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세네카의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읽기#

고대 로마 철학자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경-서기 65년)가 쓴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De brevitate vitae)는 시간과 인생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에세이로, 본 포스트는 영어나 다른 매개 언어를 거치지 않고 라틴어 원문에서 직접 한글로 번역 했습니다. 기존 번역 작품은 라틴어-이탈리어어-한글 혹은 라틴어-영어-한글의 직역이 아닌 번역의 번역본이므로 보통은 글의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릅니다.

(*라틴어-한글 직역본 있음: 2016 까치출판사 세네카의 대화)

이 고전적 작품은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글에서 세네카는 우리가 인생이 짧다고 불평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인생을 낭비하고 있다는 역설적 주장을 펼칩니다. “우리는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Non exiguum temporis habemus, sed multum perdidimus)“라는 그의 유명한 격언은 현대인의 삶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세네카는 로마 제국이 극도의 부와 권력을 누리던 시기에 활동했으며, 황제 네로의 스승이자 정치 고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외관 뒤에는 정치적 음모와, 사치, 그리고 도덕적 타락이 만연했습니다. 세네카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스토아 철학의 가치관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탐구했습니다. 스토아주의는 자연과의 조화, 이성적 판단, 감정의 절제를 강조하는 철학으로, 로마의 물질주의와 권력 지향적 문화에 대한 중요한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는 파울리누스라는 로마 고위 관리에게 헌정된 작품으로, 시간의 가치와 현명한 사용에 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세네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피상적인 활동, 무의미한 사교 행사,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에 낭비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반면, 그는 철학적 성찰, 자기 계발, 진정한 우정, 그리고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는 삶을 옹호합니다.

세네카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모순적 행동입니다. “당신들은 필멸자로서 모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불멸자처럼 모든 것을 욕망합니다.“라는 문장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는 인간의 역설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또한 그는 “멈춰야 할 때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는 것은 얼마나 늦은 일인가!“라고 외치며, 노년에 이르러서야 의미 있는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판합니다.

이 포스트에서는 로마 시대의 문화적, 정치적 맥락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텍스트의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라틴어 원문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네카의 이 작품이 오늘날 우리에게 특별히 의미 있는 이유는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기기와 소셜 미디어에 빼앗긴 시간, 소비주의와 업적 중심의 문화, 끊임없는 바쁨과 정신적 피로감 등은 세네카가 2000년 전에 비판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라틴어 원문의 철학적 깊이를 직접 한글로 옮김으로써, 그의 지혜는 우리가 시간과 관계를 재정립하고, 더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라틴어-한글 직역본을 통해 독자들은 고대 철학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원문의 깊이 그대로 발견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실천적 통찰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네카의 말처럼, “Satis longa vita et in maximarum rerum consummationem large data est, si tota bene collocaretur”(인생은 충분히 길고 가장 위대한 일들을 완수할 만큼 넉넉하게 주어졌습니다. 만약 그것이 모두 잘 사용된다면 말입니다). 이제 세네카의 시대를 초월한 지혜를 라틴어 원문의 정확한 한글 직역을 통해, 우리 각자의 시간을 어떻게 더 의미 있게 사용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

세네카의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 지식#

인물 소개: 세네카와 그의 시대의 주요 인물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경-서기 65년)#

세네카는 로마 제국 시대의 철학자, 정치가, 작가로, 스토아 철학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스페인 코르도바 출신으로, 로마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는 황제 네로의 스승이자 정치 고문으로 활동했으나, 후에 네로의 의심을 사서 자살을 강요받았습니다.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를 포함한 그의 철학적 에세이들은 삶의 지혜와 도덕적 가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으며, 그의 스토아주의 사상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파울리누스(Paulinus)#

세네카가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를 헌정한 인물로, 정확한 신원은 불분명하지만 로마의 고위 공직자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아마도 공공 곡물 공급을 관리하는 중요한 직책(praefectus annonae)을 맡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기원전 460년경-370년경)#

세네카가 “의사들 중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언급한 고대 그리스의 의사로, 서양 의학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삶은 짧고, 기술은 길다(Ars longa, vita brevis)“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기원전 384-322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학자로, 플라톤의 제자였습니다. 논리학, 생물학, 윤리학, 정치학 등 다양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세네카는 그가 인간의 짧은 수명에 대해 자연과 논쟁했다고 언급합니다.

소크라테스, 제논, 에피쿠로스 등#

세네카가 현자의 삶을 이야기하며 언급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로, 각각 다른 철학 학파를 대표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서양 철학의 아버지, 제논은 스토아학파의 창시자, 에피쿠로스는 쾌락주의 철학의 창시자입니다.

가이우스(칼리굴라), 술라, 마리우스, 폼페이우스 등#

로마의 정치적 혼란기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권력과 야망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예시로 언급됩니다. 칼리굴라는 광기로 악명 높은 황제였고, 술라와 마리우스는 내전을 벌인 장군들이었으며,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대립했던 위대한 장군이었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의 문화와 정치#

귀족 문화와 정치적 경쟁#

로마 사회는 엄격한 계급 체계와 정치적 경쟁이 특징이었습니다. 상류층 로마인들은 공직을 통해 명예(honor)와 위엄(dignitas)을 추구했으며, 이는 세네카가 비판하는 끝없는 야망과 경쟁의 배경이 됩니다. “고객(clientes)“과 “후원자(patronus)” 관계는 로마 사회의 핵심 구조로, 많은 수행원을 거느리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나타냈습니다.

공공 곡물 공급(annona)#

로마는 제국 전체, 특히 수도 로마의 시민들에게 곡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것을 중요시했습니다. 파울리누스가 맡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직책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했으며, 곡물 부족은 폭동과 정치적 불안을 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검투사 경기와 공공 오락#

로마인들의 삶에서 원형경기장의 검투사 경기와 같은 공공 오락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세네카는 이러한 오락에 대한 열광을 시간 낭비의 예로 들며 비판합니다. 부유한 로마인들은 이러한 행사를 후원함으로써 명성을 얻기도 했습니다.

스토아 철학#

세네카가 대표하는 스토아 철학은 자연과의 조화, 감정의 통제, 덕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이 철학은 로마의 전통적 가치인 자기 절제, 의무, 명예와 잘 어울려 엘리트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습니다. 세네카의 글에서는 진정한 지혜와 행복은 바깥 세계의 인정이 아닌 내면의 평화에서 온다는 스토아적 관점이 잘 드러납니다.

로마의 여가 개념(otium)#

로마인들에게 여가(otium)는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자기 계발과 철학적 사색을 위한 시간이었습니다. 세네카는 무의미한 활동으로 낭비되는 여가가 아닌, 지혜와 덕을 추구하는 진정한 여가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공적 의무(negotium)와 균형을 이루는 이상적인 여가는 로마 상류층의 문화적 이상이었습니다.

De brevitate vitae, 주요 내용 인용#

‘우리는 인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낭비하는 것이다’#

“Non exiguum temporis habemus, sed multum perdidimus. Satis longa vita et in maximarum rerum consummationem large data est, si tota bene collocaretur; sed ubi per luxum ac neglegentiam diffluit, ubi nulli bonae rei impenditur, ultima demum necessitate cogente, quam ire non intelleximus transisse sentimus. Ita est: non accipimus brevem vitam sed fecimus, nec inopes eius sed prodigi sumus. Sicut amplae et regiae opes, ubi ad malum dominum pervenerunt, momento dissipantur, at quamvis modicae, si bono custodi traditae sunt, usu crescunt: ita aetas nostra bene disponenti multum patet.”

라틴어 어휘 설명#

Non exiguum temporis habemus: ‘우리는 적은 시간을 가진 것이 아니다’

  • exiguum: 적은, 작은
  • temporis: 시간의 (속격)
  • habemus: 우리는 가지고 있다

sed multum perdidimus: ‘그러나 많은 것을 잃었다/낭비했다’

  • perdidimus: 우리가 잃었다, 낭비했다 (perdere의 완료형)

quam ire non intelleximus transisse sentimus: ‘지나가고 있음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것이 지나갔음을 우리는 느낀다’

  • quam: 그것을 (관계대명사)
  • ire: 가다, 지나가다 (불정법)
  • intelleximus: 우리는 이해했다
  • transisse: 지나간 것
  • sentimus: 우리는 느낀다

nec inopes eius sed prodigi sumus: ‘우리는 그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낭비하는 것이다’

  • nec: ~이 아니다
  • inopes: 부족한, 가난한
  • eius: 그것의
  • prodigi: 낭비하는, 방탕한
  • sumus: 우리는 ~이다

라틴어 원문 해석#

“우리는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인생은 충분히 길고 가장 위대한 일들을 완수할 만큼 넉넉하게 주어졌습니다. 만약 그것이 모두 잘 사용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사치와 무관심 속에 흘러가고, 어떤 좋은 일에도 쓰이지 않을 때, 마침내 마지막 필연적인 순간이 닥쳐서야 비로소 우리는 지나갔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시간이 지나갔음을 느끼게 됩니다. 실상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짧게 만든 것이며, 우리는 인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낭비하는 것입니다. 넉넉하고 왕성한 재산이 나쁜 주인에게 넘어가면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아무리 적은 재산이라도 좋은 관리인에게 맡겨지면 사용함으로써 늘어나듯이, 우리의 인생도 잘 배분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길게 펼쳐집니다.”

당신들은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간다#

“Tamquam semper victuri vivitis, numquam vobis fragilitas vestra succurrit, non observatis quantum iam temporis transierit; velut ex pleno et abundanti perditis, cum interim fortasse ille ipse qui alicui vel homini vel rei donatur dies ultimus sit. Omnia tamquam mortales timetis, omnia tamquam immortales concupiscitis.”

라틴어 원문 해석#

“당신들은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가며, 결코 자신의 연약함을 생각하지 않고, 이미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는지 관찰하지 않습니다. 마치 가득 차고 풍부한 것에서 잃어버리는 것처럼 시간을 낭비하지만, 그러는 동안 어떤 사람이나 물건에 바치는 그 날은 아마도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당신들은 필멸자로서 모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불멸자처럼 모든 것을 욕망합니다.”

멈춰야 할 때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는 것은 얼마나 늦은 일인가!#

“Quam serum est tunc vivere incipere cum desinendum est! Quae tam stulta mortalitatis oblivio in quinquagesimum et sexagesimum annum differre sana consilia et inde velle vitam inchoare quo pauci perduxerunt!”

라틴어 원문 해석#

“멈춰야 할 때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는 것은 얼마나 늦은 일인가! 건전한 계획을 50세와 60세까지 미루고, 소수만이 도달한 그 시점에서 삶을 시작하고자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필멸성의 망각인가!”

라틴어 전문 번역#

세네카의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I.#

대부분의 인간들은, 파울리누스여1, 자연의 인색함에 대해 불평합니다. 우리가 아주 짧은 시간만 세상에 태어나고,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빠르게, 너무나 급속하게 흘러가서 극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삶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삶이 끝나버린다고 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이런 공통된 불행에 대해 일반 대중이나 무지한 군중만 한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감정은 위대한 인물들의 불평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가장 위대한 의사2의 외침이 있었습니다: “인생은 짧고, 기술은 길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게 자연과 언쟁을 벌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이 동물들에게는 너무나 관대하여 5세기에서 10세기까지 살게 해주는데, 수많은 위대한 일을 위해 태어난 인간에게는 훨씬 더 짧은 시간을 정해놓았다고 비난했습니다.

우리는 시간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입니다. 인생은 충분히 길고 가장 위대한 일들을 완수할 만큼 넉넉하게 주어졌습니다. 만약 그것이 모두 잘 사용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사치와 무관심 속에 흘러가고, 어떤 좋은 일에도 쓰이지 않을 때, 마침내 마지막 필연적인 순간이 닥쳐서야 비로소 우리는 지나갔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한 시간이 지나갔음을 느끼게 됩니다. 실상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짧은 인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짧게 만든 것이며, 우리는 인생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낭비하는 것입니다. 넉넉하고 왕성한 재산이 나쁜 주인에게 넘어가면 순식간에 사라지지만, 아무리 적은 재산이라도 좋은 관리인에게 맡겨지면 사용함으로써 늘어나듯이, 우리의 인생도 잘 배분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길게 펼쳐집니다.

II.#

우리가 자연에 대해 불평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연은 자비롭게 행동했습니다. 인생은, 당신이 그것을 사용할 줄 안다면 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만족할 줄 모르는 탐욕에 사로잡히고, 어떤 이는 무익한 노동에 바쁜 부지런함에 집착하며, 어떤 이는 술에 젖어 있고, 어떤 이는 무기력함에 무감각합니다. 어떤 이는 항상 타인의 판단에 의존하는 야망에 시달리고, 어떤 이는 무모한 욕망에 이끌려 이익을 얻고자 모든 땅과 바다를 헤매고 다닙니다. 어떤 이들은 군사적 열망에 시달려 늘 타인의 위험이나 자신의 위험에 대해 초조해합니다. 어떤 이들은 자발적인 노예 상태로 권력자들에 대한 감사할 줄 모르는 숭배에 소모됩니다. 많은 이들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갈망하거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염려하느라 시간을 보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확실한 목표 없이 변덕스럽고 일관성 없이 자신에게도 마음에 들지 않는 가벼움으로 새로운 계획을 좇아 헤맵니다. 어떤 이들은 항로를 정할 방향이 없어 무감각하고 하품하는 운명에 붙잡혀, 위대한 시인3이 신탁처럼 말한 것이 사실임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나머지 모든 공간은 인생이 아니라 단지 시간일 뿐이다.”

죄악들이 사방에서 압박하고 포위하여 다시 일어나거나 진실을 바라볼 수 있게 눈을 들어올릴 수 없게 합니다. 그들을 짓누르고 욕망에 빠뜨려 자신에게 돌아올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만약 때때로 우연히 안식을 얻는다면, 마치 폭풍 후에도 파도가 이는 깊은 바다와 같이 그들은 계속 흔들리며, 그들의 욕망으로부터 결코 휴식을 취하지 못합니다. 제가 말하는 이들이 악행이 명백한 자들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의 행복을 향해 사람들이 달려가는 이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재산으로 질식합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재산이 무거운 짐이 되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웅변과 매일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려는 노력이 그들의 피를 빨아먹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끊임없는 쾌락으로 창백해지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주변에 몰려드는 고객들이 자유로운 시간을 전혀 남겨주지 않는지! 모든 이들을 가장 낮은 자부터 가장 높은 자까지 살펴보십시오: 이 사람은 변호사를 찾고, 저 사람은 출석하고, 저기 사람은 위험에 처해 있고, 저쪽 사람은 변호하고, 또 다른 사람은 판결합니다. 아무도 자신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모두가 서로를 위해 소모됩니다. 그들의 이름이 암기되는 이들에 대해 물어보십시오. 그들을 이런 특징으로 구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저 사람의 추종자이고, 이 사람은 저 사람의 추종자입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어떤 이들의 분노는 극도로 어리석습니다. 그들은 자신에게 접근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시간을 내주지 않은 권력자들의 오만함에 대해 불평합니다! 자신에게는 결코 시간을 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오만함에 대해 불평할 용기가 있습니까? 그 권력자는, 누구든지, 오만한 표정을 지었을지라도 당신을 한번쯤은 쳐다보았습니다.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당신을 자신의 곁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결코 자신을 바라보거나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의무를 다른 이에게 책임 전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이 그러한 일을 할 때, 그것은 다른 이와 함께 있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III.#

가장 빛나는 천재들이 이 점에 동의한다 해도, 그들은 결코 인간 정신의 이러한 어둠에 충분히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토지가 다른 이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경계에 관한 사소한 분쟁이 있을 경우 돌과 무기를 들고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침범하는 것을 허락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삶의 미래 소유자들을 스스로 초대합니다. 누구도 자신의 돈을 나누려 하지 않지만, 모두가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분배하는지! 그들은 재산을 지키는 데는 엄격하지만, 시간의 낭비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관대합니다. 이는 유일하게 인색함이 미덕이 되는 것입니다.

노인들 무리에서 누군가를 데려와 말해봅시다: “당신은 인간 수명의 끝에 도달했군요. 100세 또는 그 이상이군요. 자, 당신의 나이를 계산해 보세요. 채권자, 연인, 왕, 고객이 당신의 시간에서 얼마나 가져갔는지, 아내와의 다툼, 노예 다루기, 도시를 오가는 공적인 일에 얼마나 소비했는지 계산해 보세요. 우리가 스스로 만든 질병들을 더하고, 쓸모없이 흘러간 시간을 더하면, 당신은 생각보다 훨씬 적은 햇수를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확실한 목표를 가졌던 때를 기억해 보세요. 계획대로 흘러간 날이 몇이나 되는지, 자신을 위한 시간이 있었던 때, 표정이 변하지 않았던 때, 마음이 두려움 없었던 때, 그 긴 세월 동안 이룬 업적이 무엇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신도 모르게 당신의 삶을 망쳐놓았는지, 공허한 슬픔, 어리석은 기쁨, 탐욕스러운 욕망, 사교적 대화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빼앗아갔는지, 당신에게 얼마나 적은 시간이 남았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당신이 때 이르게 죽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인이 무엇입니까? 당신들은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결코 자신의 취약함을 생각하지 않고, 이미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갔는지 관찰하지 않습니다. 마치 가득 차고 넘치는 것에서 잃어버리는 것처럼 시간을 낭비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나 어떤 것에 바치는 그 하루가 마지막 날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들은 죽을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불멸의 존재처럼 모든 것을 욕망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50세부터는 은퇴하겠다, 60세가 되면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더 긴 삶에 대한 보증을 누구에게서 받았습니까? 누가 당신이 계획한대로 일을 진행할 수 있게 해줄까요? 당신이 쓸모 없어진 나머지 삶만을 위해 남겨두고, 어떤 것에도 쓸 수 없는 시간만을 좋은 정신 상태를 위해 할당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습니까? 멈춰야 할 때 비로소 살기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늦은 일인가요! 50세나 60세가 될 때까지 합리적인 계획을 미루고, 소수만이 도달하는 그 나이에서 삶을 시작하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망각인가요!

IV.#

당신은 가장 권력 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휴식을 바라고, 찬양하고, 자신들의 모든 선(善)보다 더 선호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때때로 안전하게 할 수 있다면 그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외부의 어떤 것도 공격하거나 흔들지 않더라도, 운명은 그 자체로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신(神)들이 다른 어떤 이보다 더 많은 것을 베풀어준 신성한 아우구스투스도 끊임없이 자신을 위한 평온을 기도하고 공직으로부터의 휴가를 청했습니다. 그의 모든 담화는 항상 휴식에 대한 희망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비록 거짓일지라도 달콤한 위로, 즉 언젠가는 자신을 위해 살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노고를 달랬습니다. 그가 원로원에 보낸 서한에서, 그의 휴식이 존엄성을 잃지 않고 그의 이전 영광과 모순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이러한 말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약속하는 것보다 실행하는 것이 더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나의 간절히 바라는 시간에 대한 열망이 나를 이끌어, 현실의 기쁨이 아직 지체되고 있으므로, 말의 달콤함으로부터 약간의 기쁨을 미리 맛보게 하였습니다.”

휴식은 너무나 큰 것으로 보였기에, 실제로는 누릴 수 없어도 생각으로나마 미리 취했습니다. 모든 것이 자신 하나에게 달려 있다고 보았던 그, 인간과 국가의 운명을 결정했던 그는 자신의 위대함을 벗어날 수 있는 그 날을 가장 즐겁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전 세계에 빛나는 이 모든 선(善)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짜내는지, 얼마나 많은 숨겨진 걱정들을 덮고 있는지 경험했습니다. 먼저 시민들과, 그 다음 동료들과, 마지막으로 친척들과 무장 충돌을 해야 했으며, 육지와 바다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마케도니아, 시칠리아, 이집트, 시리아, 아시아, 그리고 거의 모든 해안을 전쟁으로 휩쓸고, 로마인의 학살로 지친 군대를 외국 전쟁으로 돌렸습니다. 알프스를 평정하고 제국의 평화 한가운데 있는 적들을 완전히 정복하며, 라인강, 유프라테스강, 다뉴브강 너머로 국경을 확장하는 동안, 로마 시 안에서는 무레나, 카에피오, 레피두스, 에그나티우스 등이 그를 향해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 이들의 음모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의 딸과 많은 귀족 청년들이 간통의 맹세로 맺어져 그의 쇠약한 노년을 위협했고, 다시 한번 안토니우스와 함께한 여인4이 두려울 만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상처들을 살과 함께 잘라냈지만, 다른 상처들이 다시 자라났습니다. 마치 너무 많은 피로 가득 찬 몸처럼, 항상 어느 부분에선가 파열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휴식을 바랐고, 이러한 희망과 생각 속에서 그의 수고가 잦아들었습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들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자의 소원이었습니다.

V.#

마르쿠스 키케로는 카틸리나와 클로디우스, 그리고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 - 일부는 공개적인 적, 일부는 의심스러운 친구 - 사이에서 흔들리며, 국가와 함께 파도를 타고 가라앉는 국가를 붙들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끌려가, 좋은 시기에도 평화롭지 않고 역경에도 견딜 수 없었던 그는 정당한 이유로 끝없이 칭찬받던 자신의 집정관직을 얼마나 자주 저주했는지 모릅니다! 폼페이우스의 아버지가 패배하고 그의 아들이 스페인에서 부서진 군대를 회복하려 할 때, 아티쿠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얼마나 슬픈 말을 표현했는지요! “무엇을 하느냐고요? 투스쿨룸에서 반쯤 자유롭게 머물고 있습니다.” 이어서 그는 과거를 한탄하고 현재를 불평하며 미래에 대해 절망하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키케로는 자신을 ‘반쯤 자유롭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현자는 결코 그런 비천한 이름으로 자신을 낮추지 않을 것이며, 결코 반쯤 자유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항상 완전하고 확고한 자유를 누리며,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다른 모든 것보다 높습니다. 운명보다 더 높은 사람 위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VI.#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거칠고 격렬한 사람으로, 새로운 법과 그라쿠스의 악5을 일으켜 이탈리아 전체의 거대한 무리에 둘러싸여, 처리할 수도 없고 일단 시작한 후에는 중단할 자유도 없는 일의 결과를 내다보지 못하고, 태초부터 불안했던 삶을 저주하며 어린 시절에도 결코 휴일이 없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는 아직 미성년자일 때부터 피고인을 판사들에게 추천하고, 재판정에서 그의 영향력을 개입시켜 일부 재판을 좌우할 만큼 실제적인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런 어린 야망이 어디로 터져 나갈지! 그렇게 조숙한 대담함이 개인과 국가 모두에게 큰 해악으로 발전할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논쟁을 좋아하고 법정에서 무거운 존재였던 자신에게 휴일이 없었다고 늦게서야 한탄했습니다.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습니다. 그는 사타구니에 갑작스러운 상처를 입고 쓰러졌는데, 어떤 이는 그의 죽음이 자발적이었는지 의심하지만, 때맞춘 것이었다는 데는 의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행복하게 보였지만 자신의 모든 행동을 혐오하며 자신에 대해 진실한 증언을 한 더 많은 사람들을 언급하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으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말이 터져 나온 후에도, 감정은 습관으로 되돌아갑니다.

진정으로, 당신의 인생이 천 년 이상 지속된다 해도, 그것은 가장 좁은 범위로 줄어들 것입니다. 이러한 악덕들은 모든 세기를 삼킬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비록 자연이 빠르게 흐르게 하지만 이성이 확장시키는 이 공간은 필연적으로 당신에게서 빠르게 도망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그것을 잡지도, 붙들지도, 가장 빠른 것의 지연을 만들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것이 쓸모없고 회복 가능한 것처럼 지나가게 내버려둡니다.

VII.#

첫째로, 저는 오직 포도주와 쾌락에만 시간을 바치는 사람들을 헤아려 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더 수치스럽게 바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은, 비록 허영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더라도, 적어도 아름다운 방식으로 잘못을 저지릅니다. 탐욕스러운 자들, 화를 잘 내는 자들, 부당한 증오심이나 전쟁을 벌이는 자들을 모두 열거하더라도, 이들 모두는 더 남성다운 방식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식욕과 욕정에 빠진 자들의 타락은 불명예스럽습니다.

이들의 모든 시간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이 계산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음모를 꾸미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두려워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아첨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아첨받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보증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만찬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보십시오. 이제 이런 만찬도 의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그들의 악이든 선이든 그들이 숨 쉴 틈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모두가 동의하는 바, 바쁜 사람은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웅변도, 자유로운 학문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산만한 정신은 아무것도 깊이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것을 마치 억지로 주입된 것처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바쁜 사람에게 가장 적은 것은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이보다 어려운 지식은 없습니다. 다른 기술의 교수들은 어디에나 많이 있으며, 이 중 일부는 어린 아이들도 충분히 이해하여 가르칠 수 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것은 평생 배워야 하며, 더 놀라운 것은 평생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고 부, 의무, 쾌락을 포기한 후, 오직 한 가지 목표, 즉 살아가는 법을 알기 위해 노년까지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중 많은 이들이 아직 알지 못한다고 고백하며 삶을 떠났습니다. 하물며 이들은 어떻겠습니까?

내 말을 믿으십시오. 인간의 오류를 초월한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시간에서 조금도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가장 깁니다. 왜냐하면 어떤 시간이든 그는 모두 자신을 위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방치되거나 쓸모없이 남겨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다른 이의 지배 아래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시간의 가장 검소한 관리인으로서, 시간과 교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시간이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삶에서 많은 것을 대중에게 내준 사람들에게는 필연적으로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당신은 그들이 때때로 자신의 손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큰 행운으로 고통받는 이들 중 대부분이 고객들의 무리 속에서, 소송 중에, 또는 다른 명예로운 고통 속에서 때때로 외치는 것을 들을 것입니다: “나는 살 수가 없다!”

왜 그럴 수 없을까요? 당신을 자신에게 부르는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 피고인은 당신에게서 얼마나 많은 날을 빼앗았습니까? 그 후보자는 얼마나 많이? 상속자를 장사지내느라 지친 그 노파는 얼마나 많이? 탐욕을 자극하기 위해 병을 가장한 그 사람은 얼마나 많이? 당신을 우정이 아니라 겉치레로 여기는 그 권력 있는 친구는 얼마나 많이? 당신의 일상을 정리하고 계산해 보십시오. 당신은 극히 적은 시간, 그것도 가치 없는 시간만이 당신에게 남아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던 관직에 오른 사람은 그것을 내려놓고 싶어하며 계속해서 말합니다: “이 해가 언제 끝날까?” 그 사람은 많은 비용을 들여 얻게 된 게임을 준비하며 말합니다: “언제 이것들을 벗어날 수 있을까?” 법정 변호사는 전체 법정에서 인기가 많고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까지 몰려듭니다. 그는 말합니다: “언제 사건이 종결될까?” 각자는 자신의 삶을 서두르고, 미래에 대한 갈망으로 고통받으며, 현재에 지쳐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시간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 모든 날을 마지막인 것처럼 정리하며, 내일을 바라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새로운 시간이 어떤 새로운 쾌락을 줄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이 알려져 있고, 모든 것이 포화 상태까지 경험되었습니다. 그 외에는, 운명이 원하는 대로 정해질 것입니다. 삶은 이미 안전합니다. 여기에 더할 수는 있어도, 빼앗길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배부르고 가득 찬 사람에게 음식을 더하는 것처럼 더해질 수 있습니다: 그는 원하지 않지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누군가의 흰 머리카락이나 주름 때문에 그가 오래 살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오래 살지 않았습니다. 단지 오래 존재했을 뿐입니다. 폭풍이 항구에서 그를 붙잡아 이리저리 흔들고, 다양한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같은 공간에서 원을 그리며 돌았다면, 그가 많이 항해했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그는 많이 항해한 것이 아니라, 많이 흔들렸을 뿐입니다.

VIII.#

시간을 요청하는 사람들과 요청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순순히 응하는지 볼 때 늘 놀랍습니다. 둘 다 시간이 요청된 이유는 생각하지만, 시간 자체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아무것도 요청되지 않고,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것 중 가장 귀중한 것을 가지고 놀고 있습니다. 그들은 속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비물질적이어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가장 하찮게 여겨지며, 심지어 거의 가치가 없게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연간 봉급과 선물을 가장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그것들을 위해 자신의 노동이나 수고나 주의를 판매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시간에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마치 공짜인 것처럼 무분별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동일한 사람들이 아플 때, 만약 죽음의 위험이 가까이 다가온다면, 의사의 무릎을 만지며, 만약 그들이 사형을 두려워한다면, 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쓸 용의가 있습니다! 그들의 감정에는 얼마나 큰 모순이 있습니까!

만약 누군가의 과거 연수와 마찬가지로 미래의 연수도 제시될 수 있다면, 얼마나 적은 시간이 남아 있는지 보고 그들이 얼마나 떨고, 얼마나 절약할지! 그러나 확실한 것이 아무리 적어도 관리하는 것은 쉽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것을 더 조심스럽게 보존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가장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햇수의 일부를 기꺼이 주겠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들은 주지만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이득 없이 자신에게서 빼앗는 방식으로 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빼앗는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숨겨진 손실은 그들에게 견딜 만합니다.

아무도 당신의 햇수를 돌려주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당신을 다시 당신 자신에게 돌려주지 않을 것입니다. 삶은 시작된 대로 갈 것이며, 그 과정을 되돌리거나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소란을 피우지 않고, 그 속도를 알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조용히 흘러갈 것입니다. 그것은 왕의 명령이나 대중의 호의에 의해 더 길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첫 날에 시작된 대로 달릴 것이며, 결코 방향을 바꾸거나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될까요? 당신은 바쁘고, 인생은 서두릅니다. 그 사이에 죽음이 다가올 것이며, 당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것을 위한 시간은 있어야 합니다.

IX.#

어떤 사람들의 감각, 즉 현명함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감각보다 더 어리석은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들은 더 열심히 바쁩니다. 더 잘 살기 위해, 그들은 삶의 비용으로 삶을 준비합니다. 그들의 생각을 먼 미래까지 정리합니다. 그러나 삶의 가장 큰 낭비는 지연입니다. 그것은 매일을 빼앗고, 더 먼 미래를 약속하면서 현재를 앗아갑니다. 삶의 가장 큰 장애물은 내일에 의존하는 기대로, 오늘을 잃어버립니다. 당신은 운명의 손에 있는 것을 계획하고, 당신의 손에 있는 것은 놓아버립니다. 당신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당신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미래의 모든 것은 불확실합니다. 지금 당장 살아가십시오.

위대한 시인은 마치 신의 영감을 받은 것처럼 외칩니다: ‘불쌍한 죽을 인간들에게 가장 좋은 날들이 가장 먼저 사라진다.’ “왜 망설이는가?” 그는 말합니다. “왜 지체하는가? 붙잡지 않으면, 그것은 도망친다.” 그리고 붙잡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도망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속도와 사용의 속도가 맞서 싸워야 합니다. 마치 빠른 급류에서, 항상 흐르지 않을 강에서 빨리 마셔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끝없는 생각을 비난하기 위해 가장 좋은 시기가 아니라 날을 언급한 것 또한 아름답습니다. 왜 당신은 그렇게 많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안전하고 느긋하게 당신의 욕심에 맞게 달과 해를 긴 시리즈로 늘리는 것입니까? 그는 당신에게 하루, 그것도 도망가는 하루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쌍한 인간들, 즉 바쁜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날들이 가장 먼저 도망간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까? 그들의 어린 마음은 노년에 압도되어, 준비되지 않고 방어 능력이 없는 상태로 그곳에 도달합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그것에 빠졌으며, 매일 그것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화나 독서, 또는 어떤 더 깊은 생각이 여행자를 속여 도착했다는 것을 가까워지기 전에 알게 되는 것처럼, 이 삶의 여정도 지속적이고 가장 빠르며, 우리가 자나 깨나 같은 걸음으로 하는 것인데, 바쁜 사람들에게는 끝에 가서야 나타납니다.

X.#

만약 제가 제시한 것을 부분과 논증으로 나누고 싶다면, 바쁜 사람들의 삶이 가장 짧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파비아누스6는 강단 철학자가 아닌 진정하고 고대의 철학자 중 한 명으로, “감정에 대항하여 세심함이 아닌 충동으로, 작은 상처가 아닌 습격으로 대열을 돌려야 한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궤변을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때려눕혀야지, 약하게 공격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오류를 비난하기 위해, 그들은 단지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가르쳐야 합니다.

삶은 세 시간으로 나뉩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이 중에서 우리가 행하는 것은 짧고, 우리가 행할 것은 불확실하며, 우리가 행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이것은 운명이 권리를 잃은 것이며, 어떤 이의 의지로도 되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바쁜 사람들은 이것을 잃어버립니다. 그들은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없으며, 만약 시간이 있다 해도 후회할 일을 기억하는 것은 불쾌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지못해 잘못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다시 시도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 결점들은, 심지어 현재의 쾌락의 유혹으로 가려졌던 것들도, 돌이켜볼 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든 행동이 결코 잘못되지 않는 자신의 검열 하에 있는 사람만이 기꺼이 과거로 돌아갑니다.

야망적으로 많은 것을 욕망하고, 오만하게 경멸하고, 통제 없이 승리하고, 음모로 속이고, 탐욕스럽게 빼앗고, 낭비적으로 써버린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기억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시간의 신성하고 헌신적인 부분이며, 모든 인간의 우연을 초월하고, 운명의 통치에서 벗어나 있으며, 빈곤이나 두려움이나 질병의 침략이 혼란스럽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란되거나 빼앗길 수 없습니다. 그것의 소유는 영원하고 두려움이 없습니다. 단지 하루하루, 그것도 순간마다 현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모든 날들은, 당신이 명령할 때, 당신 앞에 나타날 것이며, 당신의 의지에 따라 검토되고 머물 것입니다. 바쁜 사람들은 이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안전하고 평온한 마음은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바쁜 사람들의 마음은, 마치 멍에 아래 있는 것처럼, 구부리거나 돌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심연 속으로 사라집니다. 아무리 많이 넣더라도, 받아들이고 보존할 것이 없다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시간이 얼마나 주어지든 그것이 머물 곳이 없다면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것은 부서지고 뚫린 마음을 통과합니다.

현재 시간은 매우 짧아서 어떤 이들에게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항상 움직이며, 흐르고 서두릅니다. 오기도 전에 존재하기를 멈추며, 세계나 별들처럼 멈추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쉼 없는 움직임은 결코 같은 흔적에 머물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쁜 사람들에게는 현재만 해당되며, 그것은 너무 짧아서 붙잡을 수 없고, 심지어 그들이 많은 일에 분주할 때도 그것은 빼앗깁니다.

XI.#

마지막으로, 그들이 얼마나 짧게 사는지 알고 싶습니까? 그들이 얼마나 오래 살기를 원하는지 보십시오. 쇠약한 노인들은 몇 년을 더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은 자신을 더 젊게 가장하고, 거짓말로 자신을 기쁘게 하며, 마치 운명을 속이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는 것을 즐깁니다. 그러나 어떤 약점이 그들에게 죽음을 상기시킬 때, 그들은 두려워하며 죽습니다. 마치 삶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끌려나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살지 않은 바보였다고 외치며, 만약 그 병에서 회복된다면 여가 속에서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그들은 얼마나 헛되이 누리지 못할 것들을 준비했는지, 모든 노력이 얼마나 헛되었는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어찌하여 넓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에서 아무것도 위임되지 않고, 아무것도 이리저리 흩어지지 않으며, 아무것도 운명에 맡겨지지 않고, 아무것도 무관심으로 사라지지 않고, 아무것도 자선으로 줄어들지 않으며, 아무것도 불필요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전부 수익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작은 것이라도 충분히 풍부하며, 따라서 마지막 날이 올 때마다, 현자는 망설임 없이 확고한 걸음으로 죽음을 향해 갈 것입니다.

XII.#

당신은 아마도 제가 누구를 바쁜 사람들이라 부르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저는 단지 그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법정에서 개들이 쫓아낼 때까지 머무르는 사람들, 자신의 무리 속에서 더 화려하게 눌리거나 다른 이의 무리 속에서 더 멸시당하는 사람들, 자신의 집에서 나오게 하는 의무로 다른 이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 혹은 법관의 창7이 불명예스러운 이익과 때로는 곪을 이익을 위해 행사하는 사람들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의 여가도 바쁩니다. 그들의 별장이나 침대에서, 완전한 고독 속에서, 모든 이로부터 물러났을 때에도, 그들은 자신에게 귀찮습니다. 그들의 삶은 한가로운 것이 아니라 게으른 바쁨이라고 해야 합니다.

몇몇의 미친 짓으로 귀중한 코린트 청동8을 불안한 섬세함으로 정리하고 대부분의 날을 녹슨 금속 조각에 소비하는 사람을 당신은 한가롭다고 부르겠습니까? 레슬링장에서 (이것은 죄악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로마의 악덕으로도 고통받지 않습니다) 싸우는 소년들을 관람하는 사람을 한가롭다고 부르겠습니까? 자신의 짐승 무리를 나이와 색깔에 따라 짝을 지어 나누는 사람이나 최신 운동선수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을 한가롭다고 부르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이발사에게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전날 밤에 자란 것을 제거하느라, 매 머리카락에 대해 상담을 하느라, 흩어진 머리를 정리하거나 이마 양쪽으로 흩어진 머리를 모으느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한가롭다고 부르겠습니까? 이발사가 조금이라도 부주의하면 얼마나 화를 내는지, 마치 남자의 머리를 자르는 것처럼! 그들의 갈기에서 무언가 잘려나가거나 무언가 질서에서 벗어나 있으면 얼마나 화를 내는지, 모든 것이 그들의 고리로 떨어지지 않으면 얼마나 화를 내는지! 그들 중 누가 국가가 혼란스러운 것보다 자신의 머리카락이 혼란스러운 것을 선호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자신의 머리의 우아함보다 안전에 더 관심이 있습니까? 누가 더 정직하기보다 더 단정하기를 선호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빗과 거울 사이에서 바쁜 이 사람들을 한가롭다고 부르겠습니까?

그리고 노래를 작곡하고, 듣고, 배우는 데 헌신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자연이 가장 옳고 가장 단순하게 만든 목소리를 가장 게으른 선율의 변화로 비틀고, 손가락은 항상 어떤 노래를 측정하며 소리 내고, 심각하고 종종 슬픈 문제에 참여하도록 요청받을 때에도 조용한 선율이 들립니다. 이들은 한가로움이 아니라 게으른 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의 식사를 한가로운 시간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은그릇을 정리하는지, 얼마나 주의 깊게 그들의 하인들의 튜닉을 접는지, 요리사로부터 멧돼지가 어떻게 나오는지 얼마나 걱정하는지, 신호에 따라 면도한 노예들이 얼마나 빠르게 서비스를 제공하는지, 새들이 얼마나 기술적으로 고르게 조각되는지, 불쌍한 어린 하인들이 얼마나 조심스럽게 취객들의 침을 닦아내는지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아함과 사치의 명성을 얻으려 하며, 그들의 악덕은 삶의 모든 은신처까지 그들을 따라다니므로, 야망 없이 마시거나 먹지 않습니다.

의자나 가마에 실려 이리저리 옮겨지고, 마치 떠날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운동 시간에 나타나며, 언제 목욕하고, 언제 수영하고, 언제 저녁을 먹어야 하는지 다른 사람에게 상기시켜야 하는 사람들도 한가로운 사람들 중에 헤아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너무 많은 섬세한 정신의 나약함에 빠져 스스로 배고픈지도 알 수 없습니다.

저는 사치스러운 사람들 중 한 명이 (만약 사치가 인간 삶과 관습을 잊는 것이라면) 목욕탕에서 손으로 옮겨져 의자에 앉혀진 후, “이제 앉았나요?“라고 물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앉아 있는지도 모르는 이 사람이 살아 있는지, 보고 있는지, 한가로운지 알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이것을 몰랐는지 아니면 모르는 척했는지, 어느 쪽이 더 가련한지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많은 것들을 실제로 잊어 버리기도 하지만, 많은 것들을 잊은 척하기도 합니다. 어떤 악덕들은 그들에게 마치 행복의 증거인 것처럼 기쁨을 줍니다. 너무 비천하고 경멸적인 인간에게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아는 것이 적합해 보입니다. 이제 가서 광대들이 사치를 비난하기 위해 많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제 말을 믿으십시오, 그들은 지어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간과하며, 너무 많은 믿을 수 없는 악덕들이 이 한 세기에 있어서 우리는 이제 광대들의 부주의함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사치 속에서 너무 깊이 빠져 앉아 있는지도 다른 사람을 믿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은 한가롭지 않습니다. 그에게 다른 이름을 붙이십시오. 그는 병들었습니다, 아니 그는 죽었습니다. 한가로운 사람은 자신의 한가로움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반쯤 살아 있는 사람, 자신의 몸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안내자가 필요한 이 사람이 어떻게 시간의 주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XIII.#

장기나 공놀이, 또는 햇볕에 몸을 태우는 데 자신의 삶을 소비한 사람들을 일일이 추적하는 것은 길 것입니다. 그들의 쾌락이 많은 일을 수반하는 사람들은 한가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쓸모없는 문학 연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지금 로마인들 사이에서도 큰 무리를 이루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리스인들의 병이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몇 명의 선원을 가졌는지, 일리아드가 오디세이보다 먼저 쓰여졌는지, 또한 그것들이 같은 저자의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다른 것들을 묻는 것은, 당신이 그것들을 간직한다면 침묵하는 양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당신이 그것들을 드러낸다면 더 학식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성가신 것으로 보입니다.

보십시오! 쓸데없는 것을 배우는 공허한 연구가 로마인들도 침략했습니다. 요즘 저는 로마인 지도자들 중 누가 처음으로 무엇을 했는지 언급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두일리우스가 처음으로 해전에서 승리했고, 쿠리우스 덴타투스가 처음으로 개선식에 코끼리를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비록 진정한 영광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시민적 업적의 예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유익하지 않지만, 적어도 사물의 화려한 허영으로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이것 또한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양보하겠습니다: 누가 로마인들에게 처음으로 배에 오르도록 설득했는가? (그것은 클라우디우스였으며, 여러 판자의 맥락이 고대에 코덱9이라 불렸기 때문에 코덱이라 불렸습니다. 그래서 공공 기록부는 코덱이라 불리고, 지금도 티베르 강을 통해 물품을 운반하는 배는 옛 관습에 따라 코디카리아라 불립니다.)

이것 또한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발레리우스 코르비누스가 처음으로 메사나를 정복했으며, 발레리우스 가문에서 처음으로 그 정복한 도시의 이름을 따서 메사나라 불리게 되었고, 점차 대중이 글자를 바꾸면서 메살라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루키우스 술라가 처음으로 경기장에서 사자를 풀어놓았다는 것에 누군가 관심을 가질 것을 허락하겠습니까? 이전에는 묶여 있던 사자들이, 왕 보쿠스가 보낸 창던지기 선수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이것 또한 넘어가겠습니다: 폼페이우스가 처음으로 경기장에서 18마리의 코끼리 싸움을 벌였다는 것, 그것도 전투처럼 범죄자들과 맞서게 했다는 것이 어떤 좋은 것에 관련이 있습니까? 도시의 지도자이며 (전해진 바에 따르면) 고대 지도자들 중에서도 탁월한 친절함의 소유자인 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들을 죽이는 종류의 구경거리를, 기억할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싸우나요?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찢겨 나가나요?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은 거대한 동물들의 무게에 짓눌려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잊혀지는 것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어떤 권력자도 이를 배워 가장 비인간적인 것에 질투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아, 큰 행운이 우리 마음에 얼마나 많은 어둠을 던지는지! 그는 무수한 불쌍한 사람들의 무리를 다른 하늘 아래서 태어난 짐승들에게 던지고, 너무나 불균등한 동물들 사이에 싸움을 벌이고, 로마 국민 앞에서 많은 피를 쏟도록 하면서, 자신이 자연을 초월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곧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배신에 속아 가장 비천한 노예에게 찔려 죽었고,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의 별명10의 헛된 자랑을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디서 벗어났는지로 돌아가, 같은 주제에서 어떤 이들의 쓸모없는 부지런함을 보여주겠습니다. 같은 사람이 이야기했습니다: 메텔루스는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인들을 물리치고 개선식을 가졌는데, 모든 로마인들 중 유일하게 전차 앞에 120마리의 포로 코끼리를 이끌었다고 합니다. 술라는 로마인들 중 마지막으로 포메리움11을 확장했는데, 이는 고대의 관습에 따라 결코 속주가 아닌 이탈리아의 땅을 획득함으로써만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아벤티누스 산이 포메리움 밖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유익합니까? 그는 이것이 두 가지 이유 중 하나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대중이 그곳으로 후퇴했거나, 레무스가 그곳에서 점을 쳤을 때 새들이 좋은 조짐을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무수한 것들은 거짓으로 채워지거나 거짓과 비슷합니까?

설령 그들이 모든 것을 선의로 말하고 보증을 위해 쓴다고 해도, 이러한 오류들이 누구의 오류를 줄이겠습니까? 누구의 욕망을 억제하겠습니까? 누구를 더 강하게, 더 정의롭게, 더 관대하게 만들겠습니까? 우리의 파비아누스는 이러한 연구에 빠지는 것보다 어떤 연구에도 접근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지 때때로 의심한다고 말했습니다.

XIV.#

모든 사람 중에서 지혜에 전념하는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한가롭고, 오직 그들만이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의 시간만 잘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을 자신의 것에 더합니다. 그들 이전에 지나간 모든 해는 그들의 것이 됩니다. 우리가 가장 배은망덕하지 않는다면, 그 매우 유명한 신성한 의견의 창시자들은 우리를 위해 태어났고, 우리를 위해 삶을 준비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이의 노력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이끌려 온 가장 아름다운 것들로 인도됩니다. 우리는 어떤 세기로부터도 금지되지 않았으며, 모든 것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만약 정신의 위대함으로 인간의 약점의 좁은 경계를 넘어서고 싶다면, 우리가 여행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와 논쟁하고, 카르네아데스와 의심하고, 에피쿠로스와 함께 휴식을 취하고, 스토아학파와 함께 인간의 본성을 정복하고, 키니코스12와 함께 초월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 모든 시대의 교제로 나아가도록 허락하니, 왜 우리는 이 짧고 덧없는 시간의 통과에서 그 광대하고 영원하며 더 나은 이들과 공유하는 것들에 모든 마음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의무로 분주히 뛰어다니며 자신과 다른 이들을 불안하게 하는 사람들, 잘 미쳐 있을 때, 매일 모든 문지방을 돌아다니며 열린 문을 지나치지 않을 때, 다양한 집을 돌며 이익을 얻으려는 인사를 전할 때, 그들은 그토록 거대하고 다양한 욕망으로 분주한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을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잠이나 사치나 비인간성으로 그들을 멀리할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오랫동안 괴롭힌 후에 가장된 서두름으로 지나쳐갈까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객들로 가득 찬 홀을 통과하는 것을 피하고 집의 어두운 입구를 통해 도망치겠습니까, 마치 속이는 것이 내쫓는 것보다 덜 비인간적인 것처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날의 취함으로 반쯤 졸고 무거운 채로, 그 불쌍한 이들에게 자신들의 잠을 깨워 남의 잠을 기다리게 하며, 겨우 입술을 들어 천 번이나 속삭인 이름을 가장 오만한 하품으로 대답합니까!

우리는 진정한 의무에 머무는 사람들이 매일 제논, 피타고라스, 데모크리투스와 다른 훌륭한 기술의 사제들,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투스와 가장 친밀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 중 누구도 시간이 없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자신에게 오는 사람을 더 행복하고, 자신을 더 사랑하지 않은 채로 보내지 않을 것이며, 누구도 빈손으로 떠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모든 인간에 의해 만날 수 있습니다.

XV.#

그들 중 누구도 당신을 죽도록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모두가 당신을, 가르칠 것입니다. 그들 중 누구도 당신의 세월을 낭비하지 않고, 자신의 것을 당신에게 기여합니다. 그들 중 누구의 담화도 위험하지 않을 것이며, 누구의 우정도 치명적이지 않을 것이며, 누구를 관찰하는 것도 비용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그들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을 것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많이 원하든, 그들은 당신이 그것을 길어올리는 것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보호 아래 자신을 둔 사람에게 얼마나 큰 행복과 아름다운 노년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는 가장 작은 것과 가장 큰 것에 대해 상의할 수 있는 사람들, 매일 자신에 대해 상담할 수 있는 사람들, 모욕 없이 진실을 들을 수 있는 사람들, 아첨 없이 칭찬받을 수 있는 사람들, 자신의 모습을 닮을 수 있는 사람들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부모를 배정받을지가 우리의 힘에 있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운으로 주어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선한 이들의 경우 자신의 뜻에 따라 태어날 수 있습니다. 가장 고귀한 정신의 가족들이 있습니다. 어느 가족에 속하기를 원하는지 선택하십시오. 당신은 이름뿐만 아니라 재산 자체로 입양될 것이며, 이는 인색하게 또는 악의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수록 더 커질 것입니다.

이들은 당신에게 영원으로 가는 길을 주고, 누구도 쫓겨나지 않는 그 장소로 당신을 들어 올릴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을 연장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불멸로 바꾸는 방법입니다. 명예, 기념물, 야망이 법령으로 명령하거나 작품으로 세운 모든 것은 곧 무너집니다. 오랜 세월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움직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신성시한 것에는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어떤 시대도 그것을 없애거나 감소시킬 수 없습니다. 다음 시대, 그리고 그 이후의 시대는 그것의 존경에 무언가를 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질투는 가까이 있을 때 작용하지만, 우리는 멀리 있는 것을 더 순수하게 감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자의 삶은 넓게 펼쳐집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제한하는 것과 같은 경계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그는 인류의 법칙에서 유일하게 해방되었습니다. 모든 세기가 신처럼 그를 섬깁니다. 어떤 시간이 지나갔습니까? 그는 기억으로 그것을 붙잡습니다. 그것이 다가오고 있습니까? 그는 그것을 사용합니다. 그것이 올 것입니까? 그는 그것을 예상합니다. 모든 시간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그의 삶을 길게 만듭니다.

XVI.#

과거를 잊고, 현재를 무시하며, 미래를 두려워하는 이들의 삶은 가장 짧고 가장 불안합니다. 그들은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바빴는지 불행하게도 깨닫습니다.

그들이 때때로 죽음을 불러온다고 해서, 당신이 그들이 오래 산다는 증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불안한 생각은 불확실한 감정으로 그들을 괴롭히며, 그들이 두려워하는 바로 그 것들에 부딪힙니다. 그들은 두려워하기 때문에 종종 죽음을 바랍니다.

또한 하루가 그들에게 자주 길게 느껴지거나, 식사 시간이 올 때까지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불평한다고 해서 그들이 오래 산다는 증거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일이 그들을 떠날 때면, 한가로움에 남겨져 동요하며, 어떻게 그것을 배분하고 연장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일에 매달리고, 그 사이의 모든 시간은 무겁게 느껴집니다. 이것은 마치 검투사 경기의 날이 발표되었을 때나 다른 쇼나 즐거움의 날이 정해졌을 때, 중간 날들을 건너뛰고 싶어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대하는 것의 모든 지연은 그들에게 깁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 시간은 짧고 빠르며, 그들의 탓으로 훨씬 더 짧아집니다. 그들은 이것에서 저것으로 도망치고, 한 가지 욕망에 머물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날들은 길지 않고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추문이나 술에 쓰는 밤들은 얼마나 짧게 느껴지는지!

따라서 인간의 오류에 음식을 주는 우화로 시인들의 광기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주피터는 합방의 즐거움에 매혹되어 밤을 두 배로 늘린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것은 신들을 그 저자로 기록하고 신성의 예를 들어 질병에 허가된 자유를 주는 것에 의해 우리의 악덕에 불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들이 너무 비싸게 사는 이 밤들이 그들에게 너무 짧게 보일 수 있습니까? 그들은 밤을 기대하며 낮을 잃고, 빛에 대한 두려움으로 밤을 잃습니다.

XVII.#

그들의 쾌락조차도 불안하고 다양한 공포로 불안합니다. 그리고 가장 기뻐할 때 불안한 생각이 다가옵니다: “이것이 얼마나 오래갈까?” 이러한 감정으로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한탄했으며, 그들의 운명의 위대함이 그들을 기쁘게 하지 않았고, 언젠가 다가올 끝이 그들을 두렵게 했습니다.

페르시아의 매우 거만한 왕13은 훈련장의 넓은 공간에 군대를 배치하고, 그 수가 아니라 규모를 측정할 때, 백 년 안에 그 모든 젊은이들 중 아무도 살아남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운명을 재촉한 것은 바로 그 울었던 사람 자신이었고, 그는 어떤 이들은 바다에서, 어떤 이들은 땅에서, 어떤 이들은 전투에서, 어떤 이들은 도주하는 중에 잃을 것이며, 백 년을 두려워했던 그들을 짧은 시간 안에 소비할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기쁨조차도 불안하지 않습니까? 그것들은 확고한 원인에 기초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허영에 의해 혼란스럽습니다. 그들 자신의 고백에 따라 비참한 시간들은 어떠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자신을 높이고 인간 이상으로 드러내는 이러한 것들조차도 충분히 진실하지 않을 때 말입니다.

가장 큰 선들은 불안하며, 어떤 운명도 최상의 운명보다 덜 신뢰할 수 없습니다.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행복이 필요하며, 성공한 기원을 위해서도 기원을 해야 합니다. 운명으로 오는 모든 것은 불안정합니다. 더 높이 올라갈수록, 더 떨어지기 쉽습니다. 더욱이, 떨어지는 것들은 누구에게도 기쁨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더 큰 노력으로 소유할 것들을 큰 노력으로 얻는 사람들의삶이 가장 비참할 뿐만 아니라 가장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애써서 얻고, 얻은 것을 불안하게 가집니다. 그 사이에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에 대한 고려가 없습니다. 새로운 일들이 옛 일들을 대체하고, 희망이 희망을 부추기며, 야망이 야망을 자극합니다. 그들은 불행의 끝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소재를 바꿀 뿐입니다. 우리 자신의 명예가 우리를 괴롭혔습니까? 다른 이들의 명예가 더 많은 시간을 빼앗습니다. 우리는 후보자로서의 수고를 그만두었습니까? 우리는 지지자로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기소의 귀찮음을 내려놓았습니까? 우리는 판결의 귀찮음을 얻습니다. 그가 판사이기를 그만두었습니까? 그는 조사관이 됩니다. 그가 타인의 재산을 월급을 받고 관리하며 늙었습니까? 그는 자신의 재산에 사로잡힙니다.

마리우스는 군복무에서 풀려났습니까? 그는 집정관직을 수행합니다. 퀸티우스는 독재관직을 피하려고 서두릅니까? 그는 쟁기에서 다시 불려올 것입니다. 아직 그런 큰일을 할 만큼 성숙하지 않은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인들을 향해 갈 것입니다. 그는 한니발의 정복자, 안티오쿠스의 정복자, 자신의 집정관직의 영광, 형제의 보증인이 될 것이며, 만약 그 자신에 의해 지연되지 않았다면, 그는 주피터와 함께 놓여졌을 것입니다14. 시민들의 구원자인 그를 시민의 소요가 괴롭힐 것이며, 젊은 시절 신들과 같은 명예를 거부한 후, 노년에는 고집스러운 추방의 야망이 그를 기쁘게 할 것입니다. 결코 행복하든 불행하든 걱정의 원인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로 인해 삶은 밀려날 것입니다. 한가로움은 결코 실행되지 않고, 항상 바라기만 할 것입니다.

XVIII.#

그러므로, 가장 사랑하는 파울리누스여, 군중에서 벗어나 인생의 기간에 비례하지 않게 흔들린 후에 마침내 더 평온한 항구로 물러나십시오. 당신이 얼마나 많은 파도를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폭풍을, 부분적으로는 개인적인 것을, 부분적으로는 공적인 것을 자신에게로 돌렸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덕은 이미 충분히 수고롭고 불안한 증거를 통해 보여졌습니다. 이제 한가로움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십시오. 당신 나이의 대부분, 확실히 가장 좋은 부분은 국가에 바쳐졌습니다. 이제 조금은 당신 시간의 일부를 자신을 위해 가지십시오.

저는 당신을 게으르거나 무기력한 휴식으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잠이나 군중의 소중한 쾌락에 당신 안의 활기찬 재능을 모두 잠기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휴식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열심히 다루었던 모든 일보다 더 큰 일들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을 은퇴하고 안전한 상태에서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세계의 문제를 다른 사람의 것처럼 절제하게, 자신의 것처럼 부지런히, 공적인 것처럼 엄격하게 관리합니다. 당신은 혐오를 피하기 어려운 직책에서 사랑을 얻습니다. 그러나 믿으십시오, 자신의 삶의 이치를 아는 것이 공공 곡물의 이치를 아는 것보다 낫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에 가장 적합한 그 정신의 활력을, 명예로우나 행복한 삶에는 적합하지 않은 직무에서 물러나게 하고, 당신이 어린 나이부터 자유로운 학문의 모든 교양으로 많은 양의 곡물이 잘 맡겨지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아니었음을 생각하십시오. 당신은 자신에게 더 크고 더 높은 것을 약속했습니다. 정확한 절약과 부지런한 일의 사람들이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느린 짐승들이 고귀한 말들보다 짐을 운반하는 데 더 적합합니다. 누가 그들의 고귀한 빠름을 무거운 짐으로 억누르겠습니까?

또한 당신이 그렇게 큰 짐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걱정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인간의 배와 거래합니다. 그것은 이성을 허용하지 않으며, 공정에 의해 누그러지지 않고, 어떤 간청에도 굴복하지 않는 배고픈 대중입니다. 사실 가이우스 카이사르15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날들 안에 (만약 지하세계에 감각이 있다면), 그는 로마 국민에게 남은 식량이 7-8일치뿐이라는 것을 매우 괴롭게 생각했습니다! 그가 배로 다리를 연결하고 제국의 힘으로 놀고 있는 동안, 가장 최악의 재앙, 식량의 부족이 포위된 사람들에게도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광기 있고 이국적이며 불행하게도 오만한 왕의 모방은 거의 죽음과 기아와, 그리고 기아를 따르는 모든 것의 파멸로 끝났습니다.

그때 공공 곡물을 맡은 사람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그들은 돌, 철, 불, 가이우스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극도의 위장으로 내장 속에 숨겨진 그러한 큰 악을 덮었습니다, 물론 이성적으로요. 왜냐하면 어떤 병은 환자가 모르는 상태에서 치료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병을 아는 것이 죽음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XIX.#

이 더 평온하고, 더 안전하며, 더 위대한 것들로 돌아오십시오! 당신은 곡물이 부패하지 않고 운반하는 사람들의 사기나 태만에서 벗어나 창고로 옮겨지도록, 습기를 머금어 손상되거나 뜨거워지지 않도록, 측정과 무게에 맞도록 주의하는 것과, 이러한 신성하고 숭고한 것들에 접근하여 신의 물질이 무엇인지, 그의 기쁨, 상태, 형태가 무엇인지, 어떤 운명이 당신의 영혼을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가 육체에서 벗어날 때 자연이 우리를 어디에 두는지, 이 세상의 모든 무거운 것들을 중간에 지탱하고, 가벼운 것들을 위에 매달고, 불을 꼭대기로 들어 올리고, 별들을 각자의 차례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어서 거대한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다른 것들을 아는 것이 비슷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땅을 떠나 정신으로 이러한 것들을 바라보고 싶지 않습니까! 지금, 피가 뜨거울 때, 활기찬 힘으로 더 나은 것들을 향해 가야 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삶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많은 좋은 기술, 덕의 사랑과 사용, 욕망의 망각, 살고 죽는 법, 깊은 평온입니다.

XX.#

모든 바쁜 사람들의 상태는 비참합니다. 그러나 가장 비참한 것은 자신의 일에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 다른 사람의 수면에 맞춰 자고, 다른 사람의 발걸음에 맞춰 걷고, 가장 자유로운 것인 사랑과 미움을 명령받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자신의 삶이 얼마나 짧은지 알고 싶다면, 그들의 삶에서 그들의 몫이 얼마나 작은지 생각해 보게 하십시오.

그러므로 당신이 자주 정계(政界) 로브16를 입은 것을 보거나, 법정에서 유명한 이름을 볼 때,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것들은 삶의 손실로 얻어진 것입니다. 그들에게서 한 해가 헤아려지게 하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모든 해를 낭비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야망의 꼭대기에 도달하기도 전에, 초기에 분투하는 동안 나이에 의해 떠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천 가지 불경을 통해 존엄의 완성에 올라간 후, 비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은 무덤의 비문을 위해 수고했다는 것을요. 어떤 이들의 마지막 노년은, 젊음처럼 새로운 희망을 위해 안배되는 동안, 크고 부적절한 노력 속에서 약하게 실패했습니다.

법정에서 가장 알려지지 않은 소송자들을 위해 노령에, 무지한 군중의 박수를 구하던 그 사람이 숨을 거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일하기보다 살기에 지쳐 자신의 의무 속에서 쓰러진 그 사람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회계를 받는 일에 죽어가는 동안 오랫동안 기다린 상속인에게 비웃음을 산 그 사람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제가 떠오른 예를 지나칠 수 없습니다. 투란니우스는 매우 철저한 부지런함을 가진 노인이었습니다. 90세가 넘어, 가이우스 카이사르로부터 행정직에서의 휴가를 자발적으로 받은 후, 침대에 누워 마치 죽은 것처럼 주변의 가족들에게 애도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집안은 늙은 주인의 한가로움을 애도했고, 그의 일이 회복될 때까지 슬픔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바쁜 채로 죽는 것이 그렇게 즐거운 일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에 대한 욕망이 능력보다 더 오래 지속됩니다. 그들은 신체의 약함과 싸웁니다. 그들은 노년 자체가 그들을 한쪽으로 치워둔다는 이유로만 무겁다고 판단합니다. 법은 50세부터 군인을 뽑지 않고, 60세부터 원로원 의원을 소환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법에서보다 자신으로부터 여가를 얻기 더 어렵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이 약탈당하고 약탈하는 동안, 서로의 평화를 깨뜨리는 동안, 서로 비참한 동안, 삶은 결실 없이, 쾌락 없이, 어떤 정신적 진보 없이 지나갑니다. 아무도 눈앞에 죽음을 두지 않고, 아무도 멀리 희망을 두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삶을 넘어선 것들까지 계획합니다. 거대한 무덤, 공공 작품의 헌정, 장례식에서의 선물, 화려한 장례식을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들의 장례식은, 마치 그들이 아주 짧게 살았던 것처럼, 횃불과 촛불에 의해 인도되어야 합니다.

원문#

라틴어 원문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파울리누스: 세네카가 이 책을 헌정한 사람으로, 로마의 공직자였던 것으로 추정됨. ↩︎

  2. 가장 위대한 의사: 히포크라테스를 가리킴. 그의 유명한 격언 “인생은 짧고, 기술은 길다(Ars longa, vita brevis)“를. ↩︎

  3. 위대한 시인: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그리스 희극 작가 메난드로스(기원전 342-291)를 가리킨다고 생각함. ↩︎

  4. 안토니우스와 함께한 여인: 클레오파트라를 의미함. ↩︎

  5. 그라쿠스의 악: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가 시행하려 했던 토지 개혁과 그로 인한 정치적 격변을 의미함. ↩︎

  6. 파비아누스: 파피리우스 파비아누스, 세네카가 존경했던 신-피타고라스학파 철학자. ↩︎

  7. 법관의 창: 로마에서 경매를 알리는 창(hasta)을 의미함. 여기서는 경매로 이익을 취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함. ↩︎

  8. 코린트 청동: 고대 코린트에서 만들어진 매우 귀중한 청동 합금으로, 부의 상징이었음. ↩︎

  9. 코덱: 여러 판자를 묶은 것을 의미하는 라틴어. 여기서는 배의 일종과 사람의 별명을 동시에 가리킴. ↩︎

  10. 별명: 폼페이우스의 별명인 “마그누스(Magnus, 위대한)“를 의미함. ↩︎

  11. 포메리움: 로마 시의 신성한 경계선으로, 이를 확장하는 것은 커다란 영예였음. ↩︎

  12. 키니코스: 견유학파(Cynic School)를 의미함. 물질적 욕망을 초월한 생활 방식을 추구했던 철학 유파. ↩︎

  13. 페르시아의 매우 거만한 왕: 크세르크세스 1세를 가리킴. 그리스 원정 중에 자신의 거대한 군대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있음. ↩︎

  14. 주피터와 함께 놓여졌을 것: 스키피오의 동상이 주피터 신전에 세워질 만큼 큰 영예를 받았을 것이라는 의미. ↩︎

  15. 가이우스 카이사르: 로마 황제 칼리굴라(Caligula)를 의미함. ↩︎

  16. 정계 로브: 로마의 정치인들이 입는 특별한 토가(toga praetexta)를 의미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