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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 칸 그리고 주원장
샤, 칸 그리고 주원장
Zhuge Hyuk
2026

차례

서문
1부 · 기록된 삶
1장 · 조조(155 – 216 위왕) — 건안의 승상
2장 · 테무진(1162? – 1206 쿠릴타이) — 친족이 세운 칸
3장 · 주원장(1328 – 1368 즉위) — 용봉 연호 아래의 열두 해
4장 · 나디르(1688 – 1736 즉위) — 타흐마스프의 종
5장 · 나폴레옹(1769 – 1804 황제) — 국왕의 장학생, 공화국의 장군
2부 · 다시 출발선에서
6장 — 성과 뒤에 남은 사람들
7장 — 천자의 이름
8장 — 군대를 먹인 장부
9장 — 무간의 회의
3부 · 남은 질문
10장 — 네 사람의 기록이 말하는 것
11장 — 버틴 것과 거둔 것
결론 — 다음에 잴 것
부록
부록 — 다섯 사람 대조 연표
부록 — 사료 진위 해설
부록 — 전환점 원장과 대조 명부
부록 — 등장인물

서문

왜 어떤 사람은 유능한 부하나 장군으로 남고, 어떤 사람은 그들을 함께 움직이게 하는 최고권력자가 되었는가?

이 책은 이 질문을 품은 독자를 위해 썼다. 조조와 테무진과 주원장과 나디르와 나폴레옹의 이름은 알지만, 그들이 최고권력자가 되기 전에 무엇을 쥐었는지, 무엇을 쥐지 못했는지를 기록으로 본 적은 없는 독자다. 이 책은 그 기록을 따라간다. 기록이 적은 데까지만 간다.

다섯 사람이 그 자리를 다툰 때와 곳은 서로 멀다. 2세기 말의 중국, 12세기 말의 몽골 고원, 14세기 중엽의 중국, 18세기 전반의 이란, 18세기 말의 프랑스다.

이 책이 못 하는 것

속마음과 대화를 지어내지 않는다. 기록에 없는 말은 이 책에 없다. 따옴표 안의 말은 어느 기록이 그렇게 적은 말이다. 기록이 말하지 않는 곳은 비워 둔다. 기록에 없다는 것을 없었다는 뜻으로 읽지 않는다.

다섯 사람을 칭찬하거나 꾸짖지 않는다. 그들을 높이거나 낮추는 말은 기록에 남은 누군가의 말로만 들어온다.

이 책이 기대는 기록 가운데 여럿은 당사자 자신이나 그의 궁정이 이긴 뒤에 남긴 것이다. 회고와 비문과 궁정 사관이 엮은 역사가 그렇다. 이 책은 그런 기록도 쓴다. 이긴 쪽의 기록이라고 버리지도, 그대로 믿지도 않는다. 쓸 때는 누가 언제 적었는지를 문장 안에 둔다. 사료마다 누가 왜 썼는지는 부록 「사료 진위 해설」에 모았다.

당사자의 진영 밖에서 나온 기록도 있다. 적의 격문과 이웃 나라 사관의 기록, 그 궁정을 드나든 상인과 선교사와 외교관의 보고가 그렇다. 같은 일을 기록마다 다르게 적은 곳에서는 갈린 판본을 나란히 둔다.

이 책은 다섯 사람의 삶을 모두 쓰지만, 기록을 서로 견주는 셈에는 테무진을 뺀 네 사람만 넣는다.

소설과 전설은 사실로 쓰지 않는다. 조조의 장은 《삼국연의》의 장면을 쓰지 않는다. 그 소설은 조조가 죽고 천 년이 넘게 지난 뒤에 나왔다. 쓰지 않은 이야기는 부록 「사료 진위 해설」이 그 까닭과 함께 모았다.

이 책은 황제가 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범례

테두리를 두른 블록의 머리에는 '가상 시뮬레이션 · 기록이 아니다'라고 적는다. 블록 안에는 그 시점에 그 사람이 알 수 있던 정보와, 당대에 실제로 있던 선택지만 쓴다. 블록 안의 사람은 그 뒤에 일어난 일을 모른다. 블록은 그의 결정 바로 다음 한 걸음까지만 따라간다. 블록마다 그 사람 자신의 기록을 빼면 무엇이 남는지를 밝힌다.

블록 밖의 문장은 기록이거나 기록에 대한 해석이다. 해석은 문장이 스스로 해석이라고 밝힌다. '확인되지 않는다'와 '이 기록으로는 가를 수 없다'는 증거가 거기서 멈춘다는 표시다. 없었다는 말도, 틀렸다는 말도 아니다. 각주에는 출처와, 그 출처를 누가 언제 왜 썼는지를 적는다. 사료에 등급을 매긴 표는 부록 「전환점 원장과 대조 명부」에만 범례와 함께 둔다.

한문 기록의 인용은 우리말 번역 뒤 괄호 안에 원문을 둔다. 몽골어와 페르시아어와 아르메니아어와 라틴어 기록 가운데 여럿은 영어나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인용한다. 한자는 괄호 안에만 쓴다.

서술은 다섯 사람을 조조, 테무진, 주원장, 나디르, 나폴레옹으로 부른다. 칭호는 그 칭호를 말할 때만 쓴다. 등장하는 사람은 부록 「등장인물」에 모았다.

1부 다섯 장의 머리에는 연도 둘이 붙는다. 태어난 해가 크게 갈리는 사람은 한 꼴에 물음표를 붙인다. 테무진이 그렇다. 다른 설은 부록 「다섯 사람 대조 연표」가 가진다. 장 머리의 두 연도는 태어난 해와 이 책에서 서술을 마치는 지위에 오른 해다.

1부
기록된 삶
1장 · 조조(155 – 216 위왕)

건안의 승상

낙양의 들풀

낙양의 궁실은 다 타 버렸다. 건안 원년인 196년, 천자는 그 폐허에 돌아와 있었다. 백관은 가시덤불을 헤치고 다녔다. 그들은 담벼락에 기대어 지냈다. 상서랑 이하의 관리들은 직접 나가 들풀을 캤다.

담벼락 사이에서 굶어 죽는 관리가 나왔다. 병사의 손에 죽는 관리도 있었다. 주와 군은 저마다 강한 군대를 끼고 있었다. 물자는 낙양에 오지 않았다.1

천자를 호송해 온 장수는 양봉과 한섬과 동승과 장양이었다. 그들은 조정의 높은 관직을 나누어 가졌다. 장양은 대사마가, 양봉은 거기장군이 되었다. 장수들은 서로를 통솔하지 못했다. 위아래가 어지러웠다. 식량이 다했다.2

그보다 앞선 그해 여름, 양봉과 호재와 이락은 면지 동쪽으로 유람한다며 천자의 수레를 되돌리려 했다. 천자는 따르지 않았다. 수레는 북쪽 길로 떠났다.3 한 해 전 이각과 곽사가 서로 싸울 때 이각은 천자를 위협해 자기 진영으로 옮겼다. 곽사가 공격하자 화살이 천자의 어전까지 날아왔다.4

양봉의 병마가 가장 강했지만 그의 편은 적었다. 동소가 조조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양봉에게 보냈다. 편지를 받은 양봉이 말했다. “연주의 군대가 허 가까이 있는데, 병사도 있고 식량도 있으니 나라가 의지할 곳이다”(兗州諸軍近在許耳,有兵有糧,國家所當依仰也). 양봉은 다른 장수들과 함께 표를 올려 조조를 진동장군으로 삼게 했다. 조조는 아버지의 작위 비정후도 이었다.5

조조 진영은 천자를 맞는 일로 갈렸다. 여러 장수 가운데 의심하는 이가 있었다. 산동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한섬과 양봉이 장양과 이어져 있어 쉽게 누를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순욱과 정욱은 맞으라고 권했다. 순욱은 천자를 받들어 백성의 바람을 따르는 것이 큰 순리라고 했다. 그는 진 문공과 한 고조의 옛일을 들었다.

조조가 먼저 보낸 조홍은 나아가지 못했다. 동승과 원술의 장수 장노가 험한 길목을 막고 있었다.

그 뒤 한섬이 공을 뽐내며 정사를 어지럽혔다. 동승은 몰래 조조를 불렀다.6 그해 가을 조조는 직접 낙양에 들어갔다. 그는 동소에게 계책을 물었다. 동소는 천자의 수레를 허로 옮기라고 답했다. 비상한 일을 해야 비상한 공이 있다고도 했다.

조조가 답했다. “이것이 내 본래 뜻이다”(此孤本志也). 그는 가까이 양에 있는 양봉의 군대가 정예라는데 짐이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동소는 양봉에게 편이 적다고 답했다.7

같은 안은 천자가 아직 하동에 있을 때 기주의 원소 진영에도 올라왔다. 《헌제전》은 그때 저수가 천자를 맞아 업에 궁을 두자고 건의했다고 적는다.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명령하면서 군마를 길러 복종하지 않는 자를 치면 누가 막겠느냐는 건의였다. 곽도와 순우경이 반대했다. “천자를 맞아 가까이 두면 움직일 때마다 표를 올려 아뢰어야 하니, 따르면 권세가 가벼워지고 어기면 명을 거스르게 됩니다”(若迎天子以自近,動輙表聞,從之則權輕,違之則拒命). 원소는 저수의 안을 쓰지 못했다.8

진수에 따르면 헌제의 즉위는 처음부터 원소의 뜻이 아니었다. 191년 원소가 기주를 얻은 직후에도 저수는 같은 구상을 냈다. 장안에서 천자의 수레를 맞아 낙양의 종묘를 되살리자는 안이었다. 원소는 그것이 자기 마음이라고 답했다. 그 안은 실행되지 않았다.

초현에서 낙양까지

조조는 155년 패국 초현에서 태어났다.9 할아버지 조등은 환관이었다. 사마표의 《속한서》와 범엽의 《후한서》에 따르면 그는 중상시와 대장추로 네 황제를 섬겼다. 비정후에 봉해지기도 했다. 아버지 조숭은 조등의 양자였다. 조숭이 누구의 아들이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10

조등이 천거한 사람들은 모두 공경의 자리에 올랐다.11 조숭은 영제 때 태위에 올랐다. 범엽의 《후한서》는 그가 환관에게 뇌물을 주고 서원에 1억 전을 바쳐 그 자리를 샀다고 적는다. 200년 원소의 격문은 조숭이 장물로 그 지위를 빌렸다고 공격했다. 같은 격문은 조조를 환관이 남긴 추한 후손이라 불렀다.12

젊은 조조는 임협하고 방탕했다. 그는 행실을 닦지 않았다. 세상은 그를 대단하게 보지 않았다. 양국의 교현과 남양의 하옹만 그를 남다르게 보았다. 교현은 천하가 곧 어지러워지고 세상에 이름난 인재가 아니면 구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것을 안정시킬 사람은 그대일 것이라고 했다.13

원소의 집안은 고조부 원안 이래 4대에 걸쳐 삼공을 냈다. 진수의 표현으로 그 세력은 천하를 기울게 했다.

174년 스무 살의 조조는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그는 낭을 거쳐 낙양북부위가 되었다. 돈구령을 지낸 뒤 의랑이 되었다. 《위서》에 따르면 그는 종매부 송기의 죄에 연좌되어 벼슬을 잃었다가 다시 의랑으로 불려 왔다. 184년 황건이 일어났다. 조조는 기도위로 영천을 친 뒤 제남상이 되었다.

그는 제남에서 장리 여덟 명을 탄핵해 물러나게 했다. 음사도 금했다. 《위서》에 따르면 그가 헐어 낸 사당은 600여 곳이었다. 조정이 그를 동군태수로 불렀지만 그는 부임하지 않았다. 병을 핑계로 고향에 돌아갔다. 《위서》에 따르면 그는 성 밖에 집을 지었다.

188년 무렵 기주자사 왕분과 허유가 영제를 폐하고 합비후를 세우려 했다. 조조는 그 모의를 거절했다. 왕분은 자살했다. 같은 해 조정은 조조를 전군교위로 불렀다.14

가산을 흩어 모은 군대

189년 영제가 죽었다. 하진이 피살되었다. 동탁이 낙양에 들어왔다. 그해 9월 28일 동탁은 황제를 폐하고 헌제를 세웠다.15 그는 조조를 효기교위로 삼아 함께 일을 의논하려 했다. 조조는 받지 않았다.

그는 이름을 바꾸었다. 샛길로 동쪽으로 돌아갔다. 중모에서 정장이 그를 의심해 붙잡아 현으로 보냈다. 고을의 누군가가 몰래 그를 알아보고 청을 넣어 그는 풀려났다. 아버지 조숭은 아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낭야로 피란했다.16

같은 해 원소는 환관 2천여 명을 죽였다. 그는 동탁과 부딪친 뒤 기주로 달아났다. 동탁은 그를 달래려고 발해태수 자리를 주었다. 원소는 그 군을 거점으로 삼았다. 포신은 하진의 명으로 모은 무리를 거느리고 향리로 돌아갔다.17 순욱은 항보령 자리를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뒤에 종족을 이끌고 기주로 갔다.

그해 겨울 조조는 진류에서 가산을 흩어 의병을 모았다. 그는 기오에서 군사를 일으켰다.18 일족이 병력을 보탰다. 조인은 몰래 젊은이들과 결탁해 천여 명을 얻었다. 하후돈은 비장으로 따랐다.

동군태수 교모는 도성의 삼공이 보낸 것처럼 공문을 꾸며 주와 군에 돌렸다.19 190년 봄 관동의 주와 군이 일제히 군사를 일으켰다. 원소가 맹주가 되었다. 조조는 행분무장군이라는 임시 직함으로 연합에 들었다. 동탁은 천자를 장안으로 옮겼다. 그는 낙양에 머물며 궁실을 불태웠다.

원소를 비롯한 제후들은 먼저 나아가지 못했다. 조조는 홀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갔다. 그는 형양에서 동탁의 장수 서영에게 졌다.

조조는 화살을 맞았다. 조홍이 자기 말을 그에게 내주었다. 조홍은 천하에 자기는 없어도 되지만 조조는 없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함께 나아간 위자는 그 싸움에서 종일 싸우다 죽었다.20

산조에 모인 제후의 군대는 10여만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술자리를 벌였다. 진격은 도모하지 않았다. 조조는 계책을 내놓았다. 의로 군사를 일으키고도 머뭇거리면 천하의 기대를 잃는다며 그들을 위해 부끄럽다고 했다. 장막을 비롯한 장수들은 그 계책을 쓰지 않았다.

형양에서 진 뒤 조홍은 집안 병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양주자사 진온에게 가서 병사를 모았고, 용항에서 조조와 합류했다. 조조는 양주로 가서 4천여 명을 모았다. 용항에서 그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위서》에 따르면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은 5백여 명이었다. 그는 질과 건평에서 천여 명을 다시 거두었다.

맹주 원소는 유주목 유우를 새 황제로 세우려 했다. 조조는 따르지 않았다. 원소는 조조에게 장막을 죽이라고 했다. 조조는 장막이 친한 벗이라며 거절했다. 장막은 그 일을 알고 조조를 더욱 고맙게 여겼다.21

191년 원소가 기주목 한복을 위협해 기주를 차지하자 포신은 원소가 또 하나의 동탁이 되리라고 조조에게 경고했다. 황하 남쪽을 도모하며 변화를 기다리라고 권했다. 조조는 그 말을 좋게 여겼다.22

191년 순욱이 원소를 떠나 조조에게 왔다. 조조는 흑산적 백요를 복양에서 깨뜨렸다. 원소가 표를 올려 그를 동군태수로 삼았다.23

연주와 청주병

192년 연주자사 유대가 황건과 싸우다 죽었다. 191년 조조의 표로 제북상이 된 포신은 그에게 성을 지키라고 권했었다. 유대는 듣지 않고 나가 싸웠다. 동군 사람 진궁은 연주에 지금 주인이 없으니 가서 다스리라고 조조에게 권했다. 포신과 주의 관리 만잠이 동군으로 와서 조조를 맞았다. 그들은 조조를 연주목으로 삼았다.24

《위서》에 따르면 동군의 군대는 옛 병사가 적고 새 병사는 훈련되지 않아 온 군이 두려워했다. 조조는 직접 갑옷을 입고 장병을 돌아보았다. 그는 상과 벌을 분명히 했다.25

조조는 수장에서 황건과 싸웠다. 포신이 그 싸움에서 죽었다. 그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사람들이 나무로 그의 형상을 깎아 제사하고 곡했다.26

《위서》에 따르면 조조는 황건에게 여러 번 항복할 길을 열어 보였다. 그해 겨울 황건이 항복했다. 항복한 병졸이 30여만, 남녀가 100여만 명이었다. 조조는 그 가운데 정예를 골라 청주병이라 불렀다.

그 무렵 장안의 조정은 김상을 연주자사로 보냈다. 김상은 봉구까지 왔다가 조조에게 쫓겨났다. 그는 원술에게 몸을 맡겼다.27

모개는 조조에게 천자를 받들어 신하 노릇 하지 않는 자들을 호령하라고 건의했다. 경작을 닦아 군자를 쌓으라고도 했다. 조조는 그 말을 공경히 받아들였다.

조숭은 낭야로 피란해 있다가 살해되었다.28 193년 가을과 194년 여름 조조는 두 차례 서주의 도겸을 쳤다. 첫 원정에서 그는 열 개 남짓한 성을 떨어뜨렸다. 팽성의 큰 싸움에서 죽은 사람이 만을 헤아렸다. 시체로 사수가 흐르지 않았다. 두 번째 원정에서 그의 군대는 지나는 곳마다 많은 사람을 죽였다.29

세 성

194년 여름 조조가 두 번째로 서주에 가 있을 때 연주가 돌아섰다. 진류태수 장막과 진궁이 여포를 맞아들였다. 종사중랑 허사와 왕해도 모반에 가담했다. 진궁은 조조의 명으로 병력을 이끌고 동군에 남아 있던 사람이었다.

장막은 조조와 벗이었다. 도겸을 치러 떠날 때 조조는 가족에게 자기가 돌아오지 못하면 장막에게 의지하라고 일렀다. 여포가 장막과 맹세하고 떠난 일로 원소는 장막을 크게 원망했다. 진수에 따르면 장막은 조조가 끝내 원소를 위해 자기를 칠까 두려워했다. 진궁은 장막에게 천 리의 무리를 거느리고도 남에게 제압당하니 비루하지 않으냐고 했다. 여포를 맞아 함께 연주를 다스리자고 했다.

군현이 모두 호응했다. 남은 곳은 견성과 범과 동아, 세 성이었다. 견성에는 순욱과 정욱이 있었다. 조조는 떠나면서 순욱에게 남은 일을 맡겼다. 수장령 정욱도 순욱과 함께 남겨 두었다.

장막의 사자가 견성에 와서 여포 장군이 조 사군을 도와 도겸을 치러 왔으니 군량을 대라고 했다. 순욱은 장막이 난을 일으킨 줄 알았다. 그는 군대를 정비하고 동군태수 하후돈을 급히 불렀다. 하후돈은 조조의 가족이 있는 견성으로 가벼운 수레를 몰아 달려왔다. 두 사람은 그날 밤 모반에 가담한 수십 명을 죽였다.

정욱은 범과 동아로 가서 그곳 현령들을 설득했다. 범현령 근윤은 두 마음을 품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동아령 조지는 성을 지켰다.30

여포는 복양에 들어가 하후돈 군의 치중을 빼앗았다. 여포의 장수들은 거짓으로 항복해 와서 하후돈을 인질로 잡았다. 하후돈의 부장 한호는 자기는 명을 받아 적을 친다고 말했다. 한호가 하후돈을 구해 냈다.

조조가 돌아왔다. 별가 필심의 어머니와 아우와 처자가 장막에게 붙잡혀 있었다. 조조는 필심에게 노모가 저쪽에 있으니 가도 좋다고 했다. 필심은 머리를 조아리며 두 마음이 없다고 했다. 밖으로 나간 그는 저쪽으로 달아났다.31 조조가 효렴으로 천거한 위종도 그를 떠났다.

조홍은 동평과 범을 차지하고 곡식을 모아 군대를 먹였다. 승씨의 호족 이건은 빈객 수천 가를 거느리고 조조를 따르던 사람이었다. 그는 여포 쪽의 회유를 거절하다 죽었다.

조조는 여포와 백여 일을 맞섰다. 복양의 싸움에서 여포의 기병이 청주병을 먼저 쳤다. 청주병은 달아났다. 조조는 말에서 떨어져 왼손바닥을 데었다.

그해 곡식 1곡의 값이 50여만 전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먹었다. 조조는 새로 모집한 병사를 내보냈다.

그해 가을 원소가 사자를 보내 손을 잡자고 했다. 조건은 조조의 가족을 업으로 옮겨 살게 하는 것이었다. 조조는 받아들이려 했다. 정욱이 그를 말렸다. “장군께서 스스로 헤아려 그의 아래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연주가 망가졌어도 아직 세 성이 있고, 싸울 수 있는 병사가 1만 아래가 아닙니다”(將軍自度能爲之下乎…今兗州雖殘,尚有三城。能戰之士,不下萬人). 조조는 원소의 제안을 그만두었다.32

이듬해 조조는 도겸이 죽은 서주를 먼저 치려 했다. 순욱이 반대했다. 앞서 서주를 칠 때 위엄과 형벌이 실제로 행해졌다고 그는 말했다. 서주의 자제들이 부형의 치욕을 생각해 저마다 스스로 지킬 것이고 항복할 마음이 없으리라고 했다. 조조는 연주를 먼저 되찾았다. 그해 겨울 천자가 그를 연주목에 정식으로 임명했다.

옹구가 떨어지자 장막의 아우 장초가 자살했다. 장막의 삼족이 멸했다. 장막은 원술에게 구원을 청하러 가다가 자기 병사에게 죽었다.

허 천도와 둔전

196년 9월 28일 조조는 낙양에서 녹상서사와 사예교위가 되었다.33 그는 한섬과 장양의 죄를 천자에게 아뢰었다. 한섬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홀로 말을 타고 양봉에게 달아났다. 천자는 두 사람에게 수레를 도운 공이 있다며 모두 묻지 말라고 했다.34

천자가 허에 도읍하자 정욱은 상서가 되었다. 정욱은 이어 동중랑장·제음태수·도독연주사가 되었다. 장보의 《한기》에 따르면 태사령 왕립은 한을 이을 것은 위(魏)요 천하를 안정시킬 것은 조씨라고 천자에게 말했다. 조조는 사람을 보내 왕립에게 말을 많이 하지 말라고 일렀다.35

동소는 양봉에게 사자를 보내 경도에 식량이 없어 천자가 잠시 노양으로 간다고 말하라고 권했다. 조조는 좋다고 하고 곧 양봉에게 사자를 보냈다. 천자의 수레는 허로 갔다. 양봉과 한섬은 수레를 막으려 했으나 미치지 못했다. 그 뒤 조조는 양에 있던 양봉의 진영을 깨뜨렸다.36 조조가 하남 땅을 거두자 관중이 모두 귀부했다.

허로 옮긴 직후 공경이 모인 자리에서 조조는 태위 양표의 언짢은 기색을 보았다. 범엽의 《후한서》에 따르면 그는 그 자리에서 해를 입을까 두려워 연회가 열리기 전에 측간에 간다며 진영으로 돌아갔다. 양표는 그 뒤 병으로 물러났다.37

같은 책은 천자가 분을 참지 못하고 조조에게 한 말을 적는다. 그대가 자기를 도울 수 있다면 후하게 대하고, 그렇지 않다면 은혜를 베풀어 자기를 버려 달라는 말이었다. 조조는 낯빛을 잃었다. 땀이 등을 적셨다. 그 뒤로 그는 다시 조회하지 않았다.38

허에서 조조는 대장군·무평후가 되었다. 원소는 태위가 되었다. 원소는 자기 서열이 조조 아래인 것을 불만스러워했다. 조조는 대장군 자리를 원소에게 넘겼다. 197년 1월 1일 조조는 사공이 되었다.39

원소는 천자를 견성으로 옮겨 자기 가까이 두라고 요구했다. 조조는 거절했다.

그해 여포에게 하비를 빼앗긴 유비가 조조에게 왔다. 정욱은 유비를 일찍 도모하라고 권했다. 조조는 지금은 영웅을 거둘 때라며 한 사람을 죽여 천하의 마음을 잃을 수는 없다고 했다.

197년 조조는 원술과 혼인으로 얽혔다는 이유로 양표를 옥에 가두었다. 공융은 내일 당장 옷을 떨치고 떠나 다시 조회하지 않겠다고 했다. 조조는 이것이 국가의 뜻이라고 답했다. 허령 만총은 죄가 분명하지 않으면 백성의 신망을 크게 잃는다고 했다. 조조는 그날로 양표를 풀어 주었다.40

조지와 한호가 둔전을 건의했다. 조조는 허 근처의 땅에 둔전을 열었다. 그해 곡식 100만 곡을 거두었다.41 조조는 주와 군마다 농사를 맡는 전관을 두었다. 둔전은 전농중랑장 임준이 맡았다. 군국의 넉넉함은 조지에게서 시작해 임준에게서 이루어졌다는 평이 〈임준전〉에 남아 있다.

관도의 편지

197년 초 완의 장수(張繡)가 항복했다가 배반했다. 조조는 화살을 맞았다. 맏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이 죽었다. 조조는 장수의 항복을 받고도 인질을 바로 받지 않아 이렇게 되었다고 말했다. 자기가 진 까닭을 안다고 했다.

같은 해 원술이 회남에서 황제를 칭했다. 원술은 진국(陳國)을 치다가 조조가 직접 오자 군대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의 부하들이 떠났다. 원술은 199년 병으로 죽었다.

《헌제춘추》에 따르면 198년 원소 진영에서 달아난 병사가 조조에게 와서 전풍의 건의를 알렸다. 일찍 허를 습격해 천자를 끼라는 건의였다. 조조는 장수(張繡)를 포위하던 군대를 풀었다.

198년 겨울 조조는 순유와 곽가의 계책대로 하비에 물을 끌어대 성을 떨어뜨렸다. 여포와 진궁이 사로잡혔다. 진궁은 신하로서 충성하지 않고 자식으로서 효도하지 않았으니 죽는 것이 마땅하다며 죽기를 청했다. 조조는 울며 그를 보냈다. 진궁의 노모와 딸은 조조가 거두어 길렀다.42 여포도 처형되었다.

필심도 사로잡혔다. 조조는 어버이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어찌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겠느냐며 그를 노상으로 삼았다. 198년 여포가 사로잡힌 뒤 숨어 있던 태산의 장패를 조조가 찾아내 받아들였다. 조조는 청주와 서주의 바닷가 땅을 쪼개 장패에게 맡겼다. 이듬해 조조는 위종을 하내태수로 삼았다. 같은 해 장수(張繡)가 다시 항복해 왔다.

어환의 《전략》에 따르면 199년 원소는 주부 경포를 사사로이 시켜 한의 운수인 적덕(赤德)이 다했고 원씨는 황(黃)의 후손이라고 은밀히 말하게 했다. 원소가 그 말을 막부의 장수와 관리들에게 보이자 그들은 경포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원소는 경포를 죽여 혐의를 벗었다.

같은 해 조조는 유비를 좌장군으로 표했다. 두 사람은 나갈 때 같은 수레를 탔다. 앉을 때는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해 거기장군 동승이 조조를 죽이려는 모의를 꾸몄다. 동승은 황제의 옷띠 속에 든 밀조를 받았다고 말했다.43 유비도 그 모의에 가담했다. 유비는 서주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동승의 모의는 새어 나갔다. 200년 2월 11일 조조는 동승과 왕복과 종집을 죽였다. 그들의 삼족도 멸했다. 천자는 동승의 딸 동귀인이 임신했다며 여러 번 살려 달라고 청했다.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4

200년 초 조조는 원소가 큰 뜻은 있어도 일을 보는 것이 느려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그는 원소보다 유비를 먼저 쳤다. 원소는 아들의 병을 이유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해 원소 진영은 격문을 돌렸다. 격문은 조조가 삼대(三臺)를 앉아서 부르고 조정을 마음대로 한다고 공격했다. 작위와 상은 그의 마음에서 나오고 형벌과 살육은 그의 입에 달렸다고 했다. 원소 진영의 저수는 조조가 천자를 끼고 밑천으로 삼았다고 평했다.45

200년 봄 조조는 백마와 연진에서 원소의 장수 안량과 문추를 베었다. 그때 조조의 기병은 6백이 안 되었다. 그해 가을 두 군대가 관도에서 맞섰다. 원소의 무리는 10여만이었다. 조조의 병사는 1만이 안 되었다. 다친 사람이 열에 두셋이었다.46

임준은 수레 천 대를 한 부로 묶어 열 갈래로 나란히 군량을 날랐다. 종요는 말 2천여 필을 보냈다. 장패는 여러 번 정병을 이끌고 청주로 들어갔다. 조조는 원소 한 사람에게 힘을 쏟을 수 있었다. 견성의 정욱은 7백 명으로 성을 지켰다. 조조가 2천 명을 보태 주려 하자 정욱은 사양했다.

원소 진영의 저수는 서두르지 말고 날짜를 끌며 오래 버티라고 권했다. 원소는 따르지 않았다. 그 무렵 강동의 손책은 허를 습격하려다 일을 벌이기 전에 자객에게 죽었다.

군량이 모자랐다. 조조는 허를 지키던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허로 돌아가는 일을 의논했다. 순욱이 답했다. “공은 가장 약한 것으로 가장 강한 것을 상대하고 있으니, 제압하지 못하면 반드시 그에게 먹힙니다… 원소는 평민 가운데 영웅일 뿐이라, 사람을 모을 줄은 알아도 쓸 줄은 모릅니다”(以至弱當至彊,若不能制,必爲所乘…紹,布衣之雄耳,能聚人而不能用). 조조는 물러나지 않았다.47

조조는 군량을 나르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15일만 지나면 너희를 위해 원소를 깨뜨려, 다시는 너희를 수고롭게 하지 않겠다”(却十五日爲汝破紹,不復勞汝矣).48

원소의 모신 허유가 넘어왔다. 원소가 그의 재물 욕심을 채워 주지 않은 뒤였다. 허유는 군량을 지키는 순우경을 치라고 했다. 좌우는 그를 의심했다. 순유와 가후가 따르라고 권했다. 조조는 보병과 기병 5천을 직접 이끌고 오소로 갔다.

순우경의 군대는 오소에서 무너졌다. 원소의 장수 장합과 고람이 항복했다. 원소의 군대는 궤멸했다. 조조는 원소의 치중과 도서와 보물을 거두었다. 조조는 천자에게 올린 글에서 7만여 명의 목을 베었다고 보고했다.49

원소가 남긴 문서 더미에서 편지가 나왔다. 허도와 조조 진중의 사람들이 원소와 주고받은 편지였다. 조조는 그 편지를 모두 불태웠다.

업에서 적벽까지

관도에서 군대가 깨진 뒤 원소는 병이 났다. 그는 피를 토하다가 202년에 죽었다.50 작은아들 원상이 뒤를 이었다. 원담은 스스로 거기장군이라 칭했다. 두 형제는 서로 다투었다.

204년 조조는 업을 떨어뜨렸다. 성 안에서 굶어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었다. 조조는 원소의 묘에 제사했다. 그는 곡하며 눈물을 흘렸다. 원소의 아내를 위로하고 그 집안 사람과 보물을 돌려주었다.51

그해 조조는 하북의 조세를 면제했다. 천자가 그에게 기주목을 겸하게 했다. 조조는 연주목을 반납했다.52

조조는 영을 내려 조세를 정했다. 밭의 조세는 1무에 4승이었다. 호마다 거두는 것은 비단 2필과 솜 2근으로 정했다. 그 밖에는 함부로 거두지 못하게 했다.53

205년 조조는 원담을 베고 기주를 평정했다. 그는 원씨와 함께 악을 행한 자들도 다시 시작하게 한다는 영을 내렸다. 흑산의 장연이 10여만을 이끌고 항복했다.

207년 조조는 공신 20여 명을 열후에 봉했다. 그때 내린 영에서 그는 의병을 일으킨 지 19년 동안 친 곳마다 이긴 것이 자기 공이 아니라 현명한 사대부들의 힘이라고 했다. 《위서》에 따르면 그는 자기가 받은 봉읍 3만 호의 조세를 장수와 속관과 진·채에서 수자리 섰던 자들에게 나누겠다고 했다.54

여러 장수가 오환 원정에 반대했다. 곽가만 찬성했다. 조조는 오환을 쳐서 백랑산에서 답돈을 베었다. 항복한 오랑캐와 한인이 20여만 명이었다. 요동의 공손강이 달아난 원상과 원희의 머리를 보내왔다.

208년 조정은 삼공을 없애고 승상의 자리를 두었다. 그해 7월 9일 조조가 승상이 되었다.55 그해 가을 조조는 태중대부 공융을 죽이고 그 일족을 멸했다.56 형주의 유종이 항복했다. 조조는 복종한 공이 있는 형주 사람 15명을 후로 봉했다. 유표의 대장 문빙을 강하태수로 삼아 본래의 병력을 그대로 거느리게 했다.

그해 겨울 적벽에서 조조는 유비와 싸워 이롭지 못했다. 역병이 크게 돌았다. 조조는 군대를 돌렸다.57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했다.

형주를 친 뒤의 어느 날 조조는 정욱의 등을 두드렸다. 연주에서 졌을 때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정욱은 만족을 알면 욕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스스로 표를 올려 거느리던 군대를 돌려보냈다. 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반란을 일으킨 서흡과 모휘가 장패에게 몸을 의탁한 일이 있었다. 조조는 장패에게 두 사람의 목을 요구했다. 장패는 자기가 스스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조조는 요구를 거두고 두 사람을 군수로 삼았다. 장패는 뒤에 자제와 장수들의 가족을 업으로 보내겠다고 스스로 청했다.

이건의 군대를 이은 조카 이전은 승씨에 살던 종족과 부곡을 위군으로 옮기겠다고 스스로 청했다. 그는 부곡과 종족 1만 3천여 명을 업으로 옮겼다.58

봉읍과 군대

210년 봄 조조는 재능만으로 천거하라(唯才是舉)는 영을 내렸다. 그해 겨울 그는 동작대를 지었다.

211년 1월 무렵 조조는 긴 영을 하나 내렸다.59 영에 따르면 전군교위가 된 뒤 그의 소망은 묘도에 '한 고 정서장군 조후의 묘'라는 글이 새겨지는 것이었다. 영은 그가 제남상 시절 여러 상시를 거슬렀다고 말한다. 집안에 화가 미칠까 두려워 병을 핑계로 고향에 돌아갔다고도 말한다.

영은 나라에 그가 없었다면 몇 사람이 황제를 칭하고 몇 사람이 왕을 칭했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가 강성하고 천명을 믿지 않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불손한 뜻이 있다고 수군거릴까 늘 마음이 쓰인다고도 말한다. 영은 원술의 아랫사람들이 즉위를 권하자 원술이 조공이 아직 있으니 안 된다고 답했다고도 말한다. 그는 이 말을 여러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처첩에게도 해 두었다고 밝혔다.60

조조는 봉읍 4현 3만 호 가운데 양하·자·고 세 현의 2만 호를 돌려 올리고 무평의 1만 호만 받겠다고 했다. 천자의 답은 211년 2월 11일에 내려왔다.61 줄인 것은 5천 호였다. 사양한 세 현의 나머지 1만 5천 호는 세 아들 조식·조거·조표에게 5천 호씩 나뉘어 봉해졌다.

군대는 내놓지 않았다. 그는 이 영에서 스스로 이렇게 썼다. “군대를 떠나면 남에게 화를 입을까 진실로 두렵다… 헛된 이름을 탐하다 실제의 화를 입을 수는 없다”(誠恐己離兵爲人所禍也…不得慕虛名而處實禍).60

211년 아들 조비가 오관중랑장이 되었다. 그해 가을 조조는 위수 남쪽 진영 앞에서 한수와 말을 나란히 하고 한참 이야기했다. 두 사람은 군사 일은 말하지 않았다. 경도의 옛 친구들 이야기만 했다. 둘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위서》에 따르면 한인과 오랑캐 구경꾼(秦、胡觀者)이 겹겹이 둘러선 가운데 조조는 적에게, 조공도 사람일 뿐 눈이 넷이나 입이 둘인 것이 아니고 꾀가 많을 따름이라고 했다. 마초를 비롯한 장수들이 한수를 의심했다. 조조는 동관과 위남에서 마초와 한수를 깨뜨렸다.

위공의 책문

212년 봄 천자는 조조에게 소하의 옛일과 같은 예우를 내렸다. 천자에게 절할 때 그의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그는 조정에 들 때 종종걸음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칼을 차고 신을 신은 채 전각에 오를 수 있었다. 동소는 옛 다섯 등급의 봉작을 되살리자고 건의했다. 조조는 자기가 어찌 감당하겠느냐고 했다.

동소를 비롯한 사람들이 조조를 국공으로 올리고 구석을 더하는 일을 의논했다. 그들은 은밀히 순욱에게 물었다.62 《헌제춘추》에 따르면 동소는 순욱에게 편지를 보냈다. 조조가 공신 장수들과 함께 한 현의 후에 머무는 것은 천하가 바라는 바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순욱은 반대했다. 그는 조조가 본래 의병을 일으킨 뜻이 조정을 바로잡고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있었다고 말했다. 충정의 진심과 물러나 사양하는 실질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그는 군자는 덕으로 사람을 아끼는 법이니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다(君子愛人以德,不宜如此).63

진수에 따르면 조조는 이 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조는 순욱을 군중에 붙잡아 두었다.

213년 6월 16일 어사대부 치려가 절을 지니고 업에 왔다. 천자의 책명은 조조를 위공에 봉했다. 기주의 10군이 위국이 되었다. 구석이 더해졌다.64 한의 상서좌승 반욱이 쓴 책문은 위국에 여러 경과 백관을 두되 한나라 초 제후왕의 제도를 따르게 했다.

책문 속의 천자는 지난날을 이렇게 말한다. “짐은 덕이 없어 어려서 근심과 흉사를 만났다… 그때 짐은 깃발 끝의 술처럼 매달려 있었다”(若綴旒然). 조조는 세 번 사양했다.65

그해 가을 위의 사직과 종묘가 섰다. 천자는 비단 5만 필을 빙례로 보내 조조의 세 딸을 귀인으로 맞았다. 겨울에는 위국에 상서와 시중과 육경이 섰다. 상서령은 순유였다. 상서에는 모개와 최염이 들었다.66

214년 천자는 위공의 지위를 제후왕보다 위에 두었다. 금새와 적불과 원유관도 내렸다. 그해 겨울 복황후가 폐위된 뒤 죽었다. 동승이 죽은 뒤 황후가 아버지 복완에게 보낸 편지가 드러난 일이었다. 황후의 형제들은 처형되었다.67

215년 조조의 둘째 딸이 황후가 되었다. 그해 천자는 조조에게 천자의 이름으로 제후를 봉하고 태수와 국상을 임명하라고 명했다. 216년 천자는 조조를 위왕으로 올렸다. 조조는 세 번 사양했다. 세 번 다 허락받지 못했다.68 그해 하후돈은 26군을 도독하는 자리를 맡아 거소에 머물렀다.

조조는 위왕의 자리에 있다가 220년 3월 15일 낙양에서 죽었다.69

213년 책명을 받으라고 권하는 글에는 30여 명이 이름을 올렸다. 순유·종요·정욱·가후·동소·하후돈·조홍·조인을 비롯한 이름이다.70 그 명단에 순욱의 이름은 없다. 순욱은 한 해 앞선 212년 수춘에서 죽었다. 진수는 그가 근심으로 죽었다고, 손성은 그가 빈 그릇을 받고 약을 마셨다고 적는다.71

주

  1. 1범엽 《후한서》 권9 〈헌제기〉. 《후한서》는 남조 송의 범엽이 5세기에 엮은 후한의 역사서다. 범엽은 조조의 행위를 '스스로 겸했다(自領)'·'스스로 되었다(自爲)'처럼 적는 서법을 쓴다.↩
  2. 2관직은 《후한서》 권9 〈헌제기〉에 있다. 장수들이 서로 통솔하지 못하고 식량이 다한 사정은 진수 《삼국지》 권6 〈동탁전〉과 동진의 원굉이 엮은 《후한기》 권29가 함께 적는다. 《삼국지》는 촉에서 벼슬하다 촉이 망한 뒤 진(晉)에서 저작랑을 지낸 진수(233–297)가 엮었다. 진은 위의 선양을 받은 왕조다. 진수는 조조를 '태조'로 높여 부른다. 각주에 다른 기록을 밝히지 않은 사실은 이 책, 주로 권1 〈무제기〉에서 왔다.↩
  3. 3원굉 《후한기》 권29 건안 원년 조.↩
  4. 4《후한서》 권9 〈헌제기〉.↩
  5. 5권14 〈동소전〉.↩
  6. 6《후한서》 권72 〈동탁전〉.↩
  7. 7권14 〈동소전〉.↩
  8. 8《헌제전》은 한 조정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책이다. 이 대목은 배송지가 《삼국지》 권6 〈원소전〉에 단 주에 있다. 책은 지금 배송지 주와 《후한서》 주 같은 다른 책의 인용으로만 전한다. 배송지는 남조 송 문제의 명으로 진수의 책에 주를 달면서 서로 다른 기록을 원문 그대로 나란히 옮겼다. 진수의 〈원소전〉 본문은 곽도가 천자를 맞자고 건의했고 원소가 따르지 않았다고 적는다. 배송지는 《헌제전》의 곽도 대목이 본전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범엽의 《후한서》 권74상 〈원소전〉은 《헌제전》을 따랐다. 건의한 사람이 곽도인지 저수인지는 기록 안에서 가려지지 않는다.↩
  9. 9진수는 조조가 220년에 예순여섯으로 죽었다고 적는다. 155년은 그 나이에서 거꾸로 센 해다.↩
  10. 10진수는 조숭의 출생 본말을 알 수 없다고 적었다. 《조만전》과 《세어》는 그를 하후씨의 아들이자 하후돈의 숙부로 적는다. 《조만전》은 작자를 알 수 없는 책으로, 배송지 주는 오나라 사람이 지었다고 적는다. 조조의 아명 '아만'을 제목에 쓴 적대 쪽 기록이다. 《세어》는 서진의 곽반이 지은 책이다. 배송지는 이 책을 가장 비루하다고 평했다.↩
  11. 11서진 사마표의 《속한서》. 배송지 주가 인용했다.↩
  12. 12《후한서》 권78 〈환자열전〉. 액수까지 적은 기록은 이 책뿐이다. 원소의 격문은 동진 손성의 《위씨춘추》가 실었고 배송지가 권6 〈원소전〉의 주에 옮겼다. 배송지 주는 이 격문을 진림의 글이라 적는다. 200년 원소 진영이 조조를 치려고 낸 선전문이다. 배송지는 손성이 책을 지을 때 《좌전》의 말로 옛 글을 바꾼 일이 한둘이 아니라고 평했다.↩
  13. 13〈무제기〉. 위의 관찬 사서인 왕침의 《위서》는 교현의 다른 말을 싣는다. 천하의 명사를 많이 보았지만 그대 같은 이는 없었다며 처자를 부탁했다는 말이다. 《위서》는 위 정원 연간(254–256)에 왕침과 순의·완적이 함께 엮었고, 지금은 배송지 주의 인용으로만 남았다. 《진서》 〈왕침전〉은 이 책이 꺼리는 일을 많이 숨겨 진수의 기록만 못하다고 평했다.↩
  14. 14〈무제기〉. 왕분의 모의 경과는 서진 사마표의 《구주춘추》가, 조조의 거절문은 《위서》가 전한다.↩
  15. 15〈무제기〉와 권6 〈동탁전〉. 폐립의 날 영한 원년 9월 갑술일은 범엽 《후한서》 권9와, 배송지 주가 인용한 《헌제기》에 있다.↩
  16. 16〈무제기〉. 중모의 공조가 그를 알아보고 현령에게 풀어 주기를 청했다는 이야기는 《세어》에만 있다. 조숭이 낭야로 피란한 일은 《후한서》 권78에 있다.↩
  17. 17권12 배송지 주가 인용한 《위서》는 포신의 무리를 2만, 기병을 7백, 치중 수레를 5천여 대로 적는다. 《위서》는 조조의 동맹자를 크게 그릴 까닭이 있는 기록이다.↩
  18. 18〈무제기〉는 가산을 흩어 의병을 모았다고만 적는다. 병력을 5천으로, 자금을 진류의 효렴 위자가 댔다고 적은 것은 《세어》다. 원문의 달은 중평 6년 12월이다.↩
  19. 19배송지 주가 인용한 《영웅기》. 동시대 군웅들의 일을 적은 책으로 배송지 주의 인용으로 남았다.↩
  20. 20권22 〈위진전〉과 배송지 주가 인용한 《선현행장》. 〈무제기〉는 위자를 장막이 보낸 장수로, 《선현행장》은 조조와 동맹한 사람으로 적는다. 종일 싸웠다는 말도 《선현행장》에 있다.↩
  21. 21〈무제기〉, 권6 〈원소전〉, 권7 〈장막전〉. 유우 옹립을 거절한 조조의 답신은 《위서》에만 있다(《자치통감》 권60은 이 답신을 옮겼다).↩
  22. 22권12 배송지 주가 인용한 《위서》.↩
  23. 23〈무제기〉. 원소의 격문도 원소가 그를 동군태수로 표했다고 적는다. 격문은 원소가 병사를 나누어 보충해 주었다고도 주장한다. 위 쪽 기록에는 그 내용이 없다.↩
  24. 24〈무제기〉 초평 3년 조. 진궁의 권유는 《세어》에 있다. 포신이 일찍부터 조조를 난세를 바로잡을 사람으로 보고 스스로 깊이 결탁했다는 이야기는 위의 관찬 《위서》에만 있다.↩
  25. 25권1 배송지 주가 인용한 《위서》.↩
  26. 26〈무제기〉. 《위서》는 포신이 죽기로 싸워 조조를 구했다고 적는다.↩
  27. 27권7 배송지 주가 인용한 《영웅기》의 원술 편지와 어환의 《전략》. 《전략》은 위 말에서 진 초 사이에 위의 관인 어환이 개인적으로 쓴 책이다.↩
  28. 28진수는 조숭이 도겸에게 해를 입었다고만 적는다. 범인은 기록마다 다르다. 《세어》는 도겸이 몰래 보낸 기병을, 오나라 관찬인 위요의 《오서》는 호송하던 도위 장개를, 범엽은 권73에서 도겸의 별장 휘하 사졸을 꼽고, 권78에서는 도겸에게 죽었다고만 적는다. 《오서》와 범엽은 재물을 노린 범행으로 적는다.↩
  29. 29권8 〈도겸전〉과 〈무제기〉. 죽은 사람의 수는 기록마다 열 배씩 다르다. 진수는 만을 헤아렸다고, 《조만전》은 남녀 수만 명을 묻어 죽였다고, 범엽은 남녀 수십만 명을 죽였다고 적는다. 손성은 두 번째 원정의 살육을 비판했다.↩
  30. 30권10 〈순욱전〉, 권14 〈정욱전〉, 권9 〈하후돈전〉. 조지가 동아를 지킨 일은 배송지가 권16의 주에 인용한 《위무고사》의 영에도 있다. 《위무고사》는 조조의 영과 교를 모은 책이다. 엮은 사람은 알 수 없다.↩
  31. 31〈무제기〉 건안 3년 조가 이때를 돌아보며 적은 기사.↩
  32. 32권14 〈정욱전〉. 어환의 《위략》은 정욱이 같은 자리에서 전횡의 옛일에 빗대어 말렸다고 전한다.↩
  33. 33〈무제기〉는 천자가 그에게 절월을 주었다고 적는다. 범엽은 같은 일을 조조가 사예교위와 녹상서사를 스스로 겸했다고 적는다. 원문의 날짜는 건안 원년 8월 신해일이다. 범엽은 같은 날의 기사로 조조가 시중 대숭과 상서 풍석을 죽였다고 적는다. 지금 전하는 사서로는 범엽만 이 일을 적는다. 이현 주가 인용한 《산양공재기》도 대숭을 적는다.↩
  34. 34《후한서》 권72 〈동탁전〉과 《후한기》 권29.↩
  35. 35배송지 주가 인용한 장보의 《한기》. 이 이야기를 적은 기록은 이 책뿐이다.↩
  36. 36권14 〈동소전〉. 양봉과 한섬이 수레를 막으려 한 일은 《후한서》 권72에 있다. 허로 옮긴 날을 범엽은 건안 원년 8월 경신일, 서기 196년 10월 7일로 적는다. 진수는 9월로 적는다.↩
  37. 37《후한서》 권54 〈양표전〉과 권9, 《후한기》 권29.↩
  38. 38《후한서》 권10하 〈황후기〉. 서진의 《세어》는 다른 판본을 전한다. 197년 삼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알현할 때 창을 교차해 목에 대는 옛 제도가 되살아났고, 조조가 그 뒤로 다시 조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39. 39〈무제기〉와 배송지 주가 인용한 원엽의 《헌제춘추》. 1월 1일은 범엽이 적은 건안 원년 11월 병술일이다. 범엽은 이 일을 조조가 스스로 사공이 되었다고 적는다.↩
  40. 40권26 〈만총전〉. 공융의 말과 조조의 답은 《후한서》 권54 〈양표전〉에 있다. 《후한기》는 이 일을 198년 조에 둔다.↩
  41. 41100만 곡은 배송지 주가 인용한 《위서》와 권16 〈임준전〉이 적는 수다. 두 기록 모두 위 쪽에서 나왔다.↩
  42. 42진궁의 마지막 말과 조조가 그 가족을 거둔 일은 권7과 배송지 주가 인용한 어환의 《전략》에 있다.↩
  43. 43권32 〈선주전〉. 진수는 동승이 밀조를 받았다고 '말했다'고 적는다. 범엽은 동승이 밀조를 받아 조조를 죽이려 했다고 적는다.↩
  44. 44《후한서》 권9 〈헌제기〉와 권10하. 원문의 날짜는 건안 5년 정월 임오일이다. 동귀인의 일을 적은 기록은 범엽이다.↩
  45. 45배송지 주가 인용한 《헌제전》.↩
  46. 46〈무제기〉의 수다. 배송지는 이 수를 반박했다. 그는 진영의 길이, 원소의 무리 8만을 사로잡아 누른 일, 종요가 보낸 말 2천여 필을 들었다. 기록자가 적은 수로 기이함을 보이려 한 것이지 실록이 아니라고 적었다.↩
  47. 47〈무제기〉 건안 5년 조.↩
  48. 48〈무제기〉 건안 5년 조.↩
  49. 49배송지 주가 인용한 《헌제기거주》에 실린 조조의 상주. 배송지는 여러 책이 조조가 원소의 무리 8만 혹은 7만을 묻었다고 적는다고 요약했다.↩
  50. 50〈무제기〉 건안 7년 조. 진수는 패전과 병을 시간 순서로만 잇는다.↩
  51. 51〈무제기〉 건안 9년 조. 손성은 이 제사를 두고 역신의 무덤에 슬픔을 다했다고 비판했다.↩
  52. 52〈무제기〉. 범엽은 이 일을 조조가 기주목을 스스로 겸했다고 적는다.↩
  53. 53배송지 주가 인용한 《위서》에 실린 조조의 영.↩
  54. 54권1 배송지 주가 인용한 《위서》.↩
  55. 55〈무제기〉와 배송지 주가 인용한 《헌제기거주》. 원문의 날짜는 범엽 《후한서》 권9의 건안 13년 6월 계사일이다. 진수는 천자가 조조를 승상으로 삼았다고 적는다. 범엽은 조조가 스스로 승상이 되었다고 적는다.↩
  56. 56《후한서》 권9.↩
  57. 57〈무제기〉. 진의 우부가 지은 《강표전》은 오나라 쪽 기록이다. 이 책이 전하는 편지에서 조조는 손권에게, 적벽 싸움 때 역병이 돌아 자기가 배를 불태우고 스스로 물러났는데 주유가 괜히 그 이름을 얻었다고 썼다.↩
  58. 58권14 〈정욱전〉, 권18 〈장패전〉과 〈이전전〉. 정욱과 장패와 이전이 군대와 가족과 종족을 스스로 내놓은 일은 모두 위 쪽 기록에만 있다.↩
  59. 59원문의 날짜는 건안 15년 12월 기해일이다. 그 달에는 기해일이 없다. 가장 가까운 기해일은 그해 11월 29일, 서기 211년 1월 1일이다. 날짜를 옮겨 적다가 잘못이 생겼을 수 있다.↩
  60. 60영의 제목은 〈양현자명본지령〉이다. 조조의 영과 교를 모은 《위무고사》에 실려 배송지 주로만 전한다. 찬탈을 꾀한다는 의심에 해명하려고 낸 공개 영이다. 영은 양주에서 모은 병력이 3천을 넘지 않았다고 적는다. 〈무제기〉 본문은 4천여 명을 모았다고 적는다.↩
  61. 61천자의 답은 배송지 주가 인용한 《위서》에 있다. 원문의 날짜는 건안 16년 정월 경진일이다.↩
  62. 62권14 〈동소전〉과 권10 〈순욱전〉. 진수는 조조가 뒤에 받은 위공과 위왕의 칭호가 모두 동소가 처음 꾸민 일이라고 적는다. 동소의 편지는 배송지 주가 인용한 《헌제춘추》에 있다.↩
  63. 63권10 〈순욱전〉.↩
  64. 64〈무제기〉 건안 18년 조. 진수는 책문 전문을 본문에 옮겨 실었다. 원문의 날짜는 건안 18년 5월 병신일이다. 범엽은 이 일을 조조가 스스로 위공이 되었다고 적는다.↩
  65. 65책문을 쓴 사람은 배송지 주가 밝힌다. 세 번 사양한 일은 《위서》가 전한다.↩
  66. 66〈무제기〉 건안 18년 조, 배송지 주가 인용한 《헌제기거주》(빙례 5만 필)와 《위씨춘추》.↩
  67. 67〈무제기〉. 《조만전》은 화흠이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벽 속에 숨은 황후를 끌어냈다고 적는다. 범엽은 조조가 황후 복씨를 죽이고 그 일족과 두 황자를 멸했다고 적는다.↩
  68. 68〈무제기〉는 5월로, 범엽은 4월 갑오일로 적는다. 갑오일은 서기 216년 5월 29일이다. 세 번 사양하고 세 번 허락받지 못한 일은 《헌제전》에 실린 조서가 전한다.↩
  69. 69〈무제기〉 건안 25년 조. 원문의 날짜는 정월 경자일이다. 진수의 사망 기사는 그를 왕으로 적는다(王崩于洛陽).↩
  70. 70권진 명단은 배송지 주가 인용한 《위서》에 있다.↩
  71. 71진수는 권10 〈순욱전〉에서 그가 근심으로 죽었다(以憂薨)고 적는다. 손성의 《위씨춘추》는 조조가 보낸 음식 그릇을 열어 보니 비어 있었고 순욱이 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적는다. 범엽의 《후한서》 권70은 손성의 문구를 옮겼다.↩
2장 · 테무진(1162? – 1206 쿠릴타이)

친족이 세운 칸

친족의 맹세

“전시에 우리가 명령을 어기면 우리의 재산과 살림과 귀한 아내들을 빼앗고, 우리의 검은 머리를 땅에 던져라.”1

알탄과 쿠차르와 사차 베키가 쿠쿠 나우르에서 테무진 앞에 서서 이렇게 맹세했다. 그들은 싸움이 나면 앞장서겠다고 했다. 미녀와 좋은 말을 그에게 바치겠다고도 했다. 사냥 때는 앞장서 짐승을 그에게 몰아 주겠다고 했다.

세 사람은 혈통이 그보다 높았다. 알탄은 쿠툴라 칸의 아들이었고, 쿠차르는 네쿤 타이시의 아들이었다. 사차 베키는 타이추와 함께 주르킨 씨족의 연장 계보였다. 라시드 앗딘에 따르면 쿠차르는 테무진이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을 때부터 병사들과 함께 그를 섬기며 용맹을 떨쳤다. 쿠차르는 활 솜씨로 이름난 사람이었다.

테무진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칸이 아니었다. 그는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의 용사였다. 1221년 몽골 진영을 다녀간 남송 사신의 《몽달비록》에서 예수게이는 옛 천인장이다.2 그 무렵 테무진에게는 자기 이름의 큰 무리가 없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의형제 자무카의 진영에서 지냈다.

그가 어느 밤 그 진영을 떠나자 잘라이르의 토쿠라운 형제와 바룰라스의 쿠빌라이와 쿠두스, 망쿠트 사람들이 뒤따랐다. 보오르추의 동생 외골렌 체르비는 아룰라트를 떠나 형에게 왔다. 젤메의 동생 차우르칸과 수베에테이도 우리앙카이를 떠나 형에게 왔다. 주르킨의 사차 베키와 타이추, 쿠차르, 알탄도 한 진영씩 거느리고 왔다. 다리타이도 한 진영을 거느리고 왔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그 가운데에는 자무카에게 매여 있던 씨족들도 있었다.

친족들은 저마다 자기 진영을 그대로 거느렸다. 그들이 그를 칸으로 세웠다.3 추대가 있었다는 사실은 몽골 궁정 안에서 전해진 두 기록이 함께 적는다.4

1203년 테무진이 이 친족들에게 보낸 메시지가 《성무친정록》과 《원사》에 남아 있다. 그 메시지에서 그는 “나를 세운 것은 실로 너희의 추대였다”(我之立,實汝等推也)고 말한다. 같은 메시지는 그가 먼저 사차 베키와 타이추, 쿠차르, 알탄에게 칸을 맡으라고 권했고 그들이 모두 사양했다고 말한다.5 친족 쪽에서 남긴 기록은 없다.

맹세의 문구와 그 뒤의 직무 임명, 토오릴의 답을 남긴 기록은 《몽골비사》뿐이다. 추대 직후 그는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일을 나누어 맡겼다. 화살통을 지는 사람과 식사를 맡는 사람을 정했다. 양을 치는 사람과 수레를 맡는 사람, 말떼를 지키는 사람도 정했다. 이복동생 벨구테이는 말을 맡았다.

보오르추와 젤메는 이 모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두 사람은 그의 친족이 아니었다.

그는 케레이트의 칸 토오릴에게 사신을 보냈다. 토오릴이 답했다. “내 아들 테무진을 칸으로 삼은 것은 옳다. 몽골이 어찌 칸 없이 있겠는가.”6 토오릴은 자무카도 아우라 부르던 후원자였다. 메르키트 원정 때 약속한 곳에 사흘 늦게 온 토오릴은 늦은 잘못을 묻는 일은 아우 자무카의 몫이라고 말했다.

말라 버린 물

그의 어린 시절은 그의 가문 안에서 나온 《몽골비사》가 거의 혼자 전한다.7 그는 아버지가 타타르의 테무진 우게를 사로잡아 온 무렵 오논강의 델리운 볼닥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포로의 이름을 따서 그를 테무진이라 불렀다.8 아홉 살 때 아버지는 그를 온기라트의 데이 세첸 집에 데릴사위로 맡겼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타타르의 잔치에서 독을 먹고 죽었다.9

그 봄 암바카이 칸의 과부들이 조상 제사의 고기를 나눌 때 후엘룬을 빼놓았다. 타이치우드 사람들이 이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 막아서던 차라카 노인이 창에 찔렸다. 그는 그들이 아버지가 모은 백성을 다 데려갔다고 했다. 떠나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깊은 물은 말랐고 빛나는 돌은 깨졌다.”10

어머니 후엘룬이 기를 들고 쫓아가 절반을 되돌려 왔다. 되돌아온 사람들도 다시 떠났다. 남은 것은 어머니와 형제들이었다.

소년 시절 이복형 벡테르가 그들이 잡은 물고기와 종다리를 빼앗았다. 그는 동생 카사르와 함께 벡테르를 활로 쏘아 죽였다.11 어머니는 두 아들을 길게 꾸짖었다. 타이치우드의 타르쿠타이 키릴투크가 그를 붙잡아 칼을 씌운 일도 있었다. 그는 소르칸 시라의 집에 숨었다가 빠져나왔다.

집에는 거세마 아홉 필이 있었다. 그 가운데 여덟 필을 도둑맞은 날 그는 남은 한 필을 타고 쫓아가다 만난 보오르추와 함께 말을 되찾았다. 보오르추는 부유한 나쿠 바얀의 아들로, 아버지에게 알리지 않고 따라나섰다. 보르테와 혼인한 뒤 그는 보오르추를 반려로 불러들였다. 우리앙카이의 자르치우다이는 아들 젤메를 그의 종자로 바쳤다.

혼수 가운데 검은 담비 외투가 있었다. 그는 외투를 들고 툴라강의 검은 숲으로 케레이트의 토오릴을 찾아갔다. 예수게이는 숙부에게 쫓겨난 토오릴을 도와 그의 무리를 되찾아 주고 의형제를 맺은 적이 있었다. 테무진은 토오릴을 아버지와 같다고 부르며 외투를 바쳤다. 토오릴이 답했다. “검은 담비 외투의 대가로 흩어진 네 백성을 모아 주겠다.”12

메르키트가 습격해 왔다. 그는 부르칸 칼둔 산으로 피했다. 보르테를 태울 말은 남아 있지 않았다. 메르키트는 보르테를 끌고 갔다.

테무진은 토오릴에게 도움을 청했다. 토오릴은 자기가 2만을 이끌고 우익을 맡고, 소년 시절 테무진과 의형제를 맺은 자무카도 2만을 이끌고 오게 하자고 했다. 연합군은 메르키트를 쳤다. 그 밤 테무진은 도망치는 무리 속에서 보르테를 불렀다. 보르테가 수레에서 내려 달려와 고삐를 잡았다.13

그 뒤 테무진은 자무카의 진영에서 1년 반을 지냈다.

어느 날 자무카가 산 가까이 진을 치자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테무진은 뜻을 몰라 어머니에게 물었다. 보르테가 밤새 떠나자고 했다. 모두 그 말을 옳다고 여겼다.14 그 밤 그들은 자무카의 진영을 떠났다.

가마솥

칸이 된 테무진과 자무카는 곧 적이 되었다. 자무카의 동생 타이차르가 테무진 쪽 조치 다르말라의 말떼를 훔치다 사살되었다. 자무카는 열세 부족에서 3만을 모았다. 《성무친정록》에 따르면 타이치우드도 그의 편에 섰다. 테무진도 열세 진영 3만으로 맞섰다.15

《성무친정록》에 따르면 테무진 쪽 열세 익 가운데 하나는 어머니 후엘룬과 형제들이 이루었다. 알탄이 한 익을, 답성태(荅聖台)와 쿠차르가 한 익을 거느렸다. 답성태를 다리타이로 보는 견해가 있다. 여러 익은 친족과 씨족장이 이끌었다. 테무진이 직접 거느린 익은 그 가운데 일부였다.

달란 발주트의 이 싸움은 승패부터 기록마다 다르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테무진은 져서 제레네 협곡으로 피했다. 이긴 자무카는 치노스의 왕자들을 가마솥 70개에 삶았다. 그는 차간 우아의 머리를 베어 말꼬리에 매달았다. 라시드 앗딘의 『집사』에서는 테무진이 이겼다. 사로잡은 적을 가마솥 70개에 삶게 한 사람도 그였다.16

《몽골비사》는 싸움 뒤의 일을 이렇게 잇는다. 우루우트의 주르체데이와 망쿠트의 쿠일다르가 자무카를 떠나 테무진에게 왔다. 아버지가 죽기 전 뒷일을 맡겼던 뭉리크도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왔다. 테무진은 온 백성이 자기에게 넘어온다며 기뻐했다. 라시드 앗딘의 판본에서는 가마솥에 겁을 먹은 자를리야트가 그에게 항복해 온다.17

《성무친정록》에 따르면 타이치우드는 땅이 넓고 백성이 많았으나 안에 질서가 없었다. 그 백성은 태자가 남에게 자기 옷을 입히고 자기 말을 태운다며 그에게 갔다.18 《원사》에서는 타이치우드가 가장 강한 부족으로 불렸고, 그 무리는 그가 때때로 사람들에게 갖옷과 말을 내주는 것을 보고 그에게 왔다.

그 뒤 오논강 숲의 잔치에서 주르킨 사람들과 서열을 두고 다툼이 벌어졌다. 이복동생 벨구테이가 어깨를 다쳤다. 벨구테이는 상처가 심하지 않으니 지금 보복하지 말자고 했다. 테무진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몽둥이 싸움이 벌어졌다. 그의 사람들이 주르킨의 귀부인 둘을 붙잡아 왔다. 주르킨 쪽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그는 두 귀부인을 돌려주었다.19

금의 칭호

《금사》에 따르면 1196년 정월 금나라의 군목사가 대염락에서 온기라트 군대에게 져서 죽었다. 그해 여름 금나라 승상 완안양의 군대가 약속을 어긴 타타르를 몰아왔다. 타타르는 테무진의 아버지를 죽인 부족이었다. 일찍이 그의 종친 암바카이 칸을 붙잡아 금나라에 넘긴 부족이기도 했다. 《원사》에 따르면 금나라는 암바카이를 죽였다.

테무진은 토오릴에게 이 기회에 함께 치자고 했다. 토오릴은 사흘 만에 군대를 모아 왔다. 주르킨은 엿새를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울자강에서 타타르의 메구진 세울투를 죽였다. 승상은 테무진에게 자우트 쿠리라는 칭호를 주었다. 토오릴에게는 왕(王)의 칭호를 주었다. 토오릴은 그 뒤 옹 칸이라 불렸다. 승상이 말했다. “더 높은 칭호를 줄지는 알탄 칸이 정하게 하자.”20 두 사람은 타타르를 약탈하고 노획을 각자 몫대로 나누었다.

더 높은 칭호가 실제로 내려졌다는 기록은 없다. 테무진은 큰 진주로 꾸민 이불과 은 요람을 얻었다. 그해 가을 금나라 조정은 완안양을 좌승상으로 올리고 상산군왕에 봉했다. 원정 뒤 금나라는 북쪽 변경에 참호를 파고 보루를 쌓기로 했다.

《금사》에 따르면 금의 동쪽 군대는 그 원정에서 사흘 동안 포위되었다가 밤새 달려온 완안양에게 구출되었다. 달아난 적은 큰비를 만나 열에 여덟아홉이 얼어 죽었다. 금군은 남은 부장의 항복을 받고 구봉의 석벽에 공을 새겼다. 그 공을 새긴 한문 비문이 지금 몽골의 세르벤 하알가 바위에 남아 있다.21 《금사》에도 비문에도 테무진과 토오릴은 나오지 않는다.22

《금사》 〈종호전〉에 따르면 그 뒤 금나라는 온기라트의 항복을 받고 그 기병 1만 4천을 징발했다. 어느 쪽에도 매이지 않고 해마다 변경을 어지럽히던 카타긴과 살지우트는 금군에게 깨졌다. 이 전에도 테무진의 이름은 없다.

《몽달비록》을 쓴 남송 사신은 몽골 진영에서 그가 젊어서 금나라에 붙잡혀 10여 년 노비로 지내다 도망쳐 왔다는 말을 들었다. 금나라 사정을 다 아는 까닭이 거기 있다는 말이었다. 몽골 궁정의 기록에는 이 이야기가 없다.

돌아온 뒤 테무진은 주르킨을 쳤다. 《원사》에 따르면 휘하 사람들이 나이만 사람들에게 약탈당하자 그는 나이만을 치려고 60명을 보내 사차 베키에게 군사를 청했다. 사차 베키는 그 가운데 열 명을 죽이고 쉰 명의 옷을 벗겨 돌려보냈다. 《몽골비사》는 같은 수를 주르킨이 그의 본영을 털었을 때의 일로 적는다. 테무진은 텔레투 고개까지 쫓아가 사차 베키와 타이추를 붙잡아 처단했다.23 잘라이르의 구운 우아는 아들 무칼리 형제를 '문지방의 노예'로 그에게 바쳤다.

그 무렵 토오릴은 동생 에르케 카라와 나이만에게 쫓겨 카라 키타이까지 갔다가 굶주려 돌아왔다. 테무진은 그를 맞아 자기 백성에게서 세를 거두어 먹였다.24 토오릴의 형제와 추장들은 그가 형제를 죽이고 백성을 괴롭힌다며 그를 죽이려 꾀했다. 그 뒤 옹 칸은 테무진에게 알리지 않고 메르키트를 약탈했다. 노획은 조금도 나누지 않았다.

1198년 무렵 테무진과 함께 나이만과 맞선 어느 밤 옹 칸은 진영에 불을 많이 피워 두고 몰래 무리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25 그 뒤 옹 칸은 나이만에게 백성을 빼앗기자 테무진에게 좋은 장수 넷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보오르추와 무칼리와 보로굴과 칠라운이 가서 그 백성을 되찾았다. 그들은 되찾은 백성을 모두 옹 칸에게 돌려주었다.26

약탈 금지령

1200년 금나라 서북로초토사는 서쪽 탄설에서 동쪽 호열공까지 거의 600리에 이르는 변경 보루를 다 쌓았다고 보고했다. 수비군만 부리고 백성은 동원하지 않았다는 보고였다.27

1201년 열한 집단이 알쿠이 샘에 모여 자무카를 구르 칸으로 세웠다.28 카타긴·살지우트·도르벤·타타르·이키레스·온기라트·코룰라스·나이만의 부이루크·메르키트·오이라트·타이치우드였다. 라시드 앗딘에 따르면 구르 칸은 카라 키타이 군주의 큰 칭호였다.

온기라트의 우두머리 데이가 사람을 보내 연합의 기습 계획을 테무진에게 알렸다. 《성무친정록》에 따르면 연합 안에 있던 탑하이카가 사돈 초오르에게 강가의 맹세를 귀띔했다. 초오르는 테무진에게 달려와 그 계획을 모두 알렸다. 테무진은 옹 칸과 함께 그들을 쳤다. 그는 알탄과 쿠차르와 다리타이를 선봉으로 보냈다. 옹 칸 쪽에서는 생굼과 자아 감보와 빌게 베키가 선봉에 섰다. 연합은 무너졌고, 자무카는 달아났다.

온기라트가 항복해 왔다. 그를 구르 칸으로 세운 것은 저마다 자기 백성을 거느린 부족장들이었다. 《몽골비사》와 《원사》에 따르면 패한 자무카는 자기를 칸으로 뽑은 부족들을 약탈하고 떠났다.

그해 싸움에서 테무진은 목에 화살을 맞고 정신을 잃었다. 젤메가 홀로 곁에 남아 상처의 피를 빨아냈다. 밤에 그는 옷을 벗고 적진에 들어가 엉긴 젖을 구해 왔다.29

1202년 가을 테무진은 달란 네무르게스에서 타타르를 치기 전에 영을 내렸다. “적을 깨뜨리고 쫓을 때 버려진 물건을 보아도 삼가 돌아보지 말라. 군사 일이 끝나면 함께 나눈다”(茍破敵逐北,見遺棄物,愼勿顧,軍事畢共分之).30 《몽골비사》에 따르면 이 영은 그가 지휘관들과 함께 정한 것이었다.

알탄과 쿠차르와 다리타이가 영을 어기고 노획을 챙겼다. 테무진은 제베와 쿠빌라이를 보내 그들의 노획을 모두 거두었다. 거둔 노획은 군사들에게 나누었다. 제베는 한 해 전 타이치우드에서 넘어온 사람이었고, 쿠빌라이는 바룰라스 사람이었다. 라시드 앗딘의 『집사』는 이 몰수 뒤에 한 문장을 둔다. “그래서 그들이 반기를 들었다.”31

타타르의 남자 가운데 수레 비녀장보다 큰 자는 죽였다. 나머지는 나누어 노예로 삼았다. 이복동생 벨구테이가 이 결정을 타타르에게 흘렸다. 타타르가 끝까지 버텨 테무진의 군대도 많이 잃었다. 그 뒤 벨구테이는 큰 회의에 들지 못했다.32 타타르의 카르길 시라가 어린 톨루이를 끼고 칼을 뽑으려 하자 보로굴의 아내 알타니가 그의 머리채와 칼 든 손을 붙잡았다. 제테이와 젤메가 달려와 그를 죽였다. 으뜸 공은 알타니에게 돌아갔다.

1245–1247년 몽골에 다녀간 교황의 사절 카르피니도 그가 타타르와 싸운 이야기를 들었다. 카르피니가 들은 이야기에서 그는 타타르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여러 번 싸운 끝에 그들을 모두 노예로 삼았다. 그 이야기에는 연도도 금나라도 없다.33

겹혼인

옹 칸은 테무진을 아들로 들였다. 그는 테무진을 생굼의 형으로 삼으면 아들이 둘이 된다고 했다. 생굼 하나가 있지만 없는 것과 같다고도 했다. 1202년에서 이듬해로 넘어가는 겨울 테무진은 두 집안이 혼인을 겹으로 맺자고 했다. 아들 주치와 차우르 베키를, 딸 쿠진 베키와 투사카를 맺는 안이었다. 옹 칸의 아들 생굼은 그렇게 하면 자기네 여자는 문가에 서서 안쪽만 바라보게 된다며 거절했다.34

주베이니에 따르면 옹 칸은 힘과 위엄에서 다른 부족을 넘어서는 케레이트의 군주였다.35 그 기록에서는 옹 칸이 그를 높이자 나라의 일이 그에게 달리게 되었다. 그러자 옹 칸의 아들과 형제와 측근이 그를 시기했다.

1203년 봄 자무카와 알탄과 쿠차르가 생굼을 찾아갔다. 그들은 테무진이 나이만의 타양 칸과 내통한다고 말했다. 베르케 엘레트의 생굼 앞에 쇠게엔의 토오릴과 카치운 베키도 모였다.

카치운 베키는 생굼이 정하는 대로 끝까지 따르겠다고 했다. 알탄과 쿠차르는 생굼을 위해 후엘룬의 아들들 가운데 형을 죽이겠다고 했다.36 쇠게엔의 토오릴은 테무진의 백성을 잡아 오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라고 했다. 테무진은 뒤에 보낸 메시지에서 그를 자기 집안 대대의 종이라 불렀다.

생굼은 아버지에게 테무진을 치자고 졸랐다. 옹 칸은 처음에 자무카는 말을 잘 꾸미고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 들을 것이 없다며 물리쳤다. 생굼은 사얀 퇴데엔을 보내 거듭 청했다. 옹 칸은 언짢아하며 사신을 돌려보냈다. 사신을 두세 번 보내도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하자 생굼이 직접 찾아갔다.

《원사》에 따르면 옹 칸은 이렇게 답했다. “내 몸이 살아 있는 것은 실로 태자 덕이다. 수염이 이미 희니 남은 뼈나 편히 눕기를 바랐건만 너는 왜 그칠 줄 모르느냐”(吾身之存,實太子是賴。髭鬚已白,遺骸冀得安寢,汝乃喋喋不已耶).37 아들의 요구가 거듭되자 그는 결국 허락했다. 《성무친정록》에서 그는 자기가 말렸는데도 너희가 따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몽골비사》에서 옹 칸은 네가 할 수 있는 대로 하라며 결정을 아들에게 넘긴다.

생굼 쪽은 차우르 베키를 주겠다며 혼인 잔치에 테무진을 불렀다. 그 자리에서 그를 붙잡을 계획이었다. 뭉리크가 가지 말라고 말렸다. 테무진은 가던 길에서 돌아섰다. 말치기 바다이와 키실리크가 그 계획을 엿듣고 테무진에게 알렸다.38

주베이니에 따르면 옹 칸 쪽은 새벽에 그를 덮칠 계획이었다. 밀고를 받은 그가 떠난 뒤 그들은 빈 진영을 덮쳤다. 옹 칸은 큰 군대를 이끌고 그를 찾아 나섰다.39

옹 칸은 자무카에게 자기 군대의 전열을 짜게 했다. 자무카는 그 전열을 몰래 테무진에게 알렸다. 테무진은 젤메를 믿어 후위에 남겼다. 칼라칼지트 엘레트에서 두 군대가 맞붙었다. 보오르추는 말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자 걸어서 달아나다가 짐 말을 잡아타고 돌아왔다.

테무진은 물러났다. 라시드 앗딘에 따르면 그가 물러나자 군대 대부분이 그를 떠났다. 《몽골비사》는 싸움 뒤 그의 곁에 남은 사람을 2,600명으로 센다.40

발주나로 가기 전, 퉁게 개울 동쪽에 진을 친 테무진은 옹 칸과 알탄과 쿠차르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는 그들을 위해 세운 공을 하나하나 들어 그들을 책망했다.41

그는 발주나 호숫가로 갔다.42 그곳에서 그는 무슬림 상인 아산을 만났다. 코룰라스가 싸우지 않고 항복해 왔다.

동생 카사르는 처자를 옹 칸 쪽에 두고 몇 안 되는 동료와 빠져나와 합류했다. 옹 칸 쪽에 있던 다리타이와 바린·사카이·넨진의 무리도 머리를 조아리며 돌아왔다.

금장 천막

《원사》에 따르면 그 무렵 알탄과 쿠차르와 자무카는 옹 칸을 죽이려다 실패했다. 《성무친정록》에 따르면 옹 칸이 그 일을 알고 그들을 쳐서 쫓아냈다. 그들은 나이만으로 달아났다.43 라시드 앗딘에 따르면 테무진은 타양 칸을 깬 뒤 쿠차르와 알탄을 붙잡아 죽였다.

1203년 가을 그는 동생 카사르의 이름으로 거짓 항복 사신을 보냈다. 칼리우다르와 차쿠르칸이 그 사신으로 갔다. 옹 칸이 금장 천막을 치고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보고가 돌아왔다. 테무진은 밤새 군대를 몰았다. 그는 제제에르 운두르에서 옹 칸의 진영을 사흘 밤낮 에워쌌다. 케레이트가 항복했다.44

주베이니는 발주나라는 샘에서 그가 적은 군사로 옹 칸의 큰 군대를 깨뜨렸다고 적고, 그 해를 히즈라력 599년(1202–1203)으로 둔다. 발주나에서 싸웠다는 이야기는 다른 기록에 없다. 1253–1255년 몽케의 궁정을 다녀간 루브룩은 그가 몰래 군대를 모아 옹 칸을 덮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루브룩이 들은 이야기에서 옹 칸은 거란 땅으로 달아났다. 그 이야기에서 그는 옹 칸의 딸을 아들의 아내로 주었다. 루브룩은 그 딸을 몽케의 어머니라 했다.45

테무진은 케레이트 백성을 사방에 나누었다. 자아 감보의 속민만은 흩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자아 감보의 딸 이바카는 테무진이, 소르칵타니는 아들 톨루이가 맞았다. 공신 타카이에게는 지르긴 사람 100명을 주었다. 바다이와 키실리크에게는 옹 칸의 금장 천막과 다르칸의 특권을 주었다. 그 특권은 자손의 자손에게까지 잇게 했다.46

옹 칸은 달아나다 나이만의 초병 코리 수베치에게 죽었다. 《원사》에 따르면 생굼은 서하로 달아났다가 쿠차에서 죽었다.

여윈 말

서쪽 나이만의 타양 칸은 아버지 이난차 빌게 칸의 자리를 물려받은 사람이었다. 라시드 앗딘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가 아끼던 첩을 두고 동생 부이루크와 다투었다. 나이만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라시드 앗딘에 따르면 '타양'이라는 이름은 금나라 왕들이 그에게 준 칭호 타이왕(Tai Wang)에서 왔다.

타양 칸은 사신 토르비 타시를 옹구트에 보내 함께 몽골을 치자고 했다. 《원사》에 따르면 그는 하늘에 해가 둘이 없는데 백성에게 어찌 왕이 둘이겠느냐고 말했다. 《몽골비사》에서 그는 동쪽에 몽골이 조금 있다더라고 말한다. 쿡세우 사브락이 허세를 부리지 말라고 일렀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47 옹구트의 알라쿠시는 이 계획을 테무진에게 알렸다.

1204년 봄 테메이게 들에서 회의가 열렸다. 장수 다수는 봄이라 말이 여위었으니 가을을 기다리자고 했다. 테무게와 벨구테이는 곧바로 나가자고 했다. 테무진은 두 사람의 말을 따랐다.48

그는 칼카강의 켈테게이 카다에서 군대를 천호와 백호와 십호로 다시 짰다. 시종장 여섯을 두었다. 밤에 지키는 시위 80명과 낮에 지키는 시위 70명을 뽑았다. 시위는 천호장과 백호장의 아들과 아우, 그리고 보통 사람의 아들 가운데 재주 있는 자로 채웠다. 아르카이 카사르에게는 용사 1천을 거느리게 했다.49

1204년 5월 17일 그는 기에 제사하고 나섰다. 동생 카사르가 중군을 맡았다. 《원사》에 따르면 타양 칸 쪽에는 메르키트의 톡토아, 케레이트의 아린 태석, 오이라트의 쿠두카 베키가 합류했다. 두르반과 타타르와 카타긴과 살지우트도 그쪽에 섰다.

타양 칸은 몽골군을 깊이 끌어들인 뒤 치려 했다. 아들 쿠출루크가 또 여자 같은 타양이라며 아버지를 비웃었다. 장수 코리 수바치는 그러려면 왕비더러 군대를 거느리게 하라고 비웃었다. 타양 칸은 결전에 나섰다. 나쿠 절벽의 싸움에서 그가 죽었다. 나이만이 항복했고, 자무카는 싸움터를 빠져나갔다.50

그해 항복해 온 메르키트 일부를 그는 군중에 흩어 두었다. 《성무친정록》에 따르면 실은 묶어 둔 것이었다. 그들은 불안해하다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51

흰 기

《몽골비사》에 따르면 1205년 무렵 자무카는 남은 부하 다섯에게 붙잡혀 테무진에게 넘겨졌다. 마지막까지 그의 곁에 있던 사람은 그 다섯이었다. 테무진은 제 주인에게 손을 든 자들을 살려 둘 수 없다며 다섯을 처형했다. 그는 자무카에게 다시 함께하자고 했다. 자무카는 거절하고 피를 흘리지 않는 죽음을 청했다. 테무진은 그 말대로 그를 처형하고 묻어 주었다.52

1206년 범의 해, 오논강의 원류에 사람들이 모였다. 그날의 일도 《몽골비사》가 가장 자세히 적는다. 그들은 아홉 꼬리의 흰 기를 세웠다. 흰 기 아래에서 그들은 그에게 칸의 칭호를 올렸다.53 《원사》와 《성무친정록》에 따르면 이날 여러 왕과 신하가 함께 올린 존호는 성길사(成吉思) 황제, 곧 칭기즈 황제였다.

칭호를 누가 주었는지도 기록마다 다르다. 라시드 앗딘에 따르면 칭호를 준 사람은 뭉리크의 아들 쿠쿠추, 곧 텝 텡그리였다. 주베이니는 텝 텡그리가 신의 말을 전했다고 적는다. 신이 온 땅을 테무진과 그 자손에게 주고 그를 칭기즈 칸이라 이름했다는 말이었다. 금나라의 기록에는 그해의 집회도 칭호도 나오지 않는다.54

몽골과 싸운 델리 술탄국의 주즈자니는 그가 일어선 해를 히즈라력 602년, 곧 1205년에서 1206년 사이로 둔다. 주즈자니가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이렇다. 남은 몽골이 모여 굳센 지배자가 있어야 한다며 그를 우두머리로 세웠다. 그는 온 부족에게서 무슨 명이든 따르겠다는 서약을 받았다. 아들에게 아버지를 죽이라 해도 따르라는 서약이었다. 그가 내린 첫 명령은 아버지와 함께 무리를 이끌던 대아미르 바이수의 아들들을 죽이라는 것이었다.55

그때 몽골에는 아직 글로 된 문서가 없었다. 《몽달비록》에 따르면 그들은 처음 일어날 때 문서 없이 명령을 손가락 마디에 새겨 기억했다. 같은 기록에 따르면 칭기즈 황제라는 한자 칭호는 근년에 금나라에서 망명한 여진 신하가 붙였다. 성길사는 하늘이 주었다는 뜻의 두 글자를 옮긴 말이라는 설도 그 기록에 실려 있다.

테무진은 시위를 1만으로 늘려 군대의 중심으로 삼았다. 낮의 시위 8천과 밤의 시위·화살통 지기 2천이었다. 같은 때 그는 살아남은 나이만의 쿠출루크를 쫓으라고 제베를 보냈다. 《성무친정록》과 《원사》에 따르면 그해 쿠출루크의 숙부 부이루크가 사로잡혔다.

그는 천호장 95명을 임명했다.56 옹구트의 5천 호와 온기라트의 3천 호와 이키레스의 2천 호는 그의 사위들이 거느렸다. 보오르추는 서쪽 알타이산까지 뻗은 우익의 만호장이 되었다. 무칼리는 좌익의 만호장이 되었다. 《몽골비사》에 따르면 무칼리는 이때 구이 옹(國王)의 칭호도 받았다.57

젤메는 천호장 명단의 아홉째에 올랐다. 그는 아홉 번까지 죄를 묻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았다. 그의 아들 이순 테에는 화살통 지기의 우두머리가 되었다.58

상을 내리며 그가 두 사람을 먼저 부르자 시기 쿠투쿠가 따졌다. “상을 준다면 나도 못하지 않았다.”59 시기 쿠투쿠는 어머니 후엘룬이 거두어 기른 아이였다. 테무진은 그를 여섯째 아우로 대했다. 아홉 번의 죄를 면해 주겠다고도 했다. 온 백성을 나누고 재판하는 일도 그에게 맡겼다.

주

  1. 1《몽골비사》 제123절. 《몽골비사》는 칭기즈 가문 안에서 나온 서사로, 지은이는 알 수 없다. 이루어진 해는 1228년·1240년·1252년·1264년설이 맞선다. 쿠빌라이 때 손질된 흔적이 있고, 명나라 한림원이 몽골어를 한자로 옮겨 적은 판본으로 전한다. 이 책은 형제 살해나 패전처럼 가문에 불리한 일도 남겼다. 《몽골비사》 인용은 de Rachewiltz의 영역(J. C. Street 편 축약판, 2015)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각주에 다른 기록을 밝히지 않은 사실은 이 책에서 왔다.↩
  2. 2《몽달비록》은 1221년 남송 사신 조공(趙珙)이 무칼리의 진영을 다녀와 쓴 견문록이다. 몽골 궁정의 기록과는 따로 전한다.↩
  3. 3《몽골비사》는 이때 그들이 그에게 칭기즈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적는다. 다른 궁정 기록들은 그 칭호를 1206년의 일로 적는다.↩
  4. 4몽골 궁정 안에서 전해진 두 기록이다. 하나는 《몽골비사》다. 다른 하나는 쿠빌라이 때 몽골어로 쓴 궁정 연대기에서 나왔다고 연구자들은 본다. 그 한문 번역이 《황원성무친정록》이다. 청나라의 《사고전서총목제요》는 명나라 초(1369–1370)에 관에서 엮은 《원사》가 원나라 초의 일을 대개 이 책에 근거했다고 평했다. 라시드 앗딘이 14세기 초 일 칸국에서 엮은 『집사』도 같은 몽골어 원본에 기댄다. Atwood(2007)는 뒤의 기록이 《몽골비사》에 크게 기댄다고 본다. 이 책은 둘을 서로 독립된 갈래로 세지 않는다.↩
  5. 5《몽골비사》 제179절도 같은 메시지를 싣는다. 이 판본에서 권한 순서는 쿠차르, 알탄, 사차 베키와 타이추다.↩
  6. 6《몽골비사》 제124–126절.↩
  7. 7《성무친정록》과 《원사》, 라시드 앗딘의 『집사』도 그의 젊은 날을 짧게 적지만 같은 궁정 계열이다. 라시드 앗딘은 그가 마흔한 살이 될 때까지는 해마다의 기록이 없다고 스스로 밝혔다.↩
  8. 8태어난 해는 기록마다 다르다. 여러 설은 부록 「다섯 사람 대조 연표」에 있다.↩
  9. 9《몽골비사》는 그때 그가 아홉 살이었다고, 라시드 앗딘은 열세 살이었다고 적는다.↩
  10. 10《몽골비사》는 이 말을 한 사람을 퇴데엔 기르테로, 《성무친정록》과 《원사》는 시종 탈단화아진으로 적는다. 《원사》의 문장은 '깊은 못은 이미 말랐고 단단한 돌은 이미 부서졌다(深池已乾矣,堅石已碎矣)'이다.↩
  11. 11《몽골비사》에만 있는 이야기다. 《성무친정록》과 《원사》 〈태조본기〉에는 없다. 가문에 불리한 일을 가문의 책이 남긴 경우다.↩
  12. 12《몽골비사》 제96절에만 있다. 《성무친정록》은 토오릴과 부자의 예를 맺은 일을 토오릴이 자리를 되찾은 뒤의 일로 적는다.↩
  13. 13라시드 앗딘은 다른 판본을 적는다. 메르키트가 보르테를 토오릴에게 보냈고 토오릴이 그녀를 돌려보냈다는 것이다. 이 판본에는 연합군의 원정이 없다.↩
  14. 14《몽골비사》 제118–119절에만 있다. 이 대목은 갈라선 책임을 자무카 쪽에 둔다.↩
  15. 15《몽골비사》 제129절. 양쪽 모두 3만과 열세 진영이라는 수는 몽골 쪽 기록의 정형 표현일 수 있다.↩
  16. 1670이라는 수도 정형 수일 수 있다. 《성무친정록》은 자무카가 패해 달아났고 그의 군대가 일흔두 개 아궁이에서 늑대를 삶아 먹었다고 적는다. 《원사》는 테무진이 크게 싸워 그를 깨뜨렸다고 적는다. 같은 궁정 계열 안에서 승패와 가해자가 함께 갈린다.↩
  17. 17《몽골비사》 제130절과 라시드 앗딘 『집사』(영역본 p.161). 라시드 앗딘은 우데우트와 부두우트도 항복했다고 적는다.↩
  18. 18이긴 쪽의 궁정 기록이다. 때는 적혀 있지 않다. 태자는 테무진을 가리킨다.↩
  19. 19《몽골비사》 제130–132절, 《성무친정록》, 《원사》 권1.↩
  20. 20《몽골비사》 제134절. 《성무친정록》도 금나라 임금이 그를 찰올홀로(察兀忽魯)로 삼았다고 적는다. 라시드 앗딘은 이 칭호를 '장대한 사령관'이라는 뜻으로 풀었다. 알탄 칸은 금나라 황제를 부르는 이름이고, 친족 알탄과는 다른 사람이다.↩
  21. 21명창 7년(1196) 6월의 날짜를 단 9행 86자의 각석이다. 지금 읽히는 글자에 몽골 사람의 이름은 없다.↩
  22. 22《금사》 권94 〈완안양전〉과 권10. 《금사》는 원나라가 1344년에 금나라 실록을 바탕으로 엮은 관찬 사서다. 원정의 해 1196년은 이 기록으로 정해진다.↩
  23. 23《성무친정록》이 적은 해는 1196년 겨울인지 1197년 겨울인지 분명하지 않다.↩
  24. 24《몽골비사》 제151–152절. 《성무친정록》과 《원사》도 그가 토오릴을 크게 구휼했다고 적는다.↩
  25. 25《원사》 권1.↩
  26. 26《원사》 권1과 《성무친정록》.↩
  27. 27《금사》 권11 승안 5년 조. 공사에 든 품은 75만이었다.↩
  28. 28《몽골비사》 제141절. 《성무친정록》과 《원사》는 여섯이나 일곱 부족의 이름을 적는다.↩
  29. 29《몽골비사》 제145절에만 있다. 톨루이를 구한 일은 제214절.↩
  30. 30《성무친정록》 임술년 조. 《몽골비사》 제153절과 《원사》도 같은 영을 적는다.↩
  31. 31라시드 앗딘 『집사』(영역본 pp.132–133).↩
  32. 32《몽골비사》 제154절에만 있다.↩
  33. 33카르피니는 타타르를 수몽골이라 부른다. 1196년의 일인지 1202년의 일인지는 이 글로 가릴 수 없다.↩
  34. 34《몽골비사》 제164–165절. 《성무친정록》과 《원사》는 혼인이 이루어지지 않아 사이가 차츰 멀어졌다고 적는다.↩
  35. 35주베이니는 1260년 일 칸국의 관료로 『세계정복자사』를 썼다. 텝 텡그리 대목에서는 믿을 만한 몽골인에게 들었다고 밝힌다.↩
  36. 36《몽골비사》 제166절, 《원사》 권1.↩
  37. 37《원사》 권1. 《성무친정록》에도 같은 뜻의 말이 있다. 생굼이 사신을 거듭 보낸 일은 《몽골비사》 제167절과 《원사》.↩
  38. 38《몽골비사》는 두 사람을 알탄의 사촌 예케 체렌의 말치기로, 《원사》는 마부 키실리크와 그 아우 바다이로 적는다. 주베이니도 옹 칸을 섬기던 두 젊은이가 알렸다고 적는다.↩
  39. 39주베이니는 이 대목에서 기록마다 말이 다르다고 스스로 밝힌다. 《몽골비사》와 라시드 앗딘에는 빈 진영을 덮친 일이 없다.↩
  40. 40《몽골비사》 제175절에만 있는 수다. 그 가운데 1,300명은 그와 함께 강 서쪽 기슭으로 갔고, 나머지 1,300명은 우루우트와 망쿠트 사람이었다. 《성무친정록》과 라시드 앗딘(영역본 p.186)은 같은 대목에서 군사를 4,600기로 세고, 2,300기씩 강 양쪽으로 나누어 적는다. 《원사》는 오히려 옹 칸이 크게 졌다고 적는다.↩
  41. 41《몽골비사》 제177–179절, 《성무친정록》, 《원사》 권1. 세 기록 모두 사람을 보낸 일을 발주나에 이르기 전에 둔다.↩
  42. 42흙탕물을 마시며 맹세했다는 발주나의 이야기는 《성무친정록》과 《원사》가 적는다. 라시드 앗딘은 진흙에서 물을 짜 마신 일과 그때 곁에 남은 '발주나투'의 특권을, 주베이니는 그 일에 함께한 사람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었다는 것을 적는다. 《몽골비사》에는 맹세가 없다. 《원사》 열전은 그때 함께한 사람을 19명이라 한다.↩
  43. 43《원사》 권1. 쿠차르와 알탄의 최후는 라시드 앗딘 『집사』(영역본 p.67, p.133)에 있다.↩
  44. 44《몽골비사》 제185절, 《성무친정록》, 《원사》 권1.↩
  45. 45루브룩 여행기(Rockhill 영역 pp.114–115). 이 글에는 연도도, 옹 칸과의 부자 관계도, 발주나도 없다.↩
  46. 46《몽골비사》 제186–187절. 주베이니도 그가 두 사람을 다르칸으로 삼았다고 적고, 그 후손까지 우대했다고 덧붙인다.↩
  47. 47《원사》 권1, 《몽골비사》 제190절.↩
  48. 48《원사》 권1, 《성무친정록》.↩
  49. 49《몽골비사》 제191절에만 있다. 출정 날은 《몽골비사》 제193절의 '쥐해 여름 첫달 16일'을 de Rachewiltz가 서기로 환산한 날이다.↩
  50. 50《몽골비사》 제193–196절, 《성무친정록》, 《원사》 권1, 라시드 앗딘. 몽골 궁정 밖에서는 카르피니도 나이만이 몽골에게 진 일을 연도 없이 적는다.↩
  51. 51《성무친정록》 갑자년 조.↩
  52. 52《몽골비사》 제200–201절에만 있다. 《성무친정록》과 《원사》 〈태조본기〉에는 이 장면이 없다.↩
  53. 53《몽골비사》 제202절. 《몽골비사》는 칭기즈라는 이름을 첫 추대 때 받았다고 하고, 이날은 칸의 칭호를 받았다고 적는다. 그 칭호를 썼다는 사실은 남송의 재야 학자 이심전의 기록(1216)과 남송 사신의 《몽달비록》(1221)과 《흑달사략》(1230년대)에도 있다. 이 궁정 밖 기록들에는 1206년의 날짜와 즉위 의례가 없다. 《몽달비록》이 적는 흰 기는 1221년에 본 의장이다.↩
  54. 54《금사》 권12 장종기의 태화 연간 기사.↩
  55. 55주즈자니 『나시르사』(Raverty 영역 2권 pp.935–953). 이 책에는 1206년의 날짜와 흰 기와 칭호 의례가 없다. 바이수의 아들들을 죽인 일이 다른 기록의 어느 사건에 해당하는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56. 56《몽골비사》 제202절에만 있는 수와 명단이다. 시위 1만은 제224–226절.↩
  57. 57《성무친정록》과 라시드 앗딘은 무칼리가 국왕에 봉해진 해를 1218년으로, 무칼리 전기 자료와 《원사》는 1217년으로 적는다.↩
  58. 58《몽골비사》 제202절, 제211절, 제225절.↩
  59. 59《몽골비사》 제203절. 그가 후엘룬이 기른 아이라는 것은 《몽골비사》 제135절에 있다. 라시드 앗딘은 보르테가 길렀다고 적는다. 보오르추와 무칼리의 만호는 제205–206절.↩
3장 · 주원장(1328 – 1368 즉위)

용봉 연호 아래의 열두 해

호주 성문

주원장이 호주 성문에 들어서자 문지기가 그를 첩자로 몰았다. 그는 붙잡혀 베일 뻔했다. 1352년 4월 15일이었다.1 그 자신이 즉위한 뒤에 쓴 「기몽」은 그날을 이렇게 적는다. “성문 지키는 자가 사정을 묻지도 않고 잡아 베려 했다. 한참 뒤에 풀려나 보졸로 대오에 들어갔다”(城門守者不由分訴,執而欲斬之。良久,得釋,被收為步卒入伍).2

그가 왜 성에 왔는지는 그 자신의 기록끼리도 갈린다. 황제가 된 뒤의 글들은 가람신 앞에서 친 점을 이유로 든다. 「기몽」과 1378년의 「어제황릉비」, 명나라가 엮은 실록이 그렇다. 떠나기도 머물기도 불길하고 따르기만 길하다는 점괘가 나왔다는 것이다.

황제가 되기 전에 새긴 가계 비문은 다르다. 1363년 무렵의 「주씨세덕비」는 그가 “회수의 병사가 크게 일어나 대오에 붙잡혀 들어갔다”(淮兵大起,掠入行伍)고 적는다.3 즉위 이듬해인 1369년 고려에 보낸 국서에서도 그는 사나운 군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잘못 그 속에 들어갔다고 했다.4 그들이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을 보고 근심하고 두려워했다는 말이 뒤따른다. 두 갈래 모두 그 자신의 기록이다.

그의 어린 시절은 그가 황제가 된 뒤 부모 무덤에 세운 「어제황릉비」에 자세하다.5 그 비문은 앞선 비기를 유신이 꾸민 글이라 부르며 고생을 그대로 적겠다고 밝힌다. 그는 1328년 호주 종리현의 동향에서 태어났다. 「주씨세덕비」에 따르면 그의 집안은 원나라 호적에 금을 바치는 도금호로 올라 있었다. 금이 나지 않는 땅이어서 집안은 금을 사서 세로 바쳤다. 할아버지는 역을 견디지 못해 논밭과 집을 버리고 떠났다.

1344년 봄과 여름 사이 기근과 역병 속에 아버지와 큰형과 어머니가 잇달아 죽었다. 아버지는 예순넷, 어머니는 쉰아홉이었다. 땅 주인은 장지를 내주지 않았고, 이웃이 땅을 내주었다.6 「황릉비기」에 따르면 둘째와 셋째 형은 그보다 앞서 데릴사위로 나갔다. 「주씨세덕비」에 따르면 1344년에는 둘째 형이 집을 지켰다. 그해 가을 그는 이웃 왕씨가 대 준 예물을 들고 황각사에 들어가 승려 고빈을 섬겼다. 두 달이 못 되어 절의 양식이 떨어져 승려들이 흩어졌다.

그는 탁발을 하며 회수 서쪽을 떠돌았다. 실록이 꼽은 곳은 광주와 고시와 여주와 영주 일대다. 몇 해 뒤 그는 절로 돌아왔다.

1351년 원나라 조정은 황하를 고치는 공사에 군민 20만을 동원했다.7 같은 해 영주 영상에서 홍건군이 일어났다. 그가 탁발하며 지나간 땅이었다. 그가 그 무리와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홍건군은 미륵 신앙과 송 휘종의 후손이라는 선전을 내걸었다. 처주 사람 엽자기의 『초목자』에 따르면 가난한 자들이 돌아가듯 난을 따랐다.

1352년 봄 곽자흥과 손덕애를 비롯한 다섯 사람이 호주를 점거했다. 원나라 장수 철리불화는 성은 치지 않고 양민을 잡아 홍건으로 꾸며 바쳤다.8 그해 봄 난병이 황각사를 불태웠다. 성안의 옛 친구가 그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가 새어 그가 밀고당할 위험이 생겼다. 그는 호주로 향했다.

종리의 700명

성안에서 그는 보졸로 출발했다.9 「기몽」에 따르면 그는 두 달 남짓 만에 곽자흥의 친병이 되었다. 같은 마을의 탕화는 그보다 먼저 장정 10여 명을 데리고 곽자흥에게 가서 천호가 되어 있었다. 곽자흥은 정원의 부호 집안 사람이었다. 그는 가산을 흩어 장사들과 사귀다가 젊은이 수천을 모아 호주를 습격했다.

곽자흥은 거두어 기르던 마공의 딸을 그에게 주었다. 실록에 따르면 곽의 아내 장씨가 지금은 호걸을 모아야 할 때라며 혼인을 밀었다.10 남과 가까워져서는 누구와 일을 이루겠느냐는 말이었다.

호주에는 원수가 다섯 있었다. 곽자흥은 손덕애를 비롯한 나머지 넷과 맞섰다. 1352년 가을 원군이 서주를 되찾자 그곳의 팽대와 조균용이 호주로 들어왔다. 곽자흥이 손덕애의 집에 갇혔다. 주원장은 팽대의 힘을 빌려 그를 구해 냈다.

그해 겨울 원나라의 가로가 호주를 에워쌌다. 가로는 1353년 6월 17일 진중에서 병으로 죽었다.11 포위가 풀렸다. 성안에 양식이 모자라자 주원장은 회원에서 소금을 쌀로 바꿔 곽의 집을 먹였다. 팽대와 조균용은 그 무렵 저마다 왕을 칭했다. 팽대는 곧 죽었다. 조균용은 1359년 모귀를 죽이고 자신도 죽임을 당했다.

1353년 7월 1일 그는 고향에서 700여 명을 모아 왔다. 곽자흥은 기뻐하며 그를 진무로 삼았다. 「기몽」에 따르면 그는 모은 병사를 상관에게 바쳤고, 상관이 그를 진무로 삼았다.12

저주의 병권

그는 700명을 다른 장수에게 넘겼다. 서달을 비롯한 24명만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정원을 쳤다. 서달은 대대로 농사짓던 호주 집안 사람으로, 그때 스물둘이었다. 곽자흥은 그를 내보내며 너 아니면 이 일을 해낼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는 곽자흥의 이름을 빌렸다. 여패채의 수령에게는 곽공이 족하와 옛정이 있어 자기를 보냈다고 했다. 그는 꾀로 수령을 묶고 여패채의 장정 3천을 얻었다. 홍건군 병사 출신 유본의 기록에 따르면 다른 성채를 달랠 때 그는 자기를 곽 원수 휘하의 주 총관이라 불렀다.13 횡간산을 밤에 쳐서는 원나라의 지원 노장을 쫓아냈다. 그는 남녀 7만 가운데 장정 2만을 얻었다. 항복한 무리에게 그는 너희가 많았는데도 넘어온 것은 장수에게 규율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원의 이선장이 찾아와 서기를 맡았다. 이선장은 어려서 글을 읽고 법가를 익힌 사람이었다. 그는 저주를 쳐서 얻었다.14 저주를 얻은 지 한 달이 못 되어 팽대의 아들 팽조주와 조균용이 그를 우이와 사주로 불렀지만 그는 가지 않았다.

1354년 곽자흥이 1만여 명을 이끌고 저주로 왔다. 그때 주원장이 거느린 병력은 3만여였다. 명이 엮은 실록은 그 뒤의 일을 이렇게 적는다. 곽자흥은 그의 측근을 모두 불러들였다. “사방 정토의 총병권에 주상은 참여하지 못했다”(四方征討總兵之權,上皆不得與).15

같은 실록에 따르면 그는 군중에서 얻은 것을 하나도 갖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나누었다. 다른 장수들은 얻은 것을 곽에게 바쳤다. 곽은 이선장까지 데려가려 했다. 이선장은 울며 가지 않겠다고 했다. 마씨가 곽의 아내에게 예물을 보내 두 사람 사이의 틈을 메웠다.

청나라가 엮은 《명사》의 후비전에는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가 군중에서 굶을 때 마씨가 막 구운 떡을 품에 숨겨 가져왔다. 떡에 마씨의 살이 데었다.16

곽자흥은 저주에서 스스로 왕이 되려 했다. 주원장은 저주가 산성이라 배가 다니지 않는다며 말렸다.

장사성은 태주 백구장의 염정 출신이었다. 그에게는 소금을 나르던 형제들이 있었다. 《명사》에 따르면 그는 재물을 가볍게 여겨 무리의 마음을 얻었다. 1353년 그는 고우를 점거하고 성왕을 칭했다.

1354년 가을 원나라 조정은 톡토에게 고우를 치게 했다. 육합이 구원을 청해 오자 주원장은 와량루를 지키다 물러났다. 그는 빼앗은 원군의 말을 돌려보내며 자기들은 좋은 백성일 뿐이라고 했다.

1354년 12월 톡토는 출사한 지 석 달에 공이 없다는 탄핵을 받았다. 12월 24일 그는 관작을 빼앗기고 회안에 안치되었다.17 권형의 『경신외사』에 그해 겨울의 고우가 남아 있다. 성안은 거의 버티지 못해 날마다 항복을 의논했다. 톡토는 육합을 평정한 뒤 서주와 호주까지 치려 하고 있었다. 그때 조서가 왔다.

군중이 모두 통곡했다. 대군이 한꺼번에 흩어졌다. 흩어진 군사 가운데 갈 곳 없는 자는 대개 홍군을 따랐다.18

화주 청사

1355년 2월 3일 주원장의 계책에 따라 곽자흥이 보낸 장천우 등이 화주를 빼앗았다. 곽자흥이 좋다고 해서 정해진 작전이었다. 곽자흥은 그에게 화주의 총병을 맡겼다. 화주의 장수들은 곽의 옛 부하였다. 실록에 따르면 그들은 모두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사람이었고 나이도 많았다.

첫 회의 날 오경, 장수들이 먼저 와서 윗자리를 다 차지했다. 남은 것은 말석 하나였다. 그는 말석에 앉아 일을 처리했다. 장수들은 성벽을 나누어 고치기로 했다. 기한이 지났다.

그는 남쪽을 향해 자리를 놓고 그 위에 곽자흥의 격문을 올린 뒤 말했다. “총병은 주수의 명이지 내가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다… 이제부터 어기는 자는 군법으로 다스린다”(總兵,主帥命也,非我擅專…自今違令者,即以軍法從事).19

장수들은 그 뒤 그의 군령을 따랐다. 《명사》에 따르면 장수 다수가 그와 동배라 그 아래에 서려 하지 않았다. 탕화만은 그보다 세 살 위인데도 약속을 삼가 받들었다.20

실록에 따르면 화주 거리에서 한 아이가 말했다. 아버지는 관아에서 말을 기르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오누이라 부른다는 말이었다. 그는 군대가 빼앗은 부녀를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다.21 백성이 크게 기뻐했다.

원군 10만이 화주를 에워쌌다. 그는 1만 명으로 석 달을 버텼다. 양식을 찾던 손덕애의 군대가 화주로 들어왔다. 곽자흥은 참언을 듣고 밤에 화주로 와서 그를 문책했다. 그는 손덕애 군에 붙잡혔다. 서달이 대신 인질로 가서 그가 풀려났다.

1355년 3월 곽자흥이 근심 끝에 병이 나서 죽었다.22 손덕애가 곽의 군대를 차지하려 하자 곽의 아들은 스스로 따지지 못했다. 그는 주원장에게 대신 따져 달라고 청했다.

용봉의 격문

1355년 2월 유복통이 박주에서 한림아를 황제로 세웠다. 나라 이름은 송이고 연호는 용봉이었다. 송의 사신이 화주에 와서 장수들을 불렀다. 송의 격문은 곽의 아들 곽천서를 도원수로, 장천우를 우부원수로 삼았다. 주원장은 좌부원수로 셋째 자리에 섰다.

실록은 그가 송의 직을 받지 않았다고 적는다. 같은 시기 송의 이름으로 된 문서들은 남아 있다. 「주씨세덕비」는 1363년 송 조정이 내린 추증을 새겼다. 1364년의 임명 차부는 송 황제의 성지를 일컫고, 1366년의 방문은 그 성지로 시작한다.23

1355년 6월 2일 상우춘이 귀부했다. 6월 12일에는 소호의 수군이 배 1천 척을 이끌고 귀부를 청했다. 그들은 여주의 좌군필에게 시달리던 무리였다. 화주는 양식이 떨어져 있었다. 장수들은 장강 너머 집경으로 곧장 가자고 했다. 그는 채석부터 치기로 했다.

1355년 7월 11일 그는 장강을 건넜다. 실록에 따르면 우저기에 오른 뒤 그는 배의 밧줄을 끊어 물에 흘려보내게 했다. 장수들이 빼앗은 양식을 싣고 돌아가려 하자 그가 말했다. “큰일을 이루는 자는 작은 이익을 꾀하지 않는다. 여기서 태평이 매우 가까운데 버리고 어쩌겠는가”(成大事者不規小利。此去太平甚近,舍此不取,將奚為).24

그는 태평에 들어가 약탈을 금하는 방을 붙였다. 이선장이 쓴 방이었다. 태평흥국익원수부가 섰다. 실록에서는 장수들이 그를 대원수로 받들었다. 유본의 기록에서는 세 원수가 한 부에서 일을 보았고 계책과 결정은 모두 그가 했다.25 그는 이선장을 원수부의 도사로 삼았다.

『천황옥첩』에 따르면 태평의 창고에는 곡식이 쌓여 있었다. 그는 명단과 인원수를 가져오라고 했다. 자기 지휘를 듣는 자에게는 모두 양식을 주겠다는 말이었다. 대드는 자는 죽였다.26 부민 진적이 금과 비단을 바치자 그는 곧 장수와 사졸에게 나누어 주었다.

원나라 쪽에서 이 군대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진기가 집경의 원나라 관원을 기려 쓴 글에서 그들은 '회서의 도적'이다. 그 글에 따르면 도적은 강을 건너 태평을 함락하고 사방을 노략했다. 이어 몰래 집경으로 나아가 남문을 쳤다. 그 뒤 도적은 크게 몰려와 이레 밤낮 성을 에워쌌다.27

도강 뒤 도안과 이습이 찾아왔다. 유진의 『국초사적』에 따르면 도안은 금릉을 먼저 취해 왕업을 도모하라고 권했다.28

같은 책에 따르면 함께 강을 건넌 이국승은 배 위의 연회로 그를 없애려 했다. 며칠 뒤 그가 도리어 연회를 열어 이국승을 불렀고, 배에 오른 이국승을 장사들을 시켜 묶어 물에 던지게 했다. 쌍도조라 불린 조보승은 소호의 배들이 화주로 나오던 길에 떨어져 나가 서수휘에게 갔다. 조보승은 1359년 진우량의 의심을 받아 죽었다. 《명사》에 따르면 그 의심은 주원장이 꾸민 이간책에서 나왔다.

실록에 따르면 1355년 10월 22일 곽천서와 장천우가 집경을 치다가 진야선의 배반으로 전사했다.29 진야선은 주원장에게 사로잡혔다가 풀려난 원나라의 의병원수였다. 주원장은 진야선이 성실하지 않은 줄 오래전부터 알았다고 했다. 《명사》에 따르면 이에 곽자흥의 부장들이 모두 그에게 돌아왔다. 유본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부터 그가 원수부의 일을 혼자 맡았다.

곽자흥의 셋째 아들 곽천작은 송에게서 중서우승을 받았다. 《명사》에 따르면 주원장이 평장이 되자 곽천작은 자리를 잃었다. 원망하던 곽천작은 그를 해치려 꾀하다 죽임을 당했다. 그 일의 날짜는 남아 있지 않다.

응천

1356년 4월 10일 그는 집경을 떨어뜨리고 이름을 응천부로 고쳤다. 그는 군민 50여만을 얻었다.30 그는 집경 사람들에게 원이 정사를 잃었고 자기는 백성의 난을 없애러 왔을 뿐이라고 일렀다. 어진 이는 예로 쓰겠다고 했다. 하욱과 손염과 양헌을 비롯한 10여 명이 그를 찾아왔다.

그해 봄부터 익의 원수부를 세우고 원수를 임명하는 일은 모두 그의 이름으로 적힌다. 그는 요영안을 통군원수로, 서달과 탕화를 회흥익 통군원수로 삼았다. 같은 해 사졸들이 진보이의 재물을 빼앗았다. 진보이는 장사성 쪽으로 돌아섰다. 장수 둘이 그에게 붙잡혀 갔다. 주원장은 서달 이하 장수들의 등급을 한 단계씩 내렸다.

유본의 기록에 따르면 박주의 송 조정은 그를 추밀원 동첨으로, 이어 강남행성 평장으로 올렸다.31 실록과 《명사》에 따르면 1356년 7월 28일 장수들이 그를 오국공으로 받들었다. 17세기의 전겸익은 유본의 기록을 근거로 이 기사를 잘못으로 본다. 유본에 따르면 오국공은 1361년 송 조정이 올린 자리였다.32

1356년 그는 장사성에게 화친의 서신을 보냈다. 장사성은 사신을 억류했다. 그 뒤 장사성이 해마다 양식 20만 석과 황금 500냥과 백금 300근을 내겠다며 화친을 청했다. 그는 양식 50만 석을 요구했다. 화친은 깨졌다. 장사성은 1357년 원에 항복해 태위가 되었다.

유진의 『국초사적』에 따르면 1358년 그가 손수 쓴 지시에는 '용봉 3년'이 들어 있었다. 같은 책에 따르면 진강 사람들이 세운 공적비에 용봉 연호가 있자 그는 그 비를 부수게 했다. 그 일이 언제였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그는 호령을 두고 차라리 호대해가 반란을 일으킬지언정 자기 호령은 무너뜨릴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점령한 도시마다 장수와 함께 의자를 심복으로 두었다. 진강에는 주사라 불린 목영을, 엄주에는 보아라 불린 이문충을 두었다.

1357년 휘주를 얻은 뒤 그는 주승에게 시무를 물었다. 주승은 담을 높이 쌓고 양식을 널리 모으고 왕을 천천히 칭하라고 답했다.33 1358년 그는 강무재를 영전사로 두어 둔전을 맡겼다. 1363년 무렵 강무재의 둔전은 곡식 1만 5천여 석을 거두었다. 그는 장사성의 땅과 맞닿은 경계에서 소금을 교역했다. 유진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태평을 비롯한 다섯 부의 민호를 군으로 뽑아 썼다.

1359년 1월 19일 그가 직접 나서서 무주를 떨어뜨렸다. 유진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성안의 내응자에게 일이 이루어지면 함께 부귀하리라고 맹세했다. 내응자가 동문을 열어 주었다. 그때 세운 깃발 문구의 끝은 유본의 기록에서는 '대송천(大宋天)'이고 유진의 기록에서는 '대통천(大統天)'이다. 그는 무주에서 유학자 13명을 불러들였다. 《명사》에 따르면 그해 강좌와 절우의 여러 군은 그의 군대가 이르면 모두 떨어졌다.

《명사》에 따르면 송의 북벌이 원군을 붙잡아 두는 사이 그는 강남을 차례로 평정했다.34 같은 책에 따르면 밖에 나가 있는 송의 장수들은 대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유복통도 그들을 제어하지 못했다. 송 조정은 1358년 변량에 들어갔다가 1359년 안풍으로 물러났다.

방국진은 그를 따르는 척하며 형세를 보자는 쪽이었다. 1359년 방국진이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그는 받지 않았다. 1361년에는 원나라의 대장 찰한첩목아에게 사신을 보내 통호했다.

1360년 3월 18일 유기와 송렴과 장일과 엽침이 응천에 왔다. 이선장은 양식 보급을 맡았다. 《명사》에 따르면 군사의 진퇴와 상벌 규정은 대부분 참의 이선장의 손에서 정해졌다. 정벌 때마다 응천을 지킨 이선장은 병량을 옮기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주원장은 장전 위사 하필취를 강서와 산동에 보내 정세를 살피게 했다. 왕시에게는 은 3천 냥을 주어 방국진의 배로 대도를 정탐하게 했다.35

용만

1360년 6월 14일 진우량이 태평을 떨어뜨렸다. 그는 주군 서수휘를 죽이고 한(漢)을 칭했다. 진우량은 면양 어부 집안에서 났다. 《명사》에 따르면 책을 조금 읽은 그는 현의 소리를 지냈다. 서수휘의 천완 정권에서는 장부를 맡던 부하였다. 1357년 그는 상관 예문준을 죽이고 그 무리를 모두 거느렸다.

1359년 겨울 진우량은 강주에서 서수휘의 부하들을 모두 죽였다. 그는 서수휘만 남겨 강주에 받들어 두었다. 실록에 따르면 이로부터 서수휘는 빈자리만 지켰다.36 이듬해 태평을 떨어뜨린 진우량은 장사성에게 함께 응천을 치자고 했다.

응천의 장수들 사이에서 항복하자는 말과 종산으로 피하자는 말이 나왔다. 《명사》에 따르면 유기는 항복이나 도망을 주장하는 자는 벨 만하다고 했다. 주원장은 태평을 먼저 되찾자는 안과 곧바로 맞아 싸우자는 안을 모두 물리쳤다. 그는 저들이 상류에 있고 수군이 자기들의 열 배라고 했다. 진우량을 먼저 깨뜨리면 장사성은 간담이 떨어질 것이라고도 했다.

진우량의 옛 친구 강무재가 거짓 항복 서신을 써서 진우량을 끌어들였다. 이선장은 이 계책을 의심했다. 1360년 6월 23일 진우량은 용만의 매복에 걸려 크게 졌다. 주원장은 태평과 안경을 되찾았다. 진우량의 장수 우광과 구보상이 항복해 왔다.

유본의 기록에 따르면 주원장은 사로잡은 수만 명을 모두 사면한다고 해 놓고 물 감옥에 가두었다. 한 달 남짓 만에 그 절반이 넘게 죽었다.37 장사성은 경계를 지키며 형세를 보았다. 《명사》에 따르면 유기는 진우량이 태평을 떨어뜨리기 전에 이미 그를 두고, 주군을 겁박하고 아랫사람을 위협하니 이름이 바르지 않다고 평했다.

그해 지주의 구화산 싸움에서 사로잡은 3천 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수를 상우춘이 밤에 생매장했다. 반대한 서달이 그 일을 갖추어 보고했다. 《명사》에 따르면 주원장은 이를 불쾌히 여겨 나머지를 풀어 주었다. 그 뒤 그는 서달에게 장수들을 모두 거느리게 했다.

1362년 항복해 왔던 장영과 묘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금화에서 호대해가, 처주에서 경재성이 죽었다. 금화는 이문충이 수습했다. 처주는 소영이 되찾았다. 그해 8월 3일 평장 소영과 참정 조계조가 모반의 혐의로 처형되었다.

소영은 서달·상우춘과 함께 가장 두드러진 장수 셋으로 꼽히던 숙장이었다. 《명사》에 따르면 그는 교만해 다른 뜻을 품었다. 그는 조계조와 복병을 두고 변란을 꾀하다 발각되었다. 상우춘은 신하의 의리로 그와 함께 살 수 없다고 했다.38

그해 겨울 원나라가 바닷길로 장창을 보내 주원장에게 강서행성 평장의 직을 내렸다. 『월산총담』에 따르면 그는 찰한첩목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직을 받지 않았다.39 『천황옥첩』에서는 그 소식을 들은 그가 천하에 사람이 없구나 하고 말한다.

안풍

1363년 2월 16일 장사성의 장수 여진이 안풍을 떨어뜨렸다. 실록과 《명사》에 따르면 유복통은 이때 죽었다.40 송 황제 한림아가 주원장에게 위급을 알려 왔다.

유진의 『국초사적』에 따르면 유기는 출병에 반대했다. “가볍게 나가서는 안 된다. 구해 낸다 해도 어디에 둘 것인가”(不宜輕出,假使救出來,當發付何處).41 《명사》에 따르면 주원장은 안풍이 깨지면 장사성이 더 강해진다며 출병했다.

1363년 3월 16일 그는 안풍으로 나갔다. 실록에는 이 출병이 '안풍을 쳤다'로만 남아 있다. 실록에서는 오히려 유복통이 안풍을 들고 귀부해 온다. 《명사》에서는 그가 한림아를 데리고 저주로 돌아왔다. 유본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저주에 궁전을 지어 한림아를 살게 했다. 그는 한림아 곁의 환관들을 바꾸고 대접을 후히 했다.42

그달 송 조정은 그의 증조부터 아버지까지 3대를 오국공으로 추증했다. 「주씨세덕비」에 이 추증이 용봉 9년의 일로 새겨져 있다.43 그 뒤 그는 여주를 석 달 쳤으나 떨어뜨리지 못했다. 그 사이 6월 5일 진우량이 홍도를 에워쌌다. 진우량은 홍도를 석 달 동안 쳤다.

주원장은 홍도를 구하러 가서 파양호에서 진우량과 맞섰다. 진우량의 군대는 60만을 일컬었다. 8월 29일 두 함대가 강랑산 앞에서 마주쳤고, 이튿날 싸움이 시작되었다. 8월 31일 그의 군대가 불을 놓았다. 《명사》 〈유기전〉에 따르면 싸움 중에 유기가 갑자기 배를 옮기라고 외쳤다. 배를 옮기자마자 원래 배가 포에 맞아 부서졌다.44

『초목자』에 따르면 두 군대는 파양에서 80여 일을 맞섰다. 큰 싸움이 대여섯 번 있었다. 죽은 자는 6만에서 7만이었다. 진우량의 좌금오장군과 우금오장군이 차례로 투항했다.

10월 3일 진우량은 배에서 머리를 내밀어 지휘하다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죽었다.45 투항한 병사가 와서 그 죽음을 알렸다. 유본의 기록에 따르면 주원장은 누가 맞혔는지 가리기 어려우니 모두 후히 상 주라고 했다.

뒤에 그는 안풍 출병을 두고 말했다. “나는 안풍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我不當有安豐之行).46 진우량이 빈틈을 타 응천을 쳤다면 대사는 끝났을 것이라고도 했다.

유기의 행장에 따르면 유기는 어느 해 정월 하례에서 한림아의 어좌에 절하지 않았다. 그는 목동일 뿐인데 받들어 무엇 하느냐고 했다.47

평주방

1364년 2월 4일 그는 오왕이 되었다. 실록에 따르면 이선장과 서달을 비롯한 장수들이 그를 받들었다. 실록은 송의 승인을 말하지 않는다. 이선장은 우상국, 서달은 좌상국이 되었다. 같은 해의 도안 임명 차부 두 통은 '황제 성지, 오왕 영지'를 일컫고, 날짜는 용봉 10년이다.48 장사성은 그보다 앞선 1363년 가을 스스로 오왕을 칭했다.

실록에 따르면 그해 주원장은 지금 맡긴 장수들이 모두 예전에 함께 공을 세운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들이 자기에게 마음을 돌린 때부터 곧 명분을 정하고 호령을 밝혔으므로 모두 명을 따른다고 했다.

1363년 제기를 지키던 사재흥이 장사성에게 투항했다. 주원장은 사재흥의 딸을 서달에게 시집보낸 일이 있었다. 유진의 기록에 따르면 사재흥은 딸의 혼인을 자기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원망했다. 자기를 남의 절제를 받게 한다는 것도 그의 원망이었다.

사재흥의 사위는 주원장의 조카 주문정이었다. 실록에 따르면 주문정은 장사성에게 항복하려 꾀했다. 그의 측근은 처형되었다. 부하 50여 명은 다리 힘줄이 끊겼다. 유진의 기록에 따르면 마씨가 이 일에 간언했다. 주문정은 1365년 1월 압송되어 동성에 안치되었다.49

상주를 지키던 탕화는 일을 청했다가 거절당했다. 《명사》에 따르면 탕화는 술에 취해 이 성을 지키는 것이 지붕 용마루에 앉은 것 같다고 원망했다.50

1366년 5월 22일 주원장은 고향 호주에서 성묘하고 부로들과 잔치했다. 《명사》에 따르면 그는 고향을 떠난 지 10여 년, 백 번 싸운 끝에 돌아왔다며 조세를 면제했다. 원나라에서는 확곽첩목아와 이사제가 서로 싸워 조정의 명이 행해지지 않았다.

평주방은 '황제 성지, 오왕 영지'로 시작한다. 장사성을 치기에 앞서 낸 방문이다. 어느 주의 판관 허사걸이 1366년 6월 29일 이 방문을 가져왔다. 방문은 홍건이 미륵의 실재를 굳게 믿는다며 그 신앙을 요술이라 꾸짖는다. 방문은 그를 본래 호량의 백성이라 하고 이렇게 소개한다. “처음엔 대오에 있다가 차츰 군을 거느렸고, 요언으로는 일을 이룰 수 없음을 똑똑히 보았다”(初列行伍,漸至提兵,灼見妖言不能成事).51

1366년 9월 6일 그는 서달을 대장군으로, 상우춘을 부장군으로 삼아 20만으로 장사성을 치게 했다. 이선장은 정벌을 늦추자고 했다. 상우춘은 평강을 곧장 치자고 했다. 그는 두 안을 다 물리쳤다. 군대는 먼저 장사성의 호주(湖州)로 향했다.

그해 겨울 응천으로 옮겨 오던 한림아가 과보에서 죽었다.52 실록에는 그 죽음이 없다. 실록의 그달 기사는 명년을 오 원년으로 정했다는 데서 끝난다. 1396년 황자 주권이 칙명으로 엮은 『통감박론』은 요영충이 과보에서 한림아를 물에 빠뜨렸다고 적는다.53 이듬해의 연호는 오 원년이었다.

남교

《명사》 〈서달전〉에 따르면 평강을 에워싼 서달이 사자를 보내 일을 물었다. 주원장은 일마다 품명하는 것이 장군의 충성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면서도 장수가 밖에 있으면 임금이 막지 않는다며 안에서 통제하지 않겠다고 했다. 임금 앞에서 서달은 말을 잘 하지 못할 만큼 공손했다.54

장사성이 군사를 맡겼던 이백승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권했다. 장사성은 듣지 않았다. 1367년 10월 1일 평강이 떨어지고 장사성이 사로잡혔다. 장사성은 응천으로 압송된 뒤 목매 죽었다. 서달은 평강에서 이긴 병사 25만을 얻었다. 그해 서달은 평오의 공으로 신국공에 봉해졌다.

《명사》에 따르면 장사성의 장수들은 거만해 명을 듣지 않았다. 그들은 싸움이 있으면 병을 칭하다가 관작과 땅을 얻어 낸 뒤에야 나섰다.55 주원장은 평강, 곧 소주의 부민을 고향 호주로 옮겨 살게 했다.

1367년 11월 13일과 15일 그는 서달과 상우춘에게 25만으로 북벌을 명했다. 북벌 격문은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한다'고 외쳤다. 격문은 한림아의 송을 한 번도 말하지 않고, 홍건은 '요인'으로만 일컫는다. 격문은 경쟁자들을 처음엔 모두 요인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병권을 얻은 자들이라 불렀다.

실록에 따르면 그 무렵 그는 장수들에게 말했다. 자기와 제공은 의를 내세워 일어났으나 처음엔 몸을 보전하려는 계책이었다고 했다. 뜻밖에 대란이 풀리지 않아 무리가 붙었다고도 했다.56

북벌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상우춘은 곧장 원의 도성을 치면 대나무 쪼개듯 할 것이라고 했다. 주원장은 원이 도읍한 지 백 년이라 성의 수비가 반드시 굳다고 했다. 먼저 산동을 취해 울타리를 걷어 내겠다고 했다.

방국진은 원나라의 조운을 맡아 강절행성 좌승상에 오른 사람이었다. 일찍이 강동과 청서로 나아가자는 제안이 왔을 때 그는 거절했다. “나는 처음부터 뜻이 거기까지 미치지 않았다”(吾始志不及此).57 1362년 호대해를 죽인 묘군이 그 머리를 들고 와 휘하에 들기를 청했을 때도 그는 받지 않았다.

1367년 막하의 구남이 항복을 권하자 방국진은 바다로 달아났다. 그해 12월 26일 방국진이 항복했다. 그의 병졸은 2만 4천, 바다 배는 400여 척이었다. 항복한 그는 녹을 받되 부임하지 않았다.58 이선장이 즉위를 권하는 표를 세 번 올린 끝에 주원장은 허락했다.

1368년 1월 23일 그는 남교에서 즉위했다. 국호는 명, 연호는 홍무였다. 그날 하늘에 고한 글은 그가 다스리는 땅의 폭을 2만여 리라 했다. 그 글은 그가 평정한 상대 20여 명을 열거했다. 고천문은 그 가운데 '안풍 유복통'을 진우량·장사성과 나란히 적었다.59

주

  1. 1원문의 날짜는 지정 12년 윤3월 1일 갑술일이다. 각주에 다른 기록을 밝히지 않은 사실은 명 사관이 엮은 《명태조실록》과 청나라가 1739년에 엮은 《명사》에서 왔다. 지금 전하는 실록은 영락 연간에 다시 고친 재개본이고, 그가 송나라 아래 있던 일을 지운다. 《명사》 본기는 실록 계열이다.↩
  2. 2「기몽」은 1368년 즉위 뒤에 그가 쓴 글이다. 『천황옥첩』은 곽자흥이 직접 달려와 그를 살렸다고, 《명사》는 곽자흥이 그의 모습을 기이하게 여겨 결박을 풀었다고 적는다. 「어제황릉비」는 어리석은 자에게 다칠 뻔했다고만 하고 곽자흥의 이름을 쓰지 않는다.↩
  3. 3「주씨세덕비」는 그가 손수 쓴 가계 비문으로, 송나라의 용봉 연호를 그대로 쓴다. 16세기 낭영이 옛 대신의 집에서 얻었다며 『칠수유고』 권7에 옮겨 전한다. 어제문집에는 빠져 있다.↩
  4. 4『고려사』 권41 공민왕 18년 조에 실린 국서다.↩
  5. 5「어제황릉비」는 본문 첫머리에 홍무 11년(1378) 여름 4월이라 적는다. 낭영의 『칠수유고』 전사본은 같은 대목을 홍무 16년으로 적는다.↩
  6. 6장지를 내준 사람은 기록마다 다르다. 「어제황릉비」는 땅 주인의 형으로, 이선장이 지은 「황릉비기」는 같은 마을 유대수로, 《명사》와 『천황옥첩』은 마을 사람 유계조로 적고, 실록은 이름을 적지 않는다. 절에 머문 기간과 떠돈 햇수도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다.↩
  7. 7권형의 『경신외사』가 든 수다. 《원사》 〈가로전〉은 백성 15만과 군사 2만으로, 『초목자』는 장정 26만여로 적는다.↩
  8. 8실록과 「기몽」에 있는 이야기다. 원나라 쪽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다.↩
  9. 9입성 뒤 그의 자리는 기록마다 다르다. 「기몽」은 보졸로, 실록은 구부장으로, 《명사》 〈곽자흥전〉은 십부장으로 적는다.↩
  10. 10《명사》 〈곽자흥전〉은 혼인을 민 사람을 곽의 작은 부인으로 적는다.↩
  11. 11날짜는 원나라 조정의 기록을 바탕으로 명나라가 1369–1370년에 엮은 《원사》 〈가로전〉을 따랐다. 포위 기간은 《원사》 〈가로전〉에 실린 가로의 맹세문에서 그날까지 '이레'다. 같은 문장을 옮긴 전겸익의 『국초군웅사략』에는 '일곱 달'로 되어 있다. 《명사》는 성을 다섯 달 지켰다고 적는다.↩
  12. 1217세기의 전겸익은 그와 서달이 진무가 된 것이 모두 곽자흥의 임명이었다고 고증했다. 「기몽」과 『천황옥첩』은 모은 사람을 수백 명으로 적는다.↩
  13. 13유본은 『기사록』이라는 회고 연대기를 남겼다. 그의 기록은 주로 17세기 전겸익이 『국초군웅사략』과 「태조실록변증」에 옮긴 대목으로 전하고, 실록과는 따로 전하는 기록이다.↩
  14. 14저주를 얻은 해를 《명사》는 1353년으로, 「기몽」과 『천황옥첩』은 1354년 여름 이후로 적는다.↩
  15. 15《명태조실록》 권1. 《명사》 〈곽자흥전〉도 병권 회수를 적는다. 병력 3만여는 그의 진영이 적은 수다.↩
  16. 16《명사》 권113 〈후비전〉. 실록은 마씨가 곽의 아내에게 예물을 보낸 데까지만 적는다.↩
  17. 17《원사》 권43. 장사성의 기병은 《원사》 권43과 《명사》 〈장사성전〉. 장사성이 성왕을 칭한 해를 실록은 1354년 초로 적는다.↩
  18. 18권형은 원말 명초 사람이고, 『경신외사』는 원나라 조정 안을 비판적으로 적은 사찬이다. 톡토가 서주와 호주를 치려 했다는 말은 이 책에만 있다. 고우의 원군을 이 책은 백만으로 적는다. 『초목자』는 한 곳에서 40만으로, 장사성 항목에서는 백만을 일컬었다고 적는다.↩
  19. 19《명태조실록》 권2. 《명사》 본기는 그가 격문을 숨겨 두었다가 내놓았다고 적는다.↩
  20. 20《명사》 〈탕화전〉.↩
  21. 21아이의 말은 실록에만 있다. 《명사》 본기는 부녀를 돌려보낸 일만 적는다.↩
  22. 22《명사》는 그달을 3월로 적고, 실록은 날짜 없이 적는다.↩
  23. 23실록에서 한림아의 이름은 권3에 단 한 번 나오고, 그 자리에서도 그는 송의 직을 받지 않았다고 적힌다. 실록이 송을 지운 범위는 지금 전하는 권1–29다. 《명사》 본기는 그가 직을 받지 않았으나 용봉 연호를 군중에 썼다고 적는다. 유본은 그도 송의 절제를 받았다고 적는다. 차부와 방문은 전겸익의 인용으로 전한다.↩
  24. 24《명태조실록》 권3. 결정을 그가 했다는 것은 유본의 기록도 같다.↩
  25. 25《명태조실록》 권3과 유본(『국초군웅사략』 권2 경유).↩
  26. 26『천황옥첩』은 명나라 초에 엮은 황실 계보로, 지은이를 알 수 없다. 진적의 일은 실록 권3에 있다.↩
  27. 27진기, 「서하 영년공 훈덕시서」(『이백재고』 권20). 글 끝의 날짜가 지정 15년 11월이어서 사건 두세 달 뒤에 쓴 글이다. 원문은 음력 6월에 강을 건넜고 9월에 크게 몰려왔다고 적는다. 권형의 『경신외사』도 이 도강을 향군, 곧 홍건군의 일로 적는다.↩
  28. 28유진은 1358년 무렵부터 종군한 금화 사람으로, 영락 초에 태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국초사적』은 그가 영락제에게 올린 글이다.↩
  29. 29실록은 두 원수가 죽은 달을 9월로, 유본은 11월로 적는다. 날짜는 실록의 간지를 서기로 환산한 것이다. 진기의 같은 글은 진야선이 몰래 원나라와 내통했고, 관군이 그와 안팎에서 협공해 '가짜 원수 곽·장 두 도적'을 사로잡았다고 적고, 유진도 두 원수가 사로잡혀 갔다고 적는다. 진야선의 죽음을 실록은 향병의 손으로, 진기는 관군의 실수로 적는다.↩
  30. 30《명태조실록》 권4. 같은 권은 그가 항복한 진조선의 군 3만 6천 가운데 500명을 친위로 삼았고, 그날 밤 옛 측근을 밖에 두고 그들 사이에서 갑옷을 벗고 잤다고 적는다. 이 이야기는 실록 계열에만 있다.↩
  31. 31유본(『국초군웅사략』 권1 경유).↩
  32. 32전겸익은 「태조실록변증」에서 강을 건넌 뒤 오국공과 오왕이 되기까지 모든 임명이 용봉의 명에서 나왔거나 번진이 황제의 이름으로 임명하던 전례를 따랐고, 국사가 이를 꺼려 다 빼고 쓰지 않았다고 판정했다.↩
  33. 33《명사》 〈주승전〉. 같은 전은 그가 이 말을 좋게 여겼다고 적는다.↩
  34. 34《명사》 권122의 찬은 그가 여유 있게 나라를 세운 것이 송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평했다(藉其力焉).↩
  35. 35하필취의 일은 유본의, 왕시의 일은 유진의 기록에 있다. 둘 다 날짜가 남아 있지 않다.↩
  36. 36《명태조실록》 권8. 《원사》는 진우량이 서수휘를 맞아 살게 하고 스스로 한왕을 칭했다고 적는다. 진우량이 황제를 칭한 날짜는 《원사》와 실록이 서로 다르다.↩
  37. 37유본(『국초군웅사략』 권4 경유). 진우량의 수군이 열 배라는 말은 주원장 쪽의 말이다. 엽자기의 『초목자』는 주원장의 군대를 '대병'이라 부르고, 진우량이 그들을 치다가 크게 져서 돌아갔다고 적는다.↩
  38. 38《명사》 〈서달전〉·〈상우춘전〉이 실린 권125. 소영에 관한 기록은 명 쪽에만 있다.↩
  39. 39『월산총담』은 전겸익의 『국초군웅사략』 권1에 인용되어 전한다. 찰한첩목아는 1362년에 죽었다.↩
  40. 40유진은 유복통이 살아서 한림아를 받들고 저주로 갔다고 적고, 권형의 『경신외사』는 유복통이 1366년 한림아와 함께 물에 빠져 죽었다고 적는다.↩
  41. 41《명사》 〈유기전〉은 한과 오가 틈을 엿본다는 그의 말을 싣는다.↩
  42. 42유본(『국초군웅사략』 권1 경유). 『경신외사』에는 한림아가 장사성의 포위를 받자 어둠과 비를 무릅쓰고 빠져나와 저주에 머물렀다고 되어 있다. 그 책에는 그가 한림아를 구했다는 말이 없다.↩
  43. 43비문의 날짜 '3월 14일 병진'은 그달 14일의 간지인 갑인과 맞지 않는다.↩
  44. 44실록의 파양호 기사에는 이 장면이 없다.↩
  45. 45《명사》 〈진우량전〉은 화살이 눈을 꿰어 머리까지 들어갔다고 적고, 유본은 왼쪽 관자놀이에 맞았다고 적는다.↩
  46. 46《명사》 본기와 유진 모두 이 말을 그가 유기에게 한 말로 적는다.↩
  47. 47황백생의 「성의백행장」(전겸익 경유)과 《명사》 〈유기전〉. 행장은 이 일을 1360년의 일로 적는다. 전겸익은 실록과 본전에 이 일이 없고 그때는 용봉의 정삭을 받들던 때라며 1363년 이후라야 이치에 맞는다고 했다.↩
  48. 48전겸익의 「태조실록변증」 권102가 『도학사사적』에서 옮긴 차부다.↩
  49. 49주문정의 모의는 실록 권16에, 안치는 《명사》 본기에 있다. 측근과 부하의 처벌은 유진의 기록과 《명사》 본기에 있다.↩
  50. 50《명사》 〈탕화전〉. 이 말을 들은 그가 뒤에 철권에 새겼다고 같은 전은 적는다.↩
  51. 51방문의 전문은 축윤명의 『구조야기』와 『평오록』에 실렸고 전겸익의 『국초군웅사략』 권8이 옮겼다. 방문 끝에는 판관이 가져온 날로 용봉 12년 5월 21일이 적혀 있다.↩
  52. 52원문의 달은 음력 12월로, 서기로는 1367년 1월에 걸친다.↩
  53. 53『통감박론』의 이 대목은 전겸익의 「태조실록변증」이 옮겼다. 같은 글은 명 조정이 그 불의를 미워해 뒤에 요영충을 사사했다고 덧붙인다. 《명사》 본기는 한림아가 죽었다고만 적고, 〈한림아전〉은 “혹은 태조가 요영충에게 명해 한림아를 맞아 응천으로 돌아오게 했는데, 과보에 이르러 배가 뒤집혀 강에 가라앉았다고 한다”(或曰太祖命廖永忠迎林兒歸應天,至瓜步,覆舟沉于江云)는 말을 전한다. 권형의 『경신외사』는 '주진무'가 배를 갖춰 맞아들였는데 한림아와 유태보, 곧 유복통이 과주 나루에서 풍랑에 배가 뒤집혀 함께 죽었다고 적는다. 요영충은 1375년 용봉 연호를 참람하게 쓴 일을 비롯한 불법으로 사사되었다.↩
  54. 54《명사》 〈서달전〉.↩
  55. 55《명사》 〈장사성전〉. 적대 진영의 관찬이 내린 평이다.↩
  56. 56《명태조실록》 권26. 즉위 직전의 관찬이 옮긴 그 자신의 말이다. 1366년 방문의 '요언으로는 일을 이룰 수 없음을 보았다'와 결이 다르다.↩
  57. 57《명사》 〈방국진전〉. 묘군의 일도 같은 전에 있다.↩
  58. 58《명사》 〈방국진전〉. 병졸과 배의 수는 〈탕화전〉이 실린 권126에 있다.↩
  59. 59《명태조실록》 권29.↩
4장 · 나디르(1688 – 1736 즉위)

타흐마스프의 종

나드르 쿨리

“신의 은총 다음으로 자기 칼에 기댈 뿐 자기 부족과 친족의 완력에 기대지 않는다.” 나디르의 궁정 사관 미르자 마흐디 한 아스타라바디가 주인을 두고 쓴 문장이다.1

같은 사관에 따르면 나디르는 아비바르드의 아프샤르 수장이자 장관인 바바 알리 베그의 경호대장이 되었다. 여러 아프샤르인이 그를 질투했다. 그래도 그는 수장의 딸과 혼인했다. 첫 아내가 죽자 그는 바바 알리 베그의 다른 딸 고하르샤드를 아내로 맞았다. 1719년 4월 15일 맏아들 레자 쿨리가 태어났다.2

사관의 기록에서 그가 태어난 날은 1688년 11월 22일이다. 아프샤르 부족이 여름 목지에서 겨울 목지로 옮겨 가던 길이었다.3 아명은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나드르 쿨리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이맘 쿨리였다.4 아버지가 무슨 일로 살았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5 사관은 그가 열다섯 살 무렵 영광의 길에 들어섰다고만 쓴다. 그 뒤 몇 해의 일은 사관의 기록에 없다.

바바 알리 베그는 1723년 무렵 죽었다. 그 뒤 나디르가 수장 자리를 이었는지를 두고 기록이 갈린다.6 카슈미리에 따르면 약 40가구인 울루스 사람들이 그를 기꺼이 우두머리로 받아들였다. 같은 기록에 따르면 바바 알리 베그는 나디르의 계모를 아내로 맞기도 했다. 바바 알리 베그의 세 아들은 뒤에 나디르 밑에서 높은 자리에 올랐다.

칼라트

1722년 3월 8일 사파비 군대가 굴나바드에서 졌다. 6월 2일 왕자 타흐마스프가 이스파한을 빠져나갔다. 10월 22일 샤 술탄 호세인이 항복했다. 그는 왕의 깃털 관식을 아프간의 마흐무드에게 넘겼다. 11월 24일 타흐마스프는 카즈빈에서 스스로 샤를 칭했다.7 그는 그해 6월 아버지의 후계자로 지명된 터였다.

1723년 9월 타흐마스프의 사절은 러시아와 카스피해 연안을 내주는 조약을 맺었다. 그 조약은 비준되지 않았다. 1724년 6월 24일 오스만과 러시아는 이란의 북부와 서부를 나누어 갖는 조약을 맺었다. 1725년 2월 7일 마흐무드는 사파비 왕자들을 죽였다. 4월 22일 아프간의 아슈라프가 마흐무드를 없애고 이스파한의 자리에 올랐다.

이스파한에 있던 예수회 수사 크루신스키에 따르면 그때 아슈라프는 감옥에 있었다. 다수의 지지를 얻은 그를 나라의 주요 인물과 군 지휘관들이 감옥에서 꺼내 왕으로 맞았다. 그는 궁전으로 나아가 마흐무드 친위대의 저항을 뚫었다. 그는 마흐무드의 목을 베고 하자라 친위대 500명을 처형했다.8

사파비 왕자를 참칭한 자도 여럿 나타났다. 사관은 여섯을, 셰이크 하진은 열여덟을 센다. 이스파한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보낸 서한을 엮은 「역사적 보고」에 따르면 그 무렵 타흐마스프의 영역은 마잔다란과 시르반 일부와 호라산 일부였다.9

호라산에서는 툰의 지사 말레크 마흐무드 시스타니가 1720년부터 샤의 권위를 무시했다. 그는 1723년에서 이듬해 사이 마슈하드를 차지하고 카야니 왕관을 썼다. 옛 카야니 왕들을 본뜬 관이었다. 사관에 따르면 그는 카야니 왕조와 사파르 왕조의 후손을 자처했다. 그는 자기 이름으로 주화를 찍고 지사와 장군을 임명했다.10 조카 이스학은 장군이 되었고 피르 무함마드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카슈미리에 따르면 나디르는 말레크 마흐무드 밑에 들어갔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는 계획을 알고 밤에 아비바르드로 달아났다.11 궁정 사관의 기록에서는 반대로 그가 자리드 경기 도중 말레크 마흐무드를 치려다 그만두었다. 그는 함께 꾀했던 마슈하드의 아프샤르 족장 둘을 죽이고 아비바르드로 달아났다.

그 뒤 몇 해 동안의 약탈을 궁정 사관은 적지 않았다. 사관은 그가 나라의 환난을 보고 해방자가 되라는 신의 영감을 받아 칼라트를 거점으로 부족을 모았다고 쓴다.12 카슈미리와 바쟁과 핸웨이는 그가 약탈 무리를 이끌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카슈미리가 들은 바로는 그는 떠돌이 무뢰배를 동료로 삼아 약탈 기병과 노상강도의 길을 택했다.13

잘라예르의 300~400가구가 타흐마스프 한의 인솔로 그에게 왔다. 그들은 떠나지 않았다. 나세르 아가를 비롯한 기병들도 그를 따랐다. 말레크 마흐무드와 맞서던 히바의 시르 가지는 우즈베크 청년 500을 보내 주었다. 사관에 따르면 함께하던 아프샤르와 쿠르드 다수는 곧 떠났다.

그는 하부샨의 차미시가자크 쿠르드를 도와 말레크 마흐무드를 물리쳤다. 니샤푸르를 지키는 데는 실패했다. 사관에 따르면 말레크 마흐무드에게 크게 진 뒤 그는 두 사람만 데리고 칼라트로 돌아왔다. 그 뒤 사파비 장군 무함마드 한 투르크만과 함께 마슈하드 밖에서 말레크 마흐무드를 깨뜨렸다. 메르브와 사락스로도 원정했다.

그 무렵 타흐마스프가 보낸 장군 레자 쿨리 한 샴루가 호라산에 와 있었다. 술탄 호세인의 의전장을 지낸 사람이었다. 사관에 따르면 하부샨의 쿠르드는 그에게 나디르와 손잡지 말라고 했다. 함께 이기면 이득은 나디르가 다 가져가고 레자 쿨리 한을 깎아내릴 것이라는 말이었다. 레자 쿨리 한은 혼자 두 번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경질되었다.

1725년 12월 타흐마스프는 테헤란에서 마잔다란으로 달아났다. 사리에서 아스타라바드 카자르의 수장 파트알리 한이 2천을 이끌고 그에게 합류했다. 1726년 초 타흐마스프의 감찰관 하산 알리 베그가 나디르를 살피러 왔다. 하산 알리 베그는 샤의 이름으로 그를 아비바르드 부지사에 임명했다. 사관에 따르면 나디르는 그에게 왕자를 호라산으로 모셔 오라고 권했다. 말레크 마흐무드는 나디르가 없는 틈에 타흐마스프의 군대를 치려다 돌아갔다.14

나디르는 마슈하드로 나아가던 길을 멈추고 이 부름에 응했다. 1726년 9월 중순 그는 쿠르드와 아프샤르 2천을 이끌고 하부샨에서 타흐마스프와 파트알리 한에게 합류했다. 잘라예르와 우즈베크 병력도 그를 따랐다. 카자르 병력은 파트알리 한이 거느렸다.

타흐마스프 쿨리 한

파트알리 한은 나디르보다 먼저 샤 진영의 첫째 장수였다. 그는 일찍이 말레크 마흐무드를 치러 마슈하드 지사로 파견된 적이 있었다. 핸웨이에 따르면 그는 1725년 이전 샤가 보낸 군대를 물리친 적이 있었다. 샤가 그의 목숨에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한 뒤에야 그는 충성을 서약했다.

샤는 파트알리 한의 처신을 못마땅해하고 있었다. 마슈하드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의 다툼이 커졌다. 포가 없어 마슈하드 공략은 멈추어 있었다. 파트알리 한은 아스타라바드로 돌아가 병력을 모으겠다며 허락을 청했다.

1726년 10월 11일 파트알리 한이 처형되었다. 그 경위를 다룬 기록은 셋이다. 궁정 사관에 따르면 대신들이 나디르 앞에서 파트알리 한을 고발했다. 나디르는 그를 죽이지 말고 칼라트에 가두자고 권했다. 나디르가 궁정에서 정무를 보던 오후, 샤의 측근들이 틈을 타 샤 쪽에서 사람을 보내 그를 죽였다. 사자들이 그의 머리를 어전으로 가져왔다.15

카자르 가문의 궁정사가 압둘라자크의 기록에서는 나디르가 파트알리 한을 모함할 틈을 엿보았다. 샤는 어리석은 귀족들의 말을 받아들여 파트알리 한에게 순교의 잔을 마시게 했다.16 핸웨이가 들은 이야기에서는 나디르가 부하들을 시켜 군대의 기강과 급료, 지나치게 비싼 피복 값을 문제 삼게 했다. 그는 가로챘다는 편지를 내밀었다. 샤가 파트알리 한의 목숨에 손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하자 나디르가 답했다. “폐하께서는 맹세하셨지만 저는 맹세하지 않았습니다.”17 파트알리 한의 처형은 카자르 가문의 오랜 원한으로 남았다.

처형 뒤 나디르는 코르치바시가 되었다. 그는 타흐마스프 쿨리 한, 곧 '타흐마스프의 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18 칭호를 받은 때는 기록마다 다르다. 1726년 마슈하드에 머물던 셰이크 하진의 회고록에서는 마슈하드 포위 중에 그가 코르치바시의 직과 이 칭호를 받는다. 코켈은 1729년 메흐만두스트의 승리 뒤에야 샤가 그에게 자기 이름을 주었다고 썼다.19

같은 때 바바 알리 베그의 아들 칼브 알리 베그가 어전 의전장(이시크 아가시)이 되었다. 샤베르디 베그 셰이흘루는 소총대장 겸 사브제바르 지사가 되었다. 사관의 원문은 두 자리가 '맡겨졌다'고만 적고, 누구 이름으로 냈는지는 밝히지 않는다.20 사관은 이로써 '전하'가 왕국의 일과 호라산의 나랏일을 맡았다고 쓴다. 핸웨이에 따르면 그는 곧 어느 장교를 내보내고 누구를 그 자리에 앉힐지 정했다.

1726년 12월 그는 마슈하드에 들어갔다. 말레크 마흐무드의 총사령관 피르 무함마드가 성안에서 호응했다. 피르 무함마드는 잠의 지사 자리와 술탄 칭호를 받았다. 말레크 마흐무드는 이맘 레자 성묘의 수도실로 물러났다가 1727년에 죽었다. 사관의 기록에서는 나디르가 그를 처형했다. 셰이크 하진의 회고록에서는 대신 하나가 샤도 모르게 그를 죽였다.21

마슈칸 성

마슈하드를 얻은 뒤에도 대신들은 나디르를 헐뜯고 하부샨의 쿠르드와 내통했다. 모흐센의 『조브다트』에 따르면 1727년 초 샤는 마잔다란과 아스타라바드의 지사들에게 '반역자 나디르'에 맞서 오라는 명령에 서명했다.22 궁정 사관의 기록에서는 말레크 마흐무드가 이 명령을 나디르에게 알렸다. 나디르는 하부샨을 에워싸고 쿠르드를 깬 뒤 타협했다. 1727년 3월 21일 그는 마슈하드에서 샤를 맞아 노루즈를 지냈다. 하부샨의 쿠르드는 그 뒤에도 거듭 등을 돌렸다.

사관에 따르면 그해 샤는 나디르 군대의 주요 장교 몇에게 그를 떠나라는 편지를 보냈다. 사브제바르 지사가 된 샤베르디는 샤 쪽으로 움직였다. 다레가즈에서는 반란 무리가 자히르 알다울라라 불리던 나디르의 동생 이브라힘 한을 에워쌌다. 샤베르디도 그 무리에 들었다.

가을에 그는 상간을 쳤다. 거짓으로 항복했다가 다시 맞선 상간의 주민은 10월 1일 모두 죽임을 당했다. 상간 근처의 싸움에서 그는 병력 대부분을 참호에 두고, 훈련된 기병 500만 이끌고 압달리 7천~8천을 거듭 쳤다.23 참호의 병사들은 싸우게 해 달라고 했으나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1727년 말 샤 타흐마스프가 나디르에게 답장을 보냈다. 궁정 사관이 옮긴 답장은 이렇다. “그대들은 물이 없으니 옛 마슈칸으로 오지 않고, 우리도 곡식과 비축이 없으니 사브제바르로 가지 않는다.”24

이어 조정의 대신들이 호라산 각지의 주민 전체에게 명령서를 보냈다. 나디르를 나라 일 전부에서 권한을 박탈당한 사람으로 여기라는 명령서였다. 성문이 닫혔다. 나디르는 성에 포를 겨누었다. 사관에 따르면 샤는 어지러운 싸움 속을 말을 몰고 나와 지난 일을 사과했다.25

모흐센의 『조브다트』에 따르면 그 뒤 샤는 구금과 다름없는 처지로 마슈하드에 보내졌다. 나디르의 칭호는 여전히 타흐마스프 쿨리 한이었다. 해임을 알린 명령서는 시행되지 않았다.26

1728년 샤 쪽의 무함마드 알리 한 이븐 아슬란이 아스타라바드와 마잔다란에 샤의 사람들을 앉혔다. 나디르는 그들을 눌렀다. 나디르에 맞서던 무리의 우두머리 졸파가르가 죽었다. 같은 해 이브라힘 한은 쿠르드에게 졌다.

헤라트

헤라트의 압달리는 알라야르 한 쪽과 그 경쟁자 쪽으로 갈라져 있었지만 마슈하드를 위협했다. 사관에 따르면 샤는 이스파한으로 곧장 가자고 거듭 요구했다. 나디르는 먼저 헤라트의 압달리를 누르자고 고집했다. 모흐센에 따르면 술타나바드에서 만나 함께 헤라트로 가기로 한 약속도 샤가 대신들의 권유로 거두었다.

1729년 5월 3일 그는 헤라트 원정에 나섰다. 그는 둘레를 포병으로 친 보병 방진을 썼다. 카피르 칼레와 쿠수야와 리바테 파리안과 샤키반에서 싸움이 이어졌다. 압달리의 알라야르 한이 사자를 보내 강화를 청하자 그는 족장들이 직접 오라고 했다.

압달리 족장들은 복종할 뿐 아니라 길자이 아프간을 치는 데 돕겠다며 투항했다. 샤와 대신들은 이 투항을 받는 데 반대했다. 나디르는 받아들였다. 그는 족장들에게 예복을 내리고 일부를 타흐마스프 휘하로 보냈다. 알라야르 한은 샤의 이름으로 헤라트 지사에 임명되었다.27 원정은 7월 1일에 끝났다.

이스파한

이스파한의 아슈라프는 1727년 오스만과 화약을 맺어 인정을 받았다. 칸다하르의 사촌 호세인과는 반목해 증원을 받지 못했다. 바그다드의 아흐마드 파샤는 그에게 작은 지원을 보냈다.

1729년 8월 아슈라프가 테헤란 쪽으로 올라왔다. 9월 나디르는 마슈하드를 떠났다.28 9월 29일 그는 메흐만두스트에서 아슈라프를 깨뜨렸다.29 하르 협곡의 매복도 깨뜨렸다. 아슈라프를 깬 뒤 많은 아프간 병사가 그의 군대에 들어왔다.

메흐만두스트의 병력과 손실은 기록마다 다르다. 프랑스 여행가 오테르의 기록에서 아프간 군대는 5만이다. 핸웨이가 들은 페르시아군은 2만 5천 가까이였다. 코켈에 따르면 페르시아 쪽은 4천 넘게, 아프간은 약 1만 2천을 잃었다. 셰이크 하진의 회고록에서 페르시아 쪽 부상자는 둘뿐이다.

테헤란에서 그는 샤에게 너무 위험한 자리에 나서지 말라고 건의했다. 예수회의 「역사적 보고」에 따르면 샤는 예비대 9천~1만과 함께 테헤란에 남았다. 같은 보고에 따르면 그는 군주에게서 '전권'을 받고 홀로 나아갔다.30 궁정 사관의 기록에서는 샤가 국사를 정리하려고 남았다. 「역사적 보고」에 따르면 그 무렵 군대의 주요 장교와 하급 장교 대부분은 그가 고른 사람들이었다. 11월 중순 그는 무르체호르트에서 다시 이겼다.

11월 16일 나디르가 먼저 이스파한에 들어갔다. 샤는 11월 29일에 들어왔다.31 핸웨이에 따르면 노비로 꾸미고 숨어 지내던 샤의 어머니가 그때 살아서 나타났다. 12월 나디르는 호라산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샤가 말렸고 그는 남았다.32

이스파한 주재관 코켈의 기록에 따르면 그 무렵 샤는 그를 해임하려 했다. 그를 대신할 사람은 없었다. 장교들은 군대가 다른 장군 밑에서는 싸우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샤는 군 급료를 위해 나라 곳곳에서 돈을 거둘 권한을 그에게 넘겼다. 코켈은 그 일을 두고 샤가 왕관을 내준 셈이라 했다. 샤는 그를 총사령관이자 호라산의 베글레르베그로 삼고 자기 숙모를 아내로 주었다.33

그의 군대는 이스파한에서 돈을 거두었다. 동인도회사 곰브룬 상관의 일지에 따르면 몇 사람은 매를 맞다 죽었다. 그는 동인도회사에 배상을 약속하고도 3천 토만을 요구했다. 동인도회사는 300토만과 말을 빼앗겼다. 곰브룬 일지에는 병사들이 약탈하고 주민을 노예로 판 일도 적혀 있다.

1730년 1월 초 그는 자르칸에서 아슈라프를 다시 깨뜨렸다. 아슈라프는 동쪽으로 달아나다 죽었다. 프랑스 영사 가르단은 그 무렵의 그를 약 마흔 살로 보았다. 가르단에 따르면 그는 용감히 싸운 자에게 넉넉히 보상했다. 버틸 수 있는데도 물러선 자는 죽였다. 같은 영사는 이스파한의 백성과 궁정과 왕 자신이 그가 더 높이 오르려 할까 두려워한다고 보고했다.34

보루제르드

샤는 이스파한의 옥좌로 돌아와 있었다. 서부는 여전히 오스만이 차지하고 있었다. 1730년 봄 보루제르드의 진영으로 하산 알리 한과 미르자 아볼카셈이 샤의 문서를 가져왔다. 하산 알리 한은 1726년 그를 아비바르드 부지사에 앉힌 그 감찰관이었다. 문서는 칸다하르에서 호라산 경계까지의 땅과 마잔다란과 야즈드와 케르만과 시스탄을 그에게 넘겼다.

사관에 따르면 그는 깃털 관식과 왕관을 쓰기를 거절했다. 술탄 칭호도 받지 않았다. 그는 호라산에서 찍는 주화를 이맘 레자의 이름으로 찍게 했다.35

같은 무렵 샤는 아직 고위직 하나도 임명하지 못했다. 예수회의 「역사적 보고」에 따르면 그 봉급을 군대 급료에 쓰는 편이 낫다는 구실로 그가 막았다. 같은 보고에 따르면 나머지 관리는 모두 그가 마음대로 갈고 다시 앉히는 하급자였다.36

동인도회사 일지에 따르면 그는 샤의 동의 없이 왕녀 라지예 베굼과 혼인했다. 맏아들 레자 쿨리는 샤의 누이 파테메 솔탄 베굼과 약혼했다.37

「역사적 보고」에 그려진 1730년 5월의 이스파한에서 샤는 멍에를 참지 못하고 있었다. 샤는 오스만과의 전쟁이 끝나면 주인으로 말하려 했다. 같은 보고에서 그는 왕을 두려워하고 적이 많음을 알아 되도록 군중에 머물기로 했다.38 같은 보고에 따르면 그는 왕만 쓰는 깃털 장식을 터번에 꽂고 다녔다. 사관에 따르면 그해에도 그는 호라산으로 물러가겠다고 말했다.

같은 해 샤의 대사로 콘스탄티노플에 간 레자 쿨리 한 샴루는 오스만과 조약에 서명했다. 오스만이 영토를 돌려주고 페르시아가 해마다 돈을 내는 조약이었다. 오스만 대재상 이브라힘 파샤는 사절을 보내 이 조약을 받으라고 권했다. 레자 쿨리 한 샴루는 이듬해 마르딘에서 억류되었다.

데즈풀에서는 아슈라프의 대오스만 사절이던 무함마드 한 발루치가 술탄의 서한을 망설이다 그에게 넘겼다. 그는 무함마드 한 발루치를 쿠길루 지사에 앉혔다. 그는 오스만 조정의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원정을 시작했다. 여름에 압달리가 다시 일어나 마슈하드에서 이브라힘 한을 에워쌌다. 그는 마슈하드로 돌아갔다. 마슈하드에서 레자 쿨리와 파테메 솔탄 베굼의 혼례가 열렸다.39

섭정

1730년 여름부터 나디르는 열네 달 동안 호라산에서 압달리를 쳤다. 그동안 샤는 직접 군대를 이끌었다. 모흐센에 따르면 대신과 귀족들이 권한 출정이었다. 1731년 1월 샤는 1만 8천을 이끌고 나섰다.40 타브리즈에서 그는 나디르가 앉힌 지사를 내보내고 자기 사람을 앉혔다. 예레반 포위에 실패한 그는 쿠리잔에서도 졌다.

1732년 1월 10일 샤는 오스만과 강화를 맺었다. 아라스강 북쪽과 그루지야는 오스만에 남았고 타브리즈는 돌아왔다. 예수회 수사 바쟁은 나디르의 동의 없이는 이 강화를 감히 맺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헤라트에서 파라로 가던 나디르가 이 소식을 받았다. 그는 원정을 멈추었다. 그는 술탄과 바그다드의 아흐마드 파샤에게 싸움을 다시 열겠다고 알렸다. 그는 대신들을 꾸짖었다.

술탄은 그 강화를 못마땅해했다. 강화를 밀어붙인 오스만의 대재상 토팔 오스만은 1732년 3월 물러났다.

각 주에 칙령이 내려갔다. 칙령의 제목에는 사관의 초안대로 쓴 글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다. 사관은 1729년 이스파한 탈환을 축하하는 글을 쓴 뒤 17년 동안 그를 섬겼다. 그는 서기국장으로서 나디르의 명령서와 칙령의 문안을 썼다. 칙령은 이렇게 말한다. “참으로 이 강화는 눈에는 물 위의 그림이요 신기루의 물결과 같다.”41 근본 목적인 이란 포로의 석방을 강화가 전혀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싸움에 나오지 않는 자는 신의 저주를 받아 마땅하고 이단의 무리에 든다는 조항도 있었다.

그해 나디르는 하산 알리 베그를 사자로 샤에게 보내 해명했다. 샤는 그의 군대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는 각 주의 지사 다수를 자기 사람으로 바꾸었다. 압달리 족장들에게 상을 내리고 그들을 불러 모았다. 사관에 따르면 테헤란에서 그는 5만 토만을 나누어 주었다. 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 대사 킨눌의 급보에 따르면 그해 봄 샤가 아흐마드 파샤에게 보낸 편지에는 타마스 쿨리 한을 다스릴 힘이 없다는 말이 들어 있었다. 타마스 쿨리 한은 승리한 군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킨눌은 이 말이 샤가 강화를 깨는 데 대는 정치적 핑계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7월 코켈은 샤가 개전에 전적으로 반대하지만 막을 힘이 없다고 보고했다.42

1732년 6월 24일 자 와크프 문서는 그를 '호라산 여러 지방의 지사, 이란 땅의 명령권자'라 부른다.43

1732년 8월 25일 그는 이스파한에 들어왔다. 코켈에 따르면 그는 6만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왔다. 열병식에서 병사들은 샤에게 명하실 일이 있으면 받들겠다고 외쳤다. 나디르는 샤에게 병사들더러 장군에게 복종하라고 말하게 했다.

모흐센의 『조브다트』에 따르면 하자르자리브 정원에서 사흘 밤낮 연회가 이어졌다. 샤가 술과 악사를 청했고 나디르는 예의상 따랐다. 이라크와 호라산의 장수들은 그 일을 다 알게 되었다. 이어 열린 회의에서는 샤가 나라를 맡기에 맞지 않다는 말이 거듭 나왔다. 그 뒤 이스파한 사람들이 불려 와 샤의 상태를 보았다. 샤는 폐위되었다.44

코켈의 글에서는 연회의 술에 약이 타져 있었다. 샤의 술버릇은 카르멜회 수사 레안드로의 기록에도 나온다.45

이스파한 주재관 코켈은 샤가 게으른 통치와 주정으로 왕관을 잃었다는 구실이 쓰였다고 보고했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폐위는 “피 한 방울 없이” 끝났다.46 9월 5일 샤는 호송을 받으며 마슈하드로 떠났다. 코켈은 그가 붙잡힌 지 사흘 뒤 6천의 호송을 받아 마잔다란으로 보내졌고, 그 호송대는 대부분 아프간과 수니파였다고 적는다. 예수회의 「역사적 보고」에 따르면 이 무렵 유럽인들은 샤가 죽었는지 퇴위를 강요당했는지 알지 못했다.

9월 7일 샤의 아들 아바스가 아바스 3세로 즉위했다.47 코켈의 기록에서 요람에 누운 왕자는 후궁에서 옥좌로 옮겨졌다. 머리맡에는 왕관이 놓였고 옆에는 칼과 방패가 붙었다.48 코켈이 '쿨리 칸'이라 부른 나디르가 먼저 코란에 손을 얹고 아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궁정 사관은 왕관과 샤의 칭호를 아기에게 두었다고만 썼다. 왕실의 북이 이레 동안 울렸다.

나디르는 타흐마스프 쿨리 한이라는 칭호를 버렸다. 그 대신 바킬 알다울라와 나예브 알살타나, 곧 섭정의 칭호를 썼다. 셰이크 하진에 따르면 폐위된 샤는 스스로 어찌할 수 없어 그대로 따랐다. 같은 회고록에 따르면 아기의 이름으로 기도를 올리고 주화를 찍었다. 나디르는 이어 나라 전역에 자기 지사들을 앉혔다.49

하마단

1733년 1월부터 그는 바그다드를 에워싸고 있었다. 4월 이스파한에는 소문이 돌았다. 곰브룬 상관의 일지에 따르면 그가 타흐마스프를 복위시키려 불렀다가 마음을 바꾸어 마슈하드에 묶어 두었다는 소문이었다. 7월 19일 그는 바그다드를 구하러 온 오스만의 토팔 오스만 파샤에게 크게 졌다.50 토팔 오스만은 1732년 강화를 밀어붙이다 대재상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이었다.

그는 만달리에서 장수들과 의논했다.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가 무장을 새로 갖추었다. 8월 4일 하마단에 다시 모인 병사들에게 그는 20만 토만을 나누어 주었다. 사관에 따르면 잃은 말이 10토만짜리면 20토만짜리 말을 주었다.51

10월 2일 그는 다시 나섰다. 11월 9일 아크 다르반드 일대의 싸움에서 토팔 오스만이 죽었다. 12월 그는 바그다드 총독 아흐마드 파샤와 조약을 맺었다. 술탄은 그 조약을 비준하지 않았다.

그 사이 남쪽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코켈에 따르면 그의 장군 가운데 하나인 무함마드 한 발루치가 샤 타흐마스프를 왕으로 선포했다. 발루치는 시라즈를 차지했고 3만 군대를 거느렸다.52 그는 1730년 나디르가 쿠길루 지사에 앉힌 사람이었다. 사파비 왕가를 따르는 무리와 아랍인과 발루치족이 그의 깃발 아래 모였다.

카이스 섬을 막는 데 나디르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배를 빌렸다. 1734년 발루치는 그 섬에서 사로잡혀 쇠사슬에 묶인 채 이스파한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나디르의 명으로 눈을 잃었다. 그는 사흘 뒤 죽었다.53

걸프 연안은 바킬 타흐마스프 한이라 불린 타흐마스프 한 잘라예르가 정리했다. 1725년 무렵 잘라예르 가구를 이끌고 나디르에게 온 사람이었다. 그는 셰이크 아흐마드 마다니를 처형했다. 1734년 3월 레자 쿨리와 사파비 왕녀 사이에서 손자 샤로흐가 태어났다.

1735년 3월 그는 오스만을 견제하려던 러시아와 간자 조약을 맺었다. 러시아군은 바쿠와 데르벤트에서 물러났다.54 6월 19일 그는 바가바르드에서 오스만의 쾨프륄뤼 압둘라 파샤를 깨뜨렸다. 압둘라 파샤는 그 싸움에서 죽었다. 핸웨이가 들은 바로는 나디르의 군대는 모두 5만 5천이었고, 오스만은 2만을 잃고 대포 32문을 내주었다. 오스만의 대재상 하키몰루 알리 파샤는 패전의 책임으로 물러났다.

아르메니아 총대주교 아브라함은 나디르가 거느린 용사를 1만 8천으로 셌다.55 아브라함은 이 무렵에도 그를 대칸, 용맹한 타흐마즈라 불렀다.

7월 9일 간자가 항복했다. 러시아 기술자들이 그 포위를 도왔다. 티플리스와 예레반이 뒤를 이었고 그는 카르스를 에워쌌다. 오스만과의 강화 교섭은 아흐마드 파샤와 알리 파샤를 거쳐 이어졌다. 곰브룬 일지에 따르면 그해 여름 그는 각지에 통치 규범을 세우겠다는 명령서를 보냈다.

무간

1735년 12월 아르메니아 총대주교 아브라함은 그의 소집령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달력으로 12월 3일 그는 에치미아진을 떠났다. 그는 연대기에 소집의 이유는 하느님만 아신다고 적었다. 이어 이렇게 썼다. “어떤 이는 그가 샤를 다시 옥좌에 앉혔다고, 어떤 이는 그가 스스로 거기 앉으려 한다고 추측하나, 그 까닭은 아무도 확실히 모른다.”56

1736년 1월 22일 나디르가 무간 평원의 진영에 이르렀다. 칸과 지사, 카디와 울라마와 명사의 대표단이 모여 있었다. 2월 16일 대표단 앞에서 세 조건이 낭독되었다. 그는 사양한 뒤 받아들였다. 대표단은 사흘에 걸쳐 서약 두루마리에 날인했다.57

러시아 주재관 칼루시킨의 보고에 따르면 폐위된 타흐마스프와 그 아들 아바스는 미르자라는 칭호만 지니게 되었다.58 3월 6일 오스만의 사절 겐치 알리 파샤가 떠났다. 3월 7일 맏아들 레자 쿨리가 호라산으로 부임했다. 대관식 날 서기국장 미르자 마흐디는 명령서를 쓰던 일을 미르자 모멘에게 넘기고 사관이 되었다. 그의 연대기는 나디르가 죽은 뒤에 완성되었다.

새 주화에는 아랍어 문구 '일어난 일 속에 선이 있다'가 새겨졌다. 시인 카밤 알딘이 지은 이 문구의 글자 값을 더하면 그가 즉위한 해인 히즈라력 1148이 된다.59 셰이크 하진에 따르면 재담꾼들은 이 문구의 첫 두 글자를 바꾸어 뜻을 뒤집었다.

1736년 3월 8일 대관식이 열렸다. 그날 그는 나디르 샤라는 칭호를 받았다. 아브라함은 대관식 전에 진영을 떠났다. 그가 사제 테르 토우마에게서 들은 바로는 미르자 자키가 투구 모양의 금관을 나디르의 머리에 씌웠다. 칸들은 무릎을 꿇고 팔을 든 채 몰라바시 미르자 아스카르의 기도를 들었다. 파티하에 이르자 칸들은 엎드렸다.60

주

  1. 1미르자 마흐디 한 아스타라바디, 『자항고샤예 나데리』, 1962년 앙바르 편 페르시아어 판 p.26. 1770년 존스의 프랑스어역은 이 문장을 다르게 옮겼다. 각주에 다른 기록을 밝히지 않은 사실은 이 연대기와 모흐센이 엮은 『조브다트 알타바리흐』, 그리고 두 책을 동인도회사 기록과 맞대어 본 록하트의 『Nadir Shah』(1938)에서 왔다.↩
  2. 2사관의 연대기(존스 프랑스어역 p.6). 재혼은 같은 연대기 뒤쪽에 나온다(록하트 p.21).↩
  3. 3원문의 날짜는 히즈라력 1100년 무하람 28일이다. 사관은 아프샤르 부족 키르클루 지파가 여름 목지 코브칸에서 겨울 목지 다레가즈로 옮겨 가던 길의 다스트기르드에서, 곧 '이 성에서' 그가 났다고 썼다. 록하트는 이것을 후원자를 추어올리려는 꾸밈으로 보고, 그가 천막에서 났으리라고 판단했다(p.20). 카슈미리는 히즈라력 1099년이나 1102년, 핸웨이는 1687년으로 적는다.↩
  4. 4바쟁(4권 p.280)과 카슈미리(p.6).↩
  5. 51743~44년 페르시아에 머문 영국인 핸웨이는 아버지가 모자와 양가죽 외투를 지어 살았다고 들었다. 1747년 이후 나디르의 옛 병사들에게 들은 예수회 수사 바쟁은 낙타몰이꾼이었다고 적는다. 영국 동인도회사 주재관 코켈은 아프샤르 씨족장이자 요새 수비대장으로 적었으나, 록하트는 근거 없는 이야기로 본다. 사관은 아버지의 업을 쓰지 않는다.↩
  6. 6바바 알리 베그가 1723년에 죽었다는 것은 록하트가 '그런 듯하다(It appears)'고 적은 추정이다(p.21). 록하트는 부족의 반대로 그가 수장 자리를 잇지 못한 듯하다고 보았다. 카슈미리는 그가 아비바르드의 창고 관리 직도 자기 이름으로 받았다고 적는다(나심 편 pp.6–7). 카슈미리의 『바야네 바케』는 1739년부터 나디르를 따른 인도 사람인 그가 나디르의 옛 전우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7. 7록하트는 타흐마스프가 샤를 칭한 정당성을 매우 의심스럽다고 보았다(p.9).↩
  8. 8크루신스키의 기록(뒤 세르소 영역 1728, 2권 p.155; 라틴어판의 1840년 영역 pp.156–157). 그는 폴란드 출신 예수회 수사로, 1725년의 정변 때 이스파한에 있었다.↩
  9. 9「Relation historique des révolutions de Perse sous Thamas Koulikan」, 『Lettres édifiantes』 1780년판 4권 pp.169–200, 인용은 p.175. 같은 권에 실린 바쟁의 서한과는 정보원이 다르다.↩
  10. 10사관의 연대기(존스 p.24)와 카슈미리 p.8.↩
  11. 11『바야네 바케』 1970년 나심 편 p.8.↩
  12. 12사관의 연대기 p.18(록하트 p.22). 록하트는 이 서술을 몹시 윤색되어 믿기 어렵다고 보았다. 자리드 경기 이야기도 사관의 연대기에만 있다.↩
  13. 13카슈미리 p.9, 바쟁(『Lettres édifiantes』 1780년판 4권 pp.280–281), 핸웨이 4권 pp.4–5. 세 사람은 서로를 인용하지 않으나 셋 다 1740년대 나디르 군영의 이야기에 기댄다.↩
  14. 14사관의 연대기(록하트 pp.24–25). 임명 문서의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
  15. 15사관의 연대기, 앙바르 판의 사파르 14일 기사. 1770년 존스의 프랑스어역(pp.38–39)은 샤의 명으로 사람이 갔고 사자들이 피 묻은 머리를 발 앞에 가져왔다고 옮겼다. 록하트는 사관의 판본이 전혀 설득력 있게 읽히지 않는다고 보았다(p.26).↩
  16. 16압둘라자크 돈볼리의 카자르 궁정사(1833년 브리지스 영역 pp.4–5). 1810~20년대에 쓴 적대 진영의 기록이다. 처형을 명한 것은 샤로, 나디르의 몫은 모함으로 적는다. 날짜는 히즈라력 1139년 사파르 14일이다.↩
  17. 17핸웨이 『The Revolutions of Persia』(1753) 4권 pp.16–18. 핸웨이는 이 일을 1727년 마잔다란의 일로 적어, 사관이 적은 때와 장소와 맞지 않는다.↩
  18. 18모흐센의 책 fol.212b(록하트 p.26). 예수회 수사 바쟁과 핸웨이도 이 칭호를 적는다.↩
  19. 19하진의 회고록(1830년 벨푸어 영역 pp.174–175)과 코켈의 「Account」(프레이저 pp.96–97). 하진은 사파비 왕가에 충성한 학자다. 인도의 카슈미리는 말레크 마흐무드가 무너진 뒤로 적는다.↩
  20. 20앙바르 판 원문의 수동형이다. 1770년 존스의 프랑스어역은 '전하', 곧 나디르가 이들을 앉혔다고 옮겼다(p.39). 록하트는 나디르가 '임명했다, 아니 임명되게 했다'고 풀었다(p.26).↩
  21. 21하진 p.174. 카슈미리는 타흐마스프 쪽이 그의 목숨을 거두었다고 적는다. 사관의 판본은 록하트 p.28을 따랐다.↩
  22. 22무함마드 모흐센은 이스파한의 재무관으로, 1741~42년 나디르의 명으로 그의 아들 레자 쿨리를 위해 『조브다트 알타바리흐』를 엮었다. 사관의 연대기와 따로 쓰였으나 같은 궁정에서 나온 책이다. 대영도서관 사본으로 전하며, 이 대목은 록하트 p.28을 따랐다.↩
  23. 23록하트 p.29. 압달리의 수는 부풀려졌을 수 있다.↩
  24. 24사관의 연대기, 앙바르 판 p.80. 원문은 샤가 답장에 썼다고 적는다. 1770년 존스의 프랑스어역은 첫 구를 반문으로 바꾸고 지명의 철자도 달리 적었다.↩
  25. 25사과 대목은 1770년 존스의 프랑스어역 p.59에 있다.↩
  26. 26이 대치를 적은 사관의 연대기와 모흐센의 책은 둘 다 나디르의 궁정에서 나왔다. 록하트는 이 일들에 대한 편향 없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p.28 주1).↩
  27. 27사관의 연대기(록하트 pp.32–34). 압달리는 1730년 다시 일어났다.↩
  28. 28모흐센은 출발 전에 샤가 이스파한을 되찾고 아프간을 몰아내면 호라산과 케르만과 마잔다란을 나디르의 영지로 주기로 약정했다고 적는다(록하트 p.36). 궁정 사관은 이 약정을 적지 않았다.↩
  29. 29사관과 모흐센의 책에는 이 싸움의 수가 없다. 핸웨이는 어떤 이는 훨씬 많게, 어떤 이는 훨씬 적게 말한다고 덧붙였다.↩
  30. 30「역사적 보고」 4권 pp.176·180–181.↩
  31. 31두 날짜는 영국 동인도회사 곰브룬 상관의 일지에 있다(록하트 p.39).↩
  32. 32사관의 연대기(록하트 p.39). 록하트는 이 말을 꾸민 것으로 보았다.↩
  33. 33코켈의 「Account」(프레이저 『The History of Nadir Shah』 1742, pp.99–100). 코켈은 1737년 2월 페르시아를 떠났다. 곰브룬 일지는 1730년 그가 샤의 동의 없이 왕녀와 혼인했다고 적어 이 판본과 다르다.↩
  34. 34가르단의 보고(록하트 pp.42–47). 그의 인물평은 예수회 「역사적 보고」 4권 p.175에 같은 문장으로 실려 있다.↩
  35. 35사관의 연대기(존스 p.96). 이 문서를 적은 다른 기록은 없다. 모흐센이 적은 1729년의 약정은 호라산과 케르만과 마잔다란 셋뿐이다. 존스의 여백 연도 1729는 1730년 봄의 잘못이다.↩
  36. 36「역사적 보고」 4권 pp.195–196. 가르단 영사의 보고도 같은 문장이다.↩
  37. 37곰브룬 일지 1730년 4월 30일/5월 10일 자(록하트 p.42). 코켈의 「Account」는 1729년 12월 샤가 그에게 자기 숙모를 아내로 주었다고 적는다.↩
  38. 38「역사적 보고」 4권 pp.196–197.↩
  39. 39발루치의 일은 사관의 연대기(록하트 p.48), 혼례는 이란 백과사전의 「나디르 샤」 항목(터커, 2006)을 따랐다.↩
  40. 40궁정 사관은 샤가 '나디르를 흉내 내어' 나섰다고 쓴다. 지사 교체는 동인도회사 호른의 서한과 사관의 연대기에 있다(록하트 p.55).↩
  41. 41사관의 연대기, 앙바르 판 p.175(제목)와 p.176(본문). 록하트 영역의 '지혜의 눈으로 보면'은 이 판에 없다. 불참자를 저주하는 조항은 p.178.↩
  42. 42킨눌의 1732년 6월 3/14일 자 급보와 코켈의 서한(록하트 p.61 주4).↩
  43. 43마슈하드의 종교 기진(와크프) 문서다. 록하트가 사본으로 본 문서의 로마자 전사를 따랐다(p.19 주7). 다른 전사본에는 이름이 '나디르 쿨리 한'으로 되어 있다. 기진의 몫은 그 자신의 묘와 이맘 레자 성묘의 대리석 물그릇, 바바 알리 베그의 묘에 돌아갔다. 원본은 마슈하드 레자 성묘 관리청의 문서로 전한다.↩
  44. 44모흐센의 책 fol.215b–216b(록하트 pp.61–62). 궁정 사관은 샤의 음주를 적지 않았다. 폐위 날을 모흐센은 8월 31일로, 코켈은 9월 2일로 적는다.↩
  45. 45레안드로의 1757년 기록(록하트 p.62 주).↩
  46. 46코켈이 1732년 9월 19/30일 곰브룬에 보낸 보고다. 곰브룬 일지 10월 3/14일 자에 실렸다(록하트 p.62). 같은 사람이 쓴 「Account」(프레이저 pp.103–109)에는 열병식과 하자르자리브 정원의 연금도 나온다.↩
  47. 47아기의 나이는 궁정 사관이 일곱 달, 록하트가 여덟 달로 적는다. 하진은 두 달, 바쟁은 넉 달에서 다섯 달, 예수회 보고는 다섯 달에서 여섯 달, 핸웨이는 여섯 달로 적는다. 9월 7일은 록하트의 환산이고, 궁정 사관의 날짜는 한 달 뒤로 읽힌다.↩
  48. 48코켈의 「Account」(프레이저 1742, pp.108–109). 코켈의 문장은 수동태라 누가 관과 칼을 놓았는지 쓰지 않는다. 록하트는 모흐센의 책에도 이 장면이 있다고 적는다. 궁정 사관과 하진의 기록에는 없다. 핸웨이의 같은 장면은 코켈의 글을 따랐다.↩
  49. 49셰이크 하진 회고록(1830년 벨푸어 영역 pp.221–222). 하진은 사파비 왕가에 충성한 학자다.↩
  50. 50죽은 페르시아인을 오스만 진영에 있던 프랑스인 의사 니코뎀은 약 4만으로, 궁정 사관은 2천으로 적는다(니코뎀의 1733년 8월 8일 자 서한, 폰 하머 『오스만 제국사』 7권 부록 p.607; 록하트 p.70). 폰 하머는 사관의 수를 5천 6백으로 옮긴다. 니코뎀은 오스만 쪽 사망자를 1만으로 적고, 페르시아 쪽이 버린 대포 18문의 구경까지 적었다. 코켈은 페르시아군 12만 가운데 6만 넘게 잃었다고 보고했다.↩
  51. 51사관의 연대기 pp.128–129(록하트 p.72). 궁정이 적은 수다.↩
  52. 52코켈의 「Account」(프레이저 p.112). 곰브룬 일지도 그가 타흐마스프를 내걸고 일어났다고 적는다(록하트 p.72).↩
  53. 53코켈은 그가 감옥에서 목을 맸다고 적는다. 록하트는 눈을 잃은 지 사흘 만에 죽었다고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본다(p.79).↩
  54. 54러시아 쪽 보고를 요약한 솔로비요프 『러시아사』 20권과 록하트 p.86.↩
  55. 55아브라함의 연대기(브로세 프랑스어역 2권 pp.271–272). 전투일은 아브라함과 러시아 장군 예롭킨, 나디르의 서한이 19일, 궁정 사관이 18일이다.↩
  56. 56크레타의 아브라함, 『나의 역사와 페르시아 샤 나디르의 역사』(브로세 프랑스어역 2권, 1876, p.280). 그는 1734년 11월 총대주교가 되었고 1737년 4월에 죽었다. 무간 회의를 직접 보았다.↩
  57. 57아브라함의 연대기 pp.299–302. 날짜는 아브라함의 율리우스력을 그레고리력으로 바꾼 것이다. 대표단의 수를 모흐센은 2만, 궁정 사관은 10만, 바쟁은 1만 5천으로 적는다.↩
  58. 58칼루시킨의 보고를 요약한 솔로비요프 『러시아사』 20권. 그의 날짜 2월 5일은 율리우스력으로 보인다.↩
  59. 59주화 실물과 아브라함의 연대기 p.330(록하트 p.103).↩
  60. 60아브라함의 연대기 p.311. 아브라함의 날짜로는 2월 26일이다. 대관일 3월 8일은 궁정 사관의 기록과 같다.↩
5장 · 나폴레옹(1769 – 1804 황제)

국왕의 장학생, 공화국의 장군

원로원 의결

원로원 의결 제2조는 이렇게 정했다. “현재 공화국의 제1통령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인의 황제다.”1 혁명력 12년 플로레알 28일, 곧 1804년 5월 18일의 의결이었다. 같은 의결 제1조는 공화국의 정부를 황제에게 맡겼다.

같은 의결이 정한 황제의 선서는 공화국 영토의 온전함을 지키겠다는 말로 시작했다. 원로원의 표결에서 반대는 셋, 기권은 둘이었다. 제정의 발의는 원로원에서 3월 27일에, 호민원에서 4월 30일에 나왔다. 호민원의 발의자는 퀴레였다.

같은 날 생클루에서 그는 제2통령 캉바세레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의 칭호는 바뀌지만 당신의 직무와 나의 신뢰는 그대로입니다.”2 제3통령 르브룅에게도 같은 편지가 갔다. 르브룅은 제국의 대재무관이 되었다.

장학생 명단

1778년 12월 31일 전쟁부의 국왕 사관학교 입학 예정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올랐다. 코르시카 총독 마르뵈프가 추천한 이름이었다. 마르뵈프의 조카인 오툉 주교는 성직록을 나누는 자리에 있었다. 명단은 그의 이름 옆에 이렇게 적었다. “세 아이, 재산 없음.”3 같은 명단의 다른 아이 옆에는 '한 아이, 연 수입 500프랑' 같은 말이 적혔다.

그는 1769년 8월 15일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4 제노바가 코르시카에 대한 권리를 프랑스 국왕에게 넘긴 이듬해였다. 아버지 샤를은 파올리 편이었다가 프랑스의 체제에 들어갔다.

샤를은 코르시카 귀족의 대표로 베르사유에 갔다. 1771년 9월 그의 집안은 귀족으로 인정받았다. 1779년 샤를은 4대에 걸친 부계 귀족 증명을 냈다. 같은 규정 때문에 콩데 공의 추천을 받은 세나르몽은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

샤를은 맏아들 조제프를 성직자로, 나폴레옹을 군인으로 진로를 나누었다. 나폴레옹은 1779년 1월부터 4월까지 오툉의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는 5월 15일 브리엔 왕립 군사학교에 국왕 장학생으로 들어갔다. 1784년 10월에는 파리 육군사관학교의 사관생도가 되었다. 1785년 2월 아버지가 몽펠리에에서 죽었다.

1785년의 포병 장교 시험에는 136명이 응시해 58명이 장교가 되었다. 그는 42위였다.5 9월 1일 그는 포병 소위가 되었다.

그는 한두 해의 생도 과정을 건너뛰었다. 같은 기수의 피코 드 페카뒤크는 39위로 학교의 수석이었고, 펠리포는 41위였다. 두 사람은 혁명 뒤 망명했다. 피코는 오스트리아군의 장군이 되었다.

1785년부터 1792년까지 같은 기수 58명 가운데 41명이 사직하거나 직무를 버리거나 자리를 떠났다(둘은 뒤에 돌아왔다).6 그 대장에 장군 계급까지 적힌 사람은 로리스통과 도마르탱과 그, 셋이었다.

1785년 10월 28일 그는 발랑스에 주둔한 라페르 포병연대로 갔다. 1786년부터 1791년 사이 그는 여러 번 코르시카에 오래 머물렀다. 1789년 8월 23일 그는 국민과 국왕과 법에 선서했다. 1792년 4월 1일 그는 아작시오 의용대대의 부중령으로 뽑혔다. 그해 7월 탈영 혐의가 정리되자 그는 대위로 복직했다. 8월 10일 그는 튀일리 궁이 함락되는 것을 보았다.

1790년 7월 그는 섬으로 돌아온 파올리를 환영했다. 파올리는 섬의 자율을 내세웠다. 그의 형제들과 국민공회 의원 살리체티는 파리의 국민공회 쪽에 섰다. 1793년 2월 파올리의 조카가 이끈 마달레나 원정이 철수 명령으로 끝났다. 4월 2일 국민공회는 파올리를 소환했다. 그 고발은 동생 뤼시앵에게서 시작되었다.

5월 5일 그는 붙잡혔다가 빠져나왔다. 5월 23일 아작시오의 집이 약탈당했다. 6월 11일 가족 모두가 코르시카를 빠져나왔다. 그들은 툴롱에 내려 마르세유로 갔다. 7월 29일 그는 팸플릿 《보케르의 저녁 식사》를 썼다. 연방주의로 돌아선 마르세유에 헌법을 받아들이고 국민공회 의원들을 풀어 주라고 권하는 글이었다.7

툴롱의 공석

1793년 9월 4일 파견의원 살리체티는 그의 형 조제프를 전쟁 감독관에 앉혔다. 살리체티는 코르시카 출신의 자코뱅이었다. 그때 그는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가던 스물네 살의 포병 대위였다. 가족은 마르세유에서 피난민으로 지내고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툴롱을 공화국 군대가 에워싸고 있었다. 포위군의 포병 지휘관 도마르탱은 다쳐 자리를 비웠다.

살리체티는 그 일을 이렇게 썼다. “도마르탱이 다쳐 우리에게는 포병 지휘관이 없었다. 우연이 우리를 훌륭히 도왔다.”8 두 파견의원은 이탈리아 방면군으로 가던 유능한 대위를 붙잡아 도마르탱의 자리를 맡겼다. 동료 파견의원 가스파랭의 편지에도 도마르탱의 부상으로 그를 붙잡아 두었다는 말이 있다. 9월 16일 그는 포병 지휘를 대신 맡았다.

그는 사령관 카르토를 낮게 보았다. 그는 포대를 쌓았다. 그는 함대를 항구에서 몰아낼 결정적 지점을 고집했다.

포구를 내려다보는 고지들을 차지하자는 건의는 다른 장교 여럿도 냈다.9 10월 19일 그는 대대장이 되었다. 사령관 카르토와 도페는 차례로 바뀌었다. 11월 16일 새 사령관 뒤고미에와 포병 장군 뒤테유가 도착했다.

11월 30일의 반격전에서 그는 공을 세웠다. 12월 18일 영국군이 툴롱에서 물러났다. 뒤테유는 전쟁장관 부쇼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공을 그릴 말이 모자라다고 했다.

12월 22일 파견의원들은 반란 도시의 항복에 이바지했다며 그를 준장에 임명했다. 1794년 2월 6일 임시 행정평의회가 이 임명을 추인했다.10 쥐노가 그의 부관이 되었다. 그때 툴롱에 파견의원으로 와 있던 바라스와도 그는 이 무렵 알게 되었다. 바라스의 회고록은 툴롱에서 그가 세운 공을 낮추어 적는다.

튀일리

1794년 그는 이탈리아 방면군의 포병을 지휘하는 준장이었다.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 형제가 처형되었다. 살리체티는 그를 로베스피에르와 리코르의 사람이라 불렀다. 8월 6일 알비트와 살리체티와 라포르트는 바르슬로네트에서 그를 정직시키고 체포하라고 명했다.

제노바 여행을 비롯한 몹시 수상쩍은 행동이 그 이유였다.11 그는 니스에서 체포되었다. 갇혀 있는 동안 그는 부관 쥐노에게 편지를 보냈다. 8월 20일 알비트와 살리체티는 의심을 뒷받침할 것을 찾지 못했고 그의 군사 지식과 현지 지식이 공화국에 쓸모 있다며 그를 임시로 풀어 주었다.

1795년 6월 13일 그는 서부군 보병 여단장으로 발령받았다. 방데의 내전을 맡은 군대였다. 방데로는 오슈가 갔다. 그는 휴가를 얻어 부임을 피했다. 8월 17일 그는 친구 수시에게 편지를 썼다. “방데 군대에서 전열 장군으로 일하라고 나를 올렸다. 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12 많은 군인이 자기보다 여단을 잘 이끌겠지만 포병을 더 잘 지휘할 사람은 드물다는 말이 이어졌다.

8월 20일 그는 공안위원회 지형국에서 일한다고 형에게 알렸다. 튀르키예에 포병 고문으로 갈 길도 저울질했다. 지형국에서 그는 이탈리아 방면의 작전 각서를 썼다. 9월 15일 공안위원회는 그를 현역 장성 명단에서 지웠다.13 9월 27일 편지에서 그는 파리에 끓어오르는 기운과 몹시 불붙기 쉬운 싹이 있다고 했다.

명단에서 지워진 스물여섯 살의 준장은 파리에 있었다. 국민공회는 '3분의 2 법령'에 반발한 왕당파 구(區)들과 맞섰다. 지휘관 므누는 구들과 협상하다 반역을 의심받아 해임되었다. 10월 5일, 혁명력 4년 방데미에르 13일에 튀일리를 지키는 싸움이 벌어졌다. 그 자신의 편지에 따르면 국민공회는 바라스를 무력의 지휘관으로, 위원회는 그를 부지휘관으로 임명했다. 바라스의 회고록에서는 바라스가 위원회에 그를 천거해 쓰게 했고, 그를 자기 부관의 하나로 두었다.14

이튿날 새벽 2시 그는 형 조제프에게 편지를 썼다. “드디어 다 끝났다… 늘 그렇듯 나는 전혀 다치지 않았다.”15 그는 반란 쪽을 많이 죽였고 자기 쪽은 30명이 죽고 60명이 다쳤다고 했다.

그 자신의 당대 보고는 사블롱 진영의 포병을 튀일리로 옮기라는 명령을 바라스에게 돌린다.16 그가 대포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세인트헬레나에서 그가 구술한 회상에서 나온다. 바라스의 회고록에서 그는 오전 동안 걸어서 따라다녔을 뿐이다.

10월 10일 국민공회에서 그의 이름이 처음 불렸고 신문에 났다.17 10월 16일 그는 소장이 되었다. 10월 26일 그는 내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바라스는 총재가 되면서 군 지휘를 내려놓았다.

그는 수도의 경비와 구들의 무장해제를 맡았다. 3년 헌법 제288조에 따라 정부가 언제든 거둘 수 있는 직위였다. 10월 중순 그는 조제핀을 처음 만났다.

로디의 편지

1796년 3월 2일 총재정부는 그를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에 임명했다. 3년 헌법 제146조는 총사령관의 임명을 총재정부에 맡겼다. 3월 9일 그는 조제핀과 혼인했다. 증인은 바라스와 르마루아와 칼믈레와 탈리앵이었다.18

혼인증서에서 조제핀은 네 살을 줄였고 그는 열여덟 달을 늘렸다. 3월 11일 그는 이탈리아로 떠났다. 전임 사령관은 셰레르였다. 그의 첫 명령서들에는 마세나와 오주로와 라아르프와 세뤼리에의 사단, 그리고 참모장 베르티에가 나온다.

세인트헬레나에서 그는 3월 27일 니스에서 병사들에게 너희는 헐벗고 굶주렸다고 포고했다고 기억했다. 1858–69년 서한집은 그 포고의 출처를 이 구술로 밝힌다.

방면군의 급료는 밀려 있었다. 정부 감독관 살리체티와 가랑이 징발과 재정을 함께 쥐었다. 4월 22일 그는 끔찍한 약탈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몬테노테에서 로디까지 이긴 그의 군대는 5월 롬바르디아를 차지했다. 5월 7일 총재정부는 군사 담당 총재 카르노의 서명으로 편지를 보냈다. 이탈리아 방면군을 둘로 나누라는 명령이었다.

밀라노 쪽의 지휘는 알프스군의 켈레르만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협상은 총재정부의 명령이나 정부 감독관이 전하는 조건을 따르게 했다.19 정부 감독관이 병력 이동을 요구할 권리도 그대로 둔다고 했다. 적장이 상대할 직접 대리인은 프랑스 장군들뿐이라는 말도 있었다.

5월 14일 로디에서 그는 총재정부에 답장을 썼다. “나는 혼자일 때만 조국에 긴요한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나를 야심과 오만으로 고발하기는 아주 쉬울 것이나, 나는 당신들에게 내 모든 감정을 말할 의무가 있습니다.”20

5월 21일 총재정부가 답했다. 르투르뇌르와 카르노와 뢰벨이 서명했다. 총재정부는 숙고 끝에 그가 작전 전체를 계속 이끄는 쪽으로 결정했다. 켈레르만은 샹베리에 남는다고 했다.21 다음 날 총재정부는 부관참모 모니에와 프롱탱을 진급시켜 달라는 그의 요청에 결정을 미루었다. 5월 31일에는 휴전과 분담금 문서에 총사령관과 정부 감독관이 함께 서명하라고 했다.

2011년에 나온 연구서 『이탈리아 방면군』에 따르면 그는 밀라노에 2천만 프랑의 전쟁 분담금을 매겼다. 6월 23일 볼로냐 휴전에서 교황령은 현금과 귀금속 1,550만, 현물 550만을 내기로 했다.22 같은 책에 따르면 1796년 10월 1일 재정 관리자 알레르가 처음 기록에 나타났다.

그 뒤 정부 감독관들은 재정에서 밀려났다.23 그는 총재정부와 국고의 승인 없이 납품업자와 직접 거래했다. 10월 28일 총재정부는 리보르노 상인들에게 5~6백만을 요구하는 일을 정부 감독관과 협의한 뒤에 하라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12월 30일 총재정부는 빈과의 협상을 클라르크 장군에게 따로 맡겼다.

밀라노 포고

1797년 4월 18일 그는 레오벤에서 오스트리아와 예비 강화에 서명했다. 5월 4일 총재정부는 그 예비 강화를 비준해 보내며 협상의 지혜에 만족한다고 했다. 쉬고 싶다는 그의 뜻에는 군대에 그가 아직 필요하다고 답했다.24

그해 2월과 3월 파리에서는 『보나파르트와 덕 있는 사람들의 신문』이 나왔다. 파리에서는 1797년 선거로 우익이 다수가 된 의회와 총재 셋이 맞섰다. 7월 14일 밀라노에서 그는 전사한 동료들의 이름 앞에서 군에 포고를 내렸다.

포고는 '산들이 우리를 프랑스와 갈라놓는다'고 했다. 필요하면 병사들이 독수리의 빠르기로 그 산을 넘으리라는 말이 이어졌다. 헌법과 자유와 정부와 공화파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25 포고는 공화국과 3년 헌법의 적들에게 가차 없는 전쟁을 맹세하자는 말로 끝났다.

7월 17일 그는 우익 신문의 인쇄기를 부수고 클리시 클럽을 닫자고 총재정부에 건의했다. 헌법을 지지하는 좋은 신문 대여섯을 두자는 건의도 있었다. 그해 여름 그는 자기 신문을 만들었다. 7월 20일 창간된 《이탈리아 방면군 통신》은 병사들에게 공짜로 나누어졌고 밀라노와 파리에서 팔렸다.26 7월 23일 오백인회는 군의 임명을 모두 멈추자는 주르당의 안을 받아들였다.

8월 8일 총재정부는 오주로를 파리를 맡는 제17군관구 사령관에 임명했다.27 총재 가운데 바르텔레미와 카르노는 이 임명에 반대했다. 8월 16일 그는 이 임명을 군에 알렸다. 같은 날 그는 브륀을 사단장으로 진급시켰다. 연구에 따르면 그는 왕당파 첩자 당트레그의 문서를 32쪽에서 16쪽으로 다시 베끼게 해 측근의 이름을 지운 뒤 파리로 보냈다.28

9월 4일, 혁명력 5년 프뤽티도르 18일에 오주로의 부대가 의회의 우익 의원들을 몰아냈다.29 그날 총재정부는 피슈그뤼가 군을 지휘하던 시절 콩데 공과 손잡고 파리로 진군하자는 제안을 받았다는 편지를 벽보로 붙였다. 이튿날의 법은 오백인회 의장이던 피슈그뤼를 유형자 명단에 올렸다. 9월 9일 그는 레뇨가 밀라노에서 내는 신문이 파리에서 큰 효과를 냈다고 했다.

그 여름 먼저 병력을 파리 쪽으로 옮긴 장군은 오슈였다.30 오슈는 9월 19일 병으로 죽었다. 뒷날 뤼시앵은 오주로가 프뤽티도르의 공을 불신과 망각으로 보답받았다고 썼다.

9월 25일 그는 총재정부에 사임을 청했다. 10월 3일 총재정부는 임시 회의를 열어 그를 달랬다. 그 답장에 따르면 그가 걱정한 까닭은 한 젊은 장교의 말과 오주로의 편지와 전쟁장관의 편지였다. 총재정부는 그를 피슈그뤼와 같이 대한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31

9월 29일 총재정부는 강화 조건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베네치아와 아디제강까지의 본토를 황제에게 주면 패자로서 조약을 맺는 셈이라는 내용이었다. 10월 17일 그가 프랑스 쪽 전권으로 혼자 서명한 캄포포르미오 조약 제6조는 베네치아를 황제에게 넘겼다. 10월 26일 총재정부는 이 조약을 승인하고 서명했다. 같은 날 총재정부는 그를 영국 방면군 사령관으로 옮기고 라슈타트에서 비준서를 교환하는 일을 맡겼다. 11월 3일 원로원이 조약을 비준했다.32

그는 외무장관 탈레랑에게 조약을 깎아내리는 비판이 쏟아질 것을 예상한다고 했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프랑스의 라인군 15만과 이탈리아군 5만을, 자기 앞의 황제군 15만과 예비 4만과 울름 너머의 많아야 4만에 견주었다.

12월 10일 그는 총재정부의 공식 접견에서 오스트리아 황제가 비준한 조약을 바쳤다. 의장 바라스가 그에게 찬사를 했다. 1798년 2월 로마에 들어간 베르티에는 카피톨리움에서 쓴 편지에서 그의 승리가 프랑스군에게 로마로 갈 수단을 주었다고 했다.

알렉산드리아

1798년 3월 5일 총재정부는 원정 준비를 맡을 해안 위원회를 두었다. 위원회는 그의 명령을 직접 받게 되어 있었다. 4월 12일 총재정부는 그를 동방군 사령관에 임명하고 원정 중에 진급을 줄 수 있게 했다.33 5월 19일 그는 150척의 선단을 이끌고 툴롱에서 출항했다. 7월 1일 그는 알렉산드리아에 내렸다. 7월 21일 피라미드 전투가 있었다.

8월 1일 원정군은 아부키르만에서 함대를 잃었다. 그는 8월 14일에 그 소식을 알았다. 10월 카이로의 봉기는 혹독하게 진압되었다.

12월 그는 카이로에 디반을 다시 세웠다. 이집트 안에서 그는 임명과 징세와 협상을 모두 자기 손으로 했다. 그가 이집트에 있는 동안 총재정부는 그에게 여섯 번 편지를 보냈다. 그 가운데 그에게 닿은 것은 세 통이었다.34

1799년 3월 7일 야파가 함락되었다. 3월 9일 그는 베르티에에게 포로들을 해변으로 데려가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서에는 하나도 빠져나가지 않도록 조치하라는 말이 있다.

같은 날 레니에 장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4천 명의 수비대 가운데 2천이 시내에서 죽고 2천 가까이가 어제와 오늘 사이에 총살되었다고 했다.35 그 직후 원정군에 페스트가 돌았다. 3월 19일부터 5월 17일까지 그는 아크레를 에워쌌다가 물러났다. 아크레를 지키는 쪽에는 펠리포가 영국의 시드니 스미스와 함께 있었다. 3월 20일 아크레 앞 진영에서 그는 마을 대표들을 불러 복종을 맹세하게 하라고 명령했다.

7월 25일 그는 아부키르에 상륙한 오스만군을 깨뜨렸다. 8월 22일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는 클레베르에게 지휘권을 넘기는 편지를 썼다. 그는 6월 10일자까지의 영국과 프랑크푸르트 신문을 함께 넘겼다. 신문을 보면 이탈리아를 잃은 것을 알 것이라고 했다. 만토바와 토리노와 토르토나가 에워싸였다는 말도 있었다. 그는 함께 갈 사람으로 베르티에와 란과 뮈라와 앙드레오시와 마르몽, 학자 몽주와 베르톨레를 꼽았다.

편지는 이렇게 이어진다. “내가 맡기는 군대는 모두 나의 자식들로 이루어져 있다.”36 그는 5월까지 프랑스의 지원도 소식도 없고 그해 페스트로 1,500명 넘게 죽으면, 이집트 철수가 주된 조건이 되더라도 클레베르가 오스만과 강화를 맺어도 된다고 했다. 8월 23일 그는 무이롱호를 타고 이집트를 떠났다. 그의 군대는 이집트에 남았다.

10월 9일 그는 프레쥐스 근처 생라파엘만에 내렸다. 툴롱의 해군 사령관 방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집트 원정군이 여섯 달 넘게 유럽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37 이튿날 엑스에서 총재정부에 보낸 편지에서는 여러 차례 외교 회담 끝에 6월 6일자까지의 영국 신문을 얻었다고 했다. 클레베르에게는 6월 10일자까지라고 했었다.38 10월 16일 그는 파리에 닿았다.

생클루

그가 없는 동안 1799년 6월 18일 프레리알 정변에서 의회가 총재들을 갈아 치웠다. 다섯 총재 가운데 바라스와 시에예스만 자리에 남았다. 뤼시앵에 따르면 그 무렵 오백인회는 총재 트레야르의 선출을 문제 삼기로 했다. 시에예스는 그해 5월 총재가 된 사람이었다.

뤼시앵의 회고에 따르면 시에예스는 헌법을 바꾸는 데 쓸 칼을 찾았다. 총재정부가 파리 사령관에 앉혔다가 이탈리아 방면군을 맡긴 주베르는 8월 15일 노비에서 전사했다. 뤼시앵의 회고는 이 인사를 시에예스에게 돌린다. 그 싸움에서 모로는 타던 말 세 필을 잃었다. 같은 회고에 따르면 주르당은 시에예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오백인회에 정부를 모으자는 쪽에 섰다.39

9월 14일 총재정부는 전쟁장관 베르나도트의 사임을 받아들였다. 베르나도트는 자기가 내지 않은 사임을 받아들였다고 답했다. 9월 브륀은 베르겐에서, 마세나는 취리히에서 이겼다. 두 장군은 전선에 있었다.

파리에 닿은 뒤 그는 10월 22일 모로를 만났다. 《모니퇴르》는 두 사람이 총재 고이에의 집에서 처음 인사를 나누었다고 실었다. 23일에는 시에예스와 뒤코를 만났고, 같은 날 뤼시앵이 오백인회 의장에 뽑혔다. 28일에는 베르나도트와 이야기했고, 30일에는 바라스의 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11월 1일 그는 시에예스와 다시 의논했다.40 11월 6일의 연회에는 총재 다섯이 모두 나왔고 오주로와 주르당은 오지 않았다. 3년 헌법 제134조는 총재를 마흔 살 이상으로 정했다. 그는 서른 살이었다.

11월 9일, 혁명력 8년 브뤼메르 18일에 원로원은 입법부를 생클루로 옮기는 의결을 했다. 3년 헌법 제102조는 이 이전 의결을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정해 두었다. 의결은 '보나파르트 장군이 이 의결의 집행을 맡는다'고 했다.

파리를 맡는 제17군관구의 병력과 입법부 경비대, 국민방위대, 수도권의 정규군이 그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41 그날 원로원에 들어선 그를 베르티에와 르페브르와 모로와 맥도날이 수행했다. 그날 튀일리에서 오주로는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하려면서 왜 자기를 부르지 않았느냐고 했다.

11월 10일, 브뤼메르 19일 생클루에서 그는 원로원 앞에 섰다. 《모니퇴르》의 보도에 따르면 그는 지휘를 맡으면서 원로원만을 믿었다고 했다. 누가 자기를 법 밖에 두자고 하면 용감한 전우들을 부르겠다고도 했다.42 원로원에서 그는 총재 넷이 사임했고 다섯째는 원로원이 맡긴 권한으로 감시 아래 두었다고 보고했다. 뤼시앵에 따르면 총재들이 있던 뤽상부르는 모로가 지키고 있었다.

같은 날 원로원의 회의록에서 브뤼메르를 지지한 코르뉘데는 프뤽티도르 18일이 국민의 대표를 잘라 냈다고 했다. 반대한 달퐁스도 프뤽티도르 18일이 헌법을 떨어뜨린 구렁을 팠다고 했다. 달퐁스와 기요마르는 3년 헌법에 충성을 맹세하자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43

뤼시앵의 회고에 따르면 11월 10일 오랑제리의 오백인회에서 베르트랑은 원로원이 사령관을 지명한 것이 없는 권리를 쓴 것이라고 항의했다. 그는 오백인회가 모인 오랑제리로 들어갔다. 《모니퇴르》에 따르면 의원 데스트렘이 그의 어깨를 치며 외쳤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승리를 거두었군!”44 그를 법 밖에 두라는 외침이 나왔다. 주르당과 오주로를 경비대장으로 세우자는 외침도 있었다.

《모니퇴르》는 그가 르페브르 장군 덕에 살았다고 적는다. 같은 호에 실린 결의의 요약에서는 두 척탄병이 몸으로 그를 가렸다. 이틀 뒤의 호에서는 척탄병들이 그를 구한다.45 같은 신문에 따르면 칼을 대신 맞은 척탄병 토메는 20일과 21일 그와 함께 식사했다. 조제핀은 그에게 2천 에퀴짜리 다이아몬드를 끼워 주었다.

뤼시앵의 회고에 따르면 의장인 그는 말 위에 올라 경비대에 말했다. 남은 의원들은 이제 인민의 대표가 아니라 '단도의 대표들'이라는 말이었다.46 경비대가 오랑제리를 비웠다. 뤼시앵도 장군과 함께 들어간 척탄병들의 첫 진입은 법에 맞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그날 밤 남은 의원들은 총재정부가 더는 없다고 의결했다. 그들은 시에예스와 뒤코와 그를 임시 통령으로 세웠다. 밤 11시 그는 벽보로 포고를 냈다. 그는 “스무 명의 암살자가 내게 달려들었다”라고 포고했다.47 같은 포고에서 그는 한 당파의 사람이 되기를 거부했다고 했다. 뤼시앵에 따르면 반대 의원들을 미리 가두자던 시에예스의 안은 실행되지 않았다.

제39조

12월 15일 공포된 8년 헌법 제39조는 '헌법은 보나파르트 시민을 제1통령으로 지명한다'고 했다. 제42조에서 제2통령과 제3통령은 자문의 목소리만 가졌고, 결정은 그의 결정으로 족했다. 제41조는 국무원 위원과 장관과 대사를 마음대로 임명하고 해임할 권한을 그에게 주었다. 제2통령과 제3통령은 캉바세레스와 르브룅이었다. 브뤼메르를 발의한 시에예스의 이름은 그 명단에 없었다. 통령의 임기는 10년이었고, 이번에 한해 제3통령만 5년이었다.

헌법은 투표 집계가 끝나기 전인 12월 25일에 시행되었다. 1800년 2월 7일 동생인 내무장관 뤼시앵은 찬성 3,011,007표, 반대 1,562표를 발표했다. 다시 센 연구는 실제 찬성을 그 절반쯤인 150만으로 본다.48

6월 14일 그는 마렝고에서 이겼다. 그 싸움에서 드제가 전사했다. 같은 날 카이로에서 클레베르가 암살되었다. 12월 3일 모로가 호엔린덴에서 이겼다.

12월 24일 생니케즈 거리에서 그를 노린 폭탄이 터졌다. 1801년 1월 1일 그는 푸셰에게 자코뱅 130명의 명단을 만들게 했다. 1월 5일 원로원 의결로 그 가운데 약 100명이 유형을 갔다. 폭탄을 터뜨린 자들은 왕당파로 밝혀졌다.

1801년 2월 뤼네빌 강화가, 7월 정교협약이 맺어졌다. 1802년 3월과 4월 원로원 의결로 호민원과 입법원이 정리되었다. 3월에는 영국과 아미앵 강화를 맺었다. 5월 19일 레지옹 도뇌르가 만들어졌다. 호민원의 표결은 56 대 38이었다.

1802년 8월 2일 그는 종신 통령이 되었다. 국민투표의 공식 결과는 찬성 3,653,600표, 반대 8,272표였다.49 호민원에서 반대표는 카르노의 한 표였고, 입법원에서는 세 표였다. 같은 달의 10년 원로원 의결 제42조는 그가 죽은 뒤 자기를 이을 시민을 제청하게 했다. 원로원은 입법원과 호민원을 해산할 권한도 얻었다.

1804년 1월 29일 경찰은 카두달이 그를 납치하려고 파리에 와 있음을 알아냈다. 3월 6일 편지에서 그는 모로를 이 무리의 공범이라 했다. 경찰이 이 음모를 모두 지켜보고 있었으니 실제 위험은 없었다고도 했다. 4월 4일 그는 카두달을 찾아낸 사람에게 약속된 4만 8천 프랑을 주라고 대법관에게 지시했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피슈그뤼의 체포에 10만 프랑이 지급되었다고 했다.

3월 10일 그는 베르티에에게 명령을 내렸다. 오르드네르가 다른 이름으로 바덴 영토의 에텐하임에 가서 앙기앵 공을 붙잡아 오라는 명령이었다.50 3월 20일 그는 앙기앵 공을 뱅센의 군사위원회에 넘겼다. 이튿날 앙기앵 공은 총살되었다.

5월 18일 원로원 의결이 나왔다. 호민원에서 반대표는 다시 카르노의 한 표였다. 이튿날 제국 원수 18명이 임명되었다. 베르티에와 오주로와 주르당과 베르나도트가 그 가운데 있었다. 6월 6일 릴 백작은 제정에 항의했다.

6월 그는 모로가 사형은 면했지만 오명을 남기는 판결을 받았다고 했다. 카두달 일당 열두어 명은 형을 받게 되리라고도 했다. 8월 10일 푸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모로가 바르셀로나에서 배를 탔다고 했다.51 그는 모로가 가면을 벗고 곧장 적에게 가리라고 내다보았다.

8월 2일 세습을 묻는 국민투표의 집계가 끝났다. 11월 6일 원로원 의결이 결과를 공표했다. 공식 결과는 찬성 3,521,675표, 반대 2,579표였다.52 12월 2일 그는 노트르담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그해 국민투표가 물은 것은 황제의 자리를 그의 자손이 잇는가였다. 제정은 그보다 먼저 시행되고 있었다.53

5월 18일 캉바세레스에게 보낸 편지의 끝에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러니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국가와 나를 향한 같은 마음을 이어 가는 것뿐입니다”(Je n’ai donc à désirer de vous que la continuation des mêmes sentiments pour l’État et pour moi).54

주

  1. 112년 원로원 의결(혁명력 12년 플로레알 28일). 헌법위원회가 공개한 전사를 따랐다.↩
  2. 21858–69년 나폴레옹 3세의 명으로 엮은 『나폴레옹 1세 서한집』 7751번. 발송본은 캉바세레스 가문에, 초안은 제국 문서고에 있었다. 나폴레옹 재단의 새 서한집 『Correspondance générale』 4권 8874번도 같다. 각주에 다른 기록을 밝히지 않은 날짜는 새 서한집과 툴라르와 나폴레옹 재단의 연표에서 왔다.↩
  3. 3전쟁부 명단. 슈케가 『La jeunesse de Napoléon』 1권(1897) pp.82–83에 옮긴 문서다.↩
  4. 4포병 위관 명부 42번의 기록(슈케 1권 부록). 1768년 코르테에서 났다는 설은 슈케가 반박했다.↩
  5. 5슈케 1권 p.217(인원)과 pp.225–226(순위). 응시자를 137명으로 적는 연표도 있다.↩
  6. 6포병 위관 대장(슈케 1권 부록 89). 대장이 끝난 뒤의 진급은 이 수에 들지 않는다.↩
  7. 71793년 7월 29일 자 끝머리를 단 그 자신의 팸플릿(1888년 마르텔 편).↩
  8. 8살리체티와 가스파랭의 서한. 슈케가 『La jeunesse de Napoléon』 3권(1899) pp.171–172에 옮겼다. 마르세유의 카페에서 세르보니가 그를 설득해 이 자리를 맡겼다는 뒷날의 회고는 이 서한들과 맞지 않는다.↩
  9. 9슈케는 공격 계획이 그의 것이 아니고 그의 몫은 결정적 지점을 밝힌 데 있다고 보았다(3권 p.230). 그 고지들의 점령은 두메르베스트와 다르송과 트뤼게 등이 건의했다.↩
  10. 10파견의원의 임명 결정(슈케 3권 pp.229–230). 뒤고미에가 이 젊은이를 진급시키라고 썼다는 유명한 문장은 원문서가 확인되지 않아 쓰지 않는다.↩
  11. 11바르슬로네트 결정문의 일부는 샤토브리앙의 『무덤 너머의 회상』이 옮겨 실었다. 8월 20일의 석방 결정문은 라루스 『19세기 대사전』의 「Bonaparte」 항목이 옮겨 실었다. 8월 20일의 처분을 무혐의로 보는 연표와 임시 석방으로 적은 결정문이 갈린다.↩
  12. 12서한집 55번. 1858–69년 서한집은 1840년 코스통의 책을, 새 서한집은 1932년 쿠르삭의 책을 출처로 적는다. 두 판 모두 원본의 소장처를 적지 않는다.↩
  13. 13툴라르의 연표(『Dictionnaire Napoléon』 1987). 그 시기를 물질적 곤궁의 시기로 적는다.↩
  14. 14바라스 『회고록』(1895 뒤뤼 편) 영역 1권 21장. 정적이 된 뒤 왕정복고기에 쓴 원고를 다른 사람이 손질한 책이다.↩
  15. 15서한집 72번. 형 조제프의 회고록이 1850년대에 처음 공개한 편지다.↩
  16. 16서한집 73번, 전쟁부 문서고. 날짜는 서한집 편자가 방데미에르 15일(10월 7일)로 추정했다.↩
  17. 17방데미에르 18일의 회의다. 바라스 『회고록』 영역 1권의 편자 주가 옮긴 선행 연구를 따랐다.↩
  18. 18나폴레옹 재단의 조제핀 연표.↩
  19. 19총재정부가 그에게 보낸 서한과 결정을 모은 『Correspondance inédite officielle et confidentielle』(1809) 1권 pp.145–150.↩
  20. 20서한집 420번. 문언은 국방역사국 육군 문서고의 발송본 사본을 따른 새 서한집 1권 599번이다. 1858–69년 서한집은 이 대목에 '이 편지를 쓰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문장을 덧붙이는 등 문언을 손질했다.↩
  21. 21『Correspondance inédite』 1권 pp.201–203·219–221. 5월 21일 서한의 서명 셋은 국립문서관 원고를 옮긴 드비두르 판(1911) 2권 pp.437–439를 따랐다. 『Correspondance inédite』에는 카르노의 이름만 있다.↩
  22. 22『L'armée d'Italie』(렌 대학 출판부, 2011) 9장. 모두 부과액과 약정액이다.↩
  23. 23같은 장. 클라르크의 일은 『Correspondance inédite』 4권 pp.355–356.↩
  24. 24『Correspondance inédite』 4권 pp.667–668.↩
  25. 25서한집 2010번, 전쟁부 문서고.↩
  26. 26핸리, 『The Genesis of Napoleonic Propaganda』(2005) 3장.↩
  27. 27임명 날짜(테르미도르 21일)는 드빌의 『Thermidor et Directoire』(『Histoire socialiste』 5권, 1904) 17장을 따랐다. 8월 16일 그는 베르티에에게 이 임명을 일일 명령에 실으라고 했다(서한집 2109번, 전쟁부 문서고).↩
  28. 28렌츠, 같은 글.↩
  29. 29렌츠, 《Revue du Souvenir napoléonien》 412호. 오주로의 임명과 두 총재의 반대도 같은 글에 있다.↩
  30. 30오슈의 기병 연대가 헌법 제69조가 정한 입법부 반경 안으로 들어오자 총재정부가 막았고, 의회는 그의 전쟁장관 지명이 나이 조항(제148조)에 맞는지 따졌다. 그는 상브르에뫼즈군으로 돌아갔다(《모니퇴르》 재간본 28권).↩
  31. 31총재정부의 답장, 『Correspondance inédite』 3권 pp.237–238. 같은 날 바라스에게 보낸 그의 자필 편지도 사임을 청한다(새 서한집 1권 2084번).↩
  32. 32최후통첩과 승인 서한은 『Correspondance inédite』 3권 pp.232–237·249–251, 조약 전문과 승인 결정은 《모니퇴르》 재간본 29권 36호. 3년 헌법 제333조는 조약을 입법부가 비준해야 효력이 생기게 했다.↩
  33. 33『Correspondance inédite』 5권 pp.1–4·12–13.↩
  34. 34불레 드 라 뫼르트, 『Le Directoire et l'expédition d'Égypte』(1885) pp.236–237. 국립문서관 문서를 대조한 연구다.↩
  35. 35서한집 4013번, 새 서한집 2권 4284번(국방역사국 육군 문서고의 발송본). 총살된 수를 2천에서 3천 사이로 적는 연표도 있다.↩
  36. 36서한집 4374번, 전쟁부 문서고. 영국 함대가 바다에서 가로채 1798–1800년 런던에서 인쇄한 사본에도 같은 문장들이 있다.↩
  37. 37서한집 4381번. 발송본이 전하며 지금은 말메종 성 박물관에 있다. 서한집은 날짜를 10월 9일로, 새 서한집은 상륙 전 배 위에서 쓴 10월 8일로 적는다.↩
  38. 38서한집 4382번. 총재정부는 5월 26일 그의 귀환을 결정하고 지휘를 그가 정하는 사람에게 맡겨도 된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가 그에게 닿지 않았다는 연구와, 그가 다른 길로 알았으리라는 견해가 맞선다.↩
  39. 39뤼시앵 보나파르트의 회고 「브뤼메르 혁명」(1830년대 집필로 추정, 1882년 융 편 간행) pp.240–241. 모로가 파리에 왔다는 소식에 시에예스가 '너무 늦었다'고 했고, 뤼시앵이 그 말에서 형의 귀국이 그를 당혹하게 했다고 읽은 대목도 이 회고가 전한다(p.260).↩
  40. 40새 서한집 2권의 연표.↩
  41. 41원로원 의결(《모니퇴르》 재간본 29권 pp.906–907).↩
  42. 42《모니퇴르》 51호(브뤼메르 21일) p.892. 쿠데타 이틀 뒤 새 집권층 아래 인쇄된 신문이다.↩
  43. 43《모니퇴르》 재간본 29권 p.893 왼쪽 단의 원로원 회의록. 뤼시앵의 회고 pp.333–334도 같은 회의록을 옮겼다.↩
  44. 44《모니퇴르》 재간본 29권 p.893.↩
  45. 45《모니퇴르》 51호 p.893과 53호 p.901. 칼을 대신 맞은 척탄병은 아르덴 출신 토마 토메로 적혀 있다. 의장 뤼시앵이 서명한 오백인회의 인쇄 회의록은 입법부 경비대의 척탄병 둘이 몸으로 그를 가렸다고 적고, 르페브르의 이름은 적지 않는다.↩
  46. 46뤼시앵의 회고 pp.323–324. 같은 진영의 기록이며, 연설의 요지는 《모니퇴르》의 요약과 대체로 같다.↩
  47. 47브뤼메르 19일 밤의 포고 벽보(인쇄본). 반대 진영의 증언은 확인되지 않았고, 단도 이야기가 미리 짜였다는 견해도 있다.↩
  48. 48랑글루아, 《Annales historiques de la Révolution française》 209호(1972) p.390. 그는 집계가 조작되었다고 밝혔다.↩
  49. 49『Bulletin des lois』의 수다. 판본에 따라 찬성 3,568,885표, 반대 8,374표로 적기도 한다.↩
  50. 50서한집 7608번. 명령서는 뒤무리에와 영국 대령 하나도 함께 붙잡으라고 했지만, 뒤무리에가 그곳에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51. 51서한집 7812번과 7916번.↩
  52. 52판본에 따라 찬성 3,572,329표, 또는 찬성 3,069,911표에 반대 2,568표로 적기도 한다.↩
  53. 5312년 원로원 의결 제142조. 투표에 부친 문안은 황제의 존엄을 그의 직계와 입양 자손, 그리고 조제프와 루이의 직계가 잇는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원로원의 보고는 통령의 존엄을 황제의 존엄으로 바꾼 것이 이 원로원 의결이라고 밝혔다.↩
  54. 54서한집 7751번(9권 p.362)의 끝 문장이다. 발송본을 따른 새 서한집 4권 8874번도 같은 문언이다.↩
2부
다시 출발선에서
6장

성과 뒤에 남은 사람들

이긴 만큼 올라갔나

이긴 만큼 올라갔나? 이 물음에 먼저 떠오르는 답은 승리다. 그 답은 이렇게 잇는다. 성과가 사람과 자원을 모은다. 모인 사람과 자원이 조직이 된다. 커진 조직이 더 큰 성과와 결정권을 낳는다.

이 질문은 지금 꼴로는 답할 수 없다. 관도의 승리와 파양호의 승리를 한 단위로 셀 방법이 없다. 이긴 장군도 사람과 자원을 모은다. 그 장군을 임명하고 해임하는 권한, 급료를 주는 권한, 다음 작전을 정하는 권한은 다른 사람 손에 남기도 한다. 1797년 레오벤의 예비 강화에 서명한 사람은 나폴레옹이었다. 그 강화를 비준한 것은 총재정부였다.

질문을 바꾼다 — 누가 더 많이 이겼나에서, 쌓인 힘에 대한 최종 통제권이 언제 누구에게로 옮겨 갔나로. 바꾼 질문은 날짜로 답할 수 있다. 누가 장교를 임명했나, 누가 급료를 주었나, 누가 그의 결정을 뒤집을 수 있었나는 기록에 날짜와 함께 남는다. 그 사슬의 첫 고리는 성과와 협력 사이에 있다. 성과는 협력을 붙잡아 두었나.

네 사람 각각에게 성과 직후 협력이 끊긴 사건이 있다. 그 날짜에 함께 적힌 것은 상급자나 동맹과의 관계가 바뀐 일이다. 이것은 네 사례를 관찰한 결과다. 최고권력에 닿지 못한 사람들과 견준 결과는 아니다.

나폴레옹은 1793년 12월 툴롱의 승리로 파견의원들에게서 준장 자리를 받았다. 이듬해 7월 28일 그의 후원 고리가 닿아 있던 로베스피에르 형제가 처형되었다. 아흐레 뒤 파견의원들은 그를 정직시키고 체포하라고 명했다.

주원장은 1353년부터 남쪽으로 내려가 무리를 모았다. 이듬해 상급자 곽자흥이 1만 명을 이끌고 저주로 왔다. 두 달 뒤 곽자흥은 참언을 듣고 그의 측근을 다 불러들였다. 명의 실록은 그때 그가 거느린 병력을 3만여로 적는다. 같은 실록은 그 뒤 사방 정토의 총병권에 그가 참여하지 못했다고 적는다. 곽은 서기 이선장까지 데려가려 했으나 이선장이 울며 가지 않았다고도 적는다.

조조는 서주에서 열 개 남짓한 성을 떨어뜨린 이듬해인 194년, 다시 서주를 치고 있었다. 그 사이 동맹 태수 장막과, 그가 동군에 남겨 둔 진궁이 여포를 맞아들였다. 연주의 군현은 거의 다 돌아섰다. 남은 것은 세 성이었다.

장막은 그와 나란히 선 동맹이었다. 진궁과 별가 필심은 그가 자리를 맡긴 사람이었다. 그를 떠난 위종은 그가 효렴으로 천거한 사람이었다.

나디르는 1726년 12월 마슈하드를 얻었다. 그 뒤 두 해 동안 하부샨의 쿠르드는 거듭 등을 돌렸다. 몇 해 전 그가 도우러 가서 함께 말레크 마흐무드를 물리친 무리였다. 같은 시기 샤의 대신들은 그를 헐뜯었다. 마슈하드를 얻은 뒤 몇 달 안에 샤는 그에 맞서라는 명령에 서명했다.1

같은 네 사람에게서 성과 뒤에 협력이 붙은 사건도 기록돼 있다. 흑산을 깬 이듬해 연주의 관리들이 조조를 맞으러 왔다. 장강을 건넌 주원장에게는 도안과 이습이 찾아왔다. 헤라트에서 이긴 나디르에게는 압달리 족장들이 투항해 왔다.

같은 사람 안에서도 성과 뒤의 협력은 붙기도 하고 끊기기도 했다. 네 사례가 보이는 것은 성과 뒤에도 협력이 끊긴 날이 있었다는 데까지다. 성과가 협력을 끊었다는 뜻은 아니다.

협력이 붙어 있던 구간에도 병력이 누구 이름으로 적혔는지는 다른 문제다. 이 둘은 나폴레옹 한 사람의 기록에서 갈린다. 1796년부터 그가 이끈 군대는 총재정부가 맡긴 공화국의 군대였다. 1799년 8월 그가 이집트를 떠날 때 데려간 사람은 베르티에와 란을 비롯한 측근과 학자들이었다. 군대는 클레베르와 함께 이집트에 남았다.

그에게 붙은 사람과 병력이 적힌 이름이 같지 않았다. 이것은 한 사람 안의 관찰이다. 다른 세 사람에게도 그랬다는 뜻은 아니다.

파견의원의 준장, 총재정부의 사령관

나폴레옹의 기록은 협력이 어디에 붙어 있었는지에 따라 세 구간으로 나뉜다. 첫째 구간의 협력은 파견의원을 거쳐 왔다. 1793년 툴롱의 포병 지휘관 자리에 그를 앉힌 것도, 12월 그를 준장에 올린 것도 국민공회의 전권을 쥔 파견의원들이었다. 뒤테유의 서면 찬사와 부관 쥐노도 그 자리 위에서 그에게 왔다.

그때 그는 장교를 임명하지 못했다. 병력과 포탄의 배분은 사령관과 파견의원에게 있었다. 장병이 기댄 곳도 공화국과 파견의원이었다.

그 고리는 1794년 7월 테르미도르의 정변으로 끊겼다. 8월의 체포 결정문에 이름을 올린 세 파견의원 가운데 하나는 툴롱에서 그를 쓴 살리체티였다. 열나흘 뒤 그를 임시로 풀어 준 것도 그 가운데 두 사람, 알비트와 살리체티의 결정이었다. 협력은 고리와 함께 끊겼다.

이듬해 그에게 남은 것은 계급과 툴롱의 평판이었다. 인사권은 공안위원회에 있었다. 방데로 가는 보병 여단장 발령 앞에서 그가 쓸 수 있는 수단은 거절 하나였다.

둘째 구간의 자리도 위에서 왔다. 1795년 10월의 내무군 총사령관은 국민공회가 준 자리였다. 1796년 3월의 이탈리아 방면군 사령관은 3년 헌법 아래 정부가 언제든 거둘 수 있는 직위였다. 3년 헌법은 총사령관을 임명하는 권한을 총재정부에 두었다.

그 구간에 총재정부가 그의 뜻을 거슬러 낸 결정은 둘이 기록돼 있다. 1796년 5월의 분할 명령과 1797년 9월의 강화 조건이다. 둘 다 총재정부 스스로 거두었다. 레오벤 뒤 쉬고 싶다는 그에게 총재정부는 군대에 그가 아직 필요하다고 답했다.

1797년 7월 14일 그가 군에 낸 포고는 공화국과 3년 헌법의 적들에게 가차 없는 전쟁을 맹세하자는 말로 끝났다. 그에게 바치는 맹세가 아니었다. 그해 그의 이름이 붙은 것은 군대가 아니라, 그가 프랑스 쪽 전권으로 서명한 조약과 파리의 한 신문이었다. 그해 10월 그를 영국 방면군으로 옮긴 총재정부의 서한은 정부의 앞으로의 구상이 그가 밝힌 구상과 꼭 맞는다고 적었다.2 이집트에서 그가 자기 손으로 한 임명과 징세와 협상은 총재정부가 임명한 동방군 사령관의 자리에서 나왔다. 장교를 올린 권한도 1798년 4월의 그 임명이 위임한 것이었다.

그에게 붙은 사람들은 이 자리들에서 모였다. 베르티에는 1796년부터 그의 참모장이었다. 란은 그해 봄 연대장이었다. 연말에는 여단장이 되었다. 그들이 속한 군대는 총재정부의 이름으로 적혔다.

같은 수요 앞의 두 장군

뤼시앵의 회고에 따르면 1799년 여름 시에예스는 자코뱅과 맞붙을 때 쓸 칼을 찾았다. 같은 회고는 그 목적을 공화국의 개혁, 곧 헌법을 바꾸는 데 둔다. 그 수요 앞에 선 장군 가운데 주베르와 베르나도트와 모로의 자리는 각각 총재정부의 결정문에서 나왔다.

주베르는 6월 18일 총재정부의 결정으로 파리 사령관이 되었다. 7월 총재정부는 이탈리아 방면군을 모로에게서 거두어 그에게 맡겼다. 총재정부가 의회에 보낸 교서가 옮긴 보고에 따르면, 그는 토르토나를 풀려고 힘찬 공격을 정했다. 그 공격이 어려워진 사이 적이 먼저 쳤다. 8월 15일 그는 노비에서 전사했다.

뤼시앵의 회고에 따르면 장군이자 오백인회 의원이던 주르당은 시에예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오백인회에 정부를 모으는 쪽에 섰다.

베르나도트는 1797년 가을 총재정부가 나폴레옹에게 보낸 전언을 들고 간 사람이었다. 총재정부는 10월 3일, 사임을 청한 나폴레옹을 달래는 회신에서 그 전언을 언급했다. 1799년 7월 그는 총재정부가 맡긴 전쟁장관이었다. 7월 8일 그는 장관의 이름으로 방면군 사령관들에게 회람을 돌렸다.

9월 14일 총재정부의 결정문은 그가 낸 사직을 받아들인다고 적었다. 이튿날 그는 그런 사직을 낸 적이 없다고 총재정부에 회신했다. 같은 회신에서 그는 임시 장관 밀레뮈로에게 자료를 넘기겠다고 했다.3 뤼시앵의 회고는 브뤼메르를 앞두고 그를 반대할 것이 분명한 장군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모로는 이탈리아를 넘긴 그 7월에 총재정부가 새로 꾸린 라인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11월 9일 그는 원로원에 들어선 나폴레옹을 수행했다. 이 일은 이튿날 찍힌 관보가 적는다. 같은 9일 총재들이 있던 뤽상부르를 그가 지켰다는 것은 뤼시앵의 회고가 적는다.4

같은 가을 베르나도트의 기록에 남은 것은 그를 앉힌 상급자의 해임이다. 모로의 기록에 남은 것은 원로원 의결의 명의 아래 한 수행이다.

같은 수요 앞에 섰던 다른 장군들의 임명·급료·맹세 장부는 거의 비어 있다.5 그들이 왜 그 자리에 없었는지는 이 기록이 답하지 않는다.

이집트에 남은 군대

셋째 구간은 1799년 8월 22일 알렉산드리아에서 갈린다. 그날 그는 클레베르에게 지휘권을 넘기는 서한을 썼다. 그 서한에는 데려갈 사람의 이름과 남길 군대가 함께 적혔다.

총재정부의 5월 26일 서한은 브뤼 제독에게 스페인 함대와 합류해 영국 함대를 친 뒤 이집트로 가서 군대를 태우라고 했다. 그가 필요하다고 보면 병력 일부는 이집트에 남겨도 된다고 했다.7 실제로 배에 오른 것은 그와 그가 고른 측근이었다. 갈린 것은 귀환의 방향이 아니라, 누가 함께 돌아오고 무엇이 남았느냐였다. 그가 이집트에 두고 온 것은 군대만이 아니었다. 그 군대를 거쳐 쥐었던 임명과 급료와 맹세의 권한도 동방군과 함께 남았다.

8월 23일 이집트를 떠난 그는 10월 9일 프레쥐스 근처에 내렸다. 총재정부의 그 결정을 그가 알았는지는 연구가 갈린다.8 이 귀환을 명령 없는 귀환이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귀국 직후의 《모니퇴르》에는 총재정부의 공식 문책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총재의 집과 연회에서 그를 맞았다고 적는다. 바라스의 회고만이 시에예스가 그 장군이 정부의 허락을 받고 돌아왔느냐고 물었다고 적는다.

11월 9일 수도의 병력이 그의 지휘 아래 들어갔다. 그 병력을 그에게 맡긴 것은 원로원 의결이었다. 그 의결은 그가 그때 상급자의 거부에서 벗어났는지를 따로 확인해 주는 기록이 아니다. 의결의 문언이 그를 부른 이름은 '이 의결의 집행을 맡은' 장군이었다(Le général Bonaparte est chargé de l'exécution du présent décret).

주

  1. 1대신들의 비방은 모흐센의 책과 궁정 사관이, 샤의 명령은 궁정 사관이 적는다. 궁정 사관은 그 명령서를 샤베르디 베그와 대신들이 부추겼다고 적는다. 하부샨 쿠르드의 이반과 함께 록하트 pp.27–30을 따랐다.↩
  2. 2『Correspondance inédite』 3권 pp.249–252. 총재정부는 그 일치를 'la parfaite analogie'라고 썼다.↩
  3. 3회신은 총재정부 아래의 반관보 《모니퇴르》(재간본 29권 p.810)가 실었다. 결정문의 문언은 뤼시앵 회고의 편자 주(p.244)에 있다. 7월 8일 회람은 같은 신문 29권 p.729다.↩
  4. 4라인군 지명은 《모니퇴르》 재간본 29권 p.732이다. 원로원 수행은 쿠데타 이틀째인 11월 10일에 찍힌 같은 신문 49호 p.883이 적는다. 그 호가 누구의 손 아래 찍혔는지는 가려지지 않는다. 뤽상부르는 뤼시앵의 회고 p.283이다.↩
  5. 51799년 《모니퇴르》의 관련 기사와 뤼시앵의 회고는 베르나도트와 모로와 주베르가 누구를 임명했는지, 누구의 맹세를 받았는지 적지 않는다. 급양은 베르나도트가 장관으로서 군에 보낸 물자 기사(29권 p.780)가 있을 뿐이다.↩
  6. 6이 블록의 시점과 그날 그가 안 것은 그 자신의 서한에만 있다. 그의 서한과 후대 연표와 뤼시앵의 회고를 빼면 총재정부의 문서 둘이 남는다. 1798년 4월의 동방군 임명과 1799년 5월의 귀환 결정이다. 그 둘로는 한 순간의 결정이 서지 않는다. 서는 것은 총재정부가 귀환을 정한 1799년 여름에 그가 맡은 지휘를 아직 쥐고 있었다는 상태, 그리고 그 상태에서 갈리는 두 방향이다.↩
  7. 7브뤼 앞 서한은 불레 드 라 뫼르트의 1885년 연구서 부록(9번)이, 그 앞으로 쓴 허가 서한은 같은 책 본문(pp.125–127)이 국립문서관 문서로 옮겼다. 브뤼가 6월 6일 서한을 받았다는 날짜는 드빌의 연구에 있다.↩
  8. 8불레는 그가 파리에 돌아와서야 이 결정을 알았다고 본다. 드빌은 그가 다른 길로 결정을 알았다고 본다.↩
7장

천자의 이름

같은 조정의 이름, 다른 군량

붙은 사람과 적힌 이름은 갈렸다. 1799년의 나폴레옹에게서 그랬다. 그렇다면 같은 이름 아래 사람을 모은 두 사람에게서 그 이름은 무엇을 갈랐나. 이름이 같다면, 기록에서 두 진영은 어디서 달랐나.

이름은 둘을 가르지 못한다. 조조와 원소는 둘 다 한 조정의 형식을 벗지 않은 채, 상급자가 더는 그의 결정을 뒤집지 못하는 자리에 닿았다. 196년부터 두 사람은 허로 옮긴 같은 조정의 관직을 받았다. 원소도 그 이름을 썼다. 191년 그는 표를 올려 조조를 동군태수로 삼았다.

원소에게 그 자리는 191년 음력 7월에 왔다. 직속 상급자 한복의 통제가 끝난 때다. 그 위의 장안 조정은 그 전에 이미 그를 누르지 못했다. 190년 조서를 들고 온 조정의 사신을 원소 쪽이 죽였다. 190년부터 이듬해까지 그는 유주목 유우를 황제로 세우려 했다.1

조정이 그를 뒤집지 못한다는 확인은 196년에서 이듬해 사이에 온다. 그해 조정이 그를 꾸짖는 조서를 보내자 그는 상서로 해명했다. 조정은 그해 겨울 그를 태위로 삼았다. 대장군 조조 아래에 서기를 부끄러워한 그가 거짓으로 사양하자, 조조는 두려워 대장군 자리를 그에게 넘겼다. 꾸짖음 뒤에 그가 무엇을 바꾸었는지는 기록에 없다.2

조조에게 그 자리는 196년 음력 8월(서기 9~10월) 이후부터 200년 2월 사이에 왔다. 그달 그가 한섬과 장양의 죄를 아뢰자, 한섬은 죽임을 두려워해 홀로 말을 타고 양봉에게 달아났다. 천자는 그 뒤에 두 사람 모두 묻지 말라고 했다. 장양은 처벌되지 않았다. 천자 쪽의 거부가 관철된 기록은 이 장양 몫 하나다.3

그 뒤 천자 쪽에서는 물러나거나 막힌 기록만 남았다. 196년 보국장군이 된 황후의 아버지 복완은 그 뒤 정사가 조조에게 있다며 스스로 인수를 반납했다. 천자에게 시책을 아뢴 의랑 조언은 조조의 미움을 사 죽었다. 날짜가 있는 첫 실패는 200년 2월 동승 일당의 처형이다.4

두 사람을 기록이 다르게 적는 자리는 이름 밖에 있다. 하나는 196년의 영입 결정이다. 다른 하나는 그 자리에 닿기 전에 군대를 무엇으로 먹였나다.

원소가 발해태수로 있을 때 한복은 늘 종사를 보내 그의 문을 지키게 했다. 군대도 일으키지 못하게 했다. 거병을 허락한 뒤에도 한복은 그의 군량을 번번이 깎았다고 범엽의 《후한서》는 적는다.5 191년 기주를 넘기지 말라고 한복을 말리던 관리들은 원소를 이렇게 말했다. “원소는 외로운 객에 궁한 군대라 우리의 콧김을 우러러본다… 젖을 끊으면 당장 굶겨 죽일 수 있다”(袁紹孤客窮軍,仰我鼻息…絕其哺乳,立可餓殺). 진수가 본문에 옮긴 이 말은 양도를 말리던 쪽의 말이다.6

원소 쪽 사람들의 말도 남아 있다. 《영웅기》에 따르면 봉기는 원소에게, 남이 대주는 물자에 기대고 있으니 한 주를 차지하지 않으면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다고 했다. 원소는 우리 병사가 굶주려 있다고 답했다.

원소가 그 자리에 닿은 날은 한복의 기주를 넘겨받은 날이다. 조조는 그 자리에 닿는 구간보다 네 해 이상 앞선 192년에 연주를 얻었다. 그 전의 조조를 두고는 반대쪽 주장도 남아 있다. 200년 원소 진영의 격문은 원소가 조조에게 병사를 나눠 보충해 주었다고 주장한다. 위 쪽 기록에는 그 내용이 없다.

관도에서 진수는 조조의 군량이 다해 가자 그가 순욱에게 편지를 보내 허로 돌아갈 일을 의논했다고 적는다. 원소 쪽은 순우경에게 1만여 명을 주어 지키게 한 오소의 군량에서 졌다고 적는다.

붙은 사람과 적힌 이름의 구분은 이 짝에서 좁혀진다. 적힌 이름은 같아서 둘을 가르지 않는다. 두 사람이 같은 조정의 이름을 쓴 동안, 기록에서 두 진영이 달리 적힌 자리는 그 이름 아래 군량을 누가 쥐었는가다. 범엽의 한 대목에 따르면 원소의 거병군은 한복이 군량을 쥐고 깎았다. 조조의 군대는 그가 얻은 연주에서 먹었다.

영입과 불영입

두 사람이 처음 갈린 자리는 196년보다 앞선다. 연주가 돌아선 194년 가을, 원소는 손을 잡자며 조조의 가족을 업으로 옮겨 살게 하라는 조건을 냈다. 곡식 1곡이 50여만 전이던 기근의 해였다. 어환의 《위략》에 따르면 정욱은 가족을 업으로 보내는 일을 북면하여 원소를 섬기는 일이라 했다.

진수는 조조가 그 조건을 허락하려 했다고 적는다. 정욱의 말을 듣고 그는 그만두었다. 남은 기록으로는 원소가 조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한 마지막 시도다. 이듬해 연주를 되찾은 그를 천자는 음력 10월 연주목에 정식으로 임명했다. 천자를 맞기 전에도 그 이름은 그의 자리를 확인해 주었다.

196년의 안건은 두 진영에서 같았다. 천자를 맞아 가까이 둘 것인가였다. 두 진영의 기록은 이 안건에서 두 갈래로 펼쳐진다.

갈래원소 진영조조 진영
의논한 때195년 겨울, 천자가 이각에게 쫓기던 때(범엽). 진수는 천자가 하동에 있을 때로 적는다〈무제기〉는 196년 정월 조, 천자가 하동에 있던 때에 둔다. 〈순욱전〉은 천자가 음력 7월 폐허가 된 낙양에 돌아온 뒤에 둔다
맞자고 한 사람저수(《헌제전》과 범엽). 진수의 본문은 곽도로 적는다순욱과 정욱
반대하거나 의심한 사람과 그 말곽도와 순우경. 따르면 권세가 가벼워지고 어기면 명을 거스른다여러 장수 가운데 의심한 이들(〈무제기〉). 산동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고 한섬과 양봉이 장양과 이어져 쉽게 누를 수 없다는 말은 〈순욱전〉이 '어떤 이'의 말로 적는다
결정의 근거로 적힌 말처음부터 천자의 옹립은 원소의 뜻이 아니었다(진수·범엽)주상을 받들어 백성의 바람을 따름이 큰 순리다(순욱)
결정쓰지 못했다맞았다
기록진수 〈원소전〉, 《헌제전》, 범엽 《후한서》진수 〈무제기〉와 〈순욱전〉

범엽과 〈순욱전〉을 따르면 원소 진영의 의논이 반년쯤 앞섰다. 그렇게 읽으면 천자의 처지도 달랐다. 한쪽은 쫓기던 천자, 다른 쪽은 폐허에 돌아온 천자다. 진수의 〈원소전〉과 〈무제기〉를 따르면 두 의논 모두 천자가 하동에 있을 때다.

두 진영의 반대가 꼽은 것도 달랐다. 원소 진영의 반대는 천자를 가까이 두는 데 드는 값을 말했다. 조조 진영의 의심은 천자를 맞을 수 있느냐는 형편을 말했다. 결정을 설명하는 말도 다르게 남았다. 원소 쪽 기록은 결정을 원소 한 사람의 뜻으로 설명한다. 조조 쪽 기록은 순욱의 논리를 남겼다.

원소는 191년 저수가 같은 구상을 냈을 때 그것이 자기 마음이라고 답한 터였다. 원소 쪽 갈래는 이긴 쪽이 모은 기록에 남았다. 좋은 건의를 쓰지 못한 패자라는 구도가 뒤에 짜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 구도를 원소 쪽에서 받쳐 주는 따로 선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원소 쪽의 실제 갈래는 기록에 있다. 조조가 천자를 맞아 허에 도읍하고 하남 땅을 거두자 관중이 모두 귀부했다. 원소는 후회했다고 진수는 적는다. 그는 천자를 견성으로 옮겨 자기 가까이 두라고 조조에게 요구했다. 조조는 거절했다.

원엽의 《헌제춘추》는 원소의 말을 이렇게 옮긴다. “조조는 여러 번 죽을 뻔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구해 살렸다. 이제 은혜를 저버리고 천자를 끼고 내게 명령하려 하는가”(曹操當死數矣,我輒救存之,今乃背恩,挾天子以令我乎).

천자 곁 사람들의 움직임도 실제 갈래의 기록이다. 〈무제기〉는 그해 정월 조에서, 조조가 보낸 조홍의 길을 동승이 원술의 장수와 함께 막았다고 적는다. 범엽에 따르면 그해 가을 한섬이 정사를 어지럽히자 동승은 몰래 조조를 불렀다. 같은 해 안에 그의 길을 막은 사람이 그를 부른 것이다.

형식이 남긴 통로

196년 음력 8월(서기 9월 28일) 녹상서사가 된 뒤 조조의 사람들이 받은 자리는 천자의 이름으로 나갔다. 정욱도 천자가 허에 도읍한 뒤 상서가 되었다. 누가 그 자리를 정했는지는 진수가 적지 않는다. 그의 첫째 참모 순욱의 직함은 한의 상서령이었다. 둔전도 국가의 관직인 전농중랑장이 맡았다. 199년 2월(건안 3년 음력 12월) 여포를 사로잡아 죽인 뒤 그는 장패를 낭야상으로, 오돈과 윤례와 손관과 손강을 각 군의 태수로 삼았다.

관직의 이름은 천자의 것이었다. 사람을 고르고 곡식을 거둔 것은 조조의 막부였다. 215년 천자는 그에게 천자의 이름으로 제후를 봉하고 태수와 국상을 임명하라고 명했다. 조서는 일에 닥쳐 주는 상은 빨라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이 명은 그가 196년부터 해 오던 일을 문서로 확인한 것으로 읽힌다.

공이 누구 이름 아래 쌓이는지를 당대에 따진 기록은 다른 자리에도 있다. 나디르의 궁정 사관은 샤베르디 베그 일행이 타흐마스프의 장군 레자 쿨리 한에게 협력을 말렸다고 적는다. 나디르와 손잡으면 그의 사령관 자리가 헛것이 된다는 말이었다.8

조조에게 형식은 비용을 낮추기도 했다. 원소와의 서열 다툼은 대장군이라는 관직 하나를 넘기는 것으로 끝났다.

칭호를 올리는 일도 형식의 절차를 밟았다. 213년 위공의 책명을 받으라는 권진에는 30여 명이 이름을 올렸다. 그는 세 번 사양한 끝에 받았다. 216년 위왕에 오를 때도 세 번 사양했다. 그 앞의 212년에는 순욱이 국공과 구석에 반대했다.

형식은 그를 뒤집으려는 쪽의 통로로도 남았다. 천자가 있던 허에서 그를 치려는 시도가 세 번 기록돼 있다. 199년 동승은 황제의 옷띠 속 밀조를 받았다고 말하며 그를 죽이려 꾀했다가, 이듬해 2월 일당과 함께 처형되었다. 214년에는 복황후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가 드러났다. 218년에는 태의령 길본과 소부 경기, 사직 위황이 허에서 군사를 일으켰다.9 셋 다 실패했다.

형식을 지키는 동안 그는 그 형식 안의 사람들을 죽이기도 했다. 196년 시중 대숭과 상서 풍석, 208년 태중대부 공융이 그 예다. 앞의 일은 원굉과 범엽이 적는다. 조조를 주어로 적은 것은 범엽이다.

짝의 결과가 갈리는 것은 둘 다 그 자리에 닿은 뒤다. 196년 원소는 천자를 맞지 않았다. 조조는 맞았다.

《전략》에 따르면 199년 원소는 주부 경포를 시켜 한의 운이 다하고 원씨가 뒤를 이을 것이라고 은밀히 아뢰게 했다. 그 말을 군부에 보이자 모두 경포를 죽여야 한다고 했다. 원소는 경포를 죽여 혐의를 벗었다. 200년 관도에서 원소의 군대가 무너졌다. 202년 원소는 병으로 죽었다.

이 대비는 두 진영의 기록이 어디서 다른지를 가리킨다. 군량이 관도의 결과를 갈랐다는 뜻은 아니다.

두 사람이 한 조정의 이름을 썼다는 사실만으로는 관도의 서로 다른 결과를 설명할 수 없다.

주

  1. 1《삼국지》 권6 본문과 범엽 《후한서》 권9. 사신 처형의 해는 《후한서》 권9가, 유우 옹립 시도는 진수의 본문이 적는다.↩
  2. 2196년의 조서와 원소의 상서, 태위 사양과 대장군 양보는 범엽 《후한서》 권74상 〈원소전〉에 있다. 대장군 양보는 진수 〈무제기〉 본문과 《헌제춘추》(배주51)도 적는다. 191년 음력 7월 기주를 넘겨받은 일은 진수 〈무제기〉가 적는다. 《후한서》는 해만 적는다.↩
  3. 3천자의 말은 《후한서》 권72와 원굉의 《후한기》 권29에 있다. 두 책 모두 순서가 같다 — 조조의 상주, 한섬의 도주, 천자의 사면.↩
  4. 4복완과 조언의 일은 《후한서》 권10하 〈황후기〉가 적는다. 200년 원소 진영의 격문도 조조가 조정이 상을 내린 사람을 마음대로 잡아 죽였다고 공격했다. 동승 일당의 처형일은 《후한서》 권9의 건안 5년 정월 임오일이다.↩
  5. 5《후한서》 권74상 〈원소전〉. 문을 지키게 한 일은 배송지 주가 옮긴 《영웅기》에도 있다.↩
  6. 6《삼국지》 권6 〈원소전〉 본문. 말한 사람은 한복의 장사 경무와 별가 민순, 치중 이력이다.↩
  7. 7〈무제기〉는 이 의논을 건안 원년 정월 조, 천자가 하동에 있던 때에 두고 그 뒤 조홍을 보냈다고 적는다. 이 블록은 천자가 낙양에 돌아온 뒤로 적는 〈순욱전〉의 시점을 따른다. '여름'이라는 계절은 어느 기록에도 없다.↩
  8. 8궁정 사관의 연대기(앙바르 판 p.41). 록하트(p.23)는 이를 하부샨 쿠르드 일부의 말로 옮기고, '이기면 이득은 나디르가 다 가져간다'는 논리로 풀었다. 레자 쿨리 한은 혼자 두 번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경질되었다.↩
  9. 9〈선주전〉(권32), 〈무제기〉 본문과 배송지 주, 범엽 《후한서》 권9. 옷띠 속 밀조라는 말은 〈선주전〉에만 있다. 218년의 거병은 조조가 위왕이 된 뒤의 일이다.↩
8장

군대를 먹인 장부

남은 7천 석

1363년 2월 15일, 음력 2월 초하루에 주원장은 장수들에게 둔전의 영을 다시 밝혔다. 명의 실록이 옮긴 영에 따르면, 장수들에게 땅을 나누어 둔전을 시킨 지 몇 해가 지나도록 성과가 보이지 않았다. 강무재의 둔전만이 곡식 1만5천여 석을 거두어 군량으로 대고도 7천 석이 남았다. 땅과 힘이 같은데 거둔 양이 갈린 까닭을 그는 사람의 부지런함에 돌렸다.

곡식은 장부에 남는다. 장부에는 날짜가 있다. 군대를 먹인 기반이 언제 섰는지를 날짜로 적을 수 있다면, 그 날짜를 결정권이 넘어온 때와 견줄 수 있다. 군량을 쥔 손이 한 짝 안에서 달리 적혔다면, 같은 날짜 경계와 같은 증거 기준을 대도 그 차이는 다른 사람들에게서 가려지나.

판별은 두 날짜를 같은 기준으로 견줄 수 있는 데까지만 선다. 견주는 날짜는 둘이다. 하나는 그의 기반이 선 날이다. 다른 하나는 상급자가 그의 결정을 더는 뒤집지 못하게 된 구간이 시작하는 가장 이른 날이다. 기준은 그 앞의 시간에 댄다. 그의 쪽 밖에서 나온 기록이 그 앞의 시간을 구간마다 빈틈없이 덮는지를 본다.

기록을 셀 때는 같은 원천에서 옮겨 온 기록을 몇 권이든 한 갈래로 센다.

이 기준으로 보면 네 사람에게는 기반이 먼저 선 기록이 저마다 있다. 상급 권력을 넘겨받는 한 사건으로 그 자리에 닿은 사람도 같은 시대에 셋 기록돼 있다. 그 셋 가운데 그 전에 자기 기반이 없었다는 데까지 기준을 견디는 사람은 하나다. 그것도 한 갈래의 기록에 기댄다.

앞선 기반과 넘겨받은 자리

네 사람의 앞선 기반은 이렇다. 조조의 192년 연주, 주원장의 1355년 7월 태평, 나디르의 1729년 12월 징세권, 나폴레옹의 1796년 분담금이다.1 사례는 넷이다. 그 자리에 닿지 못한 사람과 견준 것은 아니다.

넘겨받아 닿은 셋은 이렇다. 원소는 191년 음력 7월 직속 상급자 한복의 기주를 넘겨받았다. 동탁은 189년 황제의 몸과 수도의 병권과 무고를 한꺼번에 쥐었다. 아슈라프는 1725년 4월 22일 감옥에서 왕으로 맞아진 뒤 마흐무드의 궁전을 무력으로 취했다. 셋 다 상급 권력의 근거지나 몸이나 중앙 기구를 넘겨받은 한 사건이 곧 그 자리에 닿은 때였다.

그 전에 자기 기반이 없었다는 것까지 기록이 덮는 사람은 원소 하나다. 같은 기준을 대면 그의 189년부터 191년까지가 구간마다 덮인다. 189년 하반기의 그는 동탁과 부딪친 뒤 기주로 달아났다. 발해태수가 되기까지 그가 땅이나 병력을 쥐었다는 기록은 없다. 발해태수 시절의 감시, 거병 뒤의 군량 삭감, 191년 한복 쪽 관리들의 말이 그다음 구간들을 덮는다. 191년의 그 말은 그 시점만 덮는다.

가장 약한 구간은 190년부터 191년까지 한복이 그의 군량을 쥐고 깎던 때다. 그 구간은 범엽 《후한서》의 한 대목에 기댄다. 한 갈래다.

동탁은 이 기준을 넘지 못한다. 그의 보급이 조정에 달렸다는 말은 그 자신의 표와 상서에만 있다. 동탁은 표에서 장병이 굶주려 대각에 급료를 달라고 했다고 썼다. 《영제기》가 적는 것은 그의 병사가 조정의 군영 소속이었다는 것과 그가 조칙을 두 번 어겼다는 것이다.2

아슈라프에게는 이 기준을 댈 자리가 없다. 그의 기록은 그가 권좌를 쥔 날부터 이 비교에 들어온다. 그 전 몇 해의 도주와 구금을 적은 기록은 각자의 시점만 적는다. 그 기록들로는 그 전에 그의 기반이 있었는지 정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군량을 쥔 손의 대비는 원소 한 사람 수준에서만 같은 기준을 견딘다.

기반이 선 뒤에도 상급자가 결정을 뒤집은 기록이 있다. 나디르는 1729년 12월 군 급료를 위해 나라 곳곳에서 돈을 거둘 권한을 받았다. 1731년 그가 동부에 있는 동안 샤는 그가 앉힌 타브리즈 지사를 갈았다. 1732년 1월 샤는 오스만과 강화를 맺었다. 징세권과 강화는 그의 진영 밖에 있던 동인도회사 주재관 코켈이 적는다.3 그가 곁에 없을 때 샤의 번복은 아직 살아 있었다.

장부의 행

네 사람의 장부를 같은 칸에 놓으면 이렇다. '구간'은 상급자가 그의 결정을 더는 뒤집지 못하게 된 구간이다. 마지막 열은 같은 기반으로 진 날이다.

사람기반이 선 날장부에 남은 행구간이 시작하는 가장 이른 날행을 적은 기록같은 기반으로 진 날
조조192년 연주196년 둔전 곡식 100만 곡, 200년 관도의 군량 수송196년 음력 8월(서기 9~10월) 뒤위의 관찬 《위서》와 진수의 〈임준전〉208년 적벽
주원장1355년 7월 태평태평 창고의 배급, 1358년 영전사, 1363년 둔전 곡식 1만5천여 석, 소금 교역1355년 10월 22일명 쪽 기록 — 실록·《명사》·『천황옥첩』, 그리고 유진1363년 여주(석 달 공략을 마치지 못함)
나디르1729년 12월 징세권1732년 테헤란의 5만 토만, 1733년 하마단의 20만 토만1732년 1월 10일징세권은 진영 밖의 코켈, 토만 수는 궁정 사관 하나1733년 7월 바그다드
나폴레옹1796년 분담금롬바르디아 2천만 프랑, 교황령 2,100만1798년 4월 12일 뒤그 자신의 서한(서한집 453·685번)과 2011년의 연구서 『이탈리아 방면군』1798–99년의 함대와 아크레
원소그 전의 기반 없음한복이 문을 지키고 군량을 깎음191년 음력 7월《후한서》 권74상 한 대목, 진수 본문—

주원장의 장부는 행이 가장 촘촘하다. 1355년 7월 태평에 들어간 그는 창고의 곡식을 자기 지휘를 듣는 자에게 주겠다고 했다고 『천황옥첩』은 적는다. 1358년 그는 강무재를 영전사로 두었다. 실록은 그 직무를 제방과 수리로 적는다. 장사성의 땅과 맞닿은 경계에서 소금을 교역했다는 것은 유진의 『국초사적』이 적는다. 대부분 명 쪽 기록이다.

그 장부의 값은 군대를 댄 고을이 치렀다. 건강을 얻은 뒤 그는 태평을 비롯한 다섯 부의 민호를 군으로 뽑아 썼다. 즉위한 뒤 그는 다섯 부의 가을 세금을 영구히 면제했다고 유진은 적는다. 《명사》는 1367년의 조세 면제를 공급이 오래 번거로웠기 때문이라고 적는다.

명 쪽 기록 하나에만 기대는 행도 있다. 상급자를 거치지 않은 분배가 처음 적힌 것은 실록의 저주 대목이다. 저주에서 그는 얻은 것을 하나도 갖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나누었다는 기록이다. 다른 장수들은 얻은 것을 곽자흥에게 바쳤다고 같은 실록은 적는다. 실록은 이 대목에 해를 적지 않는다. 갑오년(1354) 정월 기사 앞에 둘 뿐이다.

이 행을 넣으면 그의 분배는 1353–54년에 선다. 이 행을 빼면 그 날은 1356년 뒤로 늦춰진다. 다섯 부의 민호를 군으로 뽑아 쓴 일과 소금 교역을 적은 유진의 기록이 그때 첫 행이 된다.4

조조의 장부는 위의 관찬과 진수가 적는다. 그의 둔전은 194년의 기근에서 두 해 뒤에 섰다. 196년 허의 둔전은 그해 곡식 100만 곡을 거두었다. 이 수는 위의 관찬 《위서》와 진수의 〈임준전〉이 함께 적는 수다. 관도에서는 임준이 수레 천 대를 한 부로 묶어 열 갈래로 나란히 군량을 날랐다.

나디르의 장부에서 진영 밖 기록이 직접 적는 것은 징세권이다. 그 뒤의 토만 수는 궁정 사관 하나가 적는다. 하마단에서 잃은 말이 10토만짜리면 20토만짜리를 주었다는 말도 사관의 것이다. 징세권의 값은 이스파한이 치렀다. 1730년 2월 동인도회사 곰브룬 상관의 일지는 군 급료로 거두라 한 돈을 걷는 동안 몇 사람이 매를 맞다 죽었다고 적는다.

나폴레옹의 장부는 처음에 점령지에서 채워졌다. 1796년 4월 22일 그는 약탈을 금하는 명령을 냈다. 그의 분담금은 거둔 액수가 아니라 매긴 액수와 약정한 액수다. 1796년 가을 재정 관리자 알레르가 나타난 뒤 정부 감독관들이 재정에서 밀려났다고 2011년의 연구서는 적는다. 같은 해 10월 말 총재정부는 여전히 감독관과의 협의를 조건으로 달았다.

네 장부의 행은 서로 다른 쪽의 기록이 적는다. 조조의 행은 위의 관찬과 진수가, 주원장의 행은 명 쪽이 적는다. 나디르의 징세권은 진영 밖의 주재관이, 나폴레옹의 액수는 그 자신의 서한과 현대의 연구가 적는다. 같은 칸에 놓였지만 같은 무게로 선 행은 아니다.

같은 기반으로 진 날도 장부의 한 열이다. 네 사람 각각에게 그런 날이 있다. 조조의 적벽, 주원장의 여주 공략 실패, 나디르의 1733년 바그다드 대패, 나폴레옹의 함대 상실과 아크레 철수다. 사례는 넷이다. 네 사람 각각에게서 기반은 성과를 한 방향으로만 낳지 않았다.

안풍으로 가는 주력

응천은 1356년 그가 집경을 떨어뜨리고 이름을 고친 기반이다. 둔전과 소금 교역과 민병의 장부가 그곳을 중심으로 돌았다. 장부의 행이 무엇을 지키는지는 주력을 어디에 둘지 정하는 자리에서 드러난다. 1363년 초 장사성의 장수 여진이 안풍을 에워싸자 송 쪽이 주원장에게 위급을 알려 왔다. 《명사》는 한림아가, 『국초사적』은 유복통이 청했다고 적는다. 둔전의 영을 다시 밝힌 이튿날인 2월 16일 여진은 성에 들어갔다.

실제 갈래에서 진우량은 1363년 음력 4월 홍도를 에워싸 85일 동안 쳤다. 그동안 그의 주력은 안풍에 이어 여주로 나가 있었다.

세 사람의 장부

장사성과 진우량도 상급자가 더는 뒤집지 못하는 자리에 직접 닿았다. 장사성은 1353년 원이 만호의 고신으로 그를 부르자 받지 않았다. 진우량은 1358년 주군 서수휘가 용흥으로 도읍을 옮기려 하자 따르지 않았다. 서수휘는 하는 수 없이 그쳤다고 명의 실록은 적는다.

두 사람의 장부는 다르게 남았다. 장사성의 장부에는 행이 있다. 평강에 들어간 1356년 그는 추밀원을 세우고 백사를 두었다고 실록은 적는다. 원의 태위가 된 뒤인 1358년, 그의 막료 진기는 태위가 어진 이를 부르는 데 옥백과 수레와 말을 아끼지 않았다고 썼다.

장사성은 1357년 원에 항복해 태위가 되었다. 그 뒤 원에 해운 곡물 11만 석을 바쳤다고 《명사》는 적는다. 1363년 그는 스스로 오왕이 되었다. 《원사》 〈순제기〉는 그해 원이 해운을 징발하자 그가 내주지 않았다고 적는다.

진우량의 기반은 강주였다. 《명사》는 강주를 그의 치소라 적는다. 그 치소가 언제 섰는지, 그가 급료를 어디서 주었는지는 같은 책도 적지 않는다.

주원장의 장부에는 남의 몫도 적혔다. 유복통의 장수들이 여러 길로 나가 중원이 크게 어지러웠으므로 그가 강표를 차례로 평정할 수 있었다고 《명사》는 적는다. 같은 책의 찬은 그가 송의 힘을 빌렸다고 평한다.

이탈 전에 권한이 쌓인 기록은 셋 다 있다. 그 사실만으로는 1363년과 1367년의 서로 다른 패망을 설명할 수 없다.

기반이 먼저 선 뒤에도 상급자의 번복이 남았다면, 그 번복이 끝난 날은 칭호가 온 날과 같았는가?

주

  1. 1나폴레옹의 구간이 시작할 수 있는 가장 이른 때는 1798년 4월 12일 뒤다. 총재정부가 그를 동방군 사령관에 임명하며 진급권을 위임한 날로, 그에게 닿은 상급자 문서 가운데 통제가 확인되는 마지막 날이다. 그 뒤 그가 상급자의 거부에서 벗어났다는 판단은 그의 쪽 기록에만 기댄다.↩
  2. 2동탁의 표는 어환의 《전략》이, 상서는 범엽 《후한서》 권72가 싣는다. 《영제기》는 유애가 쓴 책으로 배송지 주의 인용으로 전한다.↩
  3. 3코켈의 「Account」(프레이저 『The History of Nadir Shah』 1742, pp.99–100·103). 프레이저 판은 이스파한 입성을 1730년으로 찍는다. 1729년 12월은 동인도회사 곰브룬 상관 일지에 따른 날짜다(록하트). 지사 교체는 궁정 사관이 적는다(록하트 p.55).↩
  4. 4그 자신의 쪽 기록만으로 선 행을 모두 빼면, 임명과 급료와 결정 세 권한이 그에게 와 있던 때는 1355년 7월에서 1356–60년 사이로 늦춰진다.↩
  5. 5원문의 날짜는 3월 1일 신축일이고, 안풍이 떨어진 날은 2월 계유일이다. 서기는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9장

무간의 회의

일곱 사자의 전갈

1736년 2월 무간의 들판에 지역별로 모인 대표단에게 일곱 사자가 와서 전갈을 전했다. 누구를 원하는지 의논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늙고 지쳐 호라산의 성채로 물러가려 한다는 말이 붙었다. 대표단은 한목소리로 그를 원한다고 답했다. 이 장면은 그 진영에 있던 아르메니아 총대주교 아브라함이 적는다.

대표단이 그에게 내민 것은 칭호였다. 그 칭호가 온 날은 결정권이 그에게 넘어온 때와 같았나.

같지 않았다. 이 책에서 최종 결정권은 상급자가 그의 결정을 더는 뒤집지 못하게 된 구간이다. 칭호를 받은 날과는 따로 적는다. 나디르 한 사람 안에서 세 날짜가 따로 선다. 권한이 먼저 왔다. 그다음이 구간, 마지막이 칭호다.

세 날짜

권한은 하급 지휘관을 갈고 세우는 일, 전쟁을 정하는 일, 상급자의 해임 명령을 무효로 만드는 일이다. 해임 명령은 1727년 말 마슈칸 성 앞에서 무효가 되었다. 전쟁의 결정도 그해 말의 일이다. 이 둘은 궁정 기록이다. 같은 궁정 기록은 마슈칸 직후 그가 샤에게 다시 통치를 맡겼다고도 적는다.

하급 지휘관을 갈고 세운 일은 핸웨이가 1726~27년의 일로 적는다. 1726년 10월의 자리들은 궁정 사관 원문에 누가 맡겼는지 없이 '맡겨졌다'로만 남는다.1 그의 진영 밖 기록으로는 권한이 온 때가 1729년 12월이다. 동인도회사 주재관 코켈과 예수회의 보고가 그 무렵의 일로 적는다.

권한이 온 때에서 칭호가 온 날까지는 궁정 기록으로 여덟 해 남짓, 진영 밖 기록으로 여섯 해 남짓이다.

상급자가 그의 결정을 더는 뒤집지 못하게 된 구간은 1732년 1월부터 9월 사이다. 구간의 앞끝은 그가 동부에 있는 동안 샤가 오스만과 맺은 강화다. 샤가 그의 길을 마지막으로 뒤집은 일이다. 뒤끝은 1732년 8월 31일 또는 9월 2일의 샤 폐위다. 그 구간을 한 날로 줄이지 않는다.

1732년 6월 콘스탄티노플의 영국 대사 킨눌은, 샤가 바그다드의 아흐마드 파샤에게 그를 다스릴 힘이 없다고 썼다는 급보를 보냈다. 킨눌 자신은 그것이 오스만과의 강화를 깨려는 샤의 정치적 핑계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그 말은 구간의 근거로 쓰지 않는다. 7월 코켈은 샤가 개전에 전적으로 반대하지만 막을 힘이 없다고 보고했다.

구간의 시작은 바깥의 사건들과 겹친다. 샤의 친정과 패전과 강화가 있었다. 1732년 3월에는 오스만의 강화파 대재상이 물러났다. 그 사건들이 그를 그 자리에 올려놓은 것으로 읽을 근거는 약하다. 그 전에 이미 권한 넷이 그에게 와 있었다. 진영 밖 기록만으로 세면 둘이다.

칭호는 그 뒤에 왔다. 그는 1736년 2월 무간에서 샤의 칭호를 받아들였다. 대관은 3월 8일이었다. 구간이 끝나고 3년 6개월쯤 지나서다. 칭호가 온 날은 여러 갈래의 기록이 함께 적는다. 구간은 예수회 쪽 기록과 코켈의 기록, 두 갈래가 받친다.

그 사이 그의 이름과 직함은 여러 번 바뀌었다. 그가 받은 이름은 '타흐마스프의 종'이었다. 그 이름을 받은 때부터 기록이 갈린다 — 셰이크 하진의 회고록은 1726년의 마슈하드 포위 중으로, 코켈은 1729년 메흐만두스트의 승리 뒤로 적는다. 1730년 그가 맡은 호라산의 주화는 그의 이름이 아니라 이맘 레자의 이름으로 찍혔다. 1732년 6월의 와크프 문서는 그를 호라산 지사, 이란 땅의 명령권자라 부른다.2 1732년 9월부터 그는 섭정이었다.

나라의 명의는 끝까지 사파비의 것이었다. 1732년 9월부터 기도와 주화는 아기 샤 아바스 3세의 이름으로 나갔다. 기도와 주화에 그의 이름이 오른 것은 무간 뒤다.

1727년은 구간의 시작이 아니다. 1727년 말 마슈칸 성 앞에서 해임 명령서가 무효가 된 일, 1729년 12월 샤가 그를 해임하려다 그만둔 일은 그의 곁에서 시도된 번복이 실패한 사건이다. 그가 곁에 없을 때 샤의 번복은 1732년 1월까지 살아 있었다. 이 날짜들은 나디르 한 사람의 것이다.

실제 경로에서 그는 강화를 거부했다. 코켈은 그가 6만이 넘는 군대를 이끌고 이스파한에 이르렀다고 적는다. 구간의 앞끝이 재는 것은 이 일이다. 상급자가 맺은 결정을 그가 뒤집은 일이다.

들판의 대표단

무간의 소집은 1735년 여름에 시작되었다. 그가 각지에 통치의 규범을 세우겠다는 명령서를 보냈다고 동인도회사 곰브룬 상관의 일지는 적는다. 무간으로 부르는 명령서는 그 뒤에 따로 나갔다. 궁정 사관에 따르면 그 명령서는 지사와 우두머리, 카디와 울라마와 명사를 왕국의 일을 의논하라며 불렀다. 명령서를 받은 사람들 사이에는 추측만 돌았다. 아르메니아 총대주교 아브라함은 그 이유를 아무도 확실히 모른다고 적었다.

아브라함은 그 앞 티플리스에서 이미 교회의 특권을 담은 명령서를 서른다섯 통 넘게 얻어 둔 터였다. 진영은 크게 지어졌다. 궁정 사관은 목조와 갈대 건물 1만 2천 동을 짓게 했다고 적는다. 아브라함은 칸들을 위한 갈대 오두막을 500여 채로 센다.

친위대 6천과 헌병이 질서를 맡았다. 강화를 교섭하던 오스만의 사절과 러시아의 주재관도 진영에 있었다. 1736년 1월 22일 나디르가 진영에 이르렀다. 그 뒤 날마다 어전 회의가 열렸다.

아브라함에 따르면 바이람 이튿날 대표단은 60명에서 100명씩 지역별로 들판에 모여 왜 불렀는지를 함께 따졌다. 사흘째 그들은 맨 풀밭에 앉았다. 첫머리의 전갈을 가져온 일곱 사자 가운데에는 미르자 자키와, 일찍부터 그의 곁에 남은 잘라예르의 우두머리 바킬 타흐마스프 한이 있었다.

그가 대표단 앞에 내민 선택은 네 기록이 옮긴다. 궁정 사관의 연대기에서 그는 신임하는 사람들을 거쳐 이렇게 전한다. “샤 타흐마스프와 샤 아바스 두 왕과 그들의 왕자가 요람과 옥좌에 살아 있다. 그들이든, 왕관에 걸맞다고 여기는 누구든 세워 다스리게 하라.”5

마르비의 기록에서는 타흐마스프를 샤로 고르라고, 그가 아니면 다른 사파비를 고르라고 한다. 코켈이 전해 들은 말에서는 샤 타흐마스프든 다른 누구든 고르라고 한다. 아브라함의 기록에는 누가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하느냐는 물음만 있고 사파비의 이름이 없다. 문구는 갈리지만 사관과 마르비와 코켈의 판은 서로 가깝다. 대표단이 그를 샤로 추대했다는 데서는 궁정 사관과 아브라함과 코켈과 예수회 쪽의 기록이 같다.

2월 16일 대표단 앞에서 세 조건이 낭독되었다. 아브라함에 따르면 읽은 사람은 바킬 타흐마스프 한이었다. 아브라함이 옮긴 첫 조건은 샤의 아들이 나타나도 편들지 말고 가두라는 것이다. 현장에 없던 코켈이 전해 들은 세 조건은 왕관의 세습, 옛 왕가를 위해 무기를 들지 말 것, 종파의 통일을 논의하는 모임을 열 것이다.6

코켈에 따르면 앞의 두 조항은 대표단이 선뜻 받아들였다. 셋째 종파 조항에는 대표단이 머뭇거렸다. 몰라바시는 그 조항에 반대했다. 오스만 쪽은 그해 가을 콘스탄티노플 교섭에서 이 조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금요일 그는 사양했다. 아브라함은 그의 말을 이렇게 옮긴다. “여럿이 까닭 있어 나를 싫어함을 안다. 나는 궁전을 여럿 부수고 여럿의 목숨을 빼앗았다 ….” 칸들은 권위와 군의 명예가 그것을 요구했다고 답했다.7 이어 그는 받아들였다.

코켈이 전해 들은 수락의 말에서 그는 백성의 소리를 신의 소리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대표단은 사흘에 걸쳐 서약의 두루마리에 날인했다. 호라산에서 시작해 아제르바이잔을 거쳐 아라라트 사람들로 끝났다. 날인이 끝나자 예복이 내려졌다. 서약의 두루마리는 그 개인 앞으로 받은 맹세였다. 대표단이 날인한 것은 왕위를 받아 달라는 청과 세 조건이었다.

이 회의의 순서를 날마다 목격자로서 적은 것은 아브라함이다. 궁정 사관과 마르비와 코켈도 순서를 적지만 서로 다르다.

인사도 그 자리에서 났다. 동생 이브라힘은 아제르바이잔 전역의 총독이 되었다. 헤라트의 피르 무함마드는 예레반을 받았다. 나디르는 그를 곁에 두고 대리를 보냈다.

몰라바시의 죽음은 두 갈래가 다르게 적는다. 마르비에 따르면 몰라바시는 자기 천막에서, 사파비 왕조를 해치려는 자는 자손이 세상에 남지 않으리라고 말했다. 그는 첩자의 밀고로 이튿날 어전에서 교살되었다. 코켈에 따르면 그는 회의에서 셋째 조항에 반대했다가 목 졸려 죽었다. 핸웨이는 코켈을 옮기며 활시위를 더한다. 무간에 있던 아브라함은 이 일을 적지 않는다.8

대표의 수도 기록마다 다르다. 모흐센은 2만, 궁정 사관은 10만, 바쟁은 1만 5천, 코켈은 6천 남짓으로 적는다.

칸이 된 뒤의 공물

테무진이 1206년 칸의 칭호를 받은 뒤에도 금과의 조공 관계는 이어졌다고 몽골 궁정 밖의 기록은 적는다. 남송의 재야 학자 이심전이 1216년에 엮은 책의 〈달단관새(韃靼款塞)〉에 따르면, 1211년 봄 그는 공물을 바치러 왔다. 금의 윤제가 그를 습격하려다 일이 드러났다. 그해 가을 달단이 처음 배반했다.

같은 책의 〈여진남사(女真南徙)〉는 그해 음력 3월의 일을 더 자세히 적는다. 금은 공물을 받는 자리에서 그를 습격하려 했다. 그 계획이 새어 그는 머뭇거리며 들어가지 않았다(遷延不進). 싸움은 그해 음력 7월에 시작되었다.9

그의 칭호가 온 날은 바깥 상급자와의 관계가 끝난 날과 같지 않았다.

왕관을 먼저 쓴 사람

말레크 마흐무드도 상급자가 더는 뒤집지 못하는 자리에 닿았다. 그는 카야니 왕조와 사파르 왕조의 후손을 자처했다. 1720년 툰의 지사였던 그는 샤의 권위를 무시했다. 1720년부터 이듬해까지 파트알리 한 카자르가 툰을 에워쌌지만 그를 꺾지 못했다. 사파비 쪽이 보낸 장군 레자 쿨리 한 샴루는 그를 두 번 쳤다가 두 번 지고 경질되었다.

1723년에서 이듬해 사이 그는 마슈하드를 차지하고 카야니 왕관을 썼다. 자기 이름으로 주화를 찍고 지사와 장군을 임명했다. 니샤푸르의 주민이 그에게 항복했다. 그가 앉힌 사람 가운데 조카 이스학은 장군이었다. 피르 무함마드는 총사령관이었다.

이 일은 궁정 사관의 연대기가 적는다. 인도의 카슈미리는 그가 마슈하드를 차지해 통치의 자리에 앉았다는 데까지 함께 적는다. 셰이크 하진은 그가 주화와 기도의 주인이 되었다는 데까지 함께 적는다.10 그가 왕관을 쓰기 전에 집회나 추대가 있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의 날짜를 그 사람 안에서 놓으면 이렇다. 상급자의 권위를 무시한 해는 1720년이다. 왕관과 자기 이름의 주화는 1723년에서 이듬해 사이에 왔다. 그의 왕관도 그 자리보다 뒤에 왔다.

1726년 12월 그의 총사령관 피르 무함마드가 성안에서 호응해 그는 마슈하드를 잃었다. 피르 무함마드는 사파비 쪽에서 잠의 지사 자리와 술탄 칭호를 받았다. 이 내응은 궁정 사관이 적는다.11 그는 이듬해 죽었다. 그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나디르가 샤의 관을 쓴 날(1736년 3월 8일)은, 그가 동부에 있는 동안 샤가 오스만과 강화를 맺은 달(1732년 1월)에서 4년 남짓 뒤였다.12

주

  1. 1그가 그 자리들을 앉혔다고 읽은 것은 존스의 1770년 프랑스어역과 록하트다.↩
  2. 2직함은 록하트가 사본으로 본 문서의 로마자 전사와 페르시아어 전사가 같다. 이름은 두 전사가 다르게 적어 여기 쓰지 않는다.↩
  3. 3날은 록하트(pp.55–57)가 모흐센에 따라 적은 것이다. 궁정 사관과 코켈은 날을 적지 않는다. 오스만 쪽 날짜는 폰 하머가 옮겼다.↩
  4. 4앙바르 판 p.174. 록하트(p.59)는 소식이 헤라트에서 파라로 가는 행군 중에 닿았다고 적고, 봄베이 판 p.104를 근거로 단다. 이 블록은 사관의 원문을 따른다.↩
  5. 5앙바르 판 p.268. 존스의 1770년 프랑스어역(제2부 4책 pp.3–4)은 이 대목을 “그 혈통의 왕자들이 왕좌의 상속자다”로 옮겼다.↩
  6. 6아브라함의 연대기(브로세 프랑스어역 2권 pp.299–302)와 코켈의 「Account」(프레이저 1742, pp.114–117). 낭독일은 아브라함의 율리우스력 2월 5일을 그레고리력으로 바꾼 것이다.↩
  7. 7브로세 p.301. 아르메니아어 기록을 다시 프랑스어로 옮긴 문장이다. 대화는 튀르크어로 오갔을 수 있다. 장면은 목격자의 기록이고, 문장은 옮기는 사이에 다듬어졌을 수 있다.↩
  8. 8마르비는 리야히 판 2권 p.455다. 그 사본은 몰라바시의 이름을 '아볼하산'으로 적는데, 편자는 이 이름이 원래 필경사의 손이 아니라고 적는다. 코켈은 프레이저 pp.115–118, 핸웨이는 4권 pp.124–127이다. 핸웨이는 코켈을 문장 단위로 따른다.↩
  9. 9이심전 『건염이래조야잡기』 을집 권19. 《원사》 〈태조본기〉는 남정을 그해 2월로 적는다. 금과의 관계가 끊긴 일은 1210년조에 적어 1년이 어긋난다.↩
  10. 10궁정 사관의 연대기(존스 프랑스어역 I pp.22–25), 카슈미리의 『바야네 바케』(나심 편 p.8), 셰이크 하진의 회고록(벨푸어 영역 p.173). 해는 록하트의 추산이다.↩
  11. 11존스 프랑스어역 I p.40(내응)과 p.41(보상). 록하트(p.27 주2)는 모흐센의 책도 출처로 단다.↩
  12. 12강화의 날 1732년 1월 10일은 록하트 pp.55–57을 따랐다. 바쟁은 나디르가 이 강화에 동의했다고 적는다. 이 진술을 받치는 다른 기록은 없다.↩
3부
남은 질문
10장

네 사람의 기록이 말하는 것

왕으로 죽은 사람

“만약 천명이 내게 있다면 나는 주 문왕이 되겠다”(若天命在吾,吾爲周文王矣). 손성의 《위씨춘추》 한 책이 전하는 조조의 말이다. 그는 한이 내린 위왕의 칭호를 지닌 채 220년에 죽었다. 그 칭호는 위 쪽 기록과 한 조정 쪽 기록이 함께 적는다. 그는 형식을 벗지 않고도 상급자가 더는 뒤집지 못하는 자리에 닿았다. 형식을 벗는 일이 그 자리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은 이 한 사람 앞에서 서지 않는다.

네 사람과 그 주변 인물의 기록을 함께 놓으면 무엇을 말할 수 있나.

이 자료에서 누구에게나 서는 법칙은 확인되지 않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넷이다 — 범위를 붙인 순서 하나, 칭호와 형식 이탈 쪽의 반증 둘, 칭호의 시점, 경로를 적는 두 축. 다섯째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왜 누구는 부하로 남았나는 이 기록으로 시험되지 않았다.

말할 수 있는 넷

첫째는 범위를 붙인 순서 하나다. 형식 밖으로 선 사람 가운데, 이탈 직전까지 상급 권위의 직위와 명의를 지닌 사람들에서는 임명·급료·결정 같은 권한의 이동이 형식 이탈보다 먼저였다. 이 범위에 드는 사람 가운데 상급자의 거부에서 벗어난 때가 그의 쪽 밖의 기록으로도 서는 사람은 다섯이다. 그 다섯 가운데 서로 옮기지 않은 두 갈래의 기록으로 이 순서가 남는 사례는 셋이다. 나디르와 장사성과 진우량이다.

세 사람에게서 권한은 몇 단계를 거쳐 옮겨 갔다. 나디르는 1729년 12월 징세권을 받았다. 1732년 샤가 폐위된 뒤 그는 섭정이 되었다. 1736년 무간의 서약을 받고 그는 샤가 되었다.

장사성은 원의 관작 아래에서 임명과 급료와 결정과 맹세를 쥐었다. 《원사》 열전에 따르면 1363년 그가 왕의 작위를 요구하자 원의 승상 달식첩목이가 조정에 거듭 문서를 올렸다. 회답이 없자 그는 스스로 오왕이 되었다.

진우량은 1358년 주군 서수휘의 천도를 막았다. 1359년 말 그는 강주에서 서수휘의 부하를 모두 죽이고 서수휘를 받들어 살게 했다. 그 뒤 서수휘는 빈자리만 지켰다. 1360년 그는 서수휘를 죽이고 황제를 칭했다.

권한의 이동이 형식 이탈보다 앞선 거리는 진우량이 1년에서 2년, 장사성이 6년 넘게, 나디르가 6년에서 8년이다.

나폴레옹도 분류상 이 범위에 든다. 그가 상급자의 거부에서 벗어났다는 판단은 그의 쪽 기록만 남아 이 셈 밖이다. 현재 못 닿은 사람 일곱에는 형식 밖으로 선 사람이 없어, 이 순서를 그들과 비교하지 못했다. 이 순서는 도달한 사람과 못 닿은 사람을 가르는 설명이 아니다.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이 범위는 기록을 다 본 뒤에 그은 것이다. 결과와 상관없는 사건 기준으로 그었지만, 결과를 보기 전에 정한 기준은 아니다. 형식을 벗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순서를 대지 않는다 — 조조와 원소와 동탁과 유비와 발루치다. 이탈 직전에 직위와 명의가 이미 끊겨 있던 아슈라프에게도 대지 않는다. 역순으로 확인된 사례는 없다. 후보는 1차 기록 하나에 기대는 아슈라프다.

둘째는 반증 둘이다. 기존 권위의 칭호를 쓰는 일은 이 표본에서 도달 여부를 가르지 못한다. 그 칭호 없이 닿은 사람이 있다. 말레크다. 그 칭호를 쓰고도 못 닿은 사람도 있다. 사파비 아래의 장군 파트알리 한이다.

표본을 고른 방식과 제도 환경 때문에 그 칭호가 못 닿은 사람에게도 널리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단정하지는 않는다.

형식 이탈 쪽의 반증은 첫머리의 조조로 선다. 그 밖에 한 갈래의 기록으로 서는 사람이 넷 있다.

셋째는 칭호의 시점이다. 날짜가 있는 네 사람에게서 마지막 칭호는 상급자가 더는 뒤집지 못하게 된 구간 전체보다 뒤에 왔다. 이 사람들, 이 칭호에 한한다.

넷째는 경로를 적는 두 축이다. 순서의 축은 권한이 먼저 쌓인 쪽과, 상급 권력을 한 사건으로 넘겨받은 쪽 사이에 놓인다. 수단의 축은 자기 기반을 쓴 쪽과 남의 제도를 빌린 쪽 사이에 놓인다. 한 사람이 두 축에 걸친다. 두 축은 사람을 가르는 칸도, 필요조건도 아니다.

다섯째, 말할 수 없는 쪽의 까닭은 칸의 수에 있다. 못 닿은 사람 일곱의 권한 칸 스물여덟 가운데 확인된 칸은 하나다.

처음의 그림 — 성과가 사람과 자원을 모으고, 모인 것이 조직이 되고, 조직이 결정권이 된다 — 은 공통의 경로로 확인되지 않았다. 그 마지막 고리를 상급 권력을 넘겨받는 한 사건으로 지나간 사람이 셋 기록돼 있다. 그 가운데 그 전에 자기 기반이 없었다는 것까지 기록이 덮는 사람은 원소 하나다. 그것도 한 갈래의 기록에 기댄다. 이 결과가 네 사람 각각의 경로를 뒤집지는 않는다.

붙이는 이름

관찰로만 적던 것에 여기서 이름을 붙인다. 범위는 네 사람과, 같은 시대에 같은 자리를 다툰 주변 인물이다.

첫째의 순서는 '형식을 지닌 채 권한이 먼저 옮겨 간 경로'라 부른다. 순서의 축의 두 끝은 '이전 축적'과 '장악'이다. 수단의 축의 두 끝은 '자기 기반'과 '제도 차용'이다. 칭호의 시점은 한 줄로 줄인다. 칭호는 실효를 뒤따랐다. 이 사람들과 이 칭호에 한해서다.

이전 축적 쪽에는 조조와 주원장과 나디르, 장사성과 원술과 진우량이 있다. 장악 쪽에는 원소와 동탁과 아슈라프가 있다. 셋 다 상급 권력의 근거지나 몸이나 중앙 기구를 넘겨받은 일이 곧 그 자리에 닿은 때였다. 이 관찰은 그들에게 그 전 기반이 없었다는 판정과 다른 칸이다.

나폴레옹은 두 축에 걸친다. 순서로 보면 그는 권한이 먼저 쌓인 쪽이다. 수단으로 보면 그는 남의 제도를 빌린 쪽이다. 3년 헌법은 총재의 나이를 마흔 살 이상으로 정했다. 서른 살의 그에게 수도의 병력을 맡긴 것은 원로원 의결이었다. 그가 이탈한 날에는 중앙 기구를 무력으로 해산한 일까지 겹친다.

제도 차용은 그 한 건의 관찰이다. 그것도 그의 쪽 기록으로만 선다. 진우량에게도 두 일이 겹친다. 그는 권한이 먼저 쌓인 쪽이다. 이탈하던 날 그는 상급자 서수휘를 죽였다.

칭호와 실효 통제가 어긋난 방향에도 이제 이름을 붙인다. 네 사람에 한해 방향은 셋이다. 통제가 먼저 오고 칭호가 뒤따른 방향은 조조와 나폴레옹에게 있다. 조조의 칭호는 끝까지 한이 내린 왕이었다. 나폴레옹의 칭호는 헌법과 원로원 의결로 세 번 왔다.

남의 이름을 빌려 쓴 방향은 주원장에게 있다. 남의 이름이 곧 그의 칭호였던 방향은 나디르에게 있다.

구간과 칭호의 표

네 사람을 한 표에 놓는다. '구간'은 상급자가 그의 결정을 더는 뒤집지 못하게 된 구간이다. 마지막 열은 그 구간의 판단을 받치는 기록이다.

사람구간중간 칭호마지막 칭호형식 이탈구간 판단의 기록
조조196년 음력 8월(서기 9~10월) 뒤 ~ 200년 2월 11일승상 208, 위공 213위왕 216없음위 쪽 기록과, 그를 적대한 원소 진영·오나라 쪽 기록
주원장1355년 10월 22일 ~ 1366년 음력 12월(서기 1367년 1월)오왕 1364황제 1368년 1월 23일1366년 음력 12월(서기 1367년 1월) 선포, 오 원년 정월(서기 1367년 1월 31일)부터 시행. 송 명의 문서의 마지막 확인은 1366년 6월 29일 — 그 주의 판관이 방문을 받아 온 날이다. 낸 날은 그보다 앞서고 기록에 없다명의 실록 계열과 권형의 『경신외사』
나디르1732년 1월 10일 ~ 8월 31일 또는 9월 2일섭정 1732년 9월샤 1736년 3월 8일1736년 2월 무간의 수락동인도회사 주재관 코켈의 기록과 예수회 쪽 기록
나폴레옹1798년 4월 12일 ~ 1799년 11월 9·10일임시 통령 1799년 11월 10일, 제1통령 1799년 12월, 종신 통령 1802황제 1804년 5월 18일(원로원 의결)1799년 11월 10일그의 쪽 기록만1

형식 이탈 날짜가 있는 일곱 사람 — 주원장, 나디르, 원술, 진우량, 장사성, 말레크, 아슈라프 — 에서는 구간이 시작하는 가장 이른 날이 형식 이탈보다 늦지 않다. 아슈라프에게는 둘이 같은 순간이다. 나폴레옹은 그의 쪽 기록으로만 이 셈에 든다. 중간 칭호는 구간 안에도 있다. 주원장의 오왕은 1364년에, 나폴레옹의 임시 통령은 구간이 끝나는 날에 왔다.

명제마다의 판정

판정은 세 가지다. 유지는 정한 범위 안에서 선다는 뜻이다. 반증은 서로 옮기지 않은 두 갈래의 기록으로 선 반례가 있다는 뜻이다. 유보는 판정할 기록이 모자라거나 견줄 상대가 없다는 뜻이다.

명제판정범위와 한계반례와 후보기록의 갈래
형식을 지닌 채 권한이 먼저 옮겨 감유지(범위 안)이탈 직전까지 상급 권위의 직위와 명의를 지닌 사람. 범위는 기록을 본 뒤에 그었다. 못 닿은 사람과는 견주지 못했다역순으로 확인된 사례 없음. 후보는 범위 밖의 아슈라프두 갈래로 남는 사례 셋
기존 권위의 칭호를 씀반증그 칭호 없이 닿은 사람과, 그 칭호를 쓰고 못 닿은 사람이 있다. 도달한 사람과 못 닿은 사람을 가르는지는 유보말레크, 파트알리 한반례마다 두 갈래
형식 이탈반증이탈 없이 닿은 사람이 있다. 이탈이 구간 시작보다 늦거나 같은 때라 가르는 힘은 유보조조, 그 밖에 원소·동탁·유비·발루치조조는 두 갈래, 넷은 한 갈래씩
자기 기반이 먼저 섬유보그 자리에 닿은 사람 안에서만 시험된다반증 후보 원소, 반례 후보 동탁, 비교 밖 아슈라프원소는 한 갈래
임명·급료·맹세를 먼저 쥠유보못 닿은 사람 쪽에 견줄 칸이 없다없음—
마지막 칭호 직전의 동의 의례유보못 닿은 사람에게는 견줄 칭호가 없다반례 후보 원술. 조조의 영이 참칭 뒤의 권진과 사양을 적어 그 자리는 약해졌다—

유보로 남은 셋의 까닭은 하나가 아니다.

남은 사람들의 칸

부하의 기록도 같은 칸에 놓아 본다. 기록이 따로 서는 부하는 아홉이다. 조조 쪽의 순욱과 진궁, 나디르 쪽의 이브라힘 한과 타흐마스프 한 잘라예르와 발루치, 나폴레옹 쪽의 베르티에와 마세나와 오주로와 베르나도트다.

나폴레옹 쪽 넷은 권한이 놓인 자리가 같았다. 둘은 남았다. 둘은 다른 자리로 옮겨 간 뒤 그를 떠났다. 나디르 쪽에서 떠난 발루치도 확인된 칸인 임명과 명의는 남은 둘과 같은 쪽이었다.

동기가 적힌 사람은 떠난 쪽뿐이다. 진궁과 발루치다. 남은 사람들에게서는 동기를 적은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의욕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떠난 사람에게도 따른 행위의 기록은 있다. 진궁은 192년 조조를 연주로 맞자고 유세한 사람이었다. 발루치는 1730년 아슈라프에게 가던 오스만 술탄의 서한을 나디르에게 넘긴 사람이었다.

떠난 두 사람은 자기 이름을 내걸지 않았다. 진궁은 여포에게 갔다. 발루치는 폐위된 샤 타흐마스프의 이름을 내걸었다. 주원장 쪽 부하는 그들의 결정이 명 쪽 기록에만 있어 이 셈에 없다.

권한이 주인공 쪽에 놓였다는 것으로는, 이 아홉 가운데 누가 남고 누가 떠났는지가 갈리지 않았다.

주

  1. 1구간 앞의 1796년 5월부터 1797년 8월 사이에도 그는 총재정부의 분할 명령을 거두게 했다. 1797년 4월 레오벤의 예비 강화에는 총재정부를 대신해 혼자 서명했다. 8월에는 여단장 브륀을 제 명령으로 사단장급 장군으로 올렸다. 총재정부는 그 뒤인 1798년 4월에도 그를 동방군 사령관에 임명하며 진급권을 위임했다. 분할 철회와 임명은 『Correspondance inédite』 1권과 5권 pp.12–13의 총재정부 문서가, 예비 강화와 진급은 그의 서한집 3권이 적는다.↩
11장

버틴 것과 거둔 것

이긴 쪽의 기록으로 세운 답

이긴 사람의 기록으로 세운 답이라면, 그 답은 이긴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가. 앞 장의 답 앞에서 회의자가 먼저 던질 물음이다.

그 물음은 둘로 나뉜다. 앞 장의 답은 어디서 버티고 어디서 좁아지나. 그리고 읽은 것 가운데 무엇을 셈에서 거둬야 하나.

버티는 것은 범위를 붙인 순서 하나와 반증 둘이다. 순서는 그 범위 안에서 버틴다. 반증은 칭호 쪽과 형식 이탈 쪽에 하나씩이다. 유보로 남는 것은 셋이다. 기반이 먼저 섰다는 것, 마지막 칭호 앞의 동의 의례, 임명과 급료와 맹세를 먼저 쥐었다는 것이다.

유보를 낳은 빈칸의 상당 부분은 조사가 모자라서 생긴 것이 아니다. 기록이 남은 생김새에서 생겼다. 부하로 남거나 실패한 사람의 임명과 급료와 맹세는 대개 이긴 쪽의 기록에만 남는다.

거두는 것도 하나 있다. 테무진의 삶에서 읽은 네 장면을, 서로 옮기지 않은 기록으로 검증된 비교의 근거로 쓸 수 있다는 판단이다. 네 사건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남은 판정은 두 사람의 기록이 전해진 길 위에 여유 없이 서 있다.

반론 1 — 이긴 쪽이 나중에 쓴 순서

“서수휘가 임금이었으나 권력은 모두 예만자에게 있었다 … 진우량이 그를 죽이자 대권이 모두 진에게 돌아갔다”(大權悉歸於陳). 원말의 견문을 실록과 따로 적은 엽자기의 『초목자』 문장이다. 진우량이 상관 예문준, 곧 예만자를 죽인 것은 1357년이다. 서수휘를 죽이고 황제를 칭한 것은 그 세 해 뒤다.

권한이 먼저 쌓였다는 이야기는 이긴 사람의 기록이 뒤에 만든 목적론일 수 있다는 반론에, 이 문장은 이긴 쪽 밖에서 답한다. 순서를 받치는 세 사람의 근거에는 저마다 이긴 쪽 진영 밖에서 나온 기록이 들어 있다. 나디르에게는 동인도회사 주재관과 예수회의 기록이 있다. 진우량에게는 권형의 『경신외사』가 있다. 장사성에게는 명이 1369–70년에 원 쪽 자료로 엮은 《원사》 열전이 있다.

형식을 벗은 뒤 몰락한 원술도 같은 순서를 보인다. 살아남은 사람의 기록만으로 이 순서가 생긴 것은 아니다. 그래도 범위 자체는 기록을 본 뒤에 그었다. 이 반론은 그 점에서는 비켜 가지 않는다.

아슈라프를 이 순서 설명에서 뺀 것은 그가 권좌를 무력으로 탈취해서가 아니라, 형식을 벗기 직전에 이미 상급자 아래의 직위와 명의가 끊겨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무력을 쓴 진우량과 나폴레옹은 분류상 범위 안에 있다.

결과: 축소한 채 유지한다. 이긴 사람의 기록이 지닌 치우침은 이 순서에 그대로 남는다.

반론 2 — 칭호 쪽 반증은 표본이 만들었다

못 닿은 사람 일곱의 칭호 칸은 하나같이 '씀'이다. 양봉과 한섬은 거기장군과 대장군, 파트알리 한은 샤의 장군, 피슈그뤼는 오백인회 의장이었다. 주베르와 모로와 베르나도트의 자리는 총재정부가 임명했다.

칭호 쪽과 형식 이탈 쪽의 반증은 이렇게 표본을 고른 방식에서 나왔을 수 있다는 반론이다. 못 닿은 사람으로 분류되는 일은 상급자의 거부가 실제로 행사된 일과 붙어 있다. 그 일은 그 상급자의 칭호를 쓰는 일과 가까울 수 있다. 가능성일 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 순환이 건드리는 것은 못 닿은 사람 쪽의 칸이다. 칭호 없이 닿은 말레크를 세는 반증은 닿은 사람의 칸만 쓴다. 칭호를 쓰고도 못 닿은 파트알리 한을 세는 반증과, 둘을 가르는 힘의 판정은 그 순환에 닿는다. 형식 이탈 쪽에서 칭호는 결과일 뿐이라는 반론은, 형식을 벗지 않고 닿은 조조를 건드리지 않는다. 형식 이탈은 모두 구간이 시작된 뒤이거나 같은 때에 왔다. 그래서 이탈이 둘을 가르는지는 먼저 와야 원인이 된다는 조건부터 채우지 못한다.

결과: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의 반증은 유지한다. 둘을 가르는 힘은 유보한다. 칭호를 쓰면 닿는다는 주장의 반증은 순환의 가능성과 함께 둔다.

반론 3 — 적히지 않은 것을 센 반론

“기반 없이 닿은 사람이 있고, 의례 없이 황제를 칭한 사람도 있다.” 두 반론은 같은 꼴이다. 기록에 없는 것을 없었던 것으로 센다.

원소와 동탁과 아슈라프는 상급 권력을 넘겨받는 한 사건으로 그 자리에 닿았다. 넘겨받은 일은 셋 다 기록에 있다. 반론이 서려면 그 앞에 자기 기반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 기록이 선 사람은 원소 하나다.

원소의 그 기록에는 얇은 곳이 둘 있다. 190년부터 191년까지 한복이 군량을 깎았다는 대목은 《후한서》 한 곳에만 있다. 191년 한복 쪽 관리들의 말은 기주를 넘기지 말자는 논변 속에서 나왔다. 원소를 남에게 기대는 처지로 그릴 까닭이 있던 화자들이다.

동탁은 반례의 후보에 머문다. 그에게 기반이 없었다는 쪽의 기록이 그 자신의 표와 상서뿐이다. 아슈라프에게는 그 앞을 잴 자리가 없다. 잴 시간을 1722년까지 넓혀도, 마흐무드가 맡긴 사단의 지휘와 군에 나눌 돈을 페르시아 조정에 청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 기록으로는 기반이 있었다고도 없었다고도 하지 못한다.

그 앞에 자기 기반 없이 그 자리에 닿는 길이 따로 있다고 하려면, 그 빈자리가 확인된 사람이 셋은 있어야 한다. 지금은 원소 하나다.

원술의 칭제도 같은 꼴로 읽힌다. 197년 그는 칭호를 참칭했다. 그 칭제의 절차를 적은 기록은 셋이다. 셋 다 하늘의 뜻을 보였다는 부명(符命)을 내세워 칭호를 쓰고 관제를 둔 데까지 적는다. 그 앞의 추대나 권진(勸進)이나 사양의 의례는 셋 다 적지 않는다.1 침묵은 없었다는 기록이 아니다.

195년 겨울 칭제를 의논한 자리에서는 아무도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염상은 반대했다. 그 자리는 칭제보다 1년 반쯤 앞서 마지막 칭호 바로 앞에 들지 않는다. 손책이 칭제를 말리며 보낸 편지도 다른 무리의 추대가 없었다고는 적지 않는다.

칭제 자체는 조조의 영도 적는다. 원술이 참칭한 뒤 누군가 즉위해 천하에 알리라고 권하자, 그는 조공이 아직 있으니 안 된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참칭 뒤의 일이라 마지막 칭호 바로 앞에 들지 않는다. 조조 자신의 말이고, 그를 높이는 문구다.2

결과: 둘 다 유보한다. 기반 쪽 반증의 후보는 한 갈래의 기록에 기대는 원소 한 사람이다. 원술은 반례의 후보로 남지만 그 자리는 약해졌다. 그의 진영에도 권진과 사양이 적혀 있다.

반론 4 — 진 사람의 장부는 남지 않는다

못 닿은 사람 일곱의 빈 권한 칸 스물일곱은 까닭이 저마다 다르다. 조사 범위가 좁은 칸이 열셋, 주요 기록을 다 보고도 빈 칸이 여덟이다. 분류를 다시 하면 바뀔 수 있는 칸이 셋, 그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 칸이 셋이다.

임명과 급료와 맹세를 먼저 쥐었다는 진술은 그래서 시험되지 않았다. 이 반론에는 답하지 못한다. 그 자리에 닿은 사람 쪽에는 칸이 쌓였지만, 못 닿은 사람 쪽에는 견줄 칸이 없다.

조사 범위가 좁은 열세 칸 가운데 열둘은 주베르와 모로와 베르나도트의 것이다. 그들이 남긴 군 문서와 편지에서 바뀔 수 있다. 주요 기록을 다 보고도 빈 여덟 칸 가운데 일곱은 한섬과 파트알리 한의 것이다. 두 사람을 적은 주요 기록에는 그 칸을 채울 대목이 없다.

그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 세 칸은 같은 사람을 더 살펴도 열리지 않는다. 견준 시기에 군이 아니라 오백인회에 있던 피슈그뤼의 임명과 급료와 기반 칸이다. 사람이나 질문을 바꿔야 열린다.

부하 쪽도 같다. 결정이 이긴 쪽의 기록에만 남은 부하는 견주는 셈에 넣지 않았다. 주원장 쪽의 서달과 이선장과 소영과 주문정이 그렇다. 조조 쪽에서 군대와 가족과 종족을 스스로 내놓은 정욱과 장패와 이전도 그렇다.

결과: 유보한다. 처음 질문 가운데 누가 왜 부하로 남았는가 하는 절반이 시험되지 않은 까닭이 여기 있다.

반론 5 — 맹세와 가마솥

달란 발주트의 가마솥은 두 판본으로 남았다. 이긴 쪽과 삶은 쪽이 판본마다 바뀌지만, 두 판본은 모두 칭기즈 가문의 궁정 전승에 선다.

맹세의 문구부터 아흔다섯 천호장의 이름까지, 기록된 말로 남은 테무진의 장면들은 견주는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반론이다. 장면이 생생하게 남았다는 것과, 그 장면이 서로 옮기지 않은 기록으로 확인된다는 것은 다르다.

가마솥을 근거로 쓰면, 패배 뒤에도 사람들이 그에게 왔다고 읽게 된다. 그 독해는 두 판본 가운데 하나를 고른 것이다. 남는 것은 두 판본을 나란히 두는 일이다.

첫 추대의 맹세를 근거로 쓰면, 그에게는 칭호가 조직보다 먼저 왔다고 읽게 된다. 맹세의 문구와, 그때 '칭기즈'라는 칭호를 받았다는 것은 《몽골비사》만 적는다. 다른 궁정 기록은 그 칭호를 1206년에 둔다. 칭호가 온 날부터 판본 문제다. 칭호가 실효를 뒤따랐다는 앞 장의 관찰에 그를 넣지 않은 까닭이다.

1202년의 몰수를 근거로 쓰면, 나누는 권한이 그에게 있었다고, 맹세의 조건을 집행하자 친족이 떠났다고 읽게 된다. 금지령의 문구를 적은 《성무친정록》, 몰수의 경위를 적은 《몽골비사》, 그 뒤의 반기를 적은 라시드 앗딘은 모두 같은 궁정 전승에 선다. 서로 기댄 기록이라 셈에서는 한 갈래다. 몰수가 반기를 불렀다는 인과는 라시드 앗딘의 문장이다.

1206년의 아흔다섯 천호장과 시기 쿠투쿠를 근거로 쓰면, 나누고 임명한 사람이 그였다고, 부하들은 그의 손 아래 있었다고 읽게 된다. 그날의 일은 《몽골비사》 제202–203절이 적는다. 보오르추와 무칼리와 시기 쿠투쿠가 무엇을 골랐는지도 같은 갈래에만 있다. 그래서 그들은 부하를 견주는 셈에 들지 못한다.

동료와 부하가 1206년까지 무엇을 골랐는지 적은 궁정 밖 기록은 없다. 남송의 재야 학자 이심전이 1216년에 엮은 기록은 금과의 관계를 적는다. 무칼리를 다룬 《몽달비록》은 1221년의 견문이다. 1203년의 일을 적은 루브룩은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밝히지 않는다. 1204년 테메이게 들의 회의에서 그가 장수 다수의 뜻을 물리친 일도 궁정 전승만 적는다.

결과: 네 장면을 견주는 근거로 쓰는 판단을 셈에서 거둔다. 장면은 그대로 둔다.

반론 6 — 무너진 시대에만

네 사람이 그 자리에 닿은 때에는 하나같이 기존 중앙 권위가 무너지거나 흔들리고 있었다. 이 명부 안에서 그 조건은 모두에게 같다. 이 답이 그런 시기에만 선다는 반론은 그래서 맞다. 다만 그 조건으로는 누가 닿았는지를 가르지 못한다.

남은 국가 기구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나폴레옹이다. 헌법 조문과 의회와 관보가 그때도 움직였다. 그만 남의 제도인 원로원 의결을 빌려 그 자리에 섰다는 관찰은 한 건이다. 그것도 그의 쪽 기록으로만 선다. 남은 기구가 많았기 때문에 그 길을 갔다고 묶지 않는다.

바깥의 충격에 기댄 정도는 두 사람에게서 따로 본다. 나폴레옹에게는 1799년 8월 주베르의 전사가, 뤼시앵의 회고가 적은 시에예스의 칼 자리를 비웠다. 그 시점에 그의 손에 남아 있던 권한만 세면 충격에 기댄 쪽이다. 그때까지 쌓인 권한으로 세면 그렇지 않다. 판단은 유보다.

주원장에게는 그 구간을 연 사건이 1355년 10월 상급 두 원수의 전사였다. 그 열 달 앞에는 고우를 치던 톡토가 해임되었다. 그의 쪽 기록을 빼고 세면, 그 전에 그에게 넘어온 권한이 남지 않는다. 그때는 그도 충격에 기댄 쪽에 든다.

결과: 가르는 힘은 없다. 이 조건은 답의 범위로 남긴다.

반론 7 — 두 다리 위의 판정

1799년 11월 10일 생클루, 의장이 서명한 오백인회의 공식 회의록은 그 국면을 이름 없이 “발의는 폭력과 위협만 내뿜는다”(les motions ne respirent que la violence & la menace)고만 요약한다. 《모니퇴르》와, 같은 속기 보고로 보이는 1799년의 한 인쇄본은 그 자리에서 반대파 의원 베르트랑이 한 말을 적는다. 원로원이 장군을 사령관으로 지명한 일을 두고 “갖지 않은 권리를 썼다”(il a usé d'un droit qu'il n'avait pas)고 했다는 것이다.3 뤼시앵의 회고도 이 말을 전한다. 뤼시앵은 그날 회의의 의장이자 나폴레옹의 동생이다.

네 사람을 견주는 셈은 두 사람의 기록이 전해진 길에 기대어 선다는 반론이다. 한쪽 다리는 이미 꺾였다. 1799년 11월 나폴레옹이 상급자의 거부에서 벗어났다는 판단을, 그의 쪽 밖에서 받치던 기록이 베르트랑의 그 말이었다. 그 말이 《모니퇴르》 쪽 속기 보고와 뤼시앵의 회고, 곧 그의 쪽 기록에만 남았으니, 그때의 실효 통제는 서로 옮기지 않은 두 갈래의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네 사람 가운데 그 판단이 서로 옮기지 않은 기록으로 서는 사람은 셋이다.

다른 다리는 주원장 쪽이다. 그에 대한 판정은 유본의 『기사록』 가운데 1363년 파양호 대목에 기댄다. 진우량이 화살에 맞아 죽은 뒤 그가 모두에게 상을 주라고 한 대목이다. 이 대목은 17세기 전겸익이 옮긴 문장으로 서 있다.

그 대목이 받치던 전제가 무너지면 — 그 일이 있었다는 것, 유본이 그렇게 적었다는 것, 그 문장이 전겸익을 거쳐 왔다는 것 — 주원장의 전환점 가운데 실록 밖의 기록으로 서는 것이 하나 준다. 그러면 그의 기록은 견줌에 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에 못 미친다. 그 최소한을 넘는 사람은 네 사람 가운데 둘로 준다. 둘뿐이면 네 사람을 나란히 놓고 세운 판정은 근거를 잃는다. 그때도 사람마다의 기록과, 한 사람 안에서 날짜를 견준 관찰은 남는다. 글자가 조금 다른 이문은 이 조건이 아니다.

다른 조건은 생클루 쪽에 있다. 베르트랑의 발언이 《모니퇴르》와 따로 선 길 — 서명된 회의록 원본, 반대파 신문, 그 밖의 당대 인쇄본 — 으로 확인되면, 1799년 11월 나폴레옹의 판단이 그의 쪽 밖 기록으로 다시 선다. 그 밖에 판정을 바꿀 수 있는 기록은 부록 「전환점 원장과 대조 명부」 ⑥이 적는다.

이 책의 판정은 이 판에서 넓어지지 않는다. 넓힐 기록이 나오면 다음 판에서 처음부터 다시 센다. 판정이 기대는 전제를 무너뜨리는 기록이 나오면, 그 판정은 이 판에서 거둔다.

결과: 조건부로 유지한다. 여유는 없다.

주

  1. 1진수의 《삼국지》 권6 본문과 범엽의 《후한서》 권75, 원굉의 《후한기》 권28이다. 진수와 범엽은 교외의 제사까지 적는다. 원굉은 관제에서 그친다.↩
  2. 2《삼국지》 권1 〈무제기〉 건안 15년 조에 배송지가 붙인 《위무고사》의 영이다. 원술에게는 적대 쪽의 기록이다.↩
  3. 3그 인쇄본은 1799년의 『Détails exacts』다. 공식 회의록의 요약은 그 회의록 p.11에 있다.↩
결론

다음에 잴 것

견줌이 서는 조건

이 책에서 견줌이 선다는 것은 세 가지가 함께 있다는 뜻이다 — 그 자리에 닿지 않은 사람들의 임명과 급료와 맹세의 장부, 그들에게도 같은 길이로 잡은 관찰 기간, 그 자리에 닿은 사람과 같은 칸.

그 세 가지는 닿은 사람 쪽에만 갖춰져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은 질문의 절반에만 답한다. 최종 통제권이 어떤 순서로 넘어왔는가에는 범위를 붙여 답할 수 있다. 형식을 지닌 채 권한이 옮겨 간 사람들에서 권한은 형식을 벗기 전에 왔다. 기존 권위의 칭호도, 형식을 벗는 일도 그 자리에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았다. 네 사람에게서 마지막 칭호는 실효를 뒤따랐다.

누가 왜 부하로 남았는가에는 답하지 못한다. 못 닿은 사람 쪽 칸이 거의 비어 있었다. 빈 까닭은 셋이었다. 조사가 좁은 칸, 주요 기록을 다 보고도 빈 칸, 그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 칸이다. 다음에 잴 물음은 이 실패에서 나온다.

잴 물음

기존 권위가 아직 무엇을 통제하나. 네 사람에게 그 답은 같아서 아무것도 가르지 못했다. 그 조건 안에서 남은 국가 기구의 양은 사람마다 달랐다. 그 양이 고루 퍼진 명부라야 이 물음이 무엇을 가르는지 잴 길이 열린다.

실효가 넘어온 구간과 칭호가 온 날을, 저마다 서로 옮기지 않은 두 갈래의 기록으로 적을 수 있나. 이 책에서 그 기록이 끊긴 곳은 1799년의 나폴레옹이다. 주원장의 판단도 유본의 한 대목 위에 서 있다.

형식을 벗기 전에 임명과 급료와 결정 가운데 무엇이 누구 쪽에 있었나. 견준 못 닿은 사람 일곱 가운데 형식을 벗은 사람은 없었다. 형식을 벗고도 닿지 못한 사람이 명부에 들어야 이 순서의 견줌이 선다. 못 닿은 사람을 고르는 기준도 잴 대상과 따로 서야 한다.

못 닿은 사람과 남은 사람의 장부가 남아 있나. 견줄 수 있는 부하 아홉 가운데 동기가 적힌 사람은 떠난 쪽뿐이었다. 남은 사람의 동기까지 적은 기록이 있어야 떠난 사람과 같은 칸에 놓인다. 기록이 일찍 끊긴 사람도 같은 칸에 놓기 어렵다. 주베르의 기록은 1799년 노비에서 그가 전사하며 끊긴다.

그 측정이 나오기까지 이 책의 진술이 서는 곳은 셋이 겹친 데다. 시기는 기존 중앙 권위가 무너진 때다. 사람은 네 사람과, 그 주변 인물 가운데 서로 옮기지 않은 두 갈래의 기록으로 선 사람들이다. 나폴레옹의 1799년은 그의 쪽 기록이다. 물음은 최종 통제권이 넘어온 순서와 칭호가 온 시점이다.

남은 일은 측정이다 — 그 자리에 닿지 않은 사람들의 장부부터.

부록
부록

다섯 사람 대조 연표

표 머리의 두 연도는 수명이 아니다. 앞은 태어난 해다. 뒤는 이 책이 서술을 마치는 지위에 오른 해다.

조조 155–216테무진 1162?–1206주원장 1328–1368나디르 1688–1736나폴레옹 1769–1804
출생155 패국 초현11162? 오논강 델리운 볼닥21328-10-21 호주 종리31688-11-22 다스트기르드41769-08-15 코르시카 아작시오5
첫 관직·첫 무리174 효렴, 낭을 거쳐 낙양북부위청년기, 보르테와 혼인, 보오르추를 반려로 맞음1352-04 호주 입성, 대오에 듦. 1353 진무1710년대 아비바르드 수장 바바 알리 베그의 경호대장1785-09 포병 소위(합격자 58명 가운데 42위)
첫 후원자청년기, 교현의 인물평("그것을 안정시킬 사람은 그대일 것")혼인 직후(《몽골비사》. 《성무친정록》은 부자 결의를 옹 칸 복위 뒤에 둔다), 케레이트의 토오릴('아버지')1352, 곽자흥(그의 양녀와 혼인)1710년대, 바바 알리 베그(그의 딸과 혼인)1778, 마르뵈프의 장학생 추천
처음 자기 손으로 모은 병력189-12~190-01 기오에서 가산을 흩어 모은 군대6연도 미상, 씨족들의 합류와 첫 칸 추대1353-07 고향에서 모은 700여 명(실록. 다른 두 기록은 '수백 명')1724~25 아비바르드에서 모은 약탈 무리기록 없음7
상급자 통제가 마지막으로 확인된 때196-09/10 천자가 그의 한섬·장양 탄핵을 물림8연도 미상, 첫 추대를 토오릴이 승인. 옹 칸은 1203 가을에 무너짐1355 초 곽자흥의 화주 문책. 문서의 송 명의는 1366-06까지1732-01 샤가 그 없이 맺은 강화. 1732-08/09 샤 폐위1798-04-12 총재정부의 동방군 임명. 1799-11-10 총재정부 해체
칭호를 받은 날213-06-16 위공, 216-05-29(범엽)·216-06~07(진수) 위왕91196 금의 '자우트 쿠리', '칭기즈'101356 또는 1361 오국공, 1364-02-04 오왕, 1368-01-23 황제111726-10 '타흐마스프 쿨리 한'12, 1736-03-08 샤1799-12-15 제1통령, 1802-08-02 종신 통령, 1804-05-18 황제13
도달216 위왕(생전에 황제를 칭하지 않음)1206 오논강 쿠릴타이, 천호장 95명 임명1368-01-23 남교 즉위, 국호 명1736-03-08 무간 대관, 나디르 샤1804-12-02 대관(칭호는 05-18)

주

  1. 1진수는 그가 220년 예순여섯에 죽었다고 적는다. 155는 그 나이에서 거꾸로 센 해다.↩
  2. 21154년(《몽달비록》의 '갑술생'), 1155년(라시드 앗딘의 돼지해), 1162년(《원사》의 수 66), 1167년의 네 설이 있다. 1167년은 원말 양유정이 그의 탄생을 송 태조와 같은 정해년이라 한 수사와, 1226년에 예순이었다는 《성무친정록》 기록에서 나왔다(1227년에 예순으로 세면 1168년이다). 펠리오 뒤 그루세와 이란 백과사전('아마도')이 이 해를 썼다.↩
  3. 3원문은 천력 1년 9월 18일이다. 저본의 간지 '자축(子丑)'을 구교본이 '정축(丁丑)'으로 고쳤고, 역표로도 그날은 정축이다.↩
  4. 4궁정 사관의 히즈라력 1100년 무하람 28일이다. 핸웨이는 1687년, 카슈미리는 히즈라력 1099년이나 1102년으로 적는다.↩
  5. 51768년 코르테 출생설은 슈케가 반박했다.↩
  6. 6원문은 중평 6년 12월이다(서기 189년 12월 26일~190년 1월 23일). 병력을 5천으로 적은 것은 《세어》다.↩
  7. 71792년 4월 아작시오 의용대대의 부중령으로 뽑혔다. 툴롱(1793)의 포병 지휘는 파견의원이, 이탈리아 방면군(1796)은 총재정부가 맡겼다.↩
  8. 8원문은 건안 원년 8월이다(서기 196년 9월 11일~10월 9일).↩
  9. 9위공 책명은 건안 18년 5월 병신일이다. 위왕은 진수가 건안 21년 5월로, 범엽이 4월 갑오일(216-05-29)로 적는다.↩
  10. 10《몽골비사》는 '칭기즈'를 첫 추대 때 올렸다고 적는다. 다른 궁정 기록은 1206년으로 적는다. 금의 칭호는 1196년 타타르 원정 때다.↩
  11. 11오왕은 실록 원문이 '갑진년 봄 정월 병인 초하루'(지정 24년), 황제는 '홍무 원년 정월 을해'다. 오국공은 실록이 1356년, 유본이 1361년으로 적는다.↩
  12. 12코켈은 이 칭호를 1729년 메흐만두스트 승리 뒤에 샤가 주었다고 적는다. 대관일은 히즈라력 1148년 샤왈 24일이다.↩
  13. 13제1통령은 혁명력 8년 헌법 제39조, 황제는 혁명력 12년 플로레알 28일의 원로원 의결이다.↩
부록

사료 진위 해설

같은 원자료를 옮긴 기록은 몇 권이든 한 갈래로 센다. 표의 '쓰인 곳'은 이 책에서 그 기록을 쓴 장이다.

조조 — 《삼국지》와 배송지 주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는 위의 선양을 받은 진(晉)에서 쓴 책이라 조조를 '태조'로 높인다. 진수는 본문에 실은 대사의 원자료를 밝히지 않는다. 위의 관찬 《위서》에 기댔을 수 있어서, 둘이 함께 적는 일은 독립된 두 증언으로 세지 않는다. 남조 송의 배송지(裴松之)는 그 주에 어긋나는 기록을 원문 그대로 나란히 옮겼다. 아래 표에서 범엽·원굉의 책과 『문선』을 뺀 기록은 이 책이 배송지 주의 인용으로 읽는다.

기록누가·언제갈래와 약한 곳쓰인 곳
왕침 《위서(魏書)》위의 관찬, 254–256년조조 진영. 꺼리는 일을 숨겼다는 평(《진서》)이 있다. 포신의 결탁과 유우 옹립 거절 답신은 이 책에만 있다(《자치통감》 권60은 답신을 옮겼다)1·8장
《위무고사(魏武故事)》조조의 영(令) 모음자기 서술. 〈양현자명본지령〉의 날짜 '12월 기해'는 그달에 없다1·11장
곽반 《세어》·손성 《위씨춘추》서진, 동진배송지는 《세어》를 "가장 비루하다"고, 손성을 《좌전》의 말로 옛 글을 바꾼다고 평했다. 배송지는 간보·손성 등이 《세어》의 말을 많이 따다 진(晉)의 역사를 지었다고도 적었다. 중모의 공조는 《세어》에만 있다1·10장
《헌제기거주》·《헌제전》·원엽 《헌제춘추》한 조정의 기록과 그에 기댄 사찬조조 쪽과 원자료가 다르다. 다만 《헌제기거주》에 실린 조조의 상주는 그 자신의 글이다. 원소 진영 영입 논쟁의 건의자를 진수는 곽도, 《헌제전》은 저수로 적는다1·7장
어환 《위략》·《전략》, 사마표 《속한서》·《구주춘추》, 《영웅기》, 장보 《한기》후한 말~서진위와 진대의 사찬. 《영웅기》는 왕찬 작으로 전한다. 왕립의 말은 장보에만 있다1·7·8장
《조만전》·위요 《오서》·우부 《강표전》오나라 사람, 오의 관찬, 진의 사찬적대 쪽. 《조만전》은 제목에 아명 '아만'을 썼다. 적벽 편지는 적대 진영이 전한 그의 변명1장
원소의 격문진림(陳琳), 200년원소 진영의 선전문. 《위씨춘추》본 '좌소삼대(坐召三臺)'와 『문선』 권44본 '좌령삼대(坐領三臺)'는 한 글자가 달라 뜻이 '불러들이다'와 '거느리다'로 갈리나, 둘 다 삼대를 쥐었다는 말이다. 두 본 모두 이 구절을 196년 허 천도 뒤에 둔다1·7장
범엽 《후한서》, 원굉 《후한기》남조 송, 동진범엽은 조조가 '스스로 겸했다(自領)'고 적는다. 순욱의 빈 그릇은 손성의 문구를 옮겼다. 1억 전은 범엽에만 있다. 대숭·풍석 살해도 지금 전하는 사서로는 범엽만 적는다(이현 주가 인용한 《산양공재기》도 대숭을 적는다)1·7·8·11장
유애 《영제기》한 조정 쪽동탁의 병사를 조정 군영의 병사로 적는다. 급양이 조정에서 나왔다는 말은 그의 표와 상서에만 있다8장

원술의 칭제를 적은 세 기록(범엽은 197년, 진수는 연도 없이, 원굉은 195년과 198년 조)은 부명·도참 같은 표지와 참칭·관제를 적고, 진수와 범엽은 교사도 적는다. 칭제 직전의 동의·추대·권진·사양 의례는 셋 다 적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직전의 반대는 《오록》이 실은 손책의 편지가 적는다(11장).

191년 7월 이전 원소군의 궁핍은 원소 쪽 봉기와 한복의 장수 조부(배송지 주는 《구주춘추》, 이현 주는 《영웅기》로 인용), 한복의 관리 경무 등(진수 본문)이 말한다. 경무 발언과 범엽의 '한복이 매번 군량을 깎았다'는 원자료가 밝혀져 있지 않다. 한복 쪽 화자들은 기주를 넘기지 말라고 말리던 중이었다(7·8·11장).

테무진 — 한 궁정의 기록

칭기즈 궁정에서 나온 기록은 둘로 나뉜다. 하나는 《몽골비사》다. 다른 하나는 《성무친정록》·《원사》·『집사』다. 연구자들은 이 기록들이 쿠빌라이 때 몽골어로 쓴 궁정 연대기에서 나왔다고 본다. 뒤의 기록들은 앞의 것에 크게 기댄다(Atwood 2007). 그래서 몇 권이 같은 말을 해도 한 갈래로 센다. 둘이 어긋난 곳은 원천을 고친 자리다.

기록누가·언제갈래와 약한 곳쓰인 곳
《몽골비사(蒙古秘史)》칭기즈 가문, 지은이 미상. 1228·1240·1252·1264년설쿠빌라이 때 손질되었다. 명 한림원 음역본으로 전한다(de Rachewiltz 영역, J. C. Street 편 축약판 2015). 추대 맹세의 문구, 담비 외투, 천호장 95명의 명단은 이 책에만 있다. 벡테르 살해는 다른 궁정 기록에 없다. 자무카가 피 흘리지 않는 죽음을 청한 장면도 다른 궁정 기록에 없고, 라시드 앗딘은 그가 사지가 잘려 죽었다고 적는다2·11장
《성무친정록》·《원사》·『집사』궁정 연대기의 한역, 명 초 관찬(1369–70), 일 칸국(14세기 초)《사고전서총목제요》는 《원사》가 원 초의 일을 대개 《성무친정록》에 근거했다고 평했다. 라시드 앗딘은 마흔한 살까지 해마다의 기록이 없다고 밝혔다. 무칼리 봉작 해는 1218(《성무친정록》)과 1217(《원사》·무칼리 전기 자료)로 갈린다2·9·11장
주베이니 『세계정복자사』일 칸국 관료, 1252–60년몽골인의 구술. 1203년 밀고자 같은 세부가 《몽골비사》와 같다2장
《몽달비록》·《흑달사략》·이심전 《건염이래조야잡기》남송 사신(1221·1230년대), 재야 학자(1216 — 뒤에 사관)궁정 밖. 칭호는 적지만 1206년의 날짜와 즉위 의례는 없다. 《몽달비록》은 1221년에 본 흰 기를 적는다. 이심전의 1211년 입공은 《원사》 1210년조와 1년 어긋난다2·9·11장
《금사》·세르벤 하알가 각석·카르피니·루브룩·주즈자니원의 관찬과 금의 기공문(1196), 교황 사절과 프란체스코회 수사, 델리 술탄국1196년 원정 기록에는 테무진이 나오지 않는다. 나머지는 연도나 정보원이 없는 전문(傳聞)2·11장

주원장 — 실록과 실록 밖의 기록

종군 기병 유본(俞本)의 회고 연대기 『기사록(紀事錄)』은 그를 3인칭으로 적는다. 실록과 갈리는 곳이 여럿이다. 원본은 1650년 화재로 사라졌다고 여겨졌다. 1970년대에 대만 국가도서관의 『명흥야기(明興野記)』(서문 1626년, '유본 발어' 붙음)가 이 책으로 비정되었다. 2015년에는 이신봉의 정본 『기사록전증』이 나왔다. 이 책이 인용하는 대목은 17세기 전겸익(錢謙益)이 『국초군웅사략』과 「태조실록변증」에 옮긴 문장이다. 『초학집』의 「태조실록변증」이 옮긴 유본의 1363년 파양호 장면과, 『국초군웅사략』 권4에 출전 표기 없이 실린 같은 장면은 세 군데 글자가 다르다(交發/齊發, 曹瞞/曹操, 射中者/射死者).

원 유민 왕봉(王逢)의 『오계집(梧溪集)』 사고전서본 협주에는 왕봉 자신의 주와 명 이후의 주가 섞여 있다. 서달 등이 송강·태창·곤산을 취했다는 권6의 협주에는 어느 쪽 표지도 없다(「전환점 원장과 대조 명부」 ⑥).

기록누가·언제갈래와 약한 곳쓰인 곳
《명태조실록》·《명사》·『천황옥첩』명 관찬(영락 재개본), 청 관찬(1739), 명초 황실 계보한 갈래. 실록은 그가 송 아래 있던 일을 지운다. 성문 이야기는 그 자신과 이 갈래에만 있다. 저주의 병권 회수와 화주 청사도 이 갈래가 적는다3·6·8·10장
「주씨세덕비」·「황릉비기」·「어제황릉비」·「기몽」, 1369년 국서(『고려사』 권41)그 자신의 글, 1363 무렵~1378년세덕비(『칠수유고』 전사본)와 국서는 대오에 '붙잡혀', '잘못' 들어갔다고 적는다. 즉위 뒤의 「어제황릉비」(1378)와 「기몽」은 점괘를 적는다. 「황릉비기」는 병사들 사이에 섞였다고만 적는다3장
유진 『국초사적』1358년 무렵부터 종군지은이가 실록 편찬자다3·8장
권형 『경신외사』·엽자기 『초목자』·《원사》원 영역의 사람(명초 집필), 그의 관할의 사람(1378), 명 관찬(1370)『경신외사』는 도강을 '향군'의 일로 적는다. 《원사》 순제기는 실록 없이 거둔 사적으로 지었다3·8·10·11장
진기 「서하 영년공 훈덕시서」원 쪽, 지정 15년(1355) 11월(율리우스력 1355년 12월~1356년 1월)두 원수를 '사로잡았다'고 적어 실록의 전사와 갈린다3장
「성의백행장」·차부·「평주방」·『통감박론』·『월산총담』유기 쪽, 그의 명령문, 1396년 칙찬전겸익의 인용으로 읽는다3·8장

나디르 — 궁정 사관과 진영 밖의 관찰자

미르자 마흐디 한 아스타라바디는 1729/30년부터 나디르의 서기국장, 1736년부터 공식 사관이었다. 그의 궁정 연대기 『자항고샤예 나데리』는 나디르 사후 1750년대에 완성되었다. 원문(앙바르 편, 1962)은 그가 "자기 칼에 기댈 뿐 부족과 친족의 완력에 기대지 않는다"고 적는다. 1770년 존스(William Jones)의 프랑스어역은 '낯선 이에게도 친구에게도 도움을 빚지지 않았다'를 덧붙였다. 1727년 샤가 '옛 마슈칸'을 들어 쓴 평서문 답장을 존스는 반문으로 바꾸었다. 지명은 "Mechekan"으로 적었다.

기록누가·언제갈래와 약한 곳쓰인 곳
모흐센 『조브다트 알타바리흐』이스파한 재무관, 1741–42년같은 궁정이나 따로 썼다. 사흘 술자리는 이 책에만 있다(록하트 인용)4·6·9장
코켈 「Account」(Fraser 1742)·곰브룬 일지영국 동인도회사 주재관, 1737년 출국진영 밖 한 갈래. 1732년 강화·거부·진군과 요람 장면4·8·9·10·11장
카슈미리 『바야네 바케』·바쟁 서한·핸웨이(1753)1739년부터 종군한 인도인, 시의, 1743–44년 체류 상인1740년대 군영의 구전이라 한 갈래. 강화 동의 이야기는 바쟁에만 있다4·9장
크레타의 아브라함 연대기아르메니아 총대주교(1734–37)무간 회의를 직접 보았다(브로세 불역 1876)4·9장
마르비 『알람아라예 나데리』사본 1757년1736년 이전 권은 록하트(1938) 뒤에 레닌그라드 사본으로 확인되었다. 몰라바시 교살의 경위가 핸웨이와 갈린다(서로 독립)9장
크루신스키의 기록1725년 이스파한의 예수회 수사아슈라프의 정변 순서를 직접 적는다. 핸웨이는 이 역사의 일부를 크루신스키에게서 엮었다고 밝혔다4·8·10·11장
하진 회고록·예수회 「Relation」(「역사적 보고」)1726년 마슈하드의 사파비 충성파, 1729–32년 이스파한의 서한진영 밖. 「역사적 보고」의 나디르 인물평과 1730년 임명 저지 대목은 가르단 보고와 문장이 같다4·9·10·11장
카자르 궁정사·니코뎀 서한(폰 하머)·솔로비요프적대 진영, 오스만군 의사, 러시아 보고 요약진영 밖4장
와크프 문서(1732)·주화(1736)와크프 원본은 레자 성묘 관리청 소장와크프 문서의 이름이 '나디르 알리'(록하트)와 '나디르 쿨리'로 갈린다. 주화는 연호(1148)를 새겼다4·9장
록하트(1938)·이란 백과사전(터커 2006)연구호른·킨눌·예롭킨·레안드로는 록하트의 인용으로 읽는다4·6·7·8·9장

나폴레옹 — 서한집과 관보

『나폴레옹 1세 서한집』은 나폴레옹 3세가 꾸린 위원회가 1858–69년에 엮었다. 번호마다 출처가 당대 문서, 앞선 인쇄본, 세인트헬레나 구술로 갈려 이 책은 쓴 때·구술한 때·엮은 때를 따로 본다. 1796년 5월 14일의 420번에 1858–69년 판은 '이 편지를 쓰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문장을 덧붙였다. 국방역사국 육군 문서고의 발송본 사본에는 그 문장이 없다. 5장은 나폴레옹 재단의 새 서한집 『Correspondance générale』 1권 599번의 문언을 쓴다. 출처가 'Collection Napoléon'뿐인 421·478·2014·233·2043·2255·4019번은 인용하지 않고, 사실의 근거로도 쓰지 않는다.

뤼시앵이 의장으로 서명한 오백인회 인쇄 공식 회의록에는 베르트랑의 월권 항의가 없다. 그 문언은 《모니퇴르》와, 같은 속기 보고로 보이는 『Détails exacts』(1799)에 있다. 회의장의 구출자를 공식 회의록은 '척탄병 둘', 《모니퇴르》 51호는 르페브르로 적는다(5장).

기록누가·언제갈래와 약한 곳쓰인 곳
『Correspondance inédite』(1809)엮은이 미표기, 그의 쪽 보관처총재정부·장관·장군들이 그에게 보낸 서한과 그의 서한 일부를 모은 책. 생략이 있다. 1796-05-21 철회 서한은 국립문서관 AF III 372 원고(드비두르 판 1911)로도 전한다5·6·10장
《모니퇴르》반관보1799-11-09 뒤의 호는 새 집권층 아래 인쇄5·6·11장
뤼시앵 「브뤼메르 혁명」·바라스 『회고록』동생·오백인회 의장(1882 간행), 정적(1895 간행)가족 쪽과 적대 쪽. 시에예스의 '칼' 발언은 뤼시앵이 전한다. 바라스는 방데미에르의 대포를 그에게 돌리는 구술을 반박한다5·6·11장
헌법·원로원 의결·『Bulletin des lois』·포고 벽보국가 공문, 그의 포고1799-12 뒤의 법령은 그의 쪽 문서다. 단도 이야기를 적은 기록은 모두 그의 쪽이다5·6·10·11장
슈케(1897–99)·샤토브리앙·라루스 『19세기 대사전』·코스통(1840)·조제프 회고록·영국이 가로챈 서한문서를 옮긴 책장학생 명단·위관 명부·파견의원 서한·체포와 석방 결정문은 이들이 옮긴 형태로 읽는다5장
《보케르의 저녁 식사》그의 1793년 팸플릿자기 서술5장
불레(1885)·드빌(1904)·툴라르(1987)·재단 연표·『L'armée d'Italie』·핸리·렌츠·랑글루아연구·연표날짜와 수치의 기준5·6장

쓰지 않은 이야기

인물이야기까닭
조조여백사, 칠성보도, 화용도의 관우, 72의총엇갈린 판본, 《삼국연의》, 후대 전설
테무진'대장장이 칭기즈', 프레스터 존, '대 야사'이름 풀이, 유럽 전설, 후대 통념(성문 법전)
주원장탄생 이적, 본명 '중팔', 곽영의 화살비문에 없거나 근거 없음
나디르소년기 노예 생활, 주인 살해1740년대 핸웨이·바쟁의 구전과 그 뒤 말콤의 책에만 있다
나폴레옹'한 줌의 산탄', 아르콜레의 깃발, "병사들이여, 그대들은 헐벗고"칼라일(1837), 그의 당대 보고와 어긋남, 후대 구술
부록

전환점 원장과 대조 명부

범례

① 다섯 사람의 전환점 요약

인물E1–E3E4 구간 시작E4ok 하한/상한T 하한/상한3권한상급 통제 마지막 확인최종 칭호견줌
조조존재196-09/10 뒤 ~ 200-021/16/8190196-09/10 천자의 기각216 위왕안
테무진존재1203 가을0/10/3첫 추대 무렵첫 추대 때 토오릴의 승인1206밖
주원장존재1355-10 ~ 1366-121/13/61355-071355 초 곽자흥의 문책1368 황제안
나디르존재1732 봄1/15/81727 말1732-01 샤의 독자 강화1736 샤안
나폴레옹존재1799-11-090/13/517971798-04 동방군 임명1804 황제안

테무진의 E4 판단과 동료·부하의 결정은 몽골 궁정 계열에만 있다.

② 명제별 판정(도달자 13명, 비도달자 7명)

명제판정반례와 계열 수
P2 하급 지휘관 임명을 자기 명의로 먼저유보나디르 1계열(민감도 뒤 소멸)
P3 급료·분배를 상급자를 거치지 않고유보없음
P4 항복·맹세를 자기 앞으로유보없음
P5 E4 이전의 자기 보급 기반유보(반증 후보)원소 1계열. 반례 후보 동탁, 시험 밖 아슈라프
P9 기존 권위의 칭호·명의 사용반증(필요·충분)말레크·파트알리 한 각 2계열
P10a 형식 이탈반증(필요형)조조 2계열, 그 밖에 1계열 넷
P10b 형식 유지 경로에서 3권한이 이탈보다 먼저축소 유지(사후 정교화)지지 2계열 셋(나디르·장사성·진우량), 역순 후보 아슈라프 1계열
P11 최종 칭호 직전의 동의 의례유보원술(반례 후보, 기록 부족)

③ 비도달자 일곱의 네 칸(P2–P5). (a) 다시 판정하면 바뀔 칸 · (b) 조사 범위가 좁은 칸 · (c) 주요 사료를 다 본 칸 · (d) 적용 밖.

사람P2P3P4P5
양봉(a)(a)(c)(a)
한섬(c)(c)(c)(c)
파트알리 한(c)(c)(c)존재
피슈그뤼(d)(d)(b)(d)
주베르·모로·베르나도트(b)(b)(b)(b)

④ 거울표(주인공 쪽 밖 기록에도 결정이 남은 9명). 여섯 칸은 여섯 권한의 차례다. 주 = 주인공, 본 = 본인, 혼 = 혼합, 상 = 상급자·제3자, 미 = 기록 부족.

주인공부하결과여섯 칸이탈 동기
조조순욱잔류주·미·주·혼·주·주기록 부족
조조진궁이탈(194)주·미·상·본·혼·혼존재
나디르이브라힘 한·타흐마스프 한 잘라예르잔류주·미·주·주·주·미기록 부족
나디르무함마드 한 발루치이탈(1733)주·미·미·미·주·미존재(타흐마스프 명의)
나폴레옹베르티에·마세나잔류미·미·미·주·주·주기록 부족·미조사
나폴레옹오주로·베르나도트재배치 뒤 이탈미·미·미·주·주·주기록 부족

테무진과 주원장 쪽 표본 부하 여덟은 분석 불가다(결정이 주인공 진영 기록에만 있음). 표본은 목적표집이라 비율로 일반화하지 않는다.

⑤ 가상 블록 모듈. 실질 = 실존 선택지와 직후의 귀결이 기록으로 선다. 공 = 귀결을 못 세운다.

블록고정 시점실행 / 실존 대안자기 계열을 뺀 뒤유형
6장1799-08-22(서한집 4374번)귀환 / 잔류그의 서한을 빼면 1799년 여름의 상태로 줄어든다실질
7장196 여름 영입 논의(진수 본문)영입 / 불영입선택지와 귀결이 남는다실질
8장1363-03 안풍 출병 직전출병 / 불출병출병 이유와 사후 자인만 빠진다실질
9장1732-01 강화 소식(코켈 「Account」)거부 / 수용칙령 문구만 빠진다실질
부록만1736-02 무간 소집샤 칭호 수락 / 섭정 유지당대 사례가 없어 귀결을 모른다공

⑥ 판정을 바꿀 수 있는 기록

기록걸린 판정열리면 바뀌는 것
유본 『기사록』 파양호 대목의 원문주원장 T·F그 대목이 받치던 사건·귀속·전승 경로가 원문에서 서지 않으면 F 2/4 — 축소 판정의 근거를 거둔다. 자구만 다른 이문은 조건이 아니다
서명된 오백인회 회의록 원본, 1799-11 반대파 신문, 그 밖의 당대 인쇄본(『Détails exacts』의 정보원, 고티에 『Mémoires historiques』)나폴레옹 E4ok베르트랑의 발언이 《모니퇴르》와 따로 선 길로 확인되면 F 4/4
국립문서관 AF III 372 원본1796년 분할 명령 철회드비두르 판과 다를 때만 다시 본다
궁정 사관 연대기 1726년 10월 대목의 다른 사본·판본나디르 P2명의나 임명자를 적은 판본이 서면 P2 칸(지금 기록 부족)을 다시 본다
『오계집』 이본주원장 부하 비교의 상한명 이후 주이면 1 → 0
범위 안에서 형식 이탈이 권한 이동보다 먼저 온 사례를 적은 기록P10b 순서두 계열로 확인되면 순서 문장이 무너진다
VOC 보고, 라 마미클레락, 모흐센의 사본아슈라프 정변(P10b 역순 후보)둘째 계열이 서도 범위 밖의 역순 사례 하나를 확정할 뿐이다
말레크를 적은 두 계열의 원천 관계P9 칭호 쪽 필요형 반증한쪽이 다른 쪽을 옮긴 것이면 반증이 후보로 내려간다
조조의 마지막 칭호를 적은 두 계열의 원천 관계P10a 형식 이탈 쪽 필요형 반증두 계열의 독립이 깨지면 반증이 후보로 내려간다
《후한서》 '매번 군량을 깎았다'의 원자료P5 원소190–191년 군량 대목에 둘째 계열이 서고 나머지 구간도 두 계열이면, 기반 쪽 반증이 원소 한 사람으로 선다
동탁의 188년부터 189년 9월(중평 6년 8월)까지를 그의 쪽 밖에서 적은 기록P5 동탁구간마다 덮으면서 상급자가 그의 보급을 쥐었다거나 그가 영역과 병력 없이 있었다고 적으면 반례 후보에서 반례로. 강도는 가장 약한 구간의 계열 수다. 한 시점의 급양 기록이나 소속·명령 거역의 둘째 기록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원소 밖 사람들의 선행 기반 부재를 적은 기록자기 기반 없이 닿는 길원소 밖의 두 사람에게서 더 확인되면, 같은 방식의 깨짐을 세는 셈이 처음 선다. 후보는 동탁·진우량·유비이고, 확정하려면 셋 모두 두 계열이어야 한다
원술의 197년 참칭 직전·당일을 적은 기록P11의례 없이 치렀다고 적은 기록이 두 계열이면 반증, 한 계열이면 후보다. 직전에도 권진·사양이 있었다고 적으면 원술은 반례 후보에서 내려간다. 조조의 영처럼 참칭 뒤의 권진·사양은 조건이 아니다. 195년의 의논을 넣도록 시계를 바꾸면 마지막 칭호가 있는 사람마다 같은 시계를 다시 댄다
못 닿은 사람의 임명·급료·맹세·기반 장부닿은 사람과 못 닿은 사람의 비교명제마다 확인된 칸이 둘 이상이고 시간 순서가 적혀야 비교가 선다. 기반의 '선행'은 그들에게 묻지 못하고 '설치'만 견줄 수 있다
와크프 원본이름 해석'나디르 알리'와 '나디르 쿨리' 가운데 하나로
부록

등장인물

자리는 동료(동료·경쟁자)·부하(내부 부하)·후원(후원자·상급자)이다. 해는 기록에 있는 것만 적는다.

이름(해)자리장
원소(袁紹, ?–202)동료·후원1·7·8·10·11
동탁(董卓, ?–192)동료·후원1·8·10·11
원술(袁術, ?–199)동료1·7·10·11
여포(呂布, ?–199)동료1·6·7·10
양봉(楊奉, ?–197)·한섬(韓暹, ?–197)동료1·7·11
유비(劉備)부하 → 동료1·10
진궁(陳宮, ?–199)부하 → 동료1·6·10
순욱(荀彧, 163–212)부하1·7·10
하후돈(夏侯惇)부하1
정욱(程昱)부하1·7·11
헌제(獻帝, 재위 189–220)후원1·7
토오릴(옹 칸, ?–1203)후원2
자무카(?–1205경)동료·후원2
생굼동료2
알탄·쿠차르동료·부하2
보오르추·무칼리부하2·11
젤메부하2
곽자흥(郭子興, ?–1355)후원3·6·8
한림아(韓林兒, ?–1367)후원3·8
진우량(陳友諒, ?–1363)·장사성(張士誠, 1321–1367)동료3·8·10·11
방국진(方國珍)동료3
서달(徐達)부하3·8·11
이선장(李善長)부하3·6·11
소영(邵榮, ?–1362)·주문정(朱文正)부하3·11
타흐마스프 2세(?–1740경)후원4·6·7·8·9·10
바바 알리 베그후원4
말레크 마흐무드동료4·6·9·10·11
파트알리 한 카자르(?–1726)동료4·9·10·11
아슈라프(?–1730)동료4·8·10·11
무함마드 한 발루치(?–1734)부하 → 동료4·10
이브라힘 한부하4·10
타흐마스프 한 잘라예르부하4·9·10
바라스(Barras)·살리체티(Saliceti)후원5·6
시에예스(Sieyès)후원5·6·11
모로(Moreau)동료5·6·11
주베르(Joubert, ?–1799)동료5·6·11·12
피슈그뤼(Pichegru)동료5·11
베르나도트(Bernadotte)동료·부하5·6·10·11
오주로(Augereau)동료·부하5·10
베르티에(Berthier)부하5·6·10
샤, 칸 그리고 주원장
Zhuge Hyuk
2026