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작 케인즈의 손자들을 위한 100년 후 경제 예측 (1930) - 2025/01/10, Friday, UTC
Korean Translation of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1930)' by Keynes. 케인즈의 2030년 경제 예측에 대한 에세이 (1930)
서론
Sam Altman의 하바드 비즈니스 스쿨의 부학장 Debora Spar와의 인터뷰를 보다 이 글에 대해 이야기가 나와서 찾아봤다. 선번역하고 그 글을 올려본다.
- archive.org에서 찾아볼수 있다. 예일대학교 링크인데 2024년 12월 31일이후에 링크가 깨져서 웹아카이브에서 찾았다.
소개 :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1930)
1930년대는 전 세계가 대공황으로 크게 흔들리던 시기다. 주가가 폭락하고 실업자가 급증하며 끝이 보이지 않는 침체가 이어졌다. 대부분 사람은 “앞으로는 더 나빠질 것”이라는 비관에 빠져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에 「우리 손자들의 경제적 가능성」이라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낙관론을 제시했다.
배경과 시대상
- 대공황의 충격: 1929년 미국 증시 붕괴 이후, 금융과 산업 전반이 연쇄적으로 무너져 대량 실업과 빈곤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 비관론의 확산: 경제 성장은 끝났고, 19세기의 번영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이 글이 가진 힘
- 낙관적 미래 예측: 케인스는 “100년 후에는 경제 문제가 사실상 해결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대부분 비관하던 사회 분위기와는 정반대였다.
- 새로운 과제: 케인스는 경제가 풍족해질 경우, ‘노동’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질지, 사람들은 어떤 삶의 목적을 추구하게 될지를 고민했다. 여가와 삶의 예술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다고 보았다.
- 장기 시야: 보통 정부의 단기 경제정책을 떠올리게 하는 케인스 이론과 달리, 여기서는 전쟁과 인구, 기술 발전까지 내다보며 미래 사회를 폭넓게 전망했다.
현대 사회에서의 의미
- 부분적 실현, 여전한 과제: 실제로 수십 년간 여러 나라에서 기술 발전과 경제 성장을 이루었지만, 세계가 경제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불평등, 기후위기 등 새로운 도전이 나타났다.
- 기술 발전과 노동: 로봇, 인공지능, 디지털 경제의 부상으로 ‘기술적 실업’은 케인스가 예견한 대로 현실적 위협이 되어가고 있다.
- 노동의 의미 재정립: 노동과 소득의 관계가 흔들리고, 여가와 분배 문제가 부상하는 지금 상황은 “풍요로운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케인스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이렇듯, 케인스의 1930년 에세이는 대공황이라는 암울한 시기에 ‘인류가 언젠가는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동시에 “그 뒤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오늘날까지 던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
다음 장에 해당 글의 한글 번역을 첨부한다. 번역/편집 by o1-pro.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1930)
Keynes on Possibilities 1
John Maynard Keynes Economic Possibilities for our Grandchildren (1930)
I
우리는 지금 경제적 비관주의의 심각한 발작을 앓고 있다. 19세기를 특징지었던 막대한 경제 발전의 시대가 끝났고, 생활수준의 급속한 향상이 이제 – 적어도 영국에서는 – 속도를 늦출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10년 동안에는 번영이 나아지기보다는 오히려 쇠퇴할 것이라는 말을 흔히 듣게 된다.
나는 이것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극도로 잘못된 해석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노년의 관절염(rheumatics)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빠른 변화로 인한 성장통과, 한 경제 시기에서 다른 시기로 재조정되는 과정의 고통을 겪고 있다. 기술적 효율성의 증가는 노동 흡수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생활수준의 향상도 약간 너무 빨랐고, 세계의 은행·통화제도는 균형이 요구하는 만큼 금리를 충분히 신속히 하락시키지 못하도록 막아왔다. 그럼에도 그로 인한 낭비와 혼란은 국민소득의 7½퍼센트 이상에까지 미치지는 않는다. 즉, 우리가 1파운드 중 1실링6펜스를 엉망으로 다루어버리고 18실링6펜스밖에 남지 않았지만, 우리가 더 현명했더라면 1파운드를 전부 가질 수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18실링6펜스는 불과 5, 6년 전의 1파운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1929년에 영국의 산업 생산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물리적 산출량이 더 컸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또한 우리 수입에서 모든 수입품 비용을 제하고도 해외 투자에 쓸 수 있는 대외수지가, 작년에는 어떤 다른 나라보다도 더 컸으며, 사실 미국의 해당 흑자보다도 50%가량 더 컸다는 사실도 잊고 있다. 혹은 다시 비교를 말하자면, 만약 우리가 임금을 절반으로 삭감하고, 국채의 4/5를 부인(채무불이행)하며, 6% 이상으로 빌려주는 대신 그 잉여 재화를 불모의 금으로 묵혀둔다면, 우리는 지금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프랑스와 닮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개선일까?
지금의 세계 공황, 욕구로 가득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막대한 실업이라는 거대한 모순, 그리고 우리가 저지른 재앙적 실수들은, 사물의 추세를 올바르게 해석하는 데 있어 표면 아래서 일어나는 일을 보지 못하게 우리의 눈을 가린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전 세계에서 이렇게 떠들썩하게 울려 퍼지는 두 가지 상반된 비관주의—즉, 혁명적 비관주의(현 상황이 너무나 악화되었으므로 폭력적 변화만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믿는 입장)와 반동적 비관주의(우리의 경제·사회 생활의 균형이 너무나 위태로워 어떠한 실험도 위험하다고 여기는 입장)—가, 우리 시대 안에 모두 틀렸음이 증명될 것이라고 예측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이 에세이에서 하려는 목적은, 현재나 가까운 미래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짧은 관점에서 벗어나 미래로 날아오르려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후 우리의 경제생활 수준은 어느 정도가 될 것인가? 우리 손자들의 경제적 가능성은 과연 무엇인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가장 이른 시기, 이를테면 기원전 2000년경부터 18세기 초까지, 지구의 문명 중심지에 사는 보통 사람들의 생활수준에는 그리 큰 변화가 없었다. 물론 오르내림이 있었다. 전염병, 기근, 전쟁이 찾아왔고, 때로는 황금기가 있었다. 하지만 진보적이고 급격한 변화는 없었다. 어떤 시기는 다른 시기보다 50%가량 더 나았고, 많아봐야 100% 정도 나았을 뿐이었다. 그것이, (예를 들어) 서기 1700년경까지 이어진 4천 년 동안의 최대치였다.
이처럼 더디게 진행된 진보, 혹은 사실상 진보 부재의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중요한 기술적 발명의 부재, 그리고 자본 축적의 실패—가 있었다.
선사시대부터 비교적 근대 이전까지 중요한 기술적 발명이 없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근대 시대가 시작되던 무렵 세상이 이미 가지고 있던 것 중 정말 중요한 것들은, 역사 초기 새벽 무렵부터 인간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이다. 언어, 불, 오늘날과 같은 가축, 밀, 보리, 포도나무, 올리브, 쟁기, 바퀴, 노, 돛, 가죽, 리넨과 옷감, 벽돌과 항아리, 금과 은, 구리, 주석, 납—그리고 기원전 1000년 전에는 철까지—, 은행 업무, 정치술, 수학, 천문학, 종교.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처음 가지게 된 시점에 대한 기록은 없다.
역사 시대가 열리기 전의 어느 시점, 어쩌면 마지막 빙하기 이전의 한가로운 간격기에,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와 맞먹는 진보와 발명의 시대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기록된 역사 대부분을 통틀어 그런 시기는 없었다.
근대 시대는 아마도 16세기에 시작된 자본 축적과 함께 열렸다고 나는 본다. 나는, 그것이 애초에 신대륙에서 스페인이 구대륙으로 들여온 금과 은의 보물에서 비롯된 물가상승과 그로 인한 이윤 증가 때문이었다고 믿는데, (이 글의 주요 논지와 관련 없으므로 자세히 다루지는 않겠다.) 그 시점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세대를 잠자고 있던 복리(複利)에 의한 축적 능력이 다시 살아나 힘을 되찾았다. 그리고 200년에 걸친 복리의 힘은 상상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하다.
이를 예시하기 위해 내가 직접 계산해본 수치를 하나 들어보겠다. 영국의 대외투자(해외투자) 가치는 현재 약 40억 파운드로 추정된다. 이는 약 6½%의 수익률을 내는데, 이 중 절반을 가져와 우리가 누리고, 나머지 절반, 즉 약 3¼%는 해외에서 복리로 재투자하고 있다. 이런 식의 일이 지난 250년 동안 이어져 왔다.
나는 영국 대외투자의 시작을 1580년에 프랜시스 드레이크(Drake)가 스페인으로부터 훔쳐온 재물로 보고 있다. 그해 드레이크는 골든하인드호(Golden Hind)의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귀국했다. 여왕 엘리자베스는 그 원정 자금을 댄 신디케이트의 상당한 투자자였다. 여왕은 자기 몫을 써서 영국의 모든 대외채무를 상환했고, 예산을 균형 맞췄으며, 약 4만 파운드 정도를 손에 쥐었다. 여왕은 그것을 레반트회사(Levant Company)에 투자했는데, 그 회사는 번창했다. 그리고 레반트회사에서 나온 이윤을 바탕으로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가 설립되었으며, 이 거대 사업의 이윤이 영국의 이후 대외투자의 기반이 되었다. 이제 흥미로운 사실은, 4만 파운드가 3½% 복리로 축적된 것이, 영국의 대외투자가 여러 시기를 거치며 실제로 이루어온 물적 규모와 대략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재 내가 이미 언급한 약 40억 파운드라는, 오늘날 우리의 대외투자 총액이 되었다. 즉, 1580년에 드레이크가 가져온 1파운드는 이제 10만 파운드가 되었다. 이것이 복리의 위력이다!
16세기부터, 그리고 18세기를 거치며 더욱 누적적 크레셴도(crescendo)로 이어진 과학과 기술 발명의 위대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19세기 초 이래로는 석탄, 증기, 전기, 석유, 철강, 고무, 면직, 화학 공업, 자동 기계와 대량생산 기법, 무선통신, 인쇄,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그 밖에도 너무 유명해 일일이 열거하기 힘든 수천 가지 발명과 인물이 줄을 이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전 세계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서, 그들에게 주택과 기계를 제공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과 미국의 평균 생활수준은 대략 네 배가량 향상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본의 증가는 과거 어느 시대도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던 백 배 이상의 스케일이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인구가 크게 늘어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만약 자본이 연 2%씩 증가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세계의 자본 장비(capital equipment)는 20년 후 절반이 더 늘어나고, 100년 후에는 7.5배 증가한다. 이를 주택, 교통 같은 물질적인 것들로 생각해보라.
동시에, 제조와 운송 분야의 기술 개선은 지난 10년 동안,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1925년 공장 1인당 생산이 1919년에 비해 40% 증가했다. 유럽에서는 일시적 장애로 발목이 잡혀 있지만, 그럼에도 기술적 효율성이 연 1% 이상의 복리로 증가하고 있다고 안전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 주로 산업 분야에만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혁명적 기술 변화가 곧 농업에까지 파고들 조짐이 있다. 광업, 제조, 운송에서 이미 일어난 수준만큼 농업 생산성이 개선될 날이 머지않았을지 모른다. 불과 몇 년 안에—우리 생애 안에—농업, 광업, 제조업에서 필요한 모든 작업을,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왔던 인간노동의 4분의 1 정도만으로 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현 시점에서는 이러한 변화의 지나친 속도 때문에 우리가 상처를 입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진보의 선두에 서지 못한 나라들은 상대적으로 더 고통받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데, 일부 독자는 아직 그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을 수도 있으나, 앞으로 수년 후면 그 이름을 자주 듣게 될 것이다. 즉, ‘기술적 실업(technological unemployment)’이다. 이는 노동을 절약하는 수단을 발견하는 속도가, 그 노동력을 위한 새로운 용도를 찾아내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어 발생하는 실업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일시적 부조정(maladjustment) 단계일 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결국 인간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100년 후 선진국들의 생활수준이 오늘날의 4배에서 8배 사이 정도 높아질 것이라고 예측한다. 우리의 현재 지식만으로도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진보 가능성을 상상해보는 것 역시 어리석은 일이 아닐 것이다.
II
논의를 위해, 100년 후 우리가 평균적으로 지금의 8배쯤 더 잘살게 된다고 해보자.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일 필요가 없다.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 욕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간에 우리가 느끼는 ‘절대적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만족될 때 우리가 타인보다 우월해진다고 느끼게 하는 ‘상대적 욕구’다. 이 두 번째 종류, 즉 우월성을 충족하기 위한 욕구는 정말 끝이 없을 수 있다. 사회의 전반적 수준이 올라가면 더 높이 올라가야 만족하니까. 하지만 절대적 욕구에는 그렇지 않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점에, 이 절대적 욕구들은 충분히 충족되고, 우리는 추가 에너지를 비경제적 목적에 쏟는 편을 택할 수도 있다.
이제 내가 도달하는 결론을 말하겠다. 아마 독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오래 생각해볼수록 그 결론이 점점 더 놀랍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대규모 전쟁이나 대규모 인구 증가가 없다고 가정할 때, 100년 안에 경제 문제는 해결되거나 최소한 해결의 가시권에 들어갈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이는, 미래를 바라볼 때, 경제 문제가 인류의 영구적인 과제가 아니게 된다는 뜻이다.
왜 이것이 그렇게 놀라운가? 그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돌아보면, 생존을 위한 투쟁인 경제 문제는 지금까지 인류에게—아니, 가장 원초적 형태부터 시작된 생물학적 왕국 전체에—항상 가장 근본적이고 시급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으로부터, 우리의 모든 충동과 깊은 본능을 ‘경제 문제 해결’에 맞춰 진화해 왔다. 만약 이 경제 문제가 해결된다면, 인류는 전통적인 목적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과연 이로울까? 사람이 조금이라도 인생의 진정한 가치들을 믿는다면, 적어도 이 전망은 유익함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그러나 나는, 무수한 세대에 걸쳐 평범한 사람 안에 자리 잡은 습관과 본능을 불과 몇십 년 만에 버려야 할 수도 있음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이 든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언어로 표현하면, 전반적인 ‘신경 쇠약’을 예상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우리는 내가 말하는 바를 어느 정도 경험하고 있다. 즉, 영국과 미국에서 부유층 여성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의 ‘신경 쇠약’ 말이다. 그들은 부로 인해 전통적 일과 과제에서 벗어났지만, 경제적 필요성이라는 자극이 사라지자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고 바느질하는 일을 즐겁게 해내지 못하며, 동시에 그보다 더 즐거운 무언가도 찾지 못한 채로, 불행에 빠진 경우가 많다.
매일 빵을 얻기 위해 땀 흘리는 사람에게 여가는 갈망하던 달콤함이지만, 막상 그것을 얻고 나면 또 다르다.
이런 전통적인 묘비명이 있다. 그것은 어느 노파가 자기 무덤에 직접 써놓은 것이었다.
“친구들이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
나는 앞으로 영원히 아무것도 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것이 그 할머니에게는 천국이었다. 여가를 바라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는 시간을 보내며 라디오 방송(당시의 “listening-in”)을 듣는 일이 얼마나 좋을지 상상했다. 왜냐하면 그녀 시의 다른 연 couplet(2행시)이 다음과 같았기 때문이다.
“시편과 달콤한 음악소리로 천국이 울려 퍼지겠지만,
내가 할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그러나 오직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만이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 수 있을 텐데, 우리 중에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리하여 창조된 이래 처음으로,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문제이자 영구적인 문제—즉, 절박한 경제적 고뇌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과학과 복리 이자가 우리에게 안겨준 여가를 어떻게 현명하고 즐겁고 훌륭하게 보낼 것인지—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힘겹게 돈을 버는, 목적 의식 강한 자들이 경제적 풍요의 무릎 위로 우리를 전부 이끌어갈 수 있겠지만, 풍요가 찾아왔을 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이들은, ‘삶의 예술(art of life)’ 자체를 살려내고 더 완전하게 가꿔나가며, 생계를 위한 수단에 자신을 팔지 않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가와 풍요의 시대를 두려움 없이 내다볼 수 있는 나라나 민족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분투하도록만 훈련되었고, 즐기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특히 특별한 재능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 토지나 관습, 혹은 전통적 사회의 소중한 관습에 더 이상 뿌리를 두지 못하게 되었을 때, 자기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는 심각한 문제다. 지금 전 세계 부유층의 행태와 성취로 미루어 보면, 전망은 매우 암울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의 전위부대여서, 우리 대신 약속의 땅을 정찰하고 그곳에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독립했지만 소속이나 의무나 유대가 없는 그들 대부분은, 부여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처참히 실패해 온 것처럼 보인다.
나는, 조금만 더 경험이 쌓인다면, 우리는 오늘날 부자들이 사용하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연이 새로 준 풍요를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계획을 세우게 될 것이다.
아직 오랜 세월 동안 우리의 옛 아담(노동 본능)은 매우 강력하게 작동하기에, 모든 사람은 어느 정도 일(노동)을 해야 만족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부자들이 흔히 그렇듯 온갖 일을 다 남에게 맡기지 않고,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자잘한 의무와 일, 일과(일상 루틴)를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로, 우리는 남은 빵 위에 버터를 엷게 펴 바르듯, 남은 일을 가능한 한 널리 공유하도록 애쓸 것이다. 3시간 교대나 주 15시간 근무제를 통해, 문제를 오랫동안 뒤로 미룰 수 있다. 많은 우리에게는 하루 3시간 일만으로도 옛 아담이 충분히 만족할 테니!
다른 영역에서도 우리가 예상해야 할 변화가 있다. 부의 축적이 더 이상 높은 사회적 중요성을 갖지 않게 되면, 도덕 규범에도 대단히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지난 200년 동안 우리를 짓눌러왔던 온갖 가짜 도덕 원칙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원칙들은, 인간이 가진 가장 혐오스러운 성향 중 일부를 최고의 미덕 위치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했는데, 이제 그것들을 떨쳐낼 수 있다. 우리는 마침내, 돈 동기를 진정한 가치에 따라 평가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될 것이다. 삶을 즐기고 실제를 누리는 수단으로서의 돈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 소유 자체로서의 돈에 대한 사랑은—약간 혐오스러운 병적 상태이며, 반쯤 범죄적이고 반쯤 병리적인 그런 성향—정신질환 전문가들에게 소름끼치게 맡겨야 할 무언가로 인식될 것이다. 또한 지금은 자본 축적을 촉진하는 데 지대하게 유용하다는 이유로, 그것이 아무리 불쾌하고 불공정해도 기필코 유지해온 분배나 경제적 보상·처벌에 관련된 온갖 사회적 관습과 경제적 관행을, 우리는 마침내 자유롭게 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여전히, 강한 목적의식(purposiveness)으로 충족되지 않은 열망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그 욕망을 충족할 만한 그럴싸한 대안을 못 찾으면 맹목적으로 부(富)를 추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나머지는 더 이상 그들을 칭찬하거나 고무할 의무가 없다. 우리는, 오늘날에는 위험해서 깊이 따져보지 못했던 그 ‘목적의식’의 참된 속성을 좀 더 세심하게 탐구할 것이다. 왜냐하면 목적의식이란, 우리가 행동의 직접적 질이나 현재 환경에 미치는 즉각적 영향보다, 그 행동이 먼 미래에 남길 결과에 더 관심을 두는 심리이기 때문이다. ‘목적 지향적인’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어떤 가짜·기만적 불멸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것에 대한 관심을 계속 미래로 밀어붙인다. 그는 자기 고양이를 사랑하지 않고 고양이의 새끼를 사랑하며, 사실 그 새끼들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새끼의 새끼, 이렇게 영원히 고양이 종(種)의 끝까지 이어진다. 그에게 잼(jam)은 내일 먹겠다고 미루는 ‘내일의 잼’이 아니면 잼이 아니다. 그리하여 미래로 잼을 밀어붙임으로써, 그는 잼을 끓여 만드는 행위에 불멸성을 부여하려 한다.
루이스 캐럴의 『실비와 브루노(Sylvie and Bruno)』에 등장하는 교수를 상기시키고 싶다.
“밖에 얌전한 목소리로 양복장이가 ‘올해의 계산서를 좀…’이라고 하더군.”
“음, 얘들아, 잠시만 기다리면 금방 처리할 수 있다네. 올해는 얼마지, 자네?” 교수가 말하는 동안 그 양복장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음, 이자가 매해 두 배씩이나 늘어왔으니… 이번에는 2천 파운드가 됐습니다요.” 그 재단사는 살짝 퉁명스레 대답했다. “이제 그 돈을 받고 싶습니다.”
“오, 그거야 아무것도 아니지!” 교수가 태연하게 말하며, 마치 주머니 속에 그 정도는 늘 가지고 다닌다는 듯이 옷깃을 뒤졌다. “하지만 자네는 1년 더 기다려서 2배가 된 4천 파운드를 받는 게 낫지 않겠나? 얼마나 부유해지겠어! 자네가 원하면 왕이라도 될 수 있을걸?”
“내가 왕을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래도 엄청난 돈이긴 하네요! 음… 그러면 1년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물론이지!” 교수가 말했다. “자네 안에 좋은 판단력이 있군. 그럼 안녕하게나!”
문이 닫히자, 떠나가는 채권자를 보며 실비가 물었다. “교수님, 정말로 저 4천 파운드를 갚아야 하는 날이 올까요?”
“결코 오지 않을 걸, 얘야!” 교수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계속 ‘한 해 더 기다려서 두 배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할 테니까. 알다시피, 두 배로 불어나는데 1년 더 기다리는 건 늘 가치가 있으니까!”
어쩌면, 우리의 종교에 영원(immortality)이라는 약속을 가장 깊숙이 심어놓은 인종(민족)이, 복리(複利)의 원칙을 가장 발전시킨 것이 우연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목적지향적 인간 제도 중 가장 목적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는 복리를 특히나 사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우리가 종교와 전통적 미덕의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원칙들로 되돌아갈 수 있으리라 예상한다—즉, 탐욕(avrice)은 악덕이고, 고리대(usury)는 범죄적 행위이며, 돈에 대한 사랑은 혐오스러운 것이고,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자가 가장 올바른 미덕과 온전한 지혜의 길을 간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수단’보다 ‘목적’을 높이 평가할 것이고, 유용한 것보다 좋은 것(the good)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시간을 바르게, 잘 음미하며 보내는 법을 가르쳐줄 사람들, 사물에서 직접적인 즐거움을 끌어낼 줄 아는 매혹적인 이들, 들의 백합(수고도 길쌈도 하지 않는)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심하자! 이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최소한 또 100년은, 아름다운 것을 추하며 추한 것을 아름답다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속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추한 것이 유용하고, 아름다운 것은 유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탐욕과 고리대, 그리고 조심(precaution)을 우리는 조금 더 우리 신으로 섬겨야 한다. 그것들만이 경제적 필요라는 터널 밖, 햇빛이 드는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다지 멀지 않은 날, 인류의 물질적 환경 전반에 있어 일찍이 없었던 가장 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본다. 물론 그것이 갑작스러운 대재앙처럼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이미 시작되었다. 앞으로 일어날 전개 양상은, 경제적 필요 문제에서 사실상 해방된 사람들의 계층과 집단이 점점 더 커져간다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매우 일반적으로 확산되어, 이웃에게 주어진 의무의 성격이 바뀌는 시점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는 더 이상 경제적 목적 합리성이 요구되지 않을 때에도, 여전히 ‘타인을 위해’ 경제적으로 목적 지향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인 상황이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제적 행복의 종착점에 도달할 수 있는 속도는 네 가지에 달려 있다. 인구를 통제하는 능력, 전쟁과 내전을 피하려는 결의,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일은 과학에 맡기려는 의지, 그리고 생산과 소비의 차액으로 결정되는 축적 속도이다. 이 중 마지막 축적률은, 앞선 세 가지가 해결된다면 손쉽게 제 스스로 잘 해결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운명에 대비해 사소한 준비를 해보는 것은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목적 있는 활동뿐 아니라 삶의 예술 역시 권장하고, 실험해보는 것도 무방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는 경제 문제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거나, 그 필요라고 여겨지는 것에 더 크고 영속적인 의의를 지닌 다른 문제들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경제 문제는 치과 치료처럼 전문가의 몫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만약 경제학자들이 스스로를 치과의사 정도로 겸손하고 유능한 사람들로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멋진 일이 아닐까!
John Maynard Keynes, Essays in Persuasion, New York: W.W. Norton & Co., 1963, pp. 358-3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