C65 |
| “죽은 제갈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 | 통설 당대 속담의 채록 | 『한진춘추』(배송지 주)의 백성 속담 C39 |
| 못생겼지만 재주 있는 아내 ‘황월영’ | 확인 추녀 기사 · 이름은 미확인 전승 | 『양양기』의 황승언 발언. 이름은 사료에 없음 C11 |
| “몸을 굽혀 온 힘을 다하고 죽은 뒤에야 그친다” | 미확인 전승 친작 여부 · 자구도 이문 | 「후출사표」에만 있고 진위 논쟁 중. 원형 자구는 ‘진력(盡力)’ C66 |
| 「계자서(誡子書)」를 임종 때 여덟 살 제갈첨에게 썼다 | 미확인 전승 연대 | 정사에 없고 당대 『예문유취(藝文類聚)』에 처음 보임. 양자 제갈교에게 썼다는 설도 있음 C141 |
ax3 주장 팩트체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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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장 | 상태 | 근거(출처·원문 조각) | 독립 교차확인 | 비고 |
|---|---|---|---|---|---|
| C1 | 본관 낭야 양도, 전한 사례교위 제갈풍의 후손 | 부분 확인 | S2 “낭야 양도 사람이다. 한 사례교위 제갈풍의 후손이다”(琅邪陽都人也。漢司隸校尉諸葛豐後也) | S3 형 제갈근도 “낭야 양도 사람” | 양도의 현대 지명 비정은 미검증 |
| C2 | 생년 181년은 사망 나이 54에서 세는나이로 역산한 값이며, 생일은 1차 사료에 없음 | 확인 | S2 “그해 8월…군중에서 죽으니 나이 54였다”(其年八月…卒于軍,時年五十四) | S4 원수산 인용 “연보도 광화 4년 신유생이라고만 적는다”(年譜亦僅載漢靈帝光和四年辛酉生) | 생일 7-23설(명인생일표)·4-14설(난계 족보)은 서로 다르고 1차 근거 없음 |
| C3 | 진수의 274년 표문은 208년의 그를 “나이 스물일곱”이라 적어 181년 역산과 한 살 어긋남 | 상충 | S2 표문 “량이 그때 나이 스물일곱으로…몸소 손권에게 사신 가서”(亮時年二十七…身使孫權) | 같은 권 본전의 “나이 54”(時年五十四, 역산 181 → 208년 28세) | 만 나이·207년 기준·오기 세 해석 가능. 노필 『삼국지집해』 주석 미열람 |
| C4 | 아버지는 한말 태산군승. 이름은 저본 ‘규(圭)’, 통설 ‘규(珪)’ | 부분 확인 | S2 “아버지 규는 자가 군공이며 한말에 태산군승이 되었다”(父圭,字君貢,漢末為太山郡丞) | 없음(중화서국 점교본 미대조) | ‘규(珪)’ 표기는 통설로만 확인, 그 표기를 쓰는 출처는 미확인. 이체자 또는 판본 차이 |
| C5 | 종부 제갈현의 예장태수 임명 주체와 최후가 본전과 『헌제춘추』에서 다름 | 상충 | S2 본전 “종부 현이 원술이 임명한 예장태수가 되자”(從父玄為袁術所署豫章太守) | 같은 쪽 배송지 주 인용 『헌제춘추』 “건안 2년 정월 서성 백성이 반란하여 현을 죽이고”(建安二年正月,西城民反,殺玄) · 배송지 “본전과 같지 않다”(與本傳不同) | 본전 원문은 ‘숙부’가 아니라 ‘종부’ |
| C6 | 형 제갈근은 손권을 섬겼고 241년 68세로 사망(역산 174년생), 사신으로 와서도 아우와 사적으로 만나지 않음 | 부분 확인 | S3 “아우 량과 공식 모임에서 만났을 뿐 물러나서는 사사로이 만나지 않았다”(與其弟亮俱公會相見,退無私面) | S3 배송지 주 『강표전』 “아우가 머물지 않는 것은 내가 가지 않는 것과 같다”(弟之不留,猶瑾之不往也) | 174년생은 역산값. ‘일곱 살 위’도 역산 |
| C7 | 제갈현 사후 몸소 농사지으며 「양보음」을 즐겨 불렀고 스스로를 관중·악의에 견줌 | 확인 | S2 “몸소 밭을 갈며 양보음을 즐겨 불렀다”(躬畊隴畝,好為梁父吟) · “늘 스스로를 관중·악의에 견주었다”(每自比於管仲、樂毅) | S5 권65 “늘 스스로를 관중·악의에 견주었다”(每自比管仲、樂毅) | 저본 표기 ‘경(畊)’(‘경(耕)’의 이체자) |
| C8 | 『위략』: 건안 초 형주에서 벗들과 유학, “홀로 대략을 보았다” | 부분 확인 | S2 배송지 주 인용 『위략』 “세 사람은 정밀함에 힘썼고 량만 홀로 대략을 보았다”(三人務於精熟,而亮獨觀其大略) | 없음 | 『위략』 성립 연대 미확인 |
| C9 | 융중은 남양군 등현, 양양성 서쪽 20리(『한진춘추』) | 부분 확인 | S2 배송지 주 인용 『한진춘추』 “량의 집은 남양 등현에 있었는데 양양성 서쪽 20리로, 융중이라 불렀다”(亮家于南陽之鄧縣,在襄陽城西二十里,號曰隆中) | 같은 권 출사표 “신은 본래 포의로 남양에서 몸소 밭을 갈았습니다”(臣本布衣,躬耕於南陽) | 기록 자체의 확인. 소재지 논쟁은 C10 |
| C10 | 남양·양양의 ‘몸소 밭 갈던 곳’ 논쟁은 늦어도 청대부터이며, 1996-11-20 두 곳이 같은 날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 | 부분 확인 | S6 대립 논거와 “늦어도 청대”(至晚在清代) · S7 제4차 목록: 양양 고융중 4-0149-3-071, 남양 무후사 4-0122-3-044 | S8 중국신문망 2010-05-25 “명대 소송이 황제를 놀라게 했다”(발췌) | 명대 소송설은 제목 발췌만 |
| C11 | 아내는 황승언의 딸로 “머리는 누렇고 얼굴은 검지만 재주는 짝할 만”했으며, 이름은 사료에 없음(‘황월영’은 후대) | 확인 | S2 배송지 주 인용 『양양기』 “못생긴 딸이 있는데 머리가 누렇고 얼굴이 검지만 재주는 짝할 만합니다”(身有醜女,黃頭黑色,而才堪相配) | S9 인민망 쓰촨 2021-02-01: 민간 전승 이름 황월영·황수·황석(발췌) | 평서 기원설은 ‘혹은’이 붙은 추정 |
| C12 | 서서가 “와룡”이라 추천, 유비가 “모두 세 번 가서야 만났다”. 207년은 배송지 역산과 『통감』 편년에서 나온 값 | 부분 확인 | S2 “선주가 마침내 량을 찾아갔는데, 모두 세 번 가서야 만났다”(由是先主遂詣亮,凡三往,乃見) · 배송지 “유비가 량을 처음 만난 것은 패전 한 해 전이다”(備始與亮相遇,在敗軍之前一年時也) | S5 권65 건안 12년 조 “세 번 가서야 만났다”(凡三往,乃見) | 본전·배송지 주에 ‘건안 12년’ 글자는 없음. 선주전 해당 조에도 기사 없음 |
| C13 | 『위략』·『구주춘추』는 제갈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갔다고 쓰고, 배송지가 출사표를 근거로 반박 | 상충 | S2 『위략』 “량이 이에 북으로 가서 유비를 만났는데…서생으로 대했다”(亮乃北行見備…以諸生意待之) | 같은 쪽 배송지 “그렇다면 량이 먼저 유비를 찾아간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則非亮先詣備,明矣) | 배송지가 판정한 상충 |
| C14 | 융중대 요지: 조조와 다투지 말고 손권과 맺으며 형주·익주를 차지해 변고 때 북진. 유비의 ‘물고기와 물’ 비유 | 확인 | S2 “만약 형주·익주를 걸터앉아 그 험준함을 지키고”(若跨有荊、益,保其巖阻) · “내게 공명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孤之有孔明,猶魚之有水也) | S5 권65 같은 대화 수록 | 『통감』은 『삼국지』를 저본으로 한 후대 편찬이라 독립성은 약함 |
| C15 | 208년 시상으로 가서 손권을 설득, 손권이 주유·정보·노숙의 수군 3만을 보냄 | 확인 | S2 “일이 급합니다. 명을 받들어 손장군께 구원을 청하겠습니다”(事急矣,請奉命求救於孫將軍) · “즉시 주유·정보·노숙 등 수군 3만을 보냈다”(即遣周瑜、程普、魯肅等水軍三萬) | S5 권65 “량이 시상에서 손권을 만났다”(亮見權於柴桑) | 본전 대목에는 연도가 없음 |
| C16 | 적벽 전투 서술에서 제갈량은 사신으로만 나오고 화공은 황개의 건의, 동남풍은 『강표전』의 자연 조건 서술이며 거기에도 제갈량은 없음 | 확인 | S10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냈다”(遣諸葛亮詣權) · 황개 “불태워 달아나게 할 수 있습니다”(可燒而走也) · 『강표전』 “그때 동남풍이 급했다”(時東南風急) | S10 노숙전 배송지 주: 동맹은 “모두 노숙의 본래 계책”(皆肅之本謀)이라며 촉서와 어긋남을 지적 | 동맹 발의자는 촉서와 오서가 충돌 |
| C17 | 적벽 뒤 군사중랑장으로 세 군 감독, 214년 여름 성도 평정 후 군사장군·좌장군부 서리 | 부분 확인 | S2 “성도가 평정되자 량을 군사장군으로 삼아 좌장군부의 일을 맡겼다”(成都平,以亮為軍師將軍,署左將軍府事) | S11 “19년 여름…성도를 수십 일 포위하니 유장이 나와 항복했다”(十九年夏…璋出降) | 같은 『삼국지』 안의 두 권 |
| C18 | 관우에게 보낸 답서(마초 항복 직후, 214년 무렵)가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그가 쓴 서신이 전재된 가장 이른 사례 | 부분 확인 | S12 “맹기는 문무를 겸했으나…수염의 절륜함에는 미치지 못한다”(孟起兼資文武…猶未及髯之絕倫逸群也) | 없음(연도는 마초의 입촉 시점에서 추정) | 원본 아닌 진수의 전재 |
| C19 | 221년 음력 4월 병오일(율리우스력 5-15) 유비 즉위, 같은 달 승상 임명, 녹상서사·가절 | 확인 | S11 고천문 “건안 26년 4월 병오”(惟建安二十六年四月丙午) · “제갈량을 승상으로 삼았다”(以諸葛亮為丞相) · S2 “량은 승상으로 녹상서사하고 가절을 받았다”(亮以丞相錄尚書事,假節) | 환산 S1 + 일간지 계산 일치 | 승상 임명은 ‘여름 4월’까지만 |
| C20 | 223년 봄 영안에서 탁고: “재주가 없거든 그대가 스스로 취하라”와 그의 답 | 확인 | S2 “만약 뒤를 이을 아들이 보필할 만하면 보필하고, 재주가 없거든 그대가 스스로 취하시오”(若嗣子可輔,輔之;如其不才,君可自取) | S5 권70 같은 문구 · S11 “봄 2월 승상 량이 성도에서 영안에 이르렀다” | |
| C21 | ‘스스로 취하라’를 진수는 군신의 지극한 공정함으로, 손성은 속임수 말로 평가 | 상충 | S11 진수 평 “참으로 군신의 지극한 공정함”(誠君臣之至公) | S2 배송지 주 손성 “속임수 말이지 고아를 부탁하는 말이 아니다”(詭偽之辭,非託孤之謂) | 해석 대립. 왕부지 등 후대 해석은 미열람 |
| C22 | 유비 사망일 ‘4월 계사’는 그달에 없는 날이며, 교감값은 4월 24일 임오 = 율리우스력 223-06-10 | 상충 | S11 “여름 4월 계사일 선주가 영안궁에서 죽었다”(夏四月癸巳,先主殂於永安宮) | S5 권70 위키문헌 교감본 편자의 주 “4월은 기미가 초하루여서 계사가 없다”(四月己未朔,無癸巳) · 환산 S1 | 같은 주는 “계사는 시호를 올린 날인 듯”(癸巳疑是上謚號之日)이라는 해석도 제시 |
| C23 | 223년 무향후에 봉해져 부를 열고 정사를 맡았으며 곧 익주목 겸임. 후주 17세 즉위 | 부분 확인 | S2 “건흥 원년 량을 무향후에 봉하고 부를 열어 일을 다스리게 했다”(建興元年,封亮武鄉侯,開府治事) | S13 “5월 후주가 성도에서 자리를 이으니 나이 17이었다” · 배송지 주 『위략』 “정치는 갈씨가, 제사는 과인이”(政由葛氏,祭則寡人) | 같은 『삼국지』 안 |
| C24 | 225년 남정: 3월 출정·가을 평정·12월 귀환·5월 노수 도하. 정밀도 차이일 뿐 모순 없음 | 확인 | S13 “3년 봄 3월 승상 량이 남쪽 네 군을 쳐서 모두 평정했다…12월 량이 성도로 돌아왔다” | S14 권4 “여름 5월 량이 노수를 건넜다”(夏五月,亮渡瀘) | |
| C25 | 칠종칠금은 진수 본문에 없고 『한진춘추』와 『화양국지』에 나오며, 실재 여부는 학자 간 논쟁 | 상충 | S2 배송지 주 『한진춘추』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사로잡았다”(七縱七禽) · S14 “모두 일곱 번 사로잡고 일곱 번 풀어 주었다”(凡七虜、七赦) | S15 방궈위·장화란·탄량샤오 부정, 황청쭝 긍정(발췌) | 두 동진 문헌의 선후는 단정 불가 |
| C26 | 평정 뒤 현지 우두머리를 기용하고 병사를 남기지 않고 군량을 나르지 않는 방침 | 부분 확인 | S5 권70 “이제 나는 병사를 남기지 않고 군량을 나르지 않으면서도 기강이 대략 정해지게 하려 한다”(今吾欲使不留兵,不運糧,而綱紀粗定) | 없음(원 출처 배송지 주 미대조) | “량의 생전에 오랑캐가 다시 반란하지 않았다”는 평가는 남이 유주의 반란 기록과 충돌한다는 지적 있음 |
| C27 | 출사표는 227년 한중 북상 직전의 상소(『통감』 3월, 3월 1일 = 율리우스력 04-04) | 확인 | S2 “5년, 제군을 거느리고 북으로 한중에 주둔하며, 출발에 앞서 상소하였다”(五年,率諸軍北駐漢中,臨發,上疏曰) | S5 권70 “3월…승상 량이 제군을 거느리고 북으로 한중에 주둔했다” · S13 “5년 봄 승상 량이 한중에 나가 주둔했다” | 환산 S1 |
| C28 | 228년 봄 1차 북벌: 기산 공격, 가정 패전, 스스로 세 등급 강등. 가정 전투 날짜는 사료에 없음 | 부분 확인 | S2 “마속이 량의 지휘를 어기고…장합에게 크게 패했다”(謖違亮節度…大為張郃所破) · “스스로 세 등급을 깎기를 청합니다”(請自貶三等) | S16 명제기 “장합이 가정에서 량을 쳐서 크게 깨뜨렸다”(張郃擊亮於街亭,大破之) | 명제기는 ‘봄 정월’ 아래 두나 그달에 정미일이 없음 |
| C29 | 마속의 최후가 정사 안에서 처형·옥사·도망으로 갈림. 제갈량이 눈물 흘린 것은 기록됨 | 상충 | S2 본전 “마속을 죽여 무리에 사과했다”(戮謖以謝眾) · S17 마량전 “마속은 옥에 갇혀 죽었고 량은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謖下獄物故,亮為之流涕) | S18 향랑전 “마속이 도망쳤는데 향랑이 알고도 알리지 않았다”(謖逃亡,朗知情不舉) | 연의 제96회 ‘휘루참마속’은 본전 계열 |
| C30 | 228년 12월(12월 1일 = 율리우스력 229-01-13) 진창 포위, 20여 일 만에 군량이 떨어져 철수, 왕쌍을 벰 | 확인 | S2 “겨울에 량이 다시 산관을 나와 진창을 포위했으나…군량이 떨어져 돌아왔다”(糧盡而還) | S16 “12월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다” · S5 권71 “밤낮으로 20여 일을 공방했다” | 환산 S1 |
| C31 | 229년 봄 진식을 보내 무도·음평 평정, 승상 복위 | 확인 | S13 “7년 봄 량이 진식을 보내 무도·음평을 쳐서 두 군을 평정했다” | S2 “이제 그대를 다시 승상으로 삼으니 사양하지 마시오”(今復君丞相,君其勿辭) · S5 권71 | |
| C32 | 231년 2월 기산 포위, 처음 목우로 운송, 6월 군량이 떨어져 철수하며 장합을 사살 | 확인 | S13 “9년 봄 2월 량이 다시 군을 내어 기산을 포위하고 처음으로 목우로 날랐다…장합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 | S16 명제기는 ‘3월…천수를 침입’으로 적음 · S5 권72 “날아온 화살이 장합의 오른 무릎에 맞았다” | 촉 2월 vs 위 3월, 장합 전사지 청봉 vs 목문 |
| C33 | 231년 이엄(이평)이 군량 운송 실패를 속이려다 서인으로 폐해져 재동군으로 옮겨짐 | 확인 | S19 “평은 군이 물러났다는 말을 듣자 짐짓 놀란 체하며 ‘군량이 넉넉한데 어찌 곧 돌아오는가’라고 했다” · “이에 평을 폐해 서인으로 삼고 재동군으로 옮겼다”(乃廢平為民,徙梓潼郡) | S13 “가을 8월 도호 이엄을 폐해 재동군으로 옮겼다” · S5 권72 | |
| C34 | 234년 출병 시점: 촉 사료 봄 2월, 위 명제기 여름 4월. 오장원에 주둔해 위수 남쪽에서 사마의와 100여 일 대치 | 상충 | S13 “12년 봄 2월 량이 사곡을 거쳐 나왔고 처음으로 유마로 날랐다” · S2 “무공 오장원에 자리 잡고…서로 100여 일 버텼다”(相持百餘日) | S16 “여름 4월…이달에 제갈량이 사곡을 나와 위수 남쪽에 주둔했다” · S5 권72 “대군 10만” | 출발과 도착의 차이일 가능성 [추정] |
| C35 | 234년 음력 8월 군중에서 병사(율리우스력 09-11~10-10). 1차 사료에 날짜는 없음 | 확인 | S2 “그해 8월 량이 병들어 군중에서 죽었다”(其年八月,亮疾病,卒于軍) · S13 “가을 8월 량이 위수 가에서 죽었다” | S5 권72 “이달 량이 군중에서 죽었다”(是月,亮卒於軍中) · 환산 S1 | 배송지 주 『위서』의 ‘피를 토하고 퇴각 중 병사’는 배송지가 부정 |
| C36 | 통용 사망일 ‘8월 28일(율리우스력 234-10-08)’은 청대 『충무사묘지』 → 민국 원수산 → 현대 사전 경로의 전승 | 미확인 | S4 원수산 “촉지는 죽은 해와 달만 실었다…허백도인이 엮은 충무사묘지만이 유독 자세하여…8월 28일”(蜀志僅載卒之年月…謂侯卒於建興十二年甲寅秋八月二十八日) | 환산 S1: 8/28 = 234-10-08 경진, 원수산의 “28일 경진”과 일치 | 『충무사묘지』 원문은 접근 차단으로 미열람 |
| C37 | 233년 목우·유마로 쌀을 사곡 입구에 모으고 234년 병사를 나누어 둔전, 백성이 편안했음 | 확인 | S2 “병사를 나누어 둔전하여 오래 주둔할 기반으로 삼았다”(分兵屯田,為久駐之基) · “밭 가는 자가 위수 가 주민 사이에 섞였으나 백성은 편안했고 군은 사사로이 빼앗지 않았다” | S5 권72 233년 조 “목우·유마를 만들어 쌀을 사곡 입구에 모았다” | |
| C38 | 대치 중 사마의가 싸움에 응하지 않고, 사자에게 식사와 업무량을 물어 “곧 죽겠다”고 판단 | 부분 확인 | S2 배송지 주 『위씨춘추』 “벌 20 이상은 모두 몸소 살피고, 먹는 것은 몇 되가 안 된다”(罰二十以上,皆親攬焉;所啖食不至數升) → “량은 곧 죽겠구나”(亮將死矣) | S5 권72 “제갈공명은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번잡하니 오래 가겠는가”(食少事煩,其能久乎) · S16 “량이 여러 번 싸움을 걸었으나 선왕은 굳게 지키며 응하지 않았다” | ‘식소사번’ 자구는 배송지 주 판본에 없음 |
| C39 | 사후 양의가 철군, 강유의 반격 시늉에 사마의가 물러남. “죽은 제갈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는 속담과 사마의의 “천하의 기재” 평 | 확인 | S2 본문 “선왕이 영루 자리를 살피고 ‘천하의 기재로다!’ 했다”(天下奇才也) · 배송지 주 『한진춘추』 “강유가 양의에게 깃발을 돌리고 북을 울리게 했다”(姜維令儀反旗鳴鼓) · “죽은 제갈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死諸葛走生仲達) | S5 권72 같은 일화 수록 | 속담 자체는 당대 채록이라 ‘통설’로 판정(ax2) |
| C40 | 유언에 따라 정군산에 산을 봉분 삼아 관만 들어가게 박장 | 부분 확인 | S2 “산을 따라 봉분을 삼고 무덤은 관을 넣을 만하게 하며, 평상시 옷으로 염하고 기물은 쓰지 말라”(因山為墳,塚足容棺,斂以時服,不須器物) | S7 무후묘 항목(현 몐현 정군산 아래) | |
| C41 | 시호 충무후는 234년 후주의 조서로 받음(263년이 아님) | 확인 | S2 “사지절 좌중랑장 두경을 보내 그대에게 승상 무향후 인수를 추증하고, 그대의 시호를 충무후로 한다”(謚君為忠武侯) | S20 “시호는 충무(忠武)” | 조서 날짜는 없음 |
| C42 | 성도의 뽕나무 800그루·밭 15경 외 재산을 남기지 않겠다고 했고 죽고 나니 그대로였음 | 부분 확인 | S2 “성도에 뽕나무 800그루와 메마른 밭 15경이 있으니 자제의 의식은 절로 넉넉합니다”(成都有桑八百株,薄田十五頃) · “죽자 그 말과 같았다”(及卒,如其所言) | 없음 | |
| C43 | 263년 봄 습륭·향충의 표에 따라 조서로 면양에 첫 공식 사당 | 확인 | S2 “경요 6년 봄, 조서를 내려 면양에 량의 사당을 세우게 했다”(景耀六年春,詔為亮立廟於沔陽) · 배송지 주 『양양기』 “그 묘 가까이 면양에 세워야 한다” | S21 산시성 도서관 자료(향충을 ‘向允’으로 표기) | |
| C44 | 263년 가을 위의 종회가 사당에 제사하고 묘 둘레의 꼴 베기·나무하기 금지 | 확인 | S2 “량의 사당에 제사하고, 군사들에게 량의 묘 좌우에서 꼴 베고 방목하고 나무하지 못하게 했다” | S22 화시두시바오 2023-12-18 | |
| C45 | 아들이 없던 시절 형 제갈근의 둘째 아들 제갈교를 후사로 들임. 25세 사망, 사망 연도는 교감 이문(원년 → 6년) | 부분 확인 | S2 부전 “처음에 량에게 아들이 없어 교를 후사로 구했다”(初,亮未有子,求喬為嗣) · “나이 25, 건흥 6년에 죽었다”(年二十五,建興六年卒) | 없음 | 저본의 ‘원년’을 교감본이 ‘6년’으로 고침 |
| C46 | 아들 제갈첨이 263년 겨울 면죽에서 등애를 막다 37세로 전사, 맏아들 제갈상도 함께 죽음 | 확인 | S2 부전 “드디어 싸워 크게 패하고 진에서 죽으니 나이 37이었다”(臨陣死,時年三十七) · 제갈상 “부자가 나라의 무거운 은혜를 입고도 일찍 황호를 베지 못했다” | S5 권78 경원 4년 겨울 10월 · S13 “겨울 등애가 면죽에서 위장군 제갈첨을 깨뜨렸다” | 234년 “첨은 지금 여덟 살”이라는 편지와 나이가 맞음 |
| C47 | 진수가 『제갈씨집』 24편 104,112자를 274년 2월 1일 계사(율리우스력 03-25)에 올림 | 확인 | S2 “이상 24편, 모두 104,112자”(右二十四篇,凡十萬四千一百一十二字) · “태시 10년 2월 1일 계사, 평양후상 신 진수 올림” | 환산 S1 + 일간지 계산: 274-03-25 = 계사로 사료와 일치 | 책은 전하지 않음. 목록에 손권·제갈근·맹달에게 보낸 편지 편이 있음 |
| C48 | 진수 평: “성심을 열고 공도를 폈다”, 형정이 엄했으나 원망이 없었고 관중·소하에 버금 | 확인 | S2 “형정이 엄했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던 것은 마음 씀이 공평하고 권계가 분명했기 때문이다”(刑政雖峻而無怨者,以其用心平而勸戒明也) · “다스림을 아는 좋은 인재로 관중·소하에 버금간다” | S5 권72가 같은 평을 옮김 | 평의 끝이 ‘~였던가’(歟)로 끝나는 추정형 |
| C49 | 『원자』: 법 집행은 엄했으나 백성이 기꺼이 복종했고, 그는 근본을 지키는 사람으로 임기응변은 장점이 아님 | 확인 | S2 배송지 주 『원자』 “법 집행은 엄했으나 국인이 기꺼이 복종했다”(行法嚴而國人悅服) · “량은 근본을 지키는 자로 응변에는 장점이 없었다”(亮,持本者也,其於應變,則非所長也) | 진수 평 “임기응변의 장수 지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가”와 독립적으로 수렴 | 배송지 주에 원준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음 |
| C50 | 요립은 폐해져 문산으로 쫓겨났고 이엄은 부고를 듣고 병사. 습착치는 “진·한 이래 없던 형벌 운용”이라 평함 | 부분 확인 | S19 요립 “나는 끝내 오랑캐가 되겠구나”(吾終為左衽矣) · 이평 “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병이 나 죽었다”(平聞亮卒,發病死) | S19 배송지 주 습착치 “진·한 이래 이런 일은 없었다”(自秦、漢以來未之有也) | 요립 폐출 연도는 미상 |
| C51 | 법정이 사적 원한으로 사람을 죽여도 제갈량은 그의 공을 들어 제지하지 않았고, 이릉 패전 뒤 그를 그리워함 | 부분 확인 | S23 “제갈량과 법정은 좋아하고 숭상하는 바는 달랐으나 공의로 서로를 취했다”(雖好尚不同,以公義相取) · “법효직이 살아 있었다면 주상을 제지해 동쪽으로 가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 없음 | |
| C52 | 「팔무·칠계·육공·오구」는 이름만 전하고, 『장원』·『편의십육책』은 후대 위탁서로 판정됨 | 부분 확인 | S2 배송지 주 『위씨춘추』 “량은 팔무·칠계·육공·오구를 지었는데 모두 조목이 있어 신하를 훈계했다” | 사고전서총목의 『장원』 “위서 가운데 늦게 나온 것” 판정은 발췌만 | 『제갈씨집』 목록의 「훈려(訓厲)」 편과 대응 [추정] |
| C53 | 214년 유파의 건의로 직백전을 주조해 몇 달 만에 부고가 참. 액면 ‘직백’은 오수전 100닢 값으로 풀이 | 부분 확인 | S17 배송지 주 『영릉선현전』 “다만 직백전을 주조해 물가를 고르게 하고…유비가 따르니 몇 달 사이에 부고가 가득 찼다”(但當鑄直百錢,平諸物賈…備從之,數月之間,府庫充實) | S24 ‘직(直)=당(當)’ 훈고에 근거한 풀이 | 사료 원문에 ‘100 오수’ 명시는 없음. 같은 주에 제갈량의 “내가 자초에 한참 못 미친다” |
| C54 | 직백전 무게가 제갈량 사망 전후 처음의 1/4, 촉 멸망 무렵 1/20로 감소 | 부분 확인 | S24 각주 인용 “제갈량이 죽은 전후에 직백오수 한 닢의 무게가 원래의 4분의 1로 줄었다” | 없음(1차 고고 계량 자료 미대조) | 원 문헌명 미확인 |
| C55 | 본전: 교묘한 궁리에 뛰어나 연노를 개량하고 목우·유마를 고안. 목우 231, 유마 234년 사용 | 부분 확인 | S2 “연노를 가감 개량하고, 목우·유마는 모두 그의 착상에서 나왔다”(損益連弩,木牛流馬,皆出其意) | S13 “처음으로 목우로 날랐다”(9년) · “처음으로 유마로 날랐다”(12년) | 같은 『삼국지』 안 |
| C56 | 목우·유마의 구조는 미확정: 외바퀴 수레설(북송 고승 처음), 기계 보행기설이 경합 | 상충 | S2 배송지 주 「목우유마 만드는 법」 “네모난 배에 굽은 머리, 다리 하나에 발 넷”(方腹曲頭,一腳四足) · S25 『사물기원』 “목우는 지금의 앞 끌채 달린 작은 수레, 유마는 지금의 혼자 미는 것” | S26 왕젠·옌훙썬의 연간 보행 모형(1993~, 발췌) | 사고전서총목은 고승 설을 억설로 비판(발췌) |
| C57 | 개량 연노 ‘원융’: 쇠화살 8촌, 한 노에 10발 동시 발사 | 부분 확인 | S2 배송지 주 『위씨춘추』 “쇠로 화살을 만들어 길이 8촌, 한 노에 10발이 함께 나갔다”(以鐵為矢,矢長八寸,一弩十矢俱發) | 본전 “연노를 가감 개량했다”(損益連弩)는 같은 권 | 실물 증거는 이번에 확인 못 함 |
| C58 | 팔진도: 본전 기록, 어복 강변의 돌무더기 유구(수경주), 환온의 관찰, 마륭의 실전 응용 | 확인 | S2 “병법을 추연하여 팔진도를 지었다”(推演兵法,作八陣圖) · S27 “량이 만든 팔진도가 있어…모두 잔돌을 쌓아 만들었다”(皆累細石爲之) | S28 환온전 “돌을 쌓아 여덟 줄을 만들었다” · 마륭전 “마륭이 팔진도에 의거해 편상거를 만들었다”(隆依八陣圖作偏箱車) | 유구는 싼샤댐으로 수몰되었다는 보도(발췌) |
| C59 | 만두의 제갈량 기원설은 북송 고승 『사물기원』 권9가 처음이며 본인도 추정형으로 씀 | 부분 확인 | S29 인용 “만두는 아마 무후에서 비롯한 듯하다”(饅頭疑自武侯始也) | 없음(가오치안은 불전 음식 음역설로 부정, 발췌) | ‘밀가루에 사람 머리를 그려 제사’ 구절은 원문에 없음 |
| C60 | ‘제갈채(순무)’의 가장 이른 문헌은 당 『유빈객가화록』 | 미확인 | S30 『태평광기』 권411 인용 “삼촉 사람들이 지금 순무를 제갈채라 부른다”(今呼蔓菁爲諸葛菜) | 『본초강목』 재인용(발췌) | 발췌만 확인 |
| C61 | 공명등의 제갈량 기원설은 전근대 문헌 근거를 찾지 못함 | 미확인 | S31 “전하기를…사마의에게 평양에서 포위되어”(相傳…被司馬懿困於平陽) | 없음 | 부재 주장. 오대 신칠낭 기원설도 병존 |
| C62 | 초선차전의 사서 원형은 213년 유수에서 손권의 배가 화살을 받아 균형을 잡은 『위략』 기사 | 확인 | S32 배송지 주 『위략』 “손권이 큰 배를 타고 와서 군을 살피니…다른 쪽으로도 화살을 받아 화살이 고르게 되자 배가 평평해졌다”(箭均船平) | 같은 곳 『오력』은 손권이 가벼운 배로 왔다고 달리 적음 | 원대 평화에서는 주유의 일로 나온다는 보도(발췌) |
| C63 | 칠성단 기풍 장면은 『삼국지평화』 → 원 잡극 → 연의 제49회로 이어진 창작 | 부분 확인 | S33 제49회 회목 “칠성단에서 제갈이 바람에 제사하다”(七星壇諸葛祭風) | S34 평화 권중의 기풍 장면(발췌) | 정사의 동남풍은 C16 |
| C64 | 주유는 익주 원정을 준비하다 파구에서 36세로 병사. ‘세 번 화나게 함’은 소설 창작 | 확인 | S10 “강릉으로 돌아가 행장을 꾸리다가 파구에서 병으로 죽었다…나이 서른여섯” | S33 제51·55·56회 “공명이 주공근을 한 번·두 번·세 번 화나게 하다” | 주유전에는 사망 연도가 없음. “하늘은 주유를 낳고 어찌 량을 낳았나”는 모종강본 제57회 |
| C65 | 칠성등 연명 장면(연의 제103회)은 정사 사망 기사에 대응 내용이 없음 | 부분 확인 | S33 제103회 “오장원에서 제갈이 별에 빌다”(五丈原諸葛禳星) | S2 사망 기사 “량이 병들어 군중에서 죽었다” | 원 잡극 기원설은 발췌만 |
| C66 | 「후출사표」는 본전·문집에 없고 장엄 『묵기』 → 습착치 『한진춘추』 → 배송지 주 경로로만 전하며 진위 논쟁 중. 원형 자구는 ‘진력(盡力)’ | 상충 | S2 배송지 주 “이 표는 량의 문집에 없고 장엄의 『묵기』에서 나왔다”(此表,亮集所無,出張儼默記) · “신은 몸을 굽혀 힘을 다하고 죽은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臣鞠躬盡力,死而後已) | 위작 근거 S12 조운전 “7년에 죽었다”(七年卒) vs 진작 근거 S35 제갈각 “근래 숙부의 표를 보니”(近見家叔父表) · S36 교육부 성어전 출처 원문 ‘진력(盡力)’ | 의고: 전대소·원매 등, 옹호: 하작(S37 경유). ‘진췌(盡瘁)’로 바뀐 지점은 미특정 |
| C67 | 오나라 장엄 『묵기』 「술좌편」(266년 이전)은 그를 사마의보다 낫다고 평함. 동시대 외부 평가 | 확인 | S2 배송지 주 “중달은 천하의 열 배 땅에 웅거하고도…스스로 지키기에 힘썼을 뿐이니 공명이 제멋대로 오고 가게 했다”(使彼孔明自來自去) | 같은 글이 인용한 비판 “헛되이 군사를 수고롭게 해 해마다 출정했으나 한 치 땅도 나아가지 못했다” | 장엄 사망 266년 |
| C68 | 촉한 정통론은 습착치 『한진춘추』에서 시작해 주희 『통감강목』에서 정착, 사고제요가 이를 정리 | 미확인 | S38 사고제요 “주자 이래 모두 습착치를 옳다 하고 진수를 그르다 했다”(自朱子以來,無不是鑿齒而非壽) | 모종강 「독삼국지법」 인용(발췌) | 사고제요 원문은 미열람 |
| C69 | 두보 「촉상」(760 봄, 성도)이 ‘뜻을 이루지 못한 충신’ 형상의 원형 | 부분 확인 | S39 “군사를 내어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죽으니, 길이 영웅들로 하여금 옷깃 가득 눈물 적시게 하네”(出師未捷身先死,長使英雄淚滿襟) | S40 구조오 『두시상주』 편년 760(발췌) | 편년은 청대 주석가 판정 |
| C70 | 진수 편향설: 『진서』는 부친의 곤형과 제갈첨의 경시를, 『위서』는 진수 본인의 매질을 원한으로 적음 | 상충 | S28 진수전 “진수의 아버지도 연좌되어 머리를 깎였고, 제갈첨도 진수를 경시했다…논자들이 이 때문에 그를 낮춰 보았다”(議者以此少之) | S41 모수지전: 진수가 제갈량 문하에서 매를 맞았다(撻)는 전언 | 원한 내용이 두 기록에서 다름 |
| C71 | 최호·조익 등은 진수를 변호. 조익은 편향설을 “식견 없는 논의”라 함 | 확인 | S42 『이십이사차기』 권6 “이것은 참으로 식견 없는 논의다”(此真無識之論也) | S41 최호 “진수가 량을 폄하한 것은 사실을 잃은 것이 아니다”(謂壽貶亮非為失實) | 최호는 진수 변호와 제갈량 혹평을 동시에 함 |
| C72 | 진 초에 이미 “섬길 곳을 잘못 골랐고 촉민을 피로하게 했으며 힘은 작은데 꾀는 컸다”는 비판 여론 | 확인 | S2 배송지 주 『촉기』 “당시 논자들은 량이 몸 맡길 곳을 잘못 골랐고 촉민을 수고롭게 했으며 힘은 작은데 꾀는 컸다고 많이 비난했다”(力小謀大) | 장엄이 인용한 비판 “해마다 출정했으나” | 북벌 무익론의 가장 이른 층위 |
| C73 | 북위 최호: 형주를 버리고 파촉으로 물러난 것은 하책, 관중·소하에 견준 것은 과함 | 확인 | S41 “형주를 버리고 파촉으로 물러나…이는 하책이다”(委棄荊州,退入巴蜀…此策之下者) · “조타와 짝할 만한데 관중·소하에 버금간다 하니 지나치지 않은가” | 소순 『권서·항적』 “형주를 버리고 서촉을 취했으니 그가 해낼 수 없음을 안다”(S43 경유) | |
| C74 | 초주 「구국론」(257)은 강유의 연례 출병을 겨냥한 글로, 제갈량을 지명하지 않음 | 미확인 | S44 강유의 “궁병독무(窮兵黷武)”를 겨냥했다는 서술(발췌) | 바이두백과 같은 취지(발췌) | 원문은 미열람. 제갈량 북벌 비판으로 읽는 것은 해석 |
| C75 | 톈위칭(1989)은 제갈량·융중대 평가의 미화를 비판, 주다웨이는 형주 문제 간과를 지적 | 부분 확인 | S43 각주 인용 “후인이 제갈량과 융중대를 평하면서 흔히 과찬과 두둔의 말이 나온다”(往往出現溢美和回護之詞) | 같은 항목의 주다웨이 인용 | 원 논문(『역사연구』 1989-5) 미열람 |
| C76 | 마오쩌둥이 소순의 글 메모에서 촉한 패인을 융중대의 병력 이분에서 찾았다고 전함 | 미확인 | S45 “처음은 융중대에서 그르쳤으니 천 리 떨어진 곳에 병력을 둘로 나누었다”(其始誤於隆中對,千里之遙而二分兵力)(발췌) | S43 “그 잘못은 융중대에서 시작되었다”(其誤始於隆中對) | 자구 이문. 원서(1993) 미열람 |
| C77 | 이중톈(2006)은 북벌을 ‘공격으로 수비를 삼는’ 수단으로 해석 | 미확인 | S46 『이중톈 품삼국』 제41장 「이공위수(以攻為守)」(요약 발췌) | 없음 | 원문 미열람 |
| C78 | 드 크레스피니는 도덕적 정통론을 걷어 낸 평가를 권하고 촉한을 가장 약한 나라로 규정, 킬리그루(1999)는 전략 경직·전술 교묘로 평가 | 미확인 | S47 Wiley 백과 항목 초록·킬리그루 논문 서평 요약(발췌) | 없음 | 본문 403·미열람 |
| C79 | 루쉰: 연의는 제갈량의 지혜를 그리려다 요괴에 가까워졌다 | 확인 | S48 제14편 “제갈의 다지를 그리려다 요괴에 가까워졌다”(狀諸葛之多智而近妖) | 원문 인용이라 출처 자체가 1차 | |
| C80 | ‘군대 다스림은 장점, 기모는 단점, 백성 다스림이 장략보다 낫다’(274 표문)와 ‘임기응변의 장략은 장점이 아니었던가’(본전 평)는 서로 다른 두 문헌 | 확인 | S2 표문 “군대를 다스리는 데 뛰어났고 기이한 계략에는 모자랐으며, 백성 다스리는 재간이 장수의 지략보다 나았다”(於治戎為長,奇謀為短,理民之干,優於將略) · 평 “대개 임기응변의 장수 지략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던가”(蓋應變將略,非其所長歟) | 원문 인용이라 출처 자체가 1차 | 흔히 한 문장으로 합쳐 인용됨 |
| C81 | 공성계의 원형은 곽충의 전승이며 배송지가 당시 사마의의 위치를 들어 허구로 판정 | 반증 | S2 곽충 “군중에 깃발을 눕히고 북을 쉬게 하며 네 성문을 크게 열게 했다” · 배송지 “선제는 아직 형주도독으로 완성을 지키고 있었다” · “그러므로 이 책이 끌어온 것이 모두 거짓임을 안다”(故知此書舉引皆虛) | S2 228년 가정에서 위 지휘관은 장합(본전) · S33 제95회 “무후가 거문고를 타 중달을 물리다” | 일부 2차 자료는 이 판정을 『위략』에 대한 말로 잘못 귀속 |
| C82 | 최치원 『고운집』의 ‘촉칭’은 번역본 각주가 제갈량의 공평무사 전고로 풀 뿐, 본문에 이름은 없음 | 부분 확인 | S49 각주 인용 “옛날 제갈공명은 작은 나라의 재상이었으나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고 했다”(昔諸葛孔明小國之相 猶曰吾心如稱) | 없음 | 제갈량 이름은 번역자 각주에 있음 |
| C83 | 『삼국사기』(1145) 권16 사론이 을파소 등용을 “촉의 선주가 공명을 대한 것”에 견줌. 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가장 이른 한국 사서의 이름 언급 | 부분 확인 | S50 “촉의 선주가 공명을…대한 것이 그와 같다” | 한국사DB 검색 건수(삼국사기 ‘諸葛’ 3건) — 나머지 2건 미확인 | 원문 표기는 ‘공명(孔明)’. ‘가장 이른’은 조사 범위 기준 |
| C84 | 이규보·이제현·이곡·정도전의 문집에 제갈량 언급, 이제현의 시 「제갈공명사당」 | 미확인 | S51 검색 발췌: 정도전 “제갈공명은 남양에 용처럼 누워 선주의 세 번 방문을 기다린 뒤에 일어났다”(諸葛孔明龍臥南陽。以待先主三顧而後起) | 없음 | 발췌만. 판본 연대는 저작 연대가 아님 |
| C85 | 1436년 세종실록 평안도 방어책 논의가 제갈량의 위수 남쪽 둔전을 모범으로 인용. 번역문 표기는 ‘제갈양’ | 미확인 | S51 세종실록 18년 윤6월 19일 발췌 “제갈양은 위남에 이를 두어 수송의 노고를 덜고” | 없음 | 실록 전체의 가장 이른 기사인지는 미확인 |
| C86 | 한국고전종합DB ‘출사표(出師表)’ 1,485건(실록 25·승정원일기 116), 1499년 연산군 대 진강 인용, 1787년 기생이 출사표를 노래함 | 미확인 | S51 ‘출사표(出師表)’ 그룹 검색 결과 건수 · 『일성록』 정조 11년 6월 7일 발췌 | 『고문진보후집』 출사표 전문 수록(학습서 경로) | 건수는 2026-09-28 검색 시점 값 |
| C87 | 1569년(선조 2) 6월 20일 경연에서 기대승이 『삼국지연의』를 비판 — 한국 문헌 첫 등장 | 확인 | S52 “신이 뒤에 그 책을 보니 무뢰한 자가 잡스러운 말을 모은 것이었습니다”(臣後見其冊, 定是無賴者裒集雜言) · “인출하기까지 하였으니” | S53 “1569년(선조 2) 기사에 의거하여 16세기 무렵으로 여겨진다” | 장비 일화를 먼저 말한 사람은 선조 |
| C88 | 명종 연간(1552~1560년대 초중반) 병자자 금속활자본 권8이 국내 가장 오래된 판본(2010 공개) | 부분 확인 | S54 “1552년부터 1560년대 초중반 사이에, 병자자라는 동활자로 간행됐다” | 없음(백과는 연도 없이 금속활자본 존재만 서술) | 언론 보도 의존 |
| C89 | 연의의 한국 이본은 200여 종, 번안 『적벽가』·『화용도』 존재. 이덕무 책 던지기 일화는 근거 미확인 | 확인 | S53 “확인된 『삼국지통속연의』의 이본은 200여 종이며” | 이덕무 일화는 블로그 단독, 원문 위치 없음 | 이덕무 일화는 ax7 |
| C90 | 김만중 『서포만필』이 소식의 일화를 들어 소설이 정사보다 사람을 움직인다고 논함 | 미확인 | S55 발췌 “진수의 사전이나 온공의 통감을 가지고…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서포만필」(발췌) | 발췌만 |
| C91 | 선조가 1605년 “제갈량이 관우를 구하지 않은 일”을 향시 논제로 낸 적이 있다고 회고 | 미확인 | S51 선조실록 38년 11월 3일 발췌 “제갈양불구관우(諸葛亮不救關羽)” | 없음 | ‘합격 취소’ 이야기는 비학술 단독이라 제외 |
| C92 | 정조가 1795년 춘당대 시험에 제갈량의 말로 전하는 “내 마음은 저울과 같다”를 부제로 냄. 이 말은 『삼국지』 본전에 없음 | 미확인 | S51 『일성록』 정조 19년 10월 21일 발췌 · 김주신 『수곡집』 “지금 무후 본전을 살펴보니 이 말이 없다”(今考武侯本傳。無此語) | 없음 | 출전으로 『태평어람』 권376이 거론됨 |
| C93 | 조선 후기 제갈량 담론이 주희를 매개로 병자호란 이후 북벌론과 결합(송시열 등) | 부분 확인 | S56 김기완 2022 『대동한문학』 72 초록 “‘북벌론’이란 키워드를 중심으로 제갈량 관련 시문 내의 서술 논리를 분석” | 없음(본문 미열람) | 학술 논문 초록 |
| C94 | 숙종은 제갈량이 한 회복이 어려움을 알고도 마음을 다했을 뿐이라 평함 | 미확인 | S51 숙종실록 부록 행장 발췌 “그 마음을 다하였을 뿐” | 없음 | 발췌만 |
| C95 | 이순신이 시에서 “회복을 생각하면 제갈량”이라 읊었다고 전함 | 부분 확인 | S57 국민일보 2012-11-30 인용 “회복을 생각하면 제갈량”(恢復思諸葛) | 없음(이순신전서 원문 권차 미확인) | 2차 인용만 |
| C96 | 이순신의 시호 ‘충무’(1643)는 제갈량과 같은 시호이나, 조선에 같은 시호가 여럿이고 의도적 참조의 1차 근거는 없음 | 부분 확인 | S57 “이순신 외에…여덟 분의 충무공” · 중국의 충무로 제갈공명·곽자의·악비를 듦 | 없음 | ‘본떴다’는 주장은 미확인(ax7) |
| C97 | 평안도 영유의 제갈량 사당은 선조의 명으로 건립. 연도는 1603년설과 1605년설 | 상충 | S51 영조실록 1년(1725) 5월 13일 발췌 “무후묘는 곧 선조조에서 명하여 건립한 것인데” | S58 1603년(선조 36) 무후사 건립(발췌) vs S59 “선조실록 선조 38(1605년)에 등장” | 건립 주체는 확인, 연도는 상충 |
| C98 | 1661년 수호 노비 하사, 1667년 사액. 사액명이 실록 ‘포충’, 『국조보감』 ‘와룡’으로 다름 | 상충 | S51 현종실록 8년 6월 14일 발췌 “제갈 무후의 사당에 ‘포충’이라 사액” | S51 『국조보감』 권39 발췌 “사액하고 와룡이라는 비도 세웠으며” | ‘와룡’이 사액명이 아니라 비 이름일 가능성 |
| C99 | 1695년 숙종이 악비를 영유 제갈무후 사당에 함께 모심 | 미확인 | S51 『국조보감』 권50 숙종 21년 발췌 “영유의 제갈 무후 사당에 함께 제향하여” | S51 『열성어제』 숙종 시 주석 “영유현 와룡묘” | 두 발췌 모두 같은 DB 경유 |
| C100 | 1745년 영조가 승지를 보내 영유 와룡사에 제사(처음엔 남양 용백사를 지목), 1750년 문천상 배향 | 부분 확인 | S60 “승지를 보내 영유현 와룡사에 치제하게 하였다” | S51 영조실록 26년 3월 16일 발췌 “문천상을 영유의 와룡사에 배향하였다” | 1750년 배향 부분은 발췌만 |
| C101 | 세 충신을 모시며 ‘삼충사’로 개칭. 연도는 1738년설과 1750년 이후설 | 상충 | S58 “1738년(영조 14) 삼충사로 개칭”(발췌) | S51 1750년 실록은 여전히 ‘와룡사’로 적음 | 1738년은 세 번째 충신 배향(1750) 이전이라 논리적으로 어긋남 |
| C102 | 1786년 정조가 삼충사에 제사하고 비를 세우게 함 | 미확인 | S51 신역 정조실록 10년 3월 3일·28일 발췌 | 없음 | 비문 작성자 조경은 출처 불명이라 제외 |
| C103 | 조선·근대에 제갈량 사당이 여럿: 남양 용백사, 용산 둔지미 무후묘, 1903년 곡성 무후사 | 부분 확인 | S59 우리문화신문 2019-09-16 “정확한 건립연대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 시민의소리 2016 『곡성군지』 “계묘년(1903) 여름에 건립하였다” | S60 용백사 언급 | |
| C104 | 서울 남산 와룡묘는 제갈량을 주신으로 하고 1974-01-15 서울시 민속자료 지정, 창건 연대는 불명 | 부분 확인 | S61 국가유산포털 “지정(등록)일 1974.01.15” | S61 한국어 위키백과: 엄귀비 창건설 “확실치 않다”, 1862년설 | 창건설 둘 모두 미확인 |
| C105 | 박종화 『삼국지』는 한국일보 연재 후 1968년 단행본. 연재 시작은 1963년설과 1965년설 | 상충 | S62 한국어 위키백과 “한국일보 1963.1.1~1968.5.8 연재 완료”(발췌) | S62 나무위키 “1965년 한국일보에 연재”(비학술) | 원 지면 미대조 |
| C106 | 이문열 평역 『삼국지』(1988) 누적 2,000만 부(출판사 발표 보도) | 미확인 | S63 한국경제 2020-05-24 발췌 “1988년 출간된 이래 누적 판매 2000만 부” | 다른 보도가 같은 수치를 전재 | 독립 검증 없음, 본문 403 |
| C107 | 황석영 『삼국지』 2003-06-30 초판, 2020년까지 200만 부 이상 | 미확인 | S63 한국경제 2020-12-21 발췌 “2003년 초판 발행 이후 200만 부가 넘게 팔린” | 예스24 서지 “창비 | 2003년 06월 30일” | 판매 부수는 발췌만 |
| C108 | 3차 교육과정 고교 세계사의 위·진·남북조 단원에 제갈량 이름이 없음 | 확인 | S64 “유비의 촉(221~263)” · “촉은 서남 중국으로 영토 개척을 활발히 하였으며” | 원문 확인이라 출처 자체가 1차 | 1종에 한정 |
| C109 | 삼고초려·읍참마속·수어지교·칠종칠금이 『표준국어대사전』 표제어 | 확인 | S20 삼고초려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참을성 있게 노력함” · 읍참마속 “큰 목적을 위하여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버림을 이르는 말” | 사전 정의 자체가 1차 | 읍참마속 출전을 “마속전”이라 적으나 정사의 마속은 마량전 부전 |
| C110 | ‘출사표를 던지다’ = 경기·경쟁 참가 의사를 밝히다(관용구), ‘던지다’는 어색하다는 규범 비판 | 부분 확인 | S65 경향신문 2014-10-01 “‘경기, 경쟁 따위에 참가 의사를 밝히다’란 뜻의 관용구로 올라 있다” | S20 우리말샘 ‘출사표’ 항목의 관용구 2건 표시(관용구 본문은 로딩 실패) | |
| C111 | 2026년 6·3 지방선거 보도에서 출마 선언을 ‘출사표’로 표현 | 미확인 | S66 서울경제 발췌 “6·3지선 경기 출마자 일제히 공식 출사표” | 이데일리 유사 제목(발췌) | 기사 날짜는 발췌 기준 |
| C112 | 몐현 무후사는 263년 조서로 세운 첫 공식 사당이라 ‘천하제일무후사’, 1513년 현 위치로 이전, 2013년 제7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 미확인 | S21 몐현 무후사 항목·산시성 도서관 자료(발췌) | S22 “유선이 조서를 내려 세웠다” | ‘성도보다 몇 년 이른가’는 43·41·40년으로 자료마다 다름 |
| C113 | 정군산 무후묘는 1996-11-20 제4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4-0068-2-012), 발굴 기록은 이번 조사에서 발견 못 함 | 부분 확인 | S7 제4차 목록 “무후묘 삼국 산시성 몐현” · 무후묘 항목에 발굴 언급 없음 | S22 1938년 서북연합대학 교원·학생의 고찰·정리가 가장 이른 근대 조사 | 비발굴은 부재 증거 |
| C114 | 성도 무후사 창건: 송대 지리서는 이웅 칭왕 무렵 소성 안, 박물관은 혜릉 곁 사당을 “대략 남북조 시기”로 적음. ‘305년’은 1차 근거 미확인 | 상충 | S67 “혜릉 곁…무후사는 대략 남북조 시기에 세워졌다”(武侯祠大约建于南北朝时期) | S68 『방여승람』 “이웅이 왕을 칭하자 비로소 소성 안에 사당을 세웠다”(李雄稱王始為廟於少城内)(발췌) | 소성 사당 → 혜릉 곁 이건의 두 단계로 읽으면 양립 가능 |
| C115 | 성도 무후사: 1390/1391 주춘의 소열묘 합사, 1671–72 재건, 1961-03-04 제1차 국보, 1984 박물관, 2008 국가 1급 박물관 | 부분 확인 | S67 “1961년 국무원이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공포하였고, 1984년 성도무후사박물관을 설립하였으며”(홍무 24년 합사로 서술) | S68 쓰촨 방지 계열은 합사를 홍무 23년(1390)으로 적음 · S7 제1차 목록 1-0119-3-072 | 합사 연도 상충 |
| C116 | 존칭 ‘무후’와 ‘무후사’는 무향후·충무후에서 나왔으며 어느 쪽이 주된 기원인지는 글마다 다름. “소열묘라 써도 모두 무후사라 한다”는 구절 | 미확인 | S69 민국 시기 추루(鄒魯)의 것으로 전하는 구절 “문 편액엔 크게 소열묘라 썼건만 세상 사람은 모두 무후사라 한다”(門額大書昭烈廟,世人都道武侯祠)(발췌) | 없음 | 구절의 작자 귀속은 발췌 기준 |
| C117 | 성도무후사박물관 관람객 2023년 452.7만, 2025년 603만. 주변 구역 포함 집계(TEA)와는 기준이 다름 | 부분 확인 | S70 화시두시바오 2026-05-18 “성도무후사박물관 603만 인차”(成都武侯祠博物馆603万人次) | S70 중국신문망 쓰촨 2024-05-18(2023년 수치, 인코딩 손상) · TEA 2024년 1,457만(발췌) | TEA는 진리(錦里) 등 포함 집계로 추정 [추정] |
| C118 | 1990년 우표 ‘융중대’ 발행 불발과 두 지역 별도 발행식, 2003년 교과서 주석 수정, 2010년 다른 교과서의 남양설 채택. ‘중앙선전부 논쟁 금지 통지’는 문건 미확인 | 부분 확인 | S6 2010년 교재 서술 · S8 위펑페이 회고·난양시 정부 글(발췌) | S8 신랑 2003-08-29(발췌) | 양측 자매체 편향이 큼 |
| C119 | 일본 첫 번역 『통속삼국지』, 1689년 자서, 1689–1692 간행 | 미확인 | S71 교토대 귀중자료 “원록 기사(1689) 초여름 호남 문산 적음”(元禄己巳孟夏湖南文山識) | S71 코토뱅크 “원록 2~5년(1689~1692) 간” | 두 출처 모두 발췌 |
| C120 |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1939-08-26~1943-09-05 연재, 제갈량의 죽음으로 이야기를 끝냄 | 부분 확인 | S72 “제갈량의 죽음으로 이야기 전체는 끝난다”(諸葛亮の死で物語全体は終結する) | 신초샤 도서 페이지(발췌) | |
| C121 | 요코야마 미쓰테루 만화 『삼국지』 1971년 연재 시작, 전 60권. 종료 연도는 1986·1987년설 | 상충 | S73 일본어 위키백과 “1971년부터 1987년까지”(발췌) | 전자책 서점·2021 보도자료 “1971년~1986년”(발췌) | |
| C122 | 코에이 『삼국지』 1편 1985-12-10 PC-8801용 발매 | 미확인 | S74 “1985년 12월 10일 일본의 코에이에서 발매되었다”(발췌) | 8BITS DB “1985년 12월”(발췌) | |
| C123 | CCTV 84부작 『삼국연의』 1994-10-23 첫 방송, 탕궈창이 제갈량 | 미확인 | S75 “1994년 10월 23일 CCTV-1에서 정식 첫 방송”(발췌) | 바이두백과(발췌) | |
| C124 | 95부작 『삼국』 2010-05-02 첫 방송, 루이가 제갈량 | 미확인 | S76 더우반 “첫 방송 2010-05-02, 95부”(발췌) | 바이두백과 배역표(발췌) | |
| C125 | 『적벽』(2008) 제갈량 역 가네시로 다케시, 한국 개봉일 13만 9천 명으로 중국어권 영화 개봉일 기록 | 미확인 | S77 “Takeshi Kaneshiro … Zhuge Liang” · “139,000 admissions”(발췌) | 할리우드 리포터 중국 흥행 보도(발췌) | |
| C126 | 2024–2026 동향: 정군산 새 발굴 없음, 몐현 2025 보고서의 5A 창건, 2025-05-18 AI ‘샤오제갈’, 2027 특별전 준비, 2026-07-10 애니메이션 『삼국 제1부』 개봉 | 미확인 | S78 몐현 2025 정부공작보고·신랑 2025-05-18·신화망 2026-06-13·국제재선 2026-05-18·신랑(개봉일)(모두 발췌) | 여러 매체가 같은 행사를 보도 | 모두 발췌. 2027 전시는 조달 공고 발췌만 |
| C127 | 223년 무렵 위의 화흠·왕랑 등이 칭번 권유 편지를 보냈고 그는 답하지 않고 「정의」를 지음 | 부분 확인 | S2 배송지 주 인용 『제갈량집』 “이 해 위의 사도 화흠, 사공 왕랑…각각 량에게 편지를 보내” · “량은 끝내 답서하지 않고 정의를 지었다” | 없음 | 편지 원문은 전하지 않음 |
| C128 | 그의 생전(181–234) 이름이 새겨진 금석문·간독은 확인되지 않음. 촉한 명문 쇠뇌는 251–261년 것 | 미확인 | S79 바이두백과 ‘촉한 명문 청동 쇠뇌’·즈후·펑몐신원(발췌) | 없음 | 부재 주장. 『문물』·『고고』 보고서 미열람 |
| C129 | 사후 사당이 허락되지 않자 백성이 절기마다 길가에서 사사로이 제사 | 확인 | S2 배송지 주 『양양기』 “백성들이 때마다 길가에서 사사로이 제사지냈다”(百姓遂因時節私祭之於道陌上) | S68 『방여승람』 “공명이 처음 죽자 백성이 절기를 만나면 각자 길 위에서 사사로이 제사했다”(발췌) | |
| C130 | 몐현 무후사 당 정원 11년(795) 신묘비명이 전국 무후사 가운데 가장 이른 묘비로 소개됨 | 부분 확인 | S22 화시두시바오 2023-12-18(요지) | S21 산시성 도서관 「천하제일무후사」(발췌) | 금석학 도록 미대조 |
| C131 | 성 제갈의 유래: 『오서』(제현에서 양도로 이주한 갈씨) vs 『풍속통』(갈영의 손자가 제현후) — 배송지가 차이를 명기 | 상충 | S80 『오서』 “양도에 먼저 갈씨가 있어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제갈이라 불렀고, 이로써 씨를 삼았다”(時人謂之諸葛,因以為氏) · 『풍속통』 “그 손자를 제현후에 봉하니 이로 인해 씨를 아울렀다” | 두 설이 독립 전승으로 병존 | ctext 원문은 봇 검사로 차단, 『속후한서』·『제갈충무서』 수록문으로 확인 |
| C132 | 자 ‘공명’은 ‘매우 밝다’로 이름 ‘량’과 같은 뜻의 호응이라는 통설. 명명 이유를 적은 사료는 없음 | 미확인 | S81 ‘공(孔)=매우(甚)’ 풀이와 『시경』 “우리 붉은빛 매우 밝다”(我朱孔陽)(발췌) | 다른 어문 칼럼(발췌) | ‘작은 구멍의 빛’ 겸양설·공자 흠모설은 근거 약해 제외 |
| C133 | 호칭 와룡(서서, 본전)·복룡(사마휘, 『양양기』)·방덕공 명명설(방통전 주)이 서로 다름 | 상충 | S2 “제갈공명은 와룡입니다”(諸葛孔明者,臥龍也) · 『양양기』 “이곳에 절로 복룡과 봉추가 있다”(此間自有伏龍、鳳雛) | 방통전 주 『양양기』 “제갈공명을 와룡…이라 한 것은 모두 방덕공의 말이다”(일본어 위키백과 경유, 발췌) | 연의 제37회는 사마휘 설 |
| C134 | ‘무향’의 위치: 낭야 무향 후국설 vs 한중 남정 무향곡설(한중 무향현은 북위 때 설치) | 상충 | S82 한중시 한타이구 정부 글(발췌) · 『한서』 지리지 “무향은 후국이다”(武鄉,侯國) | 없음(결정적 출토 증거 없음) | |
| C135 | 시법의 ‘충’·‘무’ 풀이. 조서가 어느 조문을 적용했는지는 명시되지 않음 | 미확인 | S83 『일주서』 「시법해」 “몸을 위태롭게 하며 윗사람을 받듦을 충이라 한다”(危身奉上曰忠) · “화란을 평정함을 무라 한다”(克定禍亂曰武)(발췌) | 다른 고문 사이트(발췌) | 판본 이문 있음. 적용 조문은 추정 |
| C136 | 외래어 표기법은 중국 과거인 인명을 종전 한자음대로 적게 함 → ‘제갈량’ | 미확인 | S84 “중국 인명은 과거인과 현대인을 구분하여 과거인은 종전의 한자음대로 표기하고”(발췌) | 한국어 위키문헌의 고시문 같은 문구(발췌) | 신해혁명 기준은 해설·통용 기준 |
| C137 | 오나라 선비들과의 설전(연의 제43회)은 정사에 없고 손권 설득 기록만 있음 | 부분 확인 | S2 “손권이 시상에서 성패를 관망하니 제갈량이 손권을 설득했다”(時權擁軍在柴桑,觀望成敗,亮說權曰) | S10 노숙전 배송지 주의 이의 | 부재 판정은 열람한 권 범위 기준 |
| C138 | 조운의 비단 주머니 세 개(연의 제54–55회)는 창작. 혼인은 손권 주도, 주유의 억류 건의는 채택되지 않음 | 미확인 | S10 주유전 “유비를 오로 옮겨 궁실을 크게 짓고”(愚謂大計宜徙備置吳,盛為築宮室) → 손권이 받아들이지 않음(발췌 경유) | S33 제54·55회 회목 | 해당 대목 원문은 발췌로만 확인 |
| C139 | 흰 깃털부채·갈건 차림의 가장 이른 묘사는 동진 『어림』의 제갈량 기사. 소식의 “우선윤건”은 주유 지칭이라는 해석과 맞섬 | 상충 | S85 『태평어람』 권702 인용 『어림』 “무후가 흰 수레에 갈건, 흰 깃털부채로 삼군을 지휘했다”(武侯乘素與、葛巾、白羽扇指麾三軍) | 소식 「건위왕씨서루」 “갈건우선으로 삼군을 지휘하네”(발췌) | ‘소여(素與)’는 ‘소여(素輿, 흰 수레)’의 오사로 보임. 미교정본 |
| C140 | 큰 별이 진영에 떨어진 뒤 죽었다는 서사는 손성 『진양추』에 있음 | 확인 | S2 배송지 주 『진양추』 “붉고 뾰족한 별이…량의 진영에 떨어졌다…곧 량이 죽었다”(投于亮營…俄而亮卒) | 문헌 존재 자체의 확인 | 사실성은 검증 불가라 ‘통설’로 판정 |
| C141 | 「계자서」는 정사에 없고 당대 『예문유취』에 처음 보이며, 234년 제갈첨에게 썼다는 설과 양자 제갈교(228 사망)에게 썼다는 설이 맞섬 | 상충 | S86 신화망 2022-03-28(발췌) | 난양시 박물원은 234년설(발췌) | 발췌만 |
| C142 | 304–306년 진남장군 유홍이 융중의 옛집을 보고 비를 세워 표창 | 부분 확인 | S2 배송지 주 『촉기』 “진 영흥 중 진남장군 유홍이 융중에 이르러 량의 옛집을 보고 갈을 세워 마을을 표창했다”(立碣表閭) | 없음 | |
| C143 | 배송지는 원가 6년(429) 7월 24일 『삼국지』 주를 올림 | 미확인 | S87 표문 날짜 “원가 6년 7월 24일”을 인용한 학위논문·중국작가망 기사(발췌) | 두 발췌가 서로 인용하지 않음 | 표문 원문 페이지는 404 |
| C144 | 성도 무후사 ‘삼절비’(809, 배도 글·유공작 글씨·노건 새김)는 성도에 완전히 남은 유일한 당비 | 미확인 | S88 쓰촨성 성정망(발췌) | 중국신문망 2020-10-17(발췌) | 치수는 자료마다 다름 |
| C145 | 2018년 10월 성도 무후사 전표 60위안 → 50위안(반표 25) 인하 | 확인 | S89 청두상바오 “무후사박물관 전표 50위안/인·회, 반표 25위안/인·회” · 이전 “전표 60위안” | S90 2026년 현행 50위안 | 시행일은 월 단위까지만(“이달부터”) |
| C146 | 『표준국어대사전』 ‘제갈량’ =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정치가(181~234). 자는 공명. 시호는 충무.” | 확인 | S20 뜻풀이 원문 | 사전 정의 자체가 1차 | 검색 결과 화면으로 열람 |
| C147 | 같은 사전의 ‘공명’ = “‘제갈량’의 자”, ‘제갈공명’ = “성과 자를 함께 이르는 말” | 확인 | S20 뜻풀이 원문 | 사전 정의 자체가 1차 | |
| C148 | ‘출사표’ 항목은 “촉나라의 재상 제갈량이 출병하면서 뒤를 이을 왕에게 적어 올린 글”로, 실제 수신자(이미 즉위한 후주)와 어긋남 | 확인 | S20 뜻풀이 원문 | S13 후주는 223년 즉위, 출사표는 227년 | |
| C149 | 대만 교육부 『중편국어사전 수정본』 ‘제갈량(諸葛亮)’ = 지혜와 꾀가 넉넉하고 충심이 한결같은 사람, 파생 표제어 ‘일이 끝난 뒤의 제갈량’(事後諸葛亮) 등 | 확인 | S91 “사람됨이 지혜가 넉넉하고 꾀가 많으며 충심이 한결같다”(為人足智多謀,忠心耿耿) | 사전 정의 자체가 1차 | “구두장이 셋이면 제갈량보다 낫다”(三個臭皮匠,勝過諸葛亮)도 표제어 |
| C150 | 브리태니커는 그를 촉한 창건자 유비의 이름난 참모로 정의 | 미확인 | S92 “celebrated adviser to Liu Bei, founder of the Shu-Han dynasty”(발췌) | 없음 | 페이지 403 |
| C151 | 중국 통편판 중학 어문 9학년 하권 제6단원에 「출사표」 수록. 과 번호 22/23 상충 | 미확인 | S93 쉐커왕 “통편판 9학년 하권 제6단원 23 출사표”(발췌) | S93 인자오서 교사의 집 “9학년 하권 22 출사표”(발췌) | 출판사 공식 목차 미대조 |
| C152 | 대만 108 과강 고교 국어문 추천 문언문 15편에 「출사표」 포함 | 미확인 | S94 대학문 “5 출사표 제갈량 한위육조”(발췌) | 관건평론망·보습 교재 목록(발췌) | 교육부 원문 미열람 |
| C153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누적 출하: 2025-01·04 “800만 본 이상” → 2025-10-27 “950만 본 이상”(공표 시점 값) | 확인 | S95 데이터북 p.6 “삼국지 950만 본 이상”(三國志 950万本以上) · 결산 자료 p.23 “800만 본 이상”(800万本以上) · 각주 “각 시리즈 누적 본수를 공표한 시점의 수치” | 공식 IR 공표치 자체가 1차 | 2026년 4·7월 자료엔 시리즈 표 없음 |
| C154 | 2021-11-11 회사 발표 “시리즈 세계 누적 800만 본” | 부분 확인 | S96 파미통 2021-11-15 “시리즈 세계 누적 본수는 무려 800만 본” | S95 2025-01 IR 800만 본 이상과 정합 | 업계지 보도 경유 |
| C155 | ‘정군산 무덤을 발굴하니 깃털 부채 하나만 나왔다’는 이야기는 발굴 기록 없이 “~라 한다”로만 유통 | 미확인 | S7 무후묘 항목에 발굴 언급 없음 | 유포 글(즈후) 자체가 ‘~라 한다’(据说)로 서술 | 부재 주장 |
| C156 | 오장원 제갈량묘(廟)는 산시성급 보호단위(1992-04-20)이며 1264년 창건설은 1차 근거 미확인 | 미확인 | S97 바이두백과(발췌) |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목록 검색 대조(전수 대조 아님) | |
| C157 | 1971년 무후사 입장권 5펀(0.05위안) — 시민 증언 | 부분 확인 | S98 쒀후/화시두시바오 2005-06-10(웨이백 2006-03-18 캡처) “1971년 무후사박물관 입장권은 5펀이었다” | 없음 | 공식 가격표 아님 |
| C158 | 2005-07-01 보통권 30 → 58위안(우편엽서형 60, 연간권 100), 청두시 물가국 승인. 2004년 청문회안(60위안 다수 지지)과 최종가가 다름 | 확인 | S99 신랑/청두상바오 2005-06-09 “보통 입장권을 30위안/장에서 58위안/장으로 조정”(普通门票由30元/张调整为58元/张) | S98 화시두시바오 “7월 1일 이후 58위안으로 오른다” | 58→60 전환 시점은 미상 |
| C159 | 2026년 현재 전가 50·반가 25·연간권 100위안 | 부분 확인 | S90 청두 번디바오(2026-08-13 게시) “전가 입장권 50위안/인, 반가 25위안/인, 연간권 100위안” | S67 공식 사이트 매표 안내 | |
| C160 | 양양 고융중 입장료: 2023년 후베이성 정부 가격 목록 성수기 67·비수기 45위안(관광차 20 별도) | 부분 확인 | S100 “융중풍경구 샹청구 5A 시급 67 45 20” | 정부 가격 목록 자체가 1차 | 가격은 상한가(정부 정가). 한 시점뿐이라 계열 불성립 |
| C161 | 직백전 발행 시작은 사서에 명기 없음: 214년설(정황 추론) vs 221년 칭제 이후설 | 상충 | S24 “사서에 명확한 기록이 없다”(史书无明载) | S101 중국국가박물관 소장품 설명의 221년설(발췌) | |
| C162 | 2021년 1월 스핑크 차이나 경매에서 직백오수(뒷면 ‘위’) 한 닢 2,000홍콩달러 낙찰 | 부분 확인 | S102 lot CSS57A000284 “Sold for HK$2,000” | 없음 | 수수료 포함 여부 미표기, lot 일자는 경매 개시일로 추정 |
| C163 | 2026-06-28 중마오성자 경매에서 직백오수 청동 거푸집 모범이 낙찰 165만·수수료 포함 189.75만 위안 | 부분 확인 | S103 서우시 수장망 2026-06-28 “165만 위안 낙찰, 수수료 포함 189.75만 위안 성교”(165万元落槌,含佣189.75万元成交) | 없음(경매사 도록 미열람) | 동전이 아니라 모범. 진위 논의 미확인 |
ax4 연표
눈금은 사건 밀도에 맞췄다. 생애(207–234)는 연·월·일 단위로, 사후 1,800년은 굵게 적는다. 양력 날짜는 율리우스력이고, 음력 월·일은 ‘음력’이라 표시했다. 정밀도는 사료가 주는 만큼만 적는다. 사건 수는 27개이며 한 사건을 쪼개 개수를 채우지 않았다.
- 181낭야 양도에서 출생(사망 나이에서 역산)생일은 어느 1차 사료에도 없다. C2
- 207(추정)유비의 세 번 방문, 융중대형주·익주를 차지하고 손권과 맺는 촉한의 설계도. 연도는 역산·편년값이다. C12 C14
- 208시상에서 손권을 설득, 손·유 동맹 → 적벽삼국 정립의 출발점. 전투 자체에서 그의 역할은 사서에 없다. C15 C16
- 214 여름성도 평정, 군사장군·좌장군부 서리익주를 얻어 융중대의 절반이 실현됐다. C17
- 221-05-15유비 즉위, 승상 임명촉한 행정의 정점에 섰다. C19
- 223-06-10유비가 영안에서 사망, 탁고 → 무향후·개부·익주목나라 전체의 실권이 그에게 넘어갔다. C22 C23
- 225 봄–겨울남중 원정, 네 군 평정후방을 안정시켜 북벌의 전제를 만들었다. C24
- 227 (음력 3월)출사표를 올리고 한중에 주둔연도가 명시된 그의 가장 이른 장문. C27
- 228 봄1차 북벌, 가정 패전, 스스로 세 등급 강등가장 큰 기회를 잃었다. C28
- 231 (음력 2–8월)기산 원정, 목우 운송, 장합 전사, 이엄 폐출물류 혁신과 법 집행이 한 원정에 겹쳤다. C32 C33
- 234 음력 8월 (09-11~10-10)오장원 군중에서 병사, 시호 충무후북벌이 끝났다. C35 C41
- 263 봄 · 겨울면양에 첫 공식 사당 → 아들 제갈첨이 면죽에서 전사추모가 제도화되고, 같은 해 아들이 나라를 지키다 죽었다. C43 C46
- 274-03-25진수가 『제갈씨집』 24편을 진 조정에 올림적국이었던 진이 그의 글을 공식 편찬했다. C47
- 304–306진남장군 유홍이 융중의 옛집에 비를 세움융중 기념의 가장 이른 기록. C142
- 429배송지가 『삼국지』 주를 올리며 곽충의 일화를 허구로 판정정사와 전승을 가르는 첫 비판적 대조. 표문 날짜는 연구서 인용 기준(원문 미대조). C143 C81
- 760 봄두보가 성도에서 「촉상」을 지음‘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죽은’ 충신상의 원형. C69
- 809성도 무후사 ‘삼절비’ 건립성도에 완전히 남은 유일한 당비로 소개된다. C144
- 1145『삼국사기』 사론이 을파소 등용을 유비–공명에 견줌이번 조사에서 확인한 가장 이른 한국 사서의 이름 언급. C83
- 1390 또는 1391촉헌왕 주춘이 성도 무후사를 소열묘에 합침군주의 사당 안에서 신하가 더 유명해지는 역전의 시작. C115
- 1569 음력 6월 20일기대승이 경연에서 『삼국지연의』를 비판연의가 한국 문헌에 처음 등장. C87
- 1603 또는 1605선조의 명으로 평안도 영유에 제갈량 사당 건립조선 왕실이 제사하는 대상이 됐다. C97
- 1689–1692일본 첫 번역 『통속삼국지』 간행일본 수용의 출발점. C119
- 1961-03-04성도 무후사,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국가 문화재 체계에 편입. C115
- 1985-12-10코에이 게임 『삼국지』 1편 발매게임을 통한 세계 수용의 시작(발매일은 백과 기준). C122
- 1988이문열 평역 『삼국지』 출간한국 최다 판매 삼국지(출판사 발표 2,000만 부). C106
- 1996-11-20정군산 무후묘, 양양 고융중, 남양 무후사 동시 국보 지정국가가 ‘밭 갈던 곳’ 논쟁을 판정하지 않고 양쪽을 모두 인정했다. C113 C10
- 2008-07영화 『적벽』 1부 개봉(제갈량 역 가네시로 다케시)21세기 대중 형상의 대표(개봉 기록은 보도 기준). C125
ax5 정의
사전적 정의
제갈-량(諸葛亮) 「명사」 『인명』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정치가(181~234). 자(字)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忠武).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뜻풀이 첫 문장) C146
같은 사전은 ‘공명’을 “‘제갈량’의 자”, ‘제갈공명’을 “성과 자를 함께 이르는 말”로 올린다 C147. ‘출사표’ 항목은 그를 “촉나라의 재상”이라 불러 두 항목의 직함이 다르고, 출사표를 “뒤를 이을 왕에게” 올린 글이라 쓰지만 실제로는 이미 즉위한 후주에게 올린 글이다 C148. 대만 교육부 『중편국어사전 수정본』은 그를 “지혜가 넉넉하고 꾀가 많으며 충심이 한결같은”(足智多謀,忠心耿耿) 사람으로 정의하고, 파생 표제어로 ‘일이 끝난 뒤의 제갈량’(事後諸葛亮) 등을 싣는다 C149. 브리태니커는 그를 “유비의 이름난 참모”로 소개한다(미확인) C150.
관할별 공식 서술
법령·규제상의 정의는 해당 없음이다. 역사 인물은 법적 정의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신 공교육에서 그를 다루는 방식을 관할별로 비교한다.
| 관할 | 확인한 문서 | 서술 요지 | 한계 |
|---|---|---|---|
| 대한민국 | 국사편찬위원회 ‘역대 국사교과서’ 고교 세계사(3차 교육과정) | ‘유비의 촉’만 나오고 제갈량 이름은 없음 C108 | 1970년대 교과서 1종. 현행 교과서와 한문 교과의 출사표 수록 여부는 미상 |
| 중화인민공화국 | 통편판 중학 어문 9학년 하권 제6단원 | 「출사표」를 문언문 과문으로 수록한 것으로 교재 자료에 나옴(미확인) C151 | 과 번호(22 또는 23)가 자료마다 다르고 출판사 공식 목차는 미대조 |
| 중화민국(대만) | 108 과강 고교 국어문 추천 문언문 15편 | 「출사표」가 한·위·육조 시기 추천 선문으로 보도됨(미확인) C152 | ‘추천’일 뿐 필수는 아님. 교육부 원문 미열람 |
실용적 의도
현장에서 ‘제갈량’이라고 할 때 의도하는 바는 사전 정의와 방향이 다르다. 한국어에서는 ‘출사표’(출마 선언)로, 중국어에서는 ‘지혜의 대명사’(“구두장이 셋이면 제갈량보다 낫다”)로 쓰인다 C149 C110. 사전은 그를 ‘정치가’로, 대중어는 ‘책략가’로 부른다. 흥미롭게도 정사가 그리는 모습은 대중어보다 사전 쪽에 가깝다. 진수는 그의 장점을 전장의 기모가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 재간에서 찾았다 C80.
ax6 미래 전망
1,800년 전 인물의 ‘미래’는 두 경로로 움직인다. 새 물증(발굴·문헌)과 수용의 매체다. 아래 시나리오는 확인된 사실과 [가정]을 문장 단위로 구분했다. 근거 있는 확률 수치가 없으므로 확률은 붙이지 않는다.
전망의 바탕이 되는 사실
- 정군산 무후묘는 1996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고, 이번 조사에서 발굴 기록은 찾지 못했다. 2024–2026년 산시성 발굴 발표 보도에서도 관련 항목은 보이지 않았다(미확인) C113 C126.
- 그의 생전 금석문·간독은 확인된 것이 없다 C128. 그의 글은 전하지 않는 『제갈씨집』의 목록과 『삼국지』·배송지 주의 인용으로만 남아 있다 C47.
- 보도에 따르면 몐현은 2025년 정부공작보고에서 ‘정군산 제갈 문화관광구’의 5A급 창건을 밝혔다. 성도 무후사는 2025년 5월 AI 디지털 휴먼을 공개했고, 2027년 ‘유비와 제갈량 군신 합동전’을 준비 중인 것으로 조달 공고에 나온다(미확인) C126.
- 성도 무후사 관람객은 2023년 452.7만 명에서 2025년 603만 명으로 늘었다 C117. 게임 시리즈 누적 출하는 2025년 1월 800만 본 이상에서 같은 해 10월 950만 본 이상으로 공표치가 바뀌었다 C153.
- 2026년 7월 애니메이션 『삼국 제1부』가 개봉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C126. [가정] 시리즈물이라 제갈량의 비중 있는 등장은 후속편일 것이다.
시나리오
A. 성지의 관광·디지털화가 이어진다
조건 — 몐현의 5A급 창건과 성도 무후사의 디지털 사업이 계획대로 진행된다.
귀결 — [가정] 추모 공간이 ‘사당’에서 체험형 문화관광지로 옮겨 가고, 관람객이 2025년의 603만 명을 넘어 증가한다.
근거 — 2025 보고서·AI 휴먼·2027 특별전 C126 · 관람객 증가 C117.
무효화 신호 — 2027년까지 정군산 관광구의 5A 지정이 발표되지 않거나, 성도 무후사 연간 관람객이 2025년 수준 아래로 떨어진다.
ax7 약한·미검증 주장과 그 해석
아래는 밖에서 자주 만나지만 근거가 약한 주장이다. 지우지 않고 모아 두되, 어느 해석도 채택하지 않는다.
| 주장 | 어디서 도는가 | 왜 약한가 | 가능한 해석들 |
|---|---|---|---|
| 사망일은 234년 8월 28일(양력 10월 8일) | 사전·백과 전반 | 정사·배송지 주에 날짜가 없고, 청대 지방지 → 민국 인용 → 현대 사전의 경로로만 추적된다 C36 | ① 지방지가 본 이른 전승의 보존 ② 제사일을 기일로 삼은 후대 관행 ③ 편찬자의 추정 |
| 생일은 음력 7월 23일(또는 4월 14일) | 명인 생일표·족보 | 두 전승이 서로 다르고 둘 다 1차 근거가 없다 C2 | ① 문중 제사일 ② 근대 편찬물의 창작 |
| 아내의 이름은 황월영(黃月英) | 드라마·게임·대중서 | 정사·배송지 주에 이름이 없다. 평서(評書) 기원설도 ‘혹은’이 붙은 추정이다 C11 | ① 근대 강담의 창작 ② 민간 족보 전승 |
| 이순신의 시호 ‘충무’는 제갈량을 본뜬 것 | 블로그·대중 강연 | 같은 시호를 받은 조선인이 여럿이고, 의도적 참조를 보여 주는 1차 사료가 없다 C96 | ① 제갈량과 무관한 시법상 선택 ② 제갈량 존숭 문화의 간접 영향 |
| 정군산 무덤을 발굴하니 깃털 부채 하나만 나왔다 | 중국 인터넷 글 | 발굴 기록 자체가 없고, 유포 글도 “~라 한다”로 적는다 C155 | ① 박장(薄葬) 유언의 극화 ② 창작 |
| 성도 무후사는 305년에 창건되었다 | 도서관 자료·관광 안내 | 특정 연도를 뒷받침하는 1차 근거를 찾지 못했다. 송대 지리서는 이웅의 칭왕 무렵이라고만 적는다 C114 | ① 이웅 칭왕(304)에서 파생한 추정 ② 일서(佚書) 『익주기』 인용 |
| 중국 선전부가 1990·2003년 ‘밭 갈던 곳’ 논쟁을 금지했다 | 지역 매체 글 | 문건 원문·문서 번호가 없다 C118 | ① 비공개 행정 지도의 와전 ② 우표·교과서 사건의 과장 |
| 오장원 제갈량묘(廟)는 1264년에 처음 세워졌다 | 백과 서술 | 1차 근거를 확인하지 못했다 C156 | ① 원대 중건 기록의 혼동 ② 지방지 전승 |
| 이덕무가 연의의 칠종칠금 대목에서 책을 던졌다 | 블로그 | 원문 위치가 제시되지 않았다 C89 | ① 문집 속 일화의 와전 ② 창작 |
초선차전·동남풍·공성계·칠종칠금·칠성등 등 연의 장면의 판정은 ax2 표에, 만두·제갈채·공명등의 기원은 본문 표에 모았다.
ax8 가치·가격 추이
사람에게는 시장 가격이 없다. 그래서 이 축은 그에게 직접 묶인 거래 대상의 시계열을 만든다. 날짜가 있는 공식가가 5개 이상 모인 것은 그를 모신 성도 무후사의 입장료뿐이었고, 이를 계열 A로 삼는다. 계열 B는 가격이 아닌 대리 지표(게임 시리즈 누적 출하)다. 그의 재상 시절 촉한이 발행한 직백오수 동전은 당대 액면만 확정되고 현대 거래가는 유형이 제각각이라 계열이 성립하지 않아 참고 표로만 둔다. 서로 성격이 다른 수치를 한 선으로 잇지 않는다. 이 절의 표가 수치의 기준이며, 차트는 표를 그린 것이다.
계열 A — 성도 무후사 성인 입장료 (2005–2026)
| ① 종류 | ② 시장·지역 | ③ 단위 | ④ | ⑤ |
|---|---|---|---|---|
| 공식 정가(시 물가 당국 승인가) | 중국 쓰촨성 청두, 무후사박물관 현장·공식 예약 | 위안(CNY) / 성인 1인 1회 | 명목(물가 조정 없음) | 해당 없음 |
| 일자 | 위안 | 조건 | 가격 유형 · 전거 |
|---|---|---|---|
| 2005-06(인상 직전) | 30 | 보통 입장권 | 공식 정가 C158 |
| 2005-07-01 | 58 | 보통 입장권(같은 날 우편엽서형 60, 연간권 100) | 공식 정가, 청두시 물가국 승인 C158 |
| 2018-10 직전 | 60 | 전표 | 공식 정가(인하 기사 속 이전 가격) C145 |
| 2018-10 | 50 | 전표 50, 반표 25 | 공식 정가(청두시 발개위 인하) C145 |
| 2026-08-13 게시 | 50 | 전가 50, 반가 25, 연간권 100 | 공식 정가(현지 생활정보 사이트 전재) C159 |
2004년 가격 청문회에서는 50·60·70위안 세 안 가운데 60위안 안이 다수 지지를 받았는데 최종 보통권은 58위안이었다. 58위안이 언제 60위안이 되었는지 보여 주는 문서는 찾지 못했다 C158. 양양 고융중(古隆中) 입장료는 2023년 후베이성 가격 목록의 성수기 67·비수기 45위안(관광차 20위안 별도) 한 시점만 공식 확인되어 계열로 쓰지 않았다 C160. 1971–2005년 사이 공식가는 미상이다. 가격 유형이 다른 참고값으로, 2005년 보도에 실린 시민 증언은 1971년 입장권을 5펀(0.05위안)으로 기억한다 C157.
계열 B (대리 지표)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세계 누적 출하
가격이 아니라 수량이다. 그가 핵심 인물인 대중 매체가 얼마나 소비되었는지를 보는 대리 지표로만 싣는다. 단위는 본(本)이고, 대부분 “이상”이 붙은 하한값이다. 회사 IR 각주는 “각 시리즈 누적 본수를 공표한 시점의 값”이라 적으므로 공표일이 곧 집계일은 아니다 C153.
| 공표일 | 누적 | 근거 유형 · 전거 |
|---|---|---|
| 2021-11-11 | 800만 본 | 회사 발표(업계지 보도 경유) C154 |
| 2025-01-27 | 800만 본 이상 | 1차 IR(결산설명회 자료) C153 |
| 2025-04-30 | 800만 본 이상 | 1차 IR C153 |
| 2025-10-27 | 950만 본 이상 | 1차 IR(데이터북) C153 |
2026년 4월·7월 결산 자료에는 시리즈 표가 없어, 기준일 현재 최신 1차 값은 950만 본 이상이다.
참고 — 촉한의 직백오수 (계열 불성립)
214년 성도 함락 뒤 유파의 건의로 주조된 직백전은 기존 오수전 100닢의 값을 액면으로 삼았다고 풀이된다 C53. 발행 시작이 214년인지 221년 유비 칭제 뒤인지는 자료가 갈린다 C161. 현대 거래가는 품목·시장·가격 유형이 모두 달라 한 계열로 묶을 수 없다. 2021년 1월 홍콩 스핑크 경매에서 뒷면에 ‘위(為)’ 자가 있는 한 닢이 2,000홍콩달러(수수료 포함 여부 미표기)에 팔렸고 C162, 2026년 6월 28일 베이징 중마오성자(中貿聖佳) 경매에서는 동전이 아니라 이 동전을 찍어 내는 청동 거푸집의 모범(母範)이 낙찰가 165만, 수수료 포함 189.75만 위안에 팔렸다 C163.
ax9 참고문헌과 조사 로그
참고문헌 (103건)
‘열람’ = 본문을 직접 열어 읽음 · ‘발췌만’ = 검색 결과 발췌만 봄. 백과사전(위키백과·브리태니커)은 1차 출처로 들어가는 이정표로 썼다. 고전 원문은 모두 위키문헌(zh.wikisource) 판본이며, 중화서국 점교본과는 대조하지 못했다. 모든 출처의 접근일은 2026-09-28이다.
- S1 중앙연구원(中央研究院), 『양천년 중서력 전환(兩千年中西曆轉換)』 질의 약 25건 + 율리우스 일수로 계산한 일간지 대조 · 열람
https://sinocal.sinica.edu.tw/ · 사용 위치: 개요 생애 ax4 ax1 ax7 ax6 - S2 진수(陳壽) 찬·배송지(裴松之) 주, 『삼국지(三國志)』 권35 촉서 제갈량전(본전·부전·「상제갈씨집표」·평, 배송지 주의 『위략』·『한진춘추』·『양양기』·『위씨춘추』·『촉기』·『원자』·『묵기』·『진양추』·곽충 오사 포함) · 열람
https://zh.wikisource.org/wiki/三國志/卷35 · 사용 위치: 생애 개요 ax1 ax4 ax7 ax2 촉한을 움직인 방식 ax6 평가: 주류 견해와 반대 입장 정사와 연의 사이 ax5 - S3 『삼국지』 권52 오서 제갈근전(배송지 주 『강표전』) ·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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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zh.wikipedia.org/zh-tw/出師表 · 사용 위치: 정사와 연의 사이 ax2 - S38 중국어 위키백과 「한진춘추(漢晉春秋)」(사고제요 인용) · 발췌만
https://zh.wikipedia.org/zh-hant/漢晉春秋 · 사용 위치: 평가: 주류 견해와 반대 입장 - S39 두보(杜甫), 「촉상(蜀相)」 · 열람
https://zh.wikisource.org/wiki/蜀相 · 사용 위치: 평가: 주류 견해와 반대 입장 ax4 - S40 쓰촨성 성정망 「두보가 성도에서(3) 금관성 밖에서 승상을 찾다」 · 징수후이(景蜀慧), 펑파이 · 발췌만
http://scdfz.sc.gov.cn/whzh/slzc1/content_46313 · 사용 위치: 평가: 주류 견해와 반대 입장 ax4 - S41 위수(魏收), 『위서(魏書)』 권43 모수지전(최호의 논평) · 열람
https://zh.wikisource.org/wiki/魏書/卷43 · 사용 위치: 평가: 주류 견해와 반대 입장 - S42 조익(趙翼), 『이십이사차기(廿二史劄記)』 권6 「진수론제갈량(陳壽論諸葛亮)」 · 열람
https://zh.wikisource.org/wiki/廿二史劄記/卷06 · 사용 위치: 평가: 주류 견해와 반대 입장 - S43 중국어 위키백과 「융중대(隆中對)」(톈위칭·주다웨이·소순·마오쩌둥 인용) · 열람
https://zh.wikipedia.org/zh-tw/隆中對 · 사용 위치: 평가: 주류 견해와 반대 입장 - S44 중국어 위키백과 「구국론(仇國論)」 · 바이두백과 같은 항목 · 발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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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 로그
범위와 방법
기준일 2026-09-28. 조사는 다섯 단위로 나누어 병렬로 진행했다. 생애와 1차 사료, 통치·발명·정사와 연의·평가, 한국·일본 수용과 정의, 최초 문헌·이름·유적·전망, 가격·가치 계열이다. 언어는 중국어 원전(번체·간체),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각각 검색했다. 『삼국지』·『자치통감』·『화양국지』·『진서』·『위서』·『수경주』는 위키문헌 원문을 직접 읽었다. 음력 날짜는 중앙연구원 변환기의 월·일과 율리우스 일수로 계산한 일간지가 모두 맞는 날만 채택했다(274년 2월 1일 계사, 223년 4월 기미 초하루, 234년 8월 28일 경진 모두 사료와 일치).
주요 질의 (발췌)
- 제갈량 사망 8월 28일 출처 고증(諸葛亮 卒 八月二十八日 出处 考证) / 충무사묘지 허백도인 원수산 명보(忠武祠墓志 虚白道人 袁树珊 命谱) / 선주 영안궁 사망 4월 계사, 그달에 계사가 없음(先主殂於永安宮 四月癸巳 是月無癸巳)
- 후출사표 진위 조운 건흥 7년 사망(後出師表 真偽 趙雲 建興七年卒) / 팔무 칠계 출처 장원 편의십육책(八務 七戒 出處 將苑 便宜十六策) / 목우유마 외바퀴 수레 사물기원(木牛流馬 獨輪車 事物紀原)
- 무후사 입장료 2005 인상 · 2018 인하 · 옛 입장권(武侯祠 门票 2005 调价 · 2018 降价 · 老门票) / 직백오수 낙찰가(直百五铢 成交价) / 코에이 삼국지 누적 출하(KOEI 三國志 累計出荷)
- 한국고전종합DB에서 제갈공명·출사표·영유 제갈·무후묘(諸葛孔明·出師表·永柔 諸葛·武侯廟) / 삼국지통속연의 선조 2년 기대승 / 출사표를 던지다 관용구 / 이순신 충무 시호 제갈량
- 무향후 무향 위치 논쟁(武乡侯 武乡 争议) / 몐현 무후묘 국보 미발굴(勉县武侯墓 国保 未发掘) / 촉한 쇠뇌 간독(蜀汉 弩机 简牍) / 2025–2026 정군산·무후사 디지털화·영화
막힌 곳
- ctext.org: 봇 검사 페이지가 떠서 우회하지 않았다. 『충무사묘지』·『삼국지평화』·제갈근전 배송지 주는 위키문헌·2차 수록문으로 대체하거나 발췌 수준에 머물렀다.
- 브리태니커·한국경제·관건평론망·Wiley(드 크레스피니)·더뉴스렌즈(이중톈): 403. NumisBids: Cloudflare 검증 페이지라 우회하지 않았다. 구취안위안디(古泉园地): 로그인 필요로 중단.
- 『표준국어대사전』 개별 항목 전체 보기와 관용구 화면: 스크립트 로딩 실패. 조선왕조실록 검색 URL: 404(개별 기사 페이지만 열림). 쓰촨성 문물국: 접속 거부. 중국신문망 쓰촨: 인코딩 손상.
- 산시대학 학보 진수 폄하 사건 논문 PDF: 스캔본이라 판독 불가. East Asian History PDF(드 크레스피니): 인증서 오류. 배송지 「상삼국지주표」 위키문헌 페이지: 404.
버린 후보와 이유
- “정군산에서 순직했다”(바이두): 오장원에서 죽었으므로 사실 오류.
- ‘밀가루에 사람 머리를 그려 제사’(만두), ‘잔돌을 모아 만들었다’(팔진도), 습착치 “행하지 않을 수 없는 데 법을 행한다”: 원문 자구와 달라 원문대로 고쳐 썼다.
- “이 책이 끌어온 것은 모두 거짓”을 『위략』에 대한 말로 적은 2차 자료: 실제로는 곽충에 대한 배송지의 평이라 귀속을 바로잡았다.
- 이중톈의 ‘뜻은 크나 재주는 성기다’ 인용, 선조의 향시 합격 취소, 정조가 ‘내 마음은 저울’을 벽에 걸었다는 이야기, 삼충사 비문 작성자: 출처가 없거나 비학술 단독이라 채택하지 않았다.
- 악비 서 전후출사표 탁본 경매가: 날짜 있는 경매 성교가 0건. 2009년 사적 거래 1건(진위 미확정)뿐이라 가격 계열에서 뺐다.
- 직백오수 온라인 플랫폼 거래가(수백~천여 위안, 발췌만·플랫폼과 수수료 불명), 1998년 무렵 코에이 판매 수치(PC판 약 110만·가정용 약 280만 본, 원 출처 미확인 3차 인용), 고융중 연도 불명 입장료: 가격 유형·출처가 불명확해 표에서 제외했다.
- 직백전 무게 감소 서술: 1차 고고 계량 자료와 대조하지 못해 본문에는 미확인 상태로만 두었다. 주유 사망 연도(210): 인용한 주유전에 연도가 없어 본문에서 뺐다.
- 루쉰 『중국소설사략』의 초판 연도: 1923년 상권설과 1925년 출판설이 엇갈려 연표 사건에서 뺐다.
남은 과제
- 『충무사묘지』 원문으로 ‘8월 28일’ 전승의 편자·연대 확인. 노필 『삼국지집해』의 “나이 스물일곱” 주석.
- 선조실록의 영유 사당 건립 기사(1603 또는 1605) 원문, 현종 대 사액명(포충·와룡) 원문 대조, 삼충사 개칭 연도.
- 성도 무후사 입장료 58위안 → 60위안 전환 시점과 1971–2005년 공식가. 『무후사지』·『청두만보』 아카이브.
- 드 크레스피니·킬리그루·톈위칭 원 논문과 원매·전대소의 「후출사표」 의고 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